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19 - 7.5 계절은 가을(8)
첫사랑은 늘 애틋하기만 하다.
삶에 있어 대개의 첫 경험은 금세 잊히기 마련이다. 기억하기도 힘들 만큼 어린 시절에 이루어지거나,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서 그날의 감정이 무뎌지기 때문이었다.
다만 오직 하나.
‘사랑’만큼은 달랐다. 누가 그랬던가, 남자는 일생이 지나도 첫사랑을 잊지 못한다고.
사내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앞으로 너희는 동고동락하며 몇 년을 수행에 힘써야 할 게다.”
후우, 하고 허공으로 내뿜어지는 담배 연기.
밀림 특유의 눅눅한 냄새, 습기를 잔뜩 머금어 푹신하던 흙과 살갗을 달구는 불볕의 더위까지.
그날 사내는 처음으로 소녀를 만났다.
제 머리 만한 고깔모자를 푹 눌러쓰고, 불퉁스러운 낯빛을 숨기지 않던 여인.
새하얀 피부는 맹렬히 타는 남국의 태양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 푸른 눈동자는 호수의 물방울을 보석으로 자아낸 듯했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보는 이로 하여금 ‘사랑스럽다.’라는 감상을 이끌어 냈다.
아마도 ‘인형’ 같다는 표현은 이날을 위해 준비된 표현이었으리라.
스승은 말했다.
“첫째야.”
“네, 네? 아, 네.”
넋이 나가 있던 사내는 그제야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초면에 한참 동안이나 상대를 바라보고 있었다니.
결례도 이만한 결례가 없었다.
다만 이 자리에서 그 사실을 신경 쓰는 이는 사내가 유일했다.
“이 아이가 둘째다. 그러니까, 네 사매가 되는 셈이지… 이제 와서 생판 남을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는 힘들겠지만, 부디 노력해 주었으면 좋겠구나.”
“네, 네…….”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사내는 얼떨떨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했다.
사실 들어본 적은 있었다.
아카데미의 투견, 라이넬라 가문의 작은 악마.
청춘의 한 조각을 바쳤던 공간에서 그녀는 건드려서는 안 될 존재로 통했다. 괜히 눈밖에 났다가는, 사단이 나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그만큼 요주의 인물이었다.
1년 후배인 사내조차 여인과 일대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비단 사내뿐만이 아닌,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랬다.
이 악명 높은 소녀와 굳이 대화를 해야 할 까닭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래서 낯설었다.
이처럼 지근거리에서 여인을 마주치고 있다는 사실이, 또 아무리 뜯어 보아도 그 악랄한 소문의 주인공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이러한 감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깨져 나가고 말았다.
“……야.”
다름 아닌, 소녀와 손을 맞잡은 그 순간부터.
“나랑 맞먹으려 들지는 마라? 나, 엘시 라이넬라야. 너 따위 하급 귀족과는 질적으로… 꺄으아아악!”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곧장 내리치는 한 줄기의 벼락.
소녀는 곧장 비명을 내질렀고, 잠시 얼이 빠져 있던 사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럼 그렇지.
벌써 마음고생 하며 지낼 날들이 눈앞에 선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사내는 그날 이후로도 소녀가 눈에 밟혀 영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 모난 성격 탓에 제자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것이 불쌍했는지도.
대마녀의 눈이 있으니 음습한 괴롭힘 따위는 하지 못했다.
다만 모두가 그녀를 멀리하고, 꺼려했을 뿐.
자업자득이다.
다들 그리 생각했고, 사내도 그리 생각하고 넘어가면 끝이었으리라. 그럼에도, 왜.
“……뭐.”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가 시원했다. 나뭇잎을 두드리는 굵은 빗줄기 아래에서, 사내는 말없이 쪼그려 앉은 여인의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워 주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먹구름이 드리운 하늘은 평소와 달리 어둑하고, 계절은 여름.
