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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620)화 (620/649)

Chapter 620 - 7.5 계절은 가을(9)

울음은 길고 길었다.

마치 그동안 만나지 못한 한을 모두 풀기라도 해야겠다는 듯, 소녀의 눈물샘에서는 끊임없이 이슬이 흘러넘쳤다.

안타까웠던 이별을 보상 받고 싶은 심리도 있었으리라.

그렇게 눈물을 한참이나 짜낸 후에도, 소녀는 사내의 품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몽롱한 눈빛으로 사내의 뺨을 손으로 덮었을 뿐.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흐윽, 흑… 왜 이리 늙었어, 얼마나 고생이 많았으면…….”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보다 어린 몸인데.

그러한 말이 목젖까지 차올랐으나, 사내는 이내 그만두었다. 어차피 사내의 몸뚱어리도 아니었으니까.

또 소녀의 말뜻을 눈치 채지 못한 것도 아니었고.

아무리 젊은 육체라도, 오랜 세월 풍파를 맞은 사내 특유의 분위기를 숨기기는 역부족이었다. 

닳고 닳은 영혼.

감정도, 열정도 이제는 희미하기만 하다. 오로지 원독과 의무감으로 작동하는 기계 같은 존재라고 할까.

오히려 지금과 같은 반응을 보이는 쪽이 기적이었다.

사내는 쓴웃음을 머금어 보려다가, 곧 그만두었다.

수 년 동안 미동조차 없던 입꼬리는 호선조차 제대로 그리지 못했다. 제대로 돌지 않는 녹슨 톱니바퀴처럼.

다만 사내는 어설프나마 소녀의 등을 쓸어내렸다.

“미안, 사매.”

“할 말은 그것뿐이야……?”

움찔, 하고.

드물게도 사내의 몸이 떨렸다. 황금빛 눈동자에 흐릿한 당혹감이 번져 가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의 사내였다면, 그래.

무심한 어조로 ‘끝’이라 말해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의문을 던진 여인은, 사내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여인이 아닌가.

그도 살과 피로 이루어진 인간이었다. 사내는 그 사실을 오늘에야 새삼 깨달았다.

머뭇거리고, 망설이다가.

끝내 사내는 깊숙한 곳에 파묻어 두었던 진심을 입에 담았다.

“보고 싶었어.”

그제야 소녀는 행복에 겨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헤헤.”

이윽고 머리를 사내의 품에 부비기까지.

사내의 얼굴에도 옅은 온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입꼬리가 미미한 호선을 그릴 만큼.

이처럼 간질거리는 분위기가 흐를 무렵이었다.

“크흠, 흠.”

느닷없이 들려오는 헛기침 소리에,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그 진원지에는 암청빛 머리카락을 지닌 여인이 서 있었다.

대마녀.

이를 깨닫자마자 사내는 소녀와 몸을 떨어트리려 했으나, 도리어 소녀 쪽이 사내에게 밀착한 탓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물론 근력 차가 있으니 밀어내려면 밀어낼 수는 있었다. 단지, 팔에 어쩐지 힘이 들어가지 않았을 뿐.

이를 앞둔 대마녀는 흠흠, 라고 재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멀리서 지켜보려고 했더니… 아직도 그러고 있는 꼴을 보면, 한창 때는 알 만했겠구나.”

“뭐, 뭘요.”

그러면서 소녀는 사내의 옷을 쥔 손에 더욱 힘을 더했다. 소중한 보물을 결코 빼앗기지 않겠다는 양.

솔직하다 못해 노골적인 반응이었다. 대마녀가 픽, 하고 헛웃음을 삼킬 만큼.

좀 더 정상적인 예우를 취한 쪽은 사내였다.

“스승님…….”

“흥, 누가 네 스승이냐.”

하지만 그에 응하는 대마녀의 목소리는 심통스럽기만 했다. 그래봐야 이내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기는 했지만 말이다.

“내 제자는 너 같은 애늙은이가 아니다. 좀 더 순수하고, 바보 같은… 그래서 좀 더 기대할 만한 놈이지.”

“그 애송이가 말입니까?”

“말버릇하고는.”

사내의 반문에, 대마녀는 삐쭉 입술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제자의 욕이 기껍지는 않은 듯했다.

그러한 모습조차도 제 스승을 떠올리게끔 했다.

