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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624)화 (624/649)

Chapter 624 - 7.5 계절은 가을(13)

“그가 당신을 원망하던가요?”

“아니.”

부정.

망설임조차 없었다. 그야, 사실이 아니었으니까.

아직도 나는 얼마 전에 보았던 레토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그렇듯 무심한 낯짝을 하고, 다소 재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을 따름이었다.

‘그러냐?’

얼핏 보기에는 별반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그가 여전히 제 인맥을 동원해서 셀린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찌 그러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셀린은 레토에게 여동생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는데.

레토는 단지 내게 아무렇지도 않은 체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차피 내게 화를 낸다고 해봐야 상황이 달라질 턱은 없을 테고, 그가 나를 비난하기 시작한다면 나는 지금의 배 이상으로 괴로워 할 테니까.

참 똑똑한 놈이었다.

그 사실이 못내 든든하면서도, 미안했다. 차라리 화를 내며 내게 욕이라도 했다면 조금 덜 미안했을까.

레토는 절대 그러지 않겠지만.

내 손이 술병을 더듬었다. 이대로 만취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으나, 아내를 인질로 잡힌 몸으로서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아직까지는 성녀의 낯빛이 괜찮아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내가 입을 열기 시작한 지는 고작해야 몇 분.

술기운조차 제대로 오르지 않을 무렵이었다. 아무리 술이 약하더라도 벌써 티가 날 리가 없겠지.

결국 나는 위스키를 들이키는 대신 한숨을 토해내는 수밖에 없었다.

“레토는, 나를 탓하지 않아… 설령 셀린이 잘못된다고 해도. 죽기 직전에야 욕 한 번 하고 넘어갈 놈이니까.”

“그래서 더 괴롭군요.”

“맞아.”

안쓰럽다는 감정을 듬뿍 담은 연분홍빛 시선이 내게 와 닿는다. 성녀는 망설이고, 머뭇거리다가.

이내 제 손으로 술잔을 벌컥벌컥 채웠다.

한 잔 가득.

어어, 하는 사이 또 다시 술 한 잔이 성녀의 식도를 타고 사라져 버렸다. 내가 무어라 타박을 하기도 전에, 성녀는 진지한 음색으로 말했다.

“이안, 지난번에 말한 적이 있죠? 하스터 가문의 금광에서 발견된 유물이 곧 아카데미에 도착한다고.”

‘하스터 가문’.

실종된 소꿉친구의 성이 나오자 일순 굳어 버린 나였지만, 당황은 길지 않았다. 업무에 관련된 화두가 내뱉어진 순간부터 네 심장은 무섭도록 침착해졌으니까.

짧은 휴식이 끝나 가고 있었다.

“벌써 몇 달 전 이야기잖습니까?”

“네, 그동안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거든요. 아마도 유물이 지니고 있는 힘이 상상 이상인 듯해요.”

“그야, 칠죄성의 파편이니 당연하죠.”

“정확히 말하자면, 어느 시점을 기점으로 갑작스레 잠들어 있던 힘이 깨어났다고 하는 편이 옳을까요?”

그동안 얌전하던 유물이 슬슬 부활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어째서?

이만큼 갑작스러운 변화에는 마땅한 원인이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수백 년 동안 조용히 잠들어 있던 미지의 힘이, 도대체 왜 이제야 눈을 떴단 말인가.

사고가 헝클어질수록 하나둘씩 추측이 떠오른다.

셀린의 실종, 세리아의 가출, 혹은 흡혈귀의 죽음?

무엇이 결정적인 변수였을지 가늠하지 못하는 와중에도 성녀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더불어 대륙 각지에서 의문의 방화 사건이 빈발하고 있기도 하고요.”

“암흑교단의 짓이군요.”

한 점의 의심조차 남아있지 않은 답변.

대륙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인 소요 행위를 벌일 만한 집단은 얼마 존재하지 않았다. 고작해야 제국 첩보부나, 암흑교단이 고작이겠지.

그리고 제국 첩보부가 그따위 짓을 벌일 까닭은 존재하지 않고.

마지막으로 남는 용의자는 하나뿐이었다.