우기(雨期)였다.
“오랜만에 비 좀 맞고 싶어서요.”
“그럼 혼자 맞든가, 왜 남의 머리 위에 우산을 씌우고 지랄이야?”
“청승 맞잖아요. 혼자 비 맞고 있으면.”
그러자 소녀는 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소문에 따르면 당장 화를 내며 달려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폭우가 쏟아지는 대수림은 몽환적인 풍경을 연출했다. 흐린 조명과 맑은 단말마를 일으키는 빗방울, 물 웅덩이에는 파문이 번지고 모든 생명을 숨을 죽인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한 폭의 풍경화를 감상했다.
몇 초, 몇 분. 그러기를 얼마쯤.
“사매도 외로움을 느낍니까?”
나는 느닷없는 화두를 던졌다.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아마도, 홀로 쪼그려 앉아 비를 맞고 있던 소녀가 퍽이나 외로워 보였던 탓이겠지.
이윽고 늘 그렇듯 퉁명스러운 어조가 되돌아왔다.
“그럼 난 사람도 아니냐? 그리고 사매가 아니라, 선배……!”
“외로움 따위는 모르는 사람처럼 굴길래.”
허를 찔린 소녀의 입술이 머뭇거리다 닫혔다. 다시금 시선을 피하는 여인의 눈썹이 축 내려앉았다.
“……어쩌라고.”
“조금만 상냥히 대하면 안 됩니까? 다들 사매를 무서워 하잖아요.”
“난 그럴 줄 몰라. 어릴 때부터 그랬어… 그때는, 내 사람만 챙기면 충분했으니까. 그리고 다시 경고하는데, 나는 네 사매가 아니라 선배……!”
“그럼 지금은?”
또 다시 소녀의 말문이 막힌다.
나는 굳이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비가 내리는 밀림을 바라보며, 우산을 기울이고 있었을 뿐.
흐르는 물이 질퍽이며 신발 안으로 스며들었다.
“이제 없어.”
망설이다, 끝내 뱉은 한 마디.
구겨지고 찢긴 감정은 너덜너덜했다. 언어로 토해 내도, 누더기를 연상시킬 만큼.
“내 사람도, 지켜야 할 사람도… 나는 아직 그만큼 강해지지 못했으니까.”
나는 그 고백에서 흐릿한 두려움을 느꼈다.
아무것도 지키지 못해서, 또 다시 이별의 아픔을 겪을까 봐 함부로 타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찌 그 마음을 모를까.
나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렇게 우리는 한참이나 더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힐끔힐끔 나를 향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얼핏 보니, 푸른 눈동자가 내 기색을 살피고 있었다.
이내 흥, 하고 들려오는 코웃음 소리.
“병신… 다 젖어서 어쩌냐?”
엘시 선배의 샐쭉한 한 마디를 듣고, 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사매도 마찬가지인데요.”
“아니, 사매가 아니라 선배라고 내가 몇 번이나… 야, 너 진짜 죽어 볼래?!”
나는 그렇게 두 팔을 치켜들며 씩씩대는 소녀를 바라보면서, 알 수 없는 감흥에 휩싸였다.
그 감정의 정체는 무엇이었는지.
몇 달이나 되는 시간이 더 흐르고 나서야, 달콤한 숨결을 맞받으며 깨달았다.
사랑이었구나.
입술을 맞추고, 몸을 겹치고, 하릴없이 킥킥대며 서로 장난을 치다가.
소녀의 처음을 가져가기도 했다. 다음날, 어색한 걸음걸이를 걸으며 괜히 얼굴을 붉히던 모습이 귀여웠는데.
그리하여 자연스레 소녀가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없게 되었을 무렵.
“드, 드디어 지켜냈다……”
대수림은 불타고, 사랑하던 소녀는 피를 흘리며 나무에 기대 누워 있었다.
핏물과 함께 복받치는 목소리를 토해 내면서.
