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23 - 7.5 계절은 가을(12)
지난 몇 달은 이별의 연속이었다.
소꿉친구는 실종됐고, 아끼던 후배는 떠나 버렸으며, 약혼자는 스승과 함께 대수림으로 향했다.
또한 사랑하는 아내마저도 내게 작별 인사를 건네지 않았던가.
하스터 가문의 금광에서 발견된 유물이 도착하기 일주일 전이었다.
한동안 신전에서 두문불출하던 성녀가 내 방을 찾아온 것은.
마침 찬장에서 싸구려 위스키를 꺼내 술잔을 채우려던 나는, 그 자리에 멈칫 굳어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요즘 과음을 반복해 왔던 나였다.
당연히 동거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던 성녀가 이를 고운 눈으로 바라볼 턱이 없었다. 몸도 완치되지 않은 마당에 무슨 짓을 하는 거냐고, 술을 줄이려고 끝내 통사정을 하기까지 했지만 내 음주가 멈추는 법은 없었다.
술은 감정의 마취제였으니까.
통증을 잊고자 하는 인간의 집념은 집요한 면이 있었다. 그동안 온갖 고통에 통달했다고 생각했던 나조차도, 마음의 상처를 이겨내지는 못했다.
싸구려 위스키를 들이키며 심장을 둔하게 만드는 수밖에.
당연히 올바른 대처는 아니었다.
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음주는 심야에 한정하곤 했다. 낮에도 일상생활을 못할 만큼 만취한다면, 그보다 한심한 일은 없을 테니까.
솔직히 마음 한 켠에서는 그러고 싶은 심정이 존재하기도 했다.
다만 내 등에 얹어진 책임의 무게가 나를 찍어 눌렀을 뿐.
인류의 샛별이자, 어둠을 사냥하는 자.
내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면, 그 파장은 결코 나 하나로는 끝나지 않을 터였다.
물론 어느 쪽이든 성녀의 억장이 무너진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침묵은 길었다. 성녀는 아무 말도 없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고, 나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위스키 병을 주섬주섬 바닥에 내려놓으며 헛기침을 하고 말았다.
“……오셨습니까?”
“뭘 그리 자연스레 숨겨요? 당장 제자리에 돌려놓지 않고?!”
결국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마냥 비척비척 위스키를 찬장에 돌려놓아야 했다.
누가 그러지 않았던가.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라고.
나는 그 말이 아주 조금 이해가 될 듯 말 듯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심지어 성녀의 잔소리는 그 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실로 잔인한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이안, 말했잖아요? 아직 당신 몸은 완치되지 않았어요… 이상할 만큼 내부가 엉망진창이라 가까스로 기워 붙인 누더기에 가깝다고요! 그런데 또 술을 마셔요?”
성녀의 불 같은 호령에, 내 눈이 스리슬쩍 내리깔렸다.
술까지 빼앗아 놓고 바가지까지 긁다니.
결혼은 최대한 미루라던 인생 선배들의 황금 같은 조언을 새삼스레 떠올랐다. 나는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 낯빛으로 소심한 반론을 제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동안 술 마셔도 잘만 싸워 왔는데…….”
“아휴, 내가 못 살아!”
그러면서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팍팍, 하고 내리치는 성녀.
묵직하고 탄력 있는 촉감이 시각적으로 전해져 온다. 이를 보고 나는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결혼이 마냥 나쁘지만은 않을 텐데.
잘난 듯이 조언하던 인생의 선배들이 전부 바보처럼 느껴졌다. 이처럼 사랑스러운 아내를 두고, 어찌 그러한 마음을 먹을 수 있단 말인가.
다만 시시각각 달라지는 내 마음과 달리, 성녀는 시종일관 한탄스러운 기색을 버리지 못했다.
“이러다 나 없이 어떻게 살려고요? 또 술이나 매일 마시고 있을 텐데!”
“그럼 평생 함께 살면 되죠.”
“에휴.”
내 지당한 반론에 성녀는 그저 한숨만을 내쉴 따름이었다.
오히려 말하자면, 기분이 살짝 좋아진 듯 보이기도 했다. 그래봐야 내 직감에 따른 근거 없는 추론에 불과했지만.
성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진짜, 나니까 참는 줄 알아요… 그러지 않았으면 벌써 이혼이야.”
그러면서 성녀의 손이 드르륵, 하고 내 맞은편의 의자를 잡아당겼다. 이윽고 자연스레 내 맞은편에 착석하는 아내.
어느덧 연분홍빛 동공에 걱정이 가득 차 있었다.
여인은 턱을 괴며 내게 물었다.
“왜 고향으로 내려가지 않았어요?”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던 탓일까.
나는 허를 찔린 사람 마냥 한동안 대답을 꺼내지 못했다. 그러기를 얼마쯤.
내 입은 가까스로 핑계 하나를 찾아냈다.
“……가봐야 할 일도 없으니.”
“언제는 할 일이 있어서 갔나요? 방학이잖아요.”
그 말대로였다.
흡혈귀의 습격이 있었던 지도 몇 달.
그새 아카데미는 기묘할 정도의 평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무리 암흑교단이라고 해도 칠죄성 중 하나를 잃은 참패가 뼈아팠기 때문일지도.
