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622)화 (622/649)

Chapter 622 - 7.5 계절은 가을(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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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안 선배에게 올리는 글월’

그간 사랑해서 죄가 많았습니다. 주제 넘는 사랑으로 많은 분들께 폐를 끼쳤습니다. 부디 용서를 받아 주시기를.

짧은 생각으로 변명을 하자면, 사랑마저 죄가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습니다.

제 사랑은 죄입니다.

실수였고, 범죄였습니다. 탐해서는 안 될 사내를 탐한 대가로 너무나 많은 분들이 고통 받았습니다. 이를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정당화하는 삶이란 얼마나 비참한지요.

그리하여 저는 심장을 두고 떠나고자 합니다.

가문, 친구, 그 외에도 많은 분들께 너무나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태생부터 괴물이었던 여자가 주제도 모르고 범한 잘못입니다. 부디 너른 마음으로 용서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마도 제가 알던 선배라면, 이 글을 처음으로 보는 분도 선배겠지요.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고, 그 탓에 너무나 많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사랑합니다. 사랑했고, 사랑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만 사랑을 접어 보려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못난 여자라서.

부디 저 없이도 행복하시기를.

세리아 유르디나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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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편지를 읽자마자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뒤를 돌아,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으니까.

다만 내 소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어느덧 내 뒤에는 자그마한 소녀가 서 있었으니까. 새하얀 담배 연기가 인상적인 여인, 내 뒤를 쫓아온 대마녀였다.

울컥 차오른 목소리가 더듬거리며 흘러나온다.

“어, 어디… 어디로 갔습니까.”

울음인가, 분노인가, 혹은 그 무엇인가.

스스로도 정의 내릴 수 없는 감정이 홍수처럼 흘러내렸다. 그때까지도 대마녀는 말없이 서 있을 따름이었다.

“어디로 갔냐고 묻잖습니까! 세리아는, 이렇게……!”

“이렇게, 뭐?”

나는 그 뻔뻔한 반문에 뇌 혈관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이렇게, 뭐 어쩌냐고?

내 곁을 떠나가서, 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래,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이상할 만치 반론이 떠오르지 않아 나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러자 대마녀는 후우, 하고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물었다.

“널 떠나면 안 되냐? 무슨 짓이 있어도 네 곁에 있어야 하고, 스스로 무슨 판단을 내리더라도 네게 허락을 구해야 해?”

“세리아는……!”

“그래서 결정한 거야.”

담담한 선언이었다.

나는 그 어조에 숨은 이야기를 알 것만 같아서,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대마녀는 막힘없이 고백을 이어갔다.

“그 꼬맹이는 칠죄성으로서 적합도가 너무 높다. 북부에서 발생한 폭식의 씨앗을 품어도 이상하지 않고, 제 어머니와 관련 있는 질투의 씨앗을 품어도 이상하지 않지.”

“제가 옆에 있다면……!”

“네가 칠죄성의 힘을 모두 제어할 수 있다고?”

턱, 하고.

반론이 나오지 않았다. 억울하고 답답한데, 목젖에서 할 말이 나오지 않는 이 느낌.

내 입술이 뻐끔거리는 사이에도 대마녀의 잔혹한 지적이 이어졌다.

“제 힘도 제어하지 못하는 주제에… 웃기지 마라, 그 아이는 널 위해서 떠난 거야. 더는 네게 짐만 될 뿐이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오만한 놈.”

스승의 엄숙한 꾸중에 나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멍하니, 이제는 빈 방이 된 세리아의 침실을 둘러보았을 뿐.

곳곳에 날 닮은 인형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만큼 날 좋아했으리라.

“너 따위가 없어도, 그 아이는 스스로 빛날 수 있다. 그럴 각오를 가지고 뛰쳐나간 게야.”

할 말은 없었다.