성녀의 예상도 나와 다르지 않은지,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 탓에 그동안 유물에 대한 조사를 미뤄왔던 거예요. 섣불리 움직이면, 오히려 암흑교단을 자극할 위험이 있으니까… 하지만 이제 더는 일정을 미룰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유물의 힘이 나날이 커져 가고 있거든요. 아마도 근시일 내에, 감당이 불가능할 만큼.”

희소식은 아니었다.

아니, 도리어 불길한 예감이 가슴을 툭, 하고 치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나는 침음을 삼키며 내 몫으로 남은 술 한 잔을 마저 들이켰다.

탁, 하고 잔이 탁자 위에 부딪히는 소리.

“각국이 아카데미에서 유물을 조사하는 데 동의했어요. 성국도 그렇지만, 제국이나 열왕국에도 암흑교단의 첩자가 숨어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그러니 삼국이 함께 모여 서로를 경계하자는 것이 이 계획의 요체죠.”

“누가 나온다고 합니까?”

“자세히는 몰라요. 다만 성국에서 누가 파견되는지는 알고 있죠.”

그러면서 성녀는 품속에서 자그마한 서류를 꺼냈다.

이래저래 기나긴 내용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핵심적인 정보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아인델 총주교’.

시엔델 산 정상에서, 멀리서나마 본 적 있던 인물이었다.

또한 오래 전에 들었던 이름이기도 했고.

북부에서 벌였던 엘프와의 혈투.

‘아인델 총주교, 그는 위험…….’

죽기 직전, 레오릭은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나는 그 이름과 함께 성녀가 꺼낸 서류를 말없이 품속에 품어 두기로 했다. 내 분위기가 단숨에 내려앉자, 성녀 또한 더욱 진중해진 낯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안, 제국에서는 누가 파견되는지 알고 있나요?”

흐음, 하고 침음과 동시에 내 머리가 슬쩍 기울었다.

당연히 그에 관련된 언질을 들은 적은 없었다. 다만 나 정도 되는 위치가 되면, 간접적으로나마 들어오는 정보가 꽤 있는 편이었다.

특히 암흑교단과 관련된 정보라면야.

이윽고 나는 가장 그럴싸한 결론을 도출해 냈다.

“알펜하우저 가문의 쌍둥이.”

“과연, 그렇군요… 아이리스 황녀가 손을 썼나 보네요.”

대략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한 어조였다.

아마도 막후에서 다양한 정치 권력이 얽힌 협상이 이루어졌겠지. 자세한 내막이 궁금하기도 했으나, 나는 일부러 이를 캐묻지는 않았다.

이미 내 뇌리는 용량 초과였다.

또한 나는 기사가 아니었던가. 기사는 검을 휘둘러야지, 세 치 혀를 휘두르는 전장은 그에 알맞은 이들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했다.

지금 내가 신경 써야 할 일은 오직 하나뿐.

인류의 적을 참하는 것.

다만 성녀가 전해야 할 소식은 그 정도가 끝이 아니었다. 그녀는 한동안 망설이다가, 이윽고 마음에 걸려 하던 사실을 토해냈다.

“이안, 사실 저…….”

“돌아가야겠군요.”

담담한 목소리.

그러나 내 표정이 좀 더 어두워졌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나와 성녀의 관계는 얕지 못했다. 슬그머니 나를 향하던 성녀의 손가락이 안타깝게 굽어졌다.

“아인델 총주교는 성국 내 배신자들을 색출하는 작업을 총지휘하던 인물이 아닙니까? 그가 이곳에 온다는 소리는, 관련된 작업이 끝나 간다는 소리고… 마무리는 성녀님께서 지으셔야겠죠. 그 누구도 당신을 의심할 수는 없을 테니까.”

성국에서 ‘성인’이란 그러한 의미였다.

천신의 선택을 받은, 신의 대리자.

이를 의심한다는 것은 곧 천신의 뜻을 의심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한동안 피바람이 불더라도 그 역풍을 온전히 감내할 수 있는 인물은 성녀가 유일하다시피 했다.

그러니 가야겠지.

알고는 있었다. 이해는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우울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또 다시 혼자인가.

한껏 울적해진 내 분위기에, 성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이윽고 무릎을 꿇기까지.

나를 위로할 때 주로 보이는 자세였다. 바닥을 향하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기 위해, 그리고 좀 더 소중히 내 손을 보듬어 주기 위해서.