“……내, 소중한 사람.”
계절은 여전히 여름.
그리고 앞으로도, 여름.
사내는 그날의 기억으로부터 단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영원히 반복되는 악몽 속에 빠져 버린 것처럼.
*
사내는 불현듯 정신을 차렸다.
너무나 오래된 꿈을 꾸었다. 낯익은 음색이, 그 말투가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을 일깨웠기 때문일까.
못된 장난이었다.
되찾을 수 없는 추억을 되새김질 해봐야 괴로워지는 쪽은 사내뿐이었다. 여태 몇 번이고 경험해 왔고, 다시는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하지 않았던가.
닳고 닳은 가슴에는 새로운 상처를 새길 자리마저 남아 있지 못했다.
그러니 뿌리쳐야만 한다.
추억은, 행복은 눈사람과 같았다. 제자리에 그대로 두어야면 아름다운 것이다.
멋대로 꺼내 오다가는 흉하게 녹아내리고 말 테지.
그래, 사실은.
사내는 너덜너덜해진 제 몰골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소녀가 사랑하던 남자는 이제 존재하지 않으니까.
바로 그때였다.
“나, 질렸어……?”
무어라 해야 할까.
사내는 그 말을 듣자마자 욱, 하고 치닫는 감정에 입을 열지 못했다. 도리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심장을 이기지 못한 황금빛 눈동자가 등 뒤를 향했다. 그곳에는, 풀 죽은 강아지처럼 눈치를 살피는 소녀가 서 있었다.
눈가에 옅은 물기를 머금은 채로.
질렸냐고?
“나, 죽고 나서 몇 년이나 지났으니까… 그, 그래서 질린 거야?”
그럴 리가.
짙푸른 녹음을 보면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고막을 두드릴 때마다, 사내의 가슴은 아프도록 먹먹히 젖어 괴로워졌다.
여름의 햇볕이 내리쬐면.
“어차피 나, 성격도 나쁘고 몸도 빈약하니까… 너, 너와 달리.”
우산을 나눠 쓰던 날이 떠오르곤 했다. 혹은 함께 땀을 흘리며 장작을 패던 날들이, 하다못해 투닥거리던 날들이 문득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곤 했다.
그래, 차라리 잊고 싶었지.
“그다지, 사회성도 좋지 않고…….”
우는 얼굴도, 웃는 얼굴도 떠오를 때마다 미치도록 힘들었는데.
“……다, 당연히 그렇겠지. 응.”
의기소침해져 있던 소녀의 뺨을 타고 이슬이 흘러 내렸다.
툭, 투둑.
한 방울, 두 방울. 어째서 눈물이 떨어지는 소리는 빗소리와 닮았는가.
“그, 그래도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어. 얼굴 볼 수 있어서, 흐윽…….”
애써 침착한 척 하던 소녀의 목이 멘다.
더는 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걸까.
소녀는 애써 몸을 돌려, 제 소매로 눈가를 슥슥 닦아냈다. 사내는 스스로도 까닭 모를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매몰차게 등을 돌리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다행이야.”
그리고 여인을 발걸음을 내딛었다.
이제야 끝인가.
의외로 감흥은 크지 않았다. 이미 수도 없이 겪어 왔던 이별의 반복일 뿐이라서, 차라리 환상에 불과하더라도 그 시절의 꿈을 품고 살아가는 편이 좋을 테지.
“나를 잊어 버려서. 네가 더는 아프지 않아서… 그럼, 안녕.”
솔직히 말해 핑계일지도 몰랐다.
사내는 이미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아왔다. 소중한 사람을 잃는 경험 따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짧은 재회에 불과할 텐데.
이대로 털어내는 편이, 누구를 위해서든 더 나을 테지.
버리고 버린다.
그렇게 생각하며 사내가 다시 고개를 돌렸을 찰나였다.
‘그러는 당신은 뭘 구해 냈지?’