돌이켜 보면, 세리아는 언제나 그랬다. 스스로 빛나는 존재였고 나 없이도 모든 이들의 동경을 사던 인물이었다. 도리어 그녀가 망가진 시점은, 혹시 나를 만난 이후인가.

머리가 어지러웠다. 다만 이제야 깨닫게 된 사실도 있었다.

세리아는 내게 소중한 존재였다.

그래서 더욱 나는 세리아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이미 떠나 버렸고, 그만큼 결심 또한 굳었을 테니.

내가 아는 후배는 그만큼이나 똑 부러지는 여인이었다.

끝내 내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의문은, 하나뿐.

“……어디로 갔습니까?”

미심쩍은 시선이 나를 향했다. 혹시나 대답을 하면, 내가 찾아갈까 싶어서 던지는 시선.

나는 이에 단단한 눈빛으로 응했다. 그 결연한 다짐을 본 대마녀는, 이내 헛웃음과 함께 낯익은 단어를 입에 담았다.

“천검산.”

칼을 손에 쥔 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지명이었다.

먼 옛날, 델피렘이 이끄는 군대가 온 대륙을 몰아쳤다. 불사의 군단을 앞둔 인류는 최선을 다했지만 끝내 죽음을 각오하는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꽂혔고, 그곳에는 새하얀 검이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이는 악과 불사를 베어 내는 전능한 무구였나니.

이름하여 ‘천검(天劍)’.

전쟁이 끝난 후, 천검의 힘을 두려워 한 영웅은 제 애병을 대륙의 중앙에 꽂아 버렸다. 그리고 이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묘지가 바로 천검산이였다.

물론 이는 전설에 불과할 뿐이라는 설이 우세하기는 했다. 천검산의 높이는 아득했고, 이를 고작 인류의 힘으로 쌓았다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이야기를 추종하는 이들도 존재는 하는 법이었다.

소드 서클(sword circle).

진정한 의미에서의 칼귀신, 속세의 모든 인연을 버리고 검에만 몰두하는 미치광이들.

나는 곧장 목청을 높이는 수밖에 없었다.

“세리아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데……!”

“그럼 네가 진작 잘 돌봐 주지 그랬더냐.”

또 다시 턱, 하고 말문을 막아 버리는 지적.

대마녀는 후, 하고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운명을 믿느냐?”

나는 함부로 대답하지 못했다. 단지, 일그러진 낯빛으로 세리아가 남긴 편지를 바라보았을 뿐.

“그렇다면 곧 보게 되겠지. 운명도, 인연도… 그토록 간단히 잘라낼 수는 없는 법이니까. 오히려 연이 깊어지기 전에 필요한 시련이라 여겨도 좋다.”

무슨 헛소리냐고.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끝내 달구어진 목소리는 내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지 못했다.

이미 늦었으니까.

하늘은 미치도록 맑았다. 계절은 가을, 이제는 끝물.

어느덧 찬 바람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

몇 달 후.

나는 이후에도 넋을 놓고 어딘가를 바라보는 일이 잦아졌다. 세리아가 그곳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이러한 내 감상을 방해하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지극히 예의가 없고, 눈치도 없는 인물을 제외하고서는.

슬프게도 내 곁에는 두 가지 조건에 모두 해당하는 인물이 존재하기는 했다.

“오랜만이네요, 손도끼 바보바보 공.”

“이제는 그 호칭으로 고정입니까?”

그렇게 말하며, 나는 슬쩍 불만스러운 시선을 뒤로 향했다. 그곳에는 은빛 동공과 머리카락을 지닌 두 쌍둥이가 위치하고 있었다.

알펜하우저의 쌍둥이.

그중에서 동생인 루나는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안절부절 하지 못했고, 언니인 시에네는 우쭐해서 건방인 웃음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언제나와 같은 풍경이었다.

“그야, 그렇잖아요? 어차피 또 다른 이름으로 부르면 목소리를 쫙 깔고, ‘에안 토리우스입니다.’라고…….”

