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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617)화 (617/649)

Chapter 617 - 7.5 계절은 가을(6)

혼몽한 꿈으로부터 눈을 뜬다.

아니, 이것은 여전히 꿈이다. 너무나도 현실적이라, 그 사실을 실감하기 힘들 뿐.

이제는 낯익은 풍경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황야는 수풀 한 포기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지평선으로 기우는 태양은 건조한 색조를 연출하고, 무수한 시체들은 그 빛을 받아 우울한 절경을 이룬다.

나는 이 죽음의 땅을 딛고 멍하니 서 있었다.

조각 난 기억들이 터를 옮기는 철새처럼 소란스레 날뛴다. 이윽고, 파편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광경들이 몇 가지.

‘엘시 선배’는 드디어 흡혈귀의 권속이 된 이들을 치료할 방법을 찾아냈다.

희생자의 가족과 친구들은 연신 고마움을 표했다. ‘엘시 선배’는 단지 내 등쌀에 못 이겼을 뿐이라 핑계를 댔지만, 그들의 감사가 전해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 엠마는 눈물까지 찔끔 흘리며 내 손을 붙잡았다.

포기하지 않아 주어서 고맙다고, 리에리 루페시아의 목숨을 구해 주어서 기쁘다고.

오지랖을 부린 보람이 있었다.

자세한 원리는 모르겠지만, ‘엘시 선배’는 흡혈귀와 맺은 ‘계약’을 파기하는 방법을 알아낸 듯했다. 계약의 주체가 죽어서 그나마 다행이라 했던가.

만일 흡혈귀가 살아 있었다면 불가능한 수단이었겠지.

일방적으로 계약 해지를 통보하는데, 얌전히 있을 인물은 없을 테니까.

결국 ‘엘시 선배’가 살아 있던 세계에서는 쓰지 못할 수단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시 선배는 못내 뿌듯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지만.

내가 치러야 할 몫까지 잊어 버리지는 않았다.

그렇게 나는 축하를 겸해 술잔을 기울였다. 마시고, 마시다 비틀비틀 방에 들어와 등에 손자국이 남을 만큼 성녀에게 바가지를 긁히다가.

“자주 보는군.”

회상에 잠겨 있던 내 정신이 화들짝 맑아졌다.

그 건조한 음색은 어느 사내의 전유물이나 다름없었다. 관심도, 흥미도, 감정도 묻어나오지 않는 황야 같은 목소리.

내 눈이 슬쩍 등 뒤를 향했다. 그곳에는, 늘 그렇듯 바위에 걸터앉은 사내가 보이고 있었다.

나는 허탈한 숨소리를 토해냈다.

“……그러게.”

“그렇게 별 것 아니라는 듯 넘길 일이 아니야.”

사내는 그리 말하면서, 더욱 가라앉은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창공에서 먹이를 찾는 까마귀처럼.

“동화율이 지나치게 높아졌다. 그 전에도 그랬지만, 지난 전투가 치명적이었어. 너는 내 기억을 너무 받아들인 거야.”

언제나 들어왔던 이야기였다.

페르쿠스 영지에서 시체 거인을 상대할 때부터 그러지 않았던가. 이러다가는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아직 나는 멀쩡했다.

사내의 심각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내가 태연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였다.

“나쁘지 않잖아? 당신도 혼자 지내기 적적할 텐데, 대화를 나눌 상대도 생기고. 나는 좀 더 많은 비전을 배우고…….”

“재차 말하지만, 대가 없는 힘은 없다. 애송아.”

또 다시 몇 번이나 들어왔던 경고.

다만 오늘의 사내는 조금 더 진중한 낯빛을 하고 있었다. 내가 이곳에 방문하는 빈도가 높아졌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는 듯이.

“지난 전투에서 이성을 잃어 버렸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슬슬 ‘나’와 ‘너’의 경계가 옅어지고 있는 거야.”

“그럼 어떻게 하라고?”

“늦었어.”