문득 어느 날 애송이가 던졌던 질문이 뇌리를 스친다.
머저리가.
그때의 애송이는 만신창이였다. 당장이라도 무너져, 다시는 일어나지 않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
사내도 그랬더랬지.
차이점이 있다면, 그 눈빛이 달랐을 뿐.
그날 보았던 황금빛 눈동자는 의지로 불타고 있었다.
‘그렇게 하나씩 버려 가서, 도대체 뭐가 남은 거야? 그러고 나니 세상은 평안하던가?’
때 묻지 않은 꼬마의 의문 따위, 비웃고 지나가면 그만이었다.
그래야만 했을 텐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사내는 이를 악문 채 발걸음을 틀고 있었다. 멋대로 뻗어진 손이 소녀의 옷자락을 붙든다.
놀란 푸른 눈동자가 등 뒤를 향한다. 이전과는 정반대, 사내는 이때까지도 머뭇거리고 있었다.
무어라 말해야 하지?
내 달력은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넘어가지 못했다고.
여전히 계절은 여름, 여름, 여름.
잊지 못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얼마나 사랑했는데.
차라리 원망하며 헤어졌더라면 좋았으리라고.
그렇게 웃는 낯을 하며, 왜 날 떠나걌냐고. 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많아 뇌리가 엉망진창이었다.
짧은 침묵의 끝.
마침내 사내가 짜낸 한 마디는, 지극히도 짧았다.
“……미안.”
한숨인지, 신음인지, 자책인지 모를 소리로.
사내는 사죄했다.
“잊지 못해서.”
이제 소녀가 입을 다물 차례였다.
멍하니 사내를 바라보고 있던 소녀의 낯에, 파도가 친다.
눈꼬리가 움찔 경련한다. 코를 찡그리다, 미간을 좁힌다, 이윽고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사내를 바라보다가.
눈망울 가득 물기를 채우기까지, 단 몇 초.
“흐윽…….”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더는 막을 수 없었다.
소녀는 그대로 사내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당황한 듯하면서도, 사내는 얼떨결에 자그마한 여인의 체구를 품에 안아야 했다.
신장 차가 큰 탓에 소녀의 얼굴은 가슴팍 인근에 파묻힐 따름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그 정도로도 충분했는지, 매달리듯 사내의 몸을 끌어안으며 펑펑 눈물을 쏟을 뿐이었다.
“바, 바보야아… 내, 내가 얼마나… 흐윽, 너, 너 보고 싶어 했는데… 그, 그렇게… 응? 흑, 나 무시하고오… 흐어어어엉……!”
“……미안.”
사내는 생각했다.
참으로 소녀는 변하지 않았구나.
사귀기 전이었다면 좀 더 거친 말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고작해야 ‘바보’라니.
나름의 애교이리라.
그래서 사내는 우는 여인을 조심스레 끌어안는 수밖에 없었다.
“왜, 왜 그러냐구우… 흐윽, 흑… 나, 나는 너 오랜만에 봐서, 끅… 얼마나 좋았는데에…….”
“미안.”
단지 짤막한 사죄를 반복하면서.
메말라 있던 사내의 낯에 옅은 감정의 파문이 번졌다. 말없이 눈을 감으며, 소녀를 끌어안자 그리운 만족감이 품을 가득 채운다.
오로지 사랑하는 여인을 안았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감각.
잊어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미안…….”
어째서 첫사랑은 잊을 수 없는가.
자문하고, 자문해도 답은 하나뿐이었다.
지독히도 사랑했으니까.
끌어안은 두 남녀를 멀찍이 앞두고, 담배 연기가 한 줄기 궤적을 그린다.
이제 불볕은 없다. 폭우도 내리지 않고, 서로의 체온이 그리워질 만큼 쌀쌀한 바람이 부는 이날.
계절은 가을.
오늘, 사내의 기나긴 여름이 비로소 마침표를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