“이안 페르쿠스입니다.”

“푸흐흐, 그거 봐요! 그렇게 할 거면서!”

나는 시에네의 말에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머금고 말았다.

날 흉내 내려는 듯 눈을 느슨히 감고, 목소리를 진중히 내리깐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뿐이었다. 정작 중요한 내 이름을 틀려버렸으니까.

하지만 시에네는 그조차도 즐겁다는 양 깔깔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한결 같은 여인이 아닐 수 없었다.

내 입에서는 자연스레 반문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셀린의 소식은 좀 얻었습니까?”

“흐응, 뭐 그 정도야.”

그러면서 시에네는 쥘부채를 펼쳐 제 입가를 가렸다. 여태껏 유의미한 성과를 내지 못한 인물치고는, 실로 당당한 자세였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나오지 않을까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알펜하우저의 정보력은 대륙 제일…….”

“시에네 선배.”

뒷말은 들어볼 필요도 없으리라.

나는 무뚝뚝한 낯빛 그대로 말을 이어갔다.

“할 말 없으면 꺼져요. 심란하니까.”

“위, 위로해 주려 했더니……!”

그러자 오히려 화를 낸 쪽은 시에네 선배였다.

더불어 그 고백에 깜짝 놀란 쪽은 나였고.

설마 그 싸가지 없는 말들이 위로를 위해서였단 말인가?

내가 화들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자, 시에네 선배는 씩씩 분이 차서 목청을 높였다.

“이제 곧 하스터 가문의 유물이 도착한다고요! 그런데, 아직까지 그렇게 넋이 나가 있을 거예요?!”

“그렇게 막 떠들어도 됩니까?”

“흥, 상관없어요! 어차피 유물이 보관될 장소는 아무도 모르니까!”

흥흥, 하고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리는 여인.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무척 귀여운 장면이었다. 안타깝게도 나와 여인 사이에 두터운 악연이 쌓여, 그 사실을 인지하기 힘들 뿐이지.

내가 얼이 빠져 있자, 시에네 선배는 마지막으로 소리를 빽 지르며 떠나갔다.

“아, 알려 주려고 했는데! 이젠 몰라, 바보!”

“뭔…….”

애새끼 같은 소리냐고, 그리 되묻기 전에.

시에네 선배는 종종걸음으로 떠나가고 말았다. 루나 선배만이 마지막으로 입술을 달싹이며 뜻을 전했을 뿐.

‘내일 따로 암호문을 보낼게요.’

그래야지.

나는 그리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성국으로 떠난 내 아내와. 대수림으로 간 약혼자와, 행방도 모를 소꿉친구를 떠올리며.

도대체 왜.

셀린과 세리아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단지 내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실로 종잡을 수 없는 마음가짐이었다.

**

그날 밤.

알펜하우저가 묵는 아카데미의 건물 앞, 따스한 조명이 새어 나오는 입구에서 근위기사들이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사박, 사박, 사박.

매끄러운 발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근위기사들이 눈을 돌리자, 그곳에는 황갈빛 불씨가 떠 있었다.

“…….?”

그리고 궤적처럼 검은 머리카락이 따라붙는다.

한 걸음, 두 걸음.

다가올 때마다 근위기사는 기묘한 감각에 몸을 떨어야 했다. 닭살이 돋는 듯도 하고, 피부가 간지럽기도 한 이 느낌.

뭐지?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도 전에, 근위기사들은 그동안 훈련받은 대로 창을 내세우며 입을 열었다.

“정지! 신분을 밝혀라!”

대답은 한동안 없었다.

황갈빛 눈동자는 하늘을 향하고, 달빛이 유순히 뺨을 타고 흘러내리며.

끝내 여인은 얼어붙은 음색으로 말했다.

“하스터.”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두 근위기사의 시선이 마주쳤고, 그것이 끝.

지옥이 알펜하우저에 강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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