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25 - 7.5 계절은 가을(14)
‘황금 요새’.
아카데미에 위치한 알펜하우저 소유의 건물을 이르는 말이었다. 아니, 실은 대륙 곳곳에 위치한 알펜하우저의 건물 중 어디에 붙여도 이상하지 않은 별명이었다.
제국의 5대 귀족이 지닌 힘이란 무엇인가?
북부의 유르디나는 군대를.
동부의 루페미온은 기사를.
서부의 핀들스턴은 정보를.
남부의 아라호른은 마법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들이 주관하는 분야는 비단 제국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에, 온 대륙이 그들을 견제하기도 했다.
다만 오직 단 한 가문.
알펜하우저만큼은 대륙 곳곳을 자유롭게 누빌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단순했다.
금화를 싫어하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이처럼 수백 년에 걸쳐 막대한 자본을 쌓은 가문이었다. 당연히 돈은 썩어 넘칠 만큼 많았고, 황금은 그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는 법.
인력이든, 마법이든, 건축 자재든 상관이 없었다. 무한정 솟아오르는 금화를 잔뜩 투자한 알펜하우저의 건물은 가히 하나의 ‘요새’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그야말로 난공불락.
알펜하우저의 금과 첩보를 노리고 접근한 이들 중 그 누구도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 그만큼 드높은 명성을 구가하는 장소였다.
아카데미의 ‘황금 요새’는.
그럼에도, 왜.
쾅!
“아아아아아악!”
비명과 함께 문짝이 박살 나 목편으로 흩날렸다. 저 너머에서 넘실대는 불꽃이 온 세상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새빨갛다.
알펜하우저에 고용된 근위 기사는 오들오들 떨면서, 그리 생각했다. 동료가 날아들며 나동그라진 문짝의 제 위치 너머.
모든 것이 불타고 있었다.
낼름거리는 불길이 액자와 벽면을 태우며 점점 더 제 영역을 넓혀 가고 있었다. 벽면을 물들인 핏물과, 곳곳에 쓰러져 온몸을 비트는 기사들.
“으그, 끄, 아아아아아아악!”
“사, 살려… 아, 아니… 차라리 주, 죽여어어어어어억!”
악몽인가.
근위 기사는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을 치다가, 마찬가지로 굳어 있던 부하들을 향해 외쳤다.
“요격 마법을 작동시켜!”
“자, 작동하지 않습니다! 하, 하, 한참 전부터… 계속, 계속 시도했는데!”
그럴 리가.
끔찍한 소식을 접한 근위 기사의 낯빛이 새하얘졌다. 몇 번이고 실험해 보고, 몇 번이나 유지 보수 작업을 진행해 왔던 마법 함정이었다.
알펜하우저는 철두철미했다. 그들의 방심에는 언제나 이유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토록 공을 들였던 마법들인데.
단 한순간에 망가졌다고? 그것도 이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돌이켜 보면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박살이 나서 파편만 남은 문짝.
무려 ‘황금 요새’라 불리는 건물이었다. 당연히 문 하나하나에도 강도를 높이고 공간과 공간을 차단하는 마법을 걸어둔 터였다.
그런데 이처럼 허무하게 찢겨 나가다니.
“도대체, 무슨…….”
난생 처음 보는 사태에 근위 기사가 더듬거리는 사이.
사박, 사박.
소름 끼치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이 모든 재앙을 불러온 악마가 다가온다는 전조였다.
붉기만 하던 저 너머의 세상에 새로운 색채가 둥실 떠오른다.
황갈색 눈동자, 칠흑의 궤적을 그리는 머리카락, 새파란 예기를 흩뿌리는 태도까지.
보폭은 일정했다. 걸음걸이도 느긋한 편이라, 얼핏 보기에는 도저히 위협적이지 않은 소녀였다.
도리어 아름답다면 몰라.
하지만 그녀를 보자마자, 근위 기사는 발악처럼 소리를 내지르는 수밖에 없었다.
“당장 막아!”
“하, 하지만 불길이……!”
“그건 내가 어떻게든 해본다! 막아!”
어차피 이판사판이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면.
마침내 결의를 굳힌 기사 셋이 시선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땅을 박차고 쏘아지는 육중한 몸집.
도저히 그 무게에 걸맞지 않은 속도였다. 온갖 마법 유물들로 온몸을 강화했기에 보일 수 있는 묘기였다.
말하자면 강철로 이루어진 포탄.
무려 셋이나 되는 일류 검사들이 질풍처럼 몰아닥쳤다. 고작해야 가녀린 소녀 혼자로서는 그대로 휩쓸릴 수밖에 없어 보일 만큼 위협적인 기세였다.
정, 우, 좌.
정면에서는 빠져 나갈 수 없도록 간격을 촘촘히 좁힌 기사들이 벼락처럼 들이닥쳤고.
비로소 소녀의 태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합(一合).
칼날과 칼날이 마주치며 미끄러진다. 놀랍도록 정교한 맞물림이었다.
날과 날이 서로의 위에 서다니.
이 믿기 힘든 기예가 누구의 의도였는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소녀의 손목이 살짝 비틀리는 듯하더니.