사내는 일순 과거로 되돌아 간 듯한 착각에 빠져야 했다. 힘들기는 했지만, 그 이상으로 행복하고 소중했던 순간들.

그때였다.

망설임 없이 다가온 스승이, 까치발을 든 것은.

사내는 마침 자그마한 연인을 안기 위해 살짝 상체를 낮춘 채였다. 대마녀의 손이 가까스로 사내의 정수리를 덮을 수 있었던 까닭이기도 했다.

“잘했구나.”

사내의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너무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음색이었다. 스승이 제자를 칭찬할 때만 쓰던, 상냥한 높낮이.

흉내 따위가 아니었다. 몇 년에 걸친 세월 동안 쌓인 정이 없다면 불가능한 목소리였으니까.

다름 아닌 사내가 이를 모를 턱이 없었다.

수도 없이 되새김질했던 음성이 아니었던가.

입이 제대로 열리지 않는다.

“수고가 많았어. 너무나도 잘해 주었다… 너는, 누가 뭐래도 내 자랑스러운 제자야.”

그러자 사내는 무심코.

“아니요.”

스승의 말을 부정하고 말았다. 말하고 나서도 아차 싶었지만, 사내의 주장에는 막힘이 없었다.

“저는, 스승님의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몇 번이나 소중한 사람들을 잃고, 실패하고, 후회하고… 만일 제가 좀 더 잘할 수 있었다면……!”

“스승을 믿느냐.”

또 다시 말문이 멎는다.

사내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끝내 반박을 입에 담지 못했다. 그저 시선을 살짝 피했을 뿐.

“……네.”

“그렇다면 토 달지 말거라. 원, 귀하디 귀한 시간을 내줬는데도 제자의 한탄이나 들어줘야 한다니…….”

그러면서 대마녀는 곰방대를 살짝 물었다.

“라고, 네 스승은 말하고 싶어 하더구나.”

다음으로 반응을 보인 쪽은 소녀였다.

엘시는 곧장 목청을 높이며 반문을 던졌다. 그 푸른 동공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 그럼 스승님께서는……!”

“이제 없다.”

후우, 하고 담배 연기와 함께 내뱉어진 대답.

짤막하고 담백한 언어는 한 치의 의심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소녀가 망연한 표정을 짓는 사이, 대마녀는 재차 잔인한 진실을 입에 담았다.

“애초에 ‘망집’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던 의지였다. 내가 받아들인 것은, 너희와 달리 영혼이나 기억의 전부가 아니야. 단지 죽어 가면서 간절히 소원했던 무언가가 남았을 뿐… 이조차도 내 못난 언니가 결계로 ‘경계’를 혼란시키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

그리고 침묵.

한동안 머뭇거리던 대마녀는, 끝내 한숨을 푹 내쉬며 두 사람을 제지한 진정한 이유를 고백했다.

“……너도 무관하지는 않고.”

그녀답지 않게 완곡한 표현이었다.

말뜻을 이해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내’가 살아가던 세상의 ‘대마녀’가 불려온 사건이 예외적이었다면, 달리 불려온 인물 또한 마찬가지일 테니까.

의외로 그 사실에 가장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쪽은 사내였다.

“얼마나 남았습니까.”

묵직한 목소리였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결말이었다. 사내는 이 세상으로 넘어가기 위해 어마어마한 대가를 바쳤다. 무상으로 제 추억을 불러오는 일 따위, 감히 바란 적도 없을 정도였다.

이제 와서 첫사랑과 재회한 일?

말도 안 되는 기적이었다. 당연히, 그 끝은 이르다. 그래서 더더욱 제 마음을 인정하기가 싫었던 것이다.

소녀를 잊지 못했단 사실을.

그러지 않아도 괴로운데, 오늘의 만남이 자꾸만 생각날 테니까.

온갖 감정이 뒤섞인 물음은 짤막한 답변을 불러왔다.

“아주 조금.”

소녀의 낯빛에 공포가 되돌아 왔다. 절망조차도 아니라, 이제 곧 사랑하는 남자와의 이별을 앞두었다는 순수한 두려움이 그 얼굴에 깃들어 있었다.

헤어지고 싶지 않다.

지당한 욕망이 눈물이 되어 소녀의 눈꼬리에 매달렸다. 아마도 이러한 마음은 사내도 마찬가지였을 테지.

