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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618)화 (618/649)

Chapter 618 - 7.5 계절은 가을(7)

네리스는 이성의 괴물이다.

오래 전부터 평정을 잃는 법이 없었고, 감정에 휩싸여 판단을 그르치는 일도 드물었다. 유일한 약점이 있다면 통증에 약하다는 점 정도일까.

그마저도 이안의 등장 이후에는 차차 나아지고 있었다. 폐지되었던 고문 내성 훈련이 재개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첩보부원들은 우는 낯을 하곤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네리스는 고문 내성 훈련의 성과에 내심 고무되어 있었다. 완전무결하다고 믿어 왔던 스스로의 약점을 지워 가는 쾌감이란, 자존감이 강한 인물일수록 클 수밖에 없었으니까.

또한 의외로 고문 내성 훈련의 고통이 크지 않다는 점도 한 몫 했다.

제국의 역사는 오래 되었다. 당연히 첩보부 또한 마찬가지였고, 수백 년 동안 체계적으로 정립돼 온 훈련의 강도는 실로 절묘한 면이 있었다.

진짜 죽을 정도는 아닌데, 죽고 싶다.

정말 때려치울 정도는 아닌데, 때려치우고 싶다.

그야말로 절묘한 줄타기였다. 말 그대로 ‘견딜 만은 하다’ 싶은 강도의 연속.

명검은 오랜 단야 끝에 탄생한다. 훈련을 통해 마지막 약점을 극복한 네리스가 이성을 잃은 염려는 이제 없었다.

최소한 네리스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최근 아카데미 학생들의 동향이 이상합니다.”

톡, 톡, 톡.

그날따라 네리스는 기분이 좋지 않아 손가락으로 책상을 자꾸만 두드리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첩보부원들의 몸가짐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어제 잠을 설쳐서 그런가? 혹은, 단지 오늘따라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첩보부원의 보고는 계속되었다.

“감정에 의한 극단적인 행위를 보이는 경우가 비정상적으로 많아졌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첩보부원들은 정신 조작에 대비한 물건들을 상비한 덕인지, 그 정도가 크지 않습니다만…….”

“크지 않아?”

“네?”

네리스의 불퉁한 반문에 당황한 쪽은 첩보부원이었다.

그는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박였다. 그제야 아차, 싶었던 네리스는 헛기침을 하며 말끝을 얼버무렸다.

“아니야, 됐어… 보고나 계속해.”

첩보부원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상사의 명령은 절대적인 법.

그는 이내 의문을 털어내고 본분에 집중하기로 했다.

“하여튼, 그와 관련해서 아카데미 내의 분위기가 뒤숭숭합니다. 특히 이안 님을 향한 러브레터가 줄을 잇는데…….”

“러브레터?”

“네, 연애편지.”

네리스는 그 말을 듣자마자 피식,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안 페르쿠스가 누구인가.

명령을 듣지 않는다고 손가락을 절단 내는 희대의 정신병자, 바늘로 손 끝을 찌르더라도 피 한 방울 배어 나올까 의심스러운 냉혈한.

그에게 연애편지라고?

주제를 몰라도 한참이나 모르고 저지르는 짓이었다.

물론, 이안이 마냥 나쁜 상관인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상냥하고, 지난번에는 목숨을 구해 주기도 했고, 그때 살짝 설레기도 했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무척이나 기분이 나빴다.

지들이 뭔데?

이안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안다고, 멋대로 사랑이니 연심이니 지껄이며 편지를 쓴단 말인가. 네리스는 그 사실이 견딜 수 없도록 불쾌했다.

여인의 몸이 부르르 떨린다.

첩보부원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슬쩍 목소리를 낮추면서, 계속해서 보고를 이어갔다.

“그, 아무래도 이안 님께 호감을 품고 있던 이들의 감정이 극대화된 것은 아닐지…….”

“막아.”

담백하고, 짤막한 한 마디.

이보다 명료할 수는 없는 지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고를 올리고 있던 첩보부원은 일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오직 낯빛에 물음표를 띄웠을 뿐.

그가 얼빠진 소리를 내기도 전이었다.

쾅!

네리스의 손이 책상을 강하게 내리쳤다. 양옆으로 쌓여 있던 서류 몇 장이 팔랑거리며 흩날릴 정도로.

“지부의 인원들을 전부 동원해서라도 막아. 지들이 뭐라고… 미친 거 아니야? 이안 님께서는 공사가 다망하신데, 그따위 계집질에 빠져 낭비할 시간이 있을 것 같아?”

계집질은 한참 전부터 하고 계신다 들었습니다만.

첩보부원은 목젖까지 치닫는 말을 가까스로 삼켜냈다. 그만큼이나 네리스의 기분은 좋지 않아 보였고, 군소리를 했다가는 한바탕 잔소리를 들어야 할지도 모를 판이었다.

대신 그는 최대한 합리적인 근거를 선별해 입에 담았다.

“저, 지부장 님? 아시다시피 최근 지부의 인원 대부분은 황제 폐하와 그 일행 분들을 수행하느라 바쁜 상태입니다. 그 인원을 사적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건…….”

“……사적 감정?”

아차차.