“이안…….”

“괜찮습니다.”

나는 애써 미소를 지으면서, 그렇게 성녀를 위로했다.

성녀의 눈동자에 옅은 물기가 맺히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각자의 길이 있으니까요. 서로의 책임을 다해야겠죠.”

그래, 이것이 올바른 결론이었다.

우리에게는 의무가 있었다. 인류를 구하기 위해,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다소의 희생은 감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를 모를 성녀가 아닐 테지.

그러니 이야기는 이제 끝.

서로의 길로 돌아가면 되는, 평소와 다름없는 전개였을 텐데.

성녀가 무언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 챈 것은 그 직후였다.

훌쩍, 하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에 내 시선이 멍하니 움직였다. 그 끝에는, 뺨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리는 눈물의 행렬이 비치고 있었다.

성녀였다.

도대체 왜, 라는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았다.

발갛게 달아오른 성녀의 뺨이 그 원인을 말해 주고 있었으니까.

술이었다.

내가 적절한 대처를 떠올리기도 전에, 성녀는 그대로 내 품에 달려들듯 안기고 말았다.

“이, 이아아아안… 흑, 흐윽, 흐어어어엉… 내 남편 불쌍해서 어떡해… 우리 여보는 아무 잘못도 없는데, 단지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저, 성녀님?”

“나, 나 가지 말까?”

내 손을 강하게 움켜쥐며 외친 말이었다.

아내의 연분홍빛 눈동자는 이미 물기로 가득 차 있었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뚝뚝 흘러넘치는 눈물이 이를 증명했다.

진심인가.

아무리 봐도 진심으로 보였다.

“아니, 아니지… 당신이 날 따라올래? 그래, 성국으로 신혼여행을 가자. 좋은 곳, 예쁜 곳, 멋진 곳… 당신과 함께 보고 싶은 곳이 너무 많아.”

“잘 알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칠죄성이 유물이 온다는데, 제가 어딜 가…….”

“왜 안 되는데?!”

틀렸다.

만취한 성녀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를 향한 애정과 연민이 한도를 초과해서, 이미 이성의 영역이 침수된 지 오래일 테지.

이대로 가면 끝이 없으리라.

그러니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내 남편이 얼마나 고생했는데! 휴가 정도는 줄 수 있는 거잖아! 나도, 나도 남들처럼 알콩달콩 신혼여행 가고 싶… 으웁?!”

내 손이 투정 부리는 여인을 끌어당겼다. 서로의 숨결이 맞닿을 때까지는, 찰나.

입술 사이를 부드러운 살덩이가 파고든다. 혀와 혀가 뒤섞이며 은근한 쾌감이 뇌를 뭉근히 녹여 낸다.

혀로 혀 뒤쪽을 긁자 바짝 거칠어지는 성녀의 호흡.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키스가 이어질 때마다 여인의 몸은 안절부절 하지 못하고 허벅지를 오므렸다.

찰나와 영원 같은 시간의 끝.

혀는 멀어졌지만, 달뜬 숨결은 아직 서로를 원한다며 안달을 내고 있었다. 은빛의 실선이 죽 이어진다.

몽롱해진 성녀를 향해 나는 말했다.

“벗어.”

그 대답이야, 언제나 그렇듯이.

“네, 네……!”

얼마 남지 않은 밤이 불타 올랐다.

다음날 아침, 성녀는 전날 밤의 기억으로 얼굴을 한껏 붉힌 채였다.

“크흠, 흠, 흠… 아무튼 조심해요. 암흑교단이 얌전히 있을 리는 없으니까. 분명 제국의 사절도 모르고 있을걸요?”

“알펜하우저를?”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는 아내의 새하얀 나신을 감상하며, 나는 슬쩍 회상에 잠겼다.

그 알펜하우저가 말이지.

내 입에서는 이내 픽, 하는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걱정하지 마.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으니까.”

제국의 금권을 상징하는 알펜하우저.

그들은 아카데미 내부에도 따로 건물을 소유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건물의 보안은, 상상 이상.

일명 ‘황금 요새’라 불리는 장소가 아니던가.

그곳이 무너질 일은 없었다.

그래, 며칠 후.

잿더미가 된 알펜하우저의 거점을 보기 전까지는.

모두가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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