소녀는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어째서 사내가 그토록 소녀를 보고도 눈을 돌렸는지. 아직 이별도 하지 않았음에도 이토록 겁이 덜컥 나는데, 실제로 이별을 겪어야만 하는 사내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렇게 소녀가 덜덜 떨며 사내의 옷가지를 손에 쥐었을 찰나.

“다행입니다.”

기억보다도 더욱 단단한 어조로, 사내는 소녀의 머리를 애틋하게 쓰다듬었다.

“다시, 만나게 되어서… 그동안 잊지 않아서.”

그렇게 말하며 사내는 가까스로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얼핏 보기에는 미소보다는 경련에 가까웠지만, 소녀는 알았다.

그것이 사내가 보일 수 있는 제일 상냥한 표정임을.

“……다행입니다.”

여인은 울었다. 사내는 울지 않았지만, 이는 그가 우는 법을 잊어 버렸기 때문일 테지.

하지만 눈물의 시간은 짧았다.

그러기에는 남은 시간이 너무 아까웠으니까.

끝내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체를 하며 물었다.

“야, 넌 나 너무 좋아해서 어떻게 하냐?”

사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태까지와 비슷한 대응이었다.

굳이 입에 담기에 부끄러운 말은, 하지 않는다.

그 사실이 엘시의 장난기를 부채질했다.

“나 죽고 나서 징징 짜기만 한 거 아니야? 엘시 선배를 잊지 못하겠어요, 하고… 응, 응? 어때, 설마 나 이후로 혼자 지낸 건 아니지?”

순전히 농담에 가까운 물음.

소녀는 그 의문에 돌아올 답을 이미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내가 슬쩍 시선을 피하며 침묵을 지켰으니까.

엘시의 미소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아, 아하하… 그, 그래! 내가 죽은 다음에도 하나나 둘쯤은 있었을 수도 있지. 너는, 이 엘시 라이넬라가 반한 남자잖아? 그래서… 몇이야, 응? 하나? 둘?”

여전히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사내의 시선은 더더욱 측면을 향하고 있었다. 기분 탓일까, 그의 이마에 옅은 땀방울이 맺힌 듯한 느낌은.

이윽고 소녀의 미소가 무너져 내린다.

“그럼, 셋? 넷… 다섯… 야, 야!”

끝까지 답이 돌아오지 않자, 인내의 한계를 맞이한 소녀는 결국 목청을 높이고 말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사내는 말없이 손가락을 피고 접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다섯, 여섯, 일곱… 아니 조금 더?

이름도 모를 여인에게 첫사랑을 빼앗긴 소녀는, 눈에 핏발을 세우며 외치는 수밖에 없었다.

“야, 이… 바람둥이 새끼야!!!”

팍팍, 하고.

사내의 정강이는 소녀에게 몇 번이나 걷어 차이고 말았다. 실로 불행한 결말이 아닐 수 없었다.

*

다음날.

“아야야…….”

숙취와 함께 눈을 뜬 이안은, 정강이에서 느껴지는 의문의 통증에 신음을 흘려야 했다. 이윽고 바짓단을 걷은 사내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뭐야, 이건…….”

정강이에 멍이 들어 있었다.

이안은 하이 익스퍼트에 이른 강자였다. 당연히 몸뚱어리에 상해를 가하기는 쉽지 않았고, 이를 하루 이상 남기기는 더더욱 힘들었다.

비상식적으로 반복적인 충격이 가해지지 않는 한.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이안이 무심코 머리맡의 물통을 들었을 때였다.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종잇조각.

이안은 고개를 갸웃하며 이를 주워 들었다. 그곳에는, 휘갈겨 쓴 필체로 짤막한 글귀가 보이고 있었다.

‘고맙다.’

낯익은 글씨, 낯선 내용.

이안은 한동안 멍하니 그 문자를 바라보았다. 그러기를 얼마쯤.

피식, 하고 웃음을 터트리며 사내의 손이 물통을 호쾌하게 기울였다. 꼴깍, 꼴깍 찬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자 그제야 정신이 드는 느낌이었다.

그럼 다시 하루를 시작해 볼까.

이와 함께 사내가 몸을 일으켰을 찰나였다.

팔랑, 하고 머리맡에 놓여 있던 자그마한 종이 조각이 떨어진다.

그곳에도 짤막한 글귀가 적혀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늘 밤, 천문대의 뒤편에서 만나자.’

다만 그 필체의 주인이 짐작 가지 않았을 뿐.

아직 사내의 가을은 끝나지 않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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