다소 짜증스럽기까지 한 내 반문에, 사내는 그렇게 답했다.

담백하기 짝이 없는 진술이었다.

“이제는 멈출 수 없다. 슬슬 마음의 준비를 하는 수밖에.”

“무슨 마음의 준비?”

“대가를 치를 준비.”

정작 사내는 그 ‘대가’가 무엇인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

그 까닭은 아마 둘 중 하나이리라.

첫 번째, 사내도 모르던가.

그리고 두 번째, 설령 알고 있더라도 ‘제약’ 때문에 말을 할 수 없던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될 만큼 익숙해진 대우였다. 그럼에도 못내 떨쳐 버리지 못한 미련이 한 톨 남아 있어서.

잠시 침묵을 지키던 내 입에서 의문이 새어 나왔다.

“……알고 있었나?”

“무얼?”

“하스터 가문에 얽힌 비화.”

의도가 뻔한 질문에 코웃음을 치는 대신, 사내는 슬쩍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과거를 더듬는 사내의 동공이 흐릿해졌다.

기다림은 필요하지 않았다.

사내는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으니까.

“모르고 있었을 리가.”

“왜 진작 말해 주지 않은 거지?”

“대답은 이미 알고 있을 텐데.”

“그래도, 자그마한 단서라도 주었다면……!”

“애송아.”

그 한 마디에 달구어지던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사내는 여전히 무감정한 눈빛으로 날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칠죄성에 관련된 정보는 파급력이 너무 커. 더불어 하스터 가문의 비사를 알았다 한들, 네가 뭘 할 수 있지?”

“만일 셀린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상처 입겠지.”

나지막이 읊조리는 사내의 눈빛이 움푹 깊어졌다 부상했다.

낡은 기억을 반추하는 노인처럼.

“그래도, 이겨 낼 수는 있어. 최소한 네가 옆에 있어 준다면.”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아?”

사내는 아무런 대답도 돌려 주지 않았다. 단지 눈짓으로 하늘을 가리켰을 뿐.

내 시선이 자연스레 그 방향을 쫓았다. 그곳에는, 흐릿한 화상처럼 비치는 기억들이 있었다.

제 몸집만한 도끼를 든 채 인(人)의 장벽을 돌파하는 무자비한 여인.

흰 테두리가 인상적인 검은 정복이 그녀의 소속을 말해 주고 있었다.

제국 첩보부.

“내 부관 중 하나였으니까.”

지금과 달리 다소 거칠어진 인상이었지만, 나는 알았다. 저 화상 속의 여인이 셀린이라는 사실을.

전장 속에서도 당당한 미소를 지을 만큼 당돌한 여인은, 몇 없을 테니까.

그러고 보면 낯설기는 했다.

매일 같이 붙어 다니던 사이였는데, 셀린의 얼굴을 본 지가 벌써 한참 되었다니.

한동안 나는 입을 열지 못한다.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끝내 흘러 나온 물음은 짤막하기만 했다.

“……살았나?”

“글쎄.”

노골적인 답변 회피였다.

소꿉친구이자, 제 부관의 생사 여부를 모를 만큼 사내는 모질지 못했으니까.

메마른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무 많은 것을 의존하려 들지 마라. 필요한 정보가 있다면 네가 수집해… 그러니까 네가 언제까지고 ‘애송이’인 거야.”

“그놈의 ‘애송이’ 소리는…….”

“혹은 ‘어린애’라든지.”

사내의 말에 툴툴거리던 나는 그대로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어린애’보다는 ‘애송이’가 더 나을 터였다. 언제쯤 내가 이름으로 불릴 지는 알 수 없었지만.

사내는 사막의 모래알처럼 사각거리는 음색을 읊어 갔다.

“고집 부리지 마. 네가 살아가는 세상의 인연은, 네가 책임져야 해. 앞으로도 영원히 내가 네 보모 노릇을 해주리라 생각한다면…….”

“그래, 그래. 알겠다고.”