혹은, 그 이상의 음모를 꾸미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당연히 계절은 이미 가을을 지나고 있었다. 쌀쌀하다 싶었던 공기가 어느새 북방의 찬 공기를 몰고 오는 시기였다.
그러니 계절의 흐름에 따라 아카데미에도 방학이 찾아오는 건 당연지사.
하지만 나는 여전히 아카데미에 머무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성녀는 그 낯선 행보에서 내 심경 변화를 읽어낸 듯했다.
“무서워요?”
조심스러우면서도, 단호한 물음.
나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면서 시선을 피했다. 찬장에 돌려놓은 위스키 생각이 간절했다.
한참이나 침묵이 이어지자, 성녀의 채근이 이어졌다.
“그렇게 울상을 하고 지낸 지가 벌써 몇 달이에요, 도대체… 나는 아내잖아요. 아내가 남편의 마음도 제대로 듣지 못하나요? 왜 대답을 못…….”
“술.”
신음인지도 한숨인지도 모를 소리.
그렇게 괴로운 음색을 토해 내면서, 나는 슬쩍 시선을 내리깔았다.
“술 주면 이야기할게.”
그리고 정적.
성녀는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나를 응시했다. 마치 눈싸움이라도 하는 양.
고요가 길지는 않았다. 아내는 이내 한숨을 푹 내쉬며 짜증스레 몸을 일으켰으니까.
이윽고 쿵, 하고 내 앞에 놓이는 술병.
나는 성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잔에 술을 따랐다. 쫄쫄쫄, 하고 흘러나오는 위스키마저 괜히 내 위축된 마음을 반영하는 듯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술 없이 할 만한 이야기가 아닌데.
내가 그렇게 잔에 가득 찬 위스키를 입에 털어 넣기 직전이었다.
어라, 하는 사이.
내 손이 닿기도 전에, 새하얀 무언가가 잔을 낚아챘다. 그리고 곧이어 들려오는 소리.
꼴깍, 꼴깍.
시야가 순식간에 회전한다. 본능이라고 해도 좋았다. 새하얀 궤적을 쫓아 고정된 내 망막에 맺힌 곳에서는.
성녀가 술을 들이키고 있었다. 그것도 40도를 넘나드는 독주를, 단숨에.
이성이 깨어나기도 전, 내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니, 이게 무슨… 이 여자가 진짜!”
당연히 위스키가 아까워 내지른 절규는 아니었다.
애초에 술은 아직 병에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몸을 벌떡 일으킨 까닭은, 성녀의 주량 탓이었다.
성녀는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
포도주만 홀짝거려도 금세 취하는 여인이었다. 그런데 도수가 그 두 배를 독주를 그대로 들이켜?
독주(毒酒)란 산술적인 계산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도수가 두 배라고 해서, 단순히 두 배 빠르게 취하는 게 끝이 아니란 뜻이었다.
그렇게 내가 기함해서 성녀의 잔을 뺏어 들기 직전.
탁, 하고.
여인의 가녀린 손이 나를 쳐냈다. 나는 하도 기가 차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그새 성녀는 혀를 삐쭉 내밀며 질색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웩, 맛 없어.”
“그러니까, 내가……!”
“마음껏 마셔요. 대신, 당신이 마실 때마다 나도 한 잔 마실 테니까.”
예상보다도 단단한 어조였다.
설마 스스로를 인질로 잡을 줄이야.
나는 허, 하고 헛웃음을 삼키며 그 자리에 주저앉는 수밖에 없었다. 성녀는 친절하게도 내 앞에 잔을 두고 술을 따라주기까지 했다.
실로 무서운 여인이었다.
과연 성국의 살얼음판 같은 정치판 위를 거닐던 인물답다고 할까.
새삼스레 내 아내의 위대함을 깨달으며, 나는 단숨에 술잔을 기울였다. 식도를 태우고 내려가는 싸구려 위스키의 작열감이 만만치 않았다.
뒤이어 올라오는 역한 알콜 냄새까지도.
이내 크으, 하고 입가를 닦아내고 나서야 내 입술이 달싹이기 시작했다.
“……셀린을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요?”
“제가 어찌 부모님 얼굴을 뵙겠습니까? 어머니는, 셀린을 딸처럼 생각하고 계신데… 하스터 부인은요? 아인스턴 남작님과 아인스턴 부인은?”
끝내 씁쓸한 마음을 이겨내지 못한 내 손이 멋대로 술병을 기울였다.
쪼르륵, 하고 잔을 다시 채우려다.
나를 유심히 바라보는 연분홍빛 시선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결국 나는 끄응, 하고 신음을 흘리며 가득 채우려던 잔을 반만 채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단숨에 내 잔을 빼앗아 가는 손길.
위스키가 여인의 입 속으로 사라진다. 바보 같은 여자, 내 씁쓸한 한탄을 뒤로 하고서.
쪼르륵.
잔은 다시 한 번 차오른다.
내 마음 깊숙한 곳에 가라앉혀 두었던 상자를 띄우기 위해.
“그리고, 레토는?”
짧지만 묵직한 한 마디였다.
레토 아인스턴, 나의 가장 절친한 벗.
그의 이름이 나오자 내 눈가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내가 견디다 못해 술잔을 비울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성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단지, 슬쩍 몽롱해진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을 뿐.
이내 반문이 되돌아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