첩보부원은 자신이 지뢰를 밟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그 차갑고 날카로운 진녹색의 시선을 받는다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사내의 이마에 식은땀 한 방울이 맺혔다. 이처럼 화가 난 네리스의 모습은, 난생 처음이었다.

“지금 내가 사적 감정에 따라 지부의 인원들을 동원하고 있다는 거야? 도대체 무슨 감정에 따라? 뭐, 내가 이안 님을 좋아하기라도 한다는 거야?”

“그, 그게 아니라…….”

“아하, 내가 그깟 년들한테 질투를 하고 있다? 그래서 첫사랑에 빠진 계집애처럼 억지를 부리고 있다… 이거야?”

“오, 오해가 있었습니다.”

첩보부원은 뒤늦게 수습에 나섰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쾅!

다시금 책상을 내리친 네리스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 이글거리는 눈초리가 어찌나 무서웠던지, 첩보부원은 그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으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

“우리의 직속상관은 이안 님이셔. 아니,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이안 님은 대륙의 신성이자 모두가 주목하는 영웅이라고! 제국의 귀중한 인재를 방치해 둬도 되겠어?”

“하오나 고작 학생들의 연심이나 질투 따위로 이안 님이 유의미한 피해를 입을 가능성은…….”

“야.”

격식 따위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말투.

단순히 지부장으로서만이 아닌, ‘네리스’라는 개인으로서도 화를 내고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첩보부원도 이를 모르지는 않았다.

얌전히 수긍하면 좋았을 텐데.

그놈의 ‘충심’이 자꾸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폭군 앞의 입 바른 신하가 처할 결말이란, 대개 뻔한 법이었다.

“너는 날파리가 위험해서 잡니?”

“그야, 아닙니다만…….“

”알아들었으면? 닥치고 그 벌레들이나 쫓아내.“

어차피 설득이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결국 첩보부원은 직언을 포기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사내가 떠난 뒤에도, 여인은 분을 삭이고 못하고 이를 갈아야만 했다.

“감히, 감히 잡년이…….”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사랑에 미친 여자 그 자체였다고 할 수 있으리라.

쾅쾅쾅!

이것이 여인이 지금 머리를 쉴 새 없이 박는 내막이었다.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치명적이다.

누가 보면 이상하다 싶을 정도의 반응, 단지 그 속사정을 아는 이라면 누구라도 짐작하고 있을 테지.

여인이 드디어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깨닫고 있다는 사실을.

다만 알고는 있었을까.

이것이 시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날 이후, 네리스는 매일 같이 이안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종류는 다양했다. 달콤한 꿈도 있었고, 씁쓸한 꿈도 있었으나 공통점은 오직 하나.

이안이 꿈의 중심에 서 있었다.

네리스는 도저히 그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었다. 그 냉혈한의 어디가 좋아서 사랑을 한단 말인가.

비록 질투의 저주가 내린 날에 다소의 폭주를 보이긴 했으나, 이는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했다. 최소한 사내를 마주하기 전까지는 그리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하스터 가문에 얽힌 비사를 조사해 주시겠습니까?”

끝내 잊고, 떨쳐 버리려던 사내가 찾아와서 던진 말이었다.

느닷없고 실리도 없는 제안.

네리스는 평소와 같이 코웃음을 치려고 했다.

“이안 님, 해당 사안은 굉장히 복잡한 권력 관계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저희 같은 약소 지부가 괜히 손을 댔다가는…….”

그때였다.

이안이 풀이 죽어서, 구슬픈 눈빛을 한 것은.

그 시선을 마주한 네리스는 무심코 욕지거리를 내뱉고 말았다.

미쳤다.

“정말 안 되겠습니까?”

“그, 어…….”

당연히 안 되지.

그것이 지당한 답변이었으나, 사내를 앞에 둔 네리스의 입에서는 도무지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잘 생겼다.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사내의 얼굴을 볼 때마다, 몽롱이 취해서 제정신을 잃어 버리는 듯한 착각.

그동안 스스로를 이성의 괴물이라 정의했다. 결코 감정 따위에 휩쓸리는 일이 없으리라고, 그리 맹세했는데.

어느덧 여인은 눈물을 찔끔 흘리며 말하고 있었다.

“최,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 다름 아닌 이안 님의 요청이니까…….”

“감사합니다! 네리스 선배!”

그러면서 사내는 여인의 손을 붙잡고 흔들었다.

바보 같아.

네리스는 그리 생각하며, 제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슬그머니 올라가는 제 입꼬리를 막을 도리는 없었다.

다만 직감한 사실이 하나.

좆됐다.

이성의 괴물은, 첫사랑을 이기지 못했다.

그 정도의 이야기였다.

**

그리하여 밤이 찾아오고.

먼 미래에서 온 소녀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오직 첫사랑을 보고 싶어 찾아왔으나, 상대는 이를 바라지 않을 수도 있단 사실을 알았기에.

다만 비극은 길지 않았다.

술을 잔뜩 마신 사내는 문득 몸을 돌렸고, 그 끝자락을 여인이 잡았으니까.

소녀는 물었다.

“……야.”

눈물을 머금고,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의문을.

“나, 질렸어……?”

강제로 불려 온 사내마저 멈칫할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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