슬슬 잔소리가 길어질 기미가 보이자, 나는 그렇게 맥을 끊어 놓는 수밖에 없었다.

어찌 이리도 걱정이 많은지.

삭막한 인상과는 대조되는 특징이었다. 내가 짜증스레 손을 내젓자, 사내의 시선은 다소 불퉁해졌다.

이마저도 내가 아니면 눈치 채지 못하겠지.

사내를 오래 보니 알 것만 같았다. 그도 심장에 피가 통하는 인간이라는 지당한 이야기를.

또 마침 잘 됐다 싶기도 했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굳이 아내에게 등짝을 얻어맞아 가며 과음을 할 만한 용건이.

나는 지체 없이 본론을 꺼냈다.

“당신 사매가 보고 싶다고 하던데.”

멈칫.

그동안 동요 한 번 사내의 몸이 움찔 굳는다. 무척이나 희귀한 반응이었지만, 나는 사내가 도망칠 수 없도록 말을 자꾸 이어갔다.

“오늘은 너무 갑작스럽고, 내일은 어때? 당신 말마따나, 당신 세상의 인연이니까.”

사내의 시선이 슬그머니 측면을 향했다.

당장 직전에 그러지 않았던가. ‘네 세계의 인연은 네가 책임져야 한다’라고.

실로 옳은 말이었다. 나는 이를 빌미로 사내를 계속 밀어붙이기로 했다.

“어른이라면 마땅히 그래야겠지. 그럼 나는 그런 줄 알고 있을 테니…….”

그러면서 흘깃.

내 눈동자가 사내의 안색을 살폈다. 여전히 감정의 잔향조차 보이지 않는 낯빛.

그렇게 침묵이 이어진다.

몇 초인가, 몇 분인가.

슬슬 사내를 한 번 더 채근할까 싶었을 찰나.

사내의 입술이 서서히 열렸다.

“……싫다만.”

끝내 억지를 부라면서.

나는 결국 울컥하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외쳤다.

“아니, 어린애처럼 굴지 말라며!”

결국 사내도 ‘나’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

제국 황실의 눈은 어디에나 있다.

비단 제국뿐만 아니라, 온 대륙에 파다한 소문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근거 없는 낭설처럼 보일 만큼 무서운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그 누구도 제국의 눈을 피할 수 없다는 소리가 아닌가.

하지만 그 소문의 진위 여부를 의심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제국이라면 그럴 만도 했으니까.

대륙 최대 규모의 첩보 조직을 거느리고 있는 곳이 제국 황실이었다. 그들의 정보는 신속하면서도 정확해서, 성국이나 남부 열왕국조차 자국의 사건을 제국보다 늦게 알았다는 풍문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제국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없을 수밖에.

이는 아카데미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중립지대로서 오랜 역사를 지닌 아카데미에도 제국 첩보부의 지부가 하나 숨어 있었다. 비록 정보 수집이나 각종 공작보다 인재 영입에 초점을 맞춘 곳이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제국 첩보부는 제국 첩보부.

그 존재를 아는 이들은 지극히 드물었다. 당연히 아카데미 지부를 이끄는 인물에 대해서도.

누가 알았으랴.

평민 출신에, 성적도 그저 그렇던 여인이 아카데미의 진정한 흑막이었다는 사실을.

일명 ‘무도회의 여왕’, 네리스 핀들스턴.

독사처럼 교활하고, 타인을 기만하기를 즐기는 여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카데미 지부의 수장에 오를 수 있기도 했고.

이처럼 제국 첩보부 내에서도 악명 높은 그녀는 지금.

“내가 미쳤지…….”

팍, 하고 고개를 집무실 책상 위에 처박은 채 자책에 빠져 있었다.

어둠 속에 제 시야를 가둔 여인의 뇌리 위로 몇 가지 이름이 스쳐 지나갔다.

이안 페르쿠스, 이안 페르쿠스, 이안 페르쿠스.

“아, 으, 아아…….”

질투의 저주가 아카데미를 덮치던 날.

네리스의 흑역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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