서걱.
첫 번째 기사는 믿기 힘들다는 얼굴을 한 채 제 가슴 어림을 내려다보았다. 검의 궤적은 비틀려 사내의 몸은 미끄럼틀을 타듯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가슴에 깊은 상흔을 새기면서.
이는 이어질 동작의 시작에 불과했다.
소녀의 입술이 자그맣게 달싹인다.
‘하나.’
팍!
‘둘.’
소녀의 몸이 살짝 뒤틀리며 찌르기와 베기가 교착한다. 그렇게 허공에 뿌려진 핏물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끄, 끄르륵…….”
마지막으로 달려들던 사내가 비틀비틀 뒷걸음질을 쳤다.
캉, 하고 떨어진 칼이 구슬픈 소리를 내며 두 조각으로 분리되고 있었다. 어느덧 여인의 검은 사내의 상체를 사선으로 가르고 지나간 뒤였다.
칼날째로 절단당했다.
압도적인 무력 차. 이를 실감한 기사의 눈빛이 절망으로 물들었고, 피거품을 머금던 마지막 사내가 마룻바닥에 쓰러졌다.
소녀는 그제야 얼음장 같이 차가운 한숨을 흘려 냈다.
“……셋.”
바로 그때였다.
쾅, 하고 폭음이 울려 퍼지더니 천장과 벽을 잠식하는 실금들.
그 노림수의 정체가 밝혀질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물줄기가 터져 나온다.
분무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물의 기세는 무시무시했다. 이대로 두면 끝도 없이 흘러 내리기라도 할 듯이.
근위 기사는 그제야 웃음을 터트릴 수 있었다.
그의 검이 벽 한 구석에 꽂혀 있었다. 균열의 시발점, 물줄기가 용솟음 치는 원인이리라.
“크흐, 흐흐… 하하하하하하!”
어차피 저 괴물은 이길 수 없었다.
죽음은 이미 확정된 결과일 테지. 하지만, 저 수상쩍은 불길을 끌 수만 있다면?
아직 남은 동료들의 승산을 조금이라도 올릴 수 있을 터였다.
목적을 달성한 사내는 더 이상의 미련이 없기라도 한 양 광소를 터트렸다. 그의 악에 받친 저주가 이어졌다.
“이, 빌어먹을 년이… 알펜하우저가 우습더냐?! 혹시 마법이 작동하지 못할 때를 대비한 수단 따위는 이미 준비해 두었다! 이곳은 특별히 상수도가 벽과 천장에 가까이 설치되어 있는……!”
하지만 그 발악이 마저 토해지기도 전에.
사박, 사박.
소녀가 다시금 걸음을 내딛는 소리가 들려 왔다.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싸늘하다 싶을 만큼 무표정한 낯을 유지하면서.
그 직후.
철푸덕, 하고.
근위 기사의 몸이 멋대로 엎어졌다. 아직 소녀와의 거리는 남아 있었고, 아무런 조짐도 느끼지 못했음에도.
어, 어라.
사내의 파르르 떨리는 시선이 제 몸뚱어리를 향했다. 그곳에는, 아지랑이처럼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있는 팔과 어깨가.
“으, 으아… 아아아아아아?!”
근위 기사는 깜짝 놀라 어떻게든 발버둥을 치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몸은 그의 통제를 벗어난 뒤.
흐물거리는 육체는 진흙이 철퍽이는 소리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윽고 근위 기사는 깨달았다.
불길의 기세가 줄지 않는다.
아니, 도리어 이전보다 더욱 거세진 느낌이었다. 이글이글 건물을 불태우던 불꽃은, 어느덧 태풍처럼 실내를 휩쓸어 가고 있었다.
“무, 무스…….”
혀마저 녹아버려 끝내 근위 기사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다만 녹아내린 몸뚱어리를 찰팍 짓밟으며, 소녀가 남긴 한 마디만이 울려 퍼졌을 뿐.
“넷… 아직 부족한가.”
그리고 다시 하나.
숫자는 단 한 번도 멈칫하지 않고 이어졌다. 거침없이 나아가, 어느새 소녀는 마지막으로 남은 문짝을 날려 버렸다.
쾅!
이전과 같은 소란은 벌어지지 않았다. 드넓고 호화스러운 집무실 안에는, 의외로 침착한 낯을 한 두 명의 여인이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시에네와 루나.
알펜하우저의 해와 달, 더불어 차기 가주를 꿈꾸는 유력한 직계들이었다.
“아무리 수소문해도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더니, 결국 제 발로 행차하시는군요.”
소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단지 시에네의 책상 앞에 시립해 있는 루나를 한 번 슬쩍 훑어보았을 뿐. 여전히 무표정한 낯빛으로, 소녀는 한 걸음을 내딛었다.
이를 가로막은 쪽은 시에네였다.
“그만.”
짤막하고, 나지막한 지시.
그러나 묘한 마력이 있는 목소리였다. 여태 멈추지 않던 소녀의 걸음이 한 번 멈칫했을 정도였으니까.
시에네는 이 틈을 타 설득을 이어갔다.
“셀린 하스터, 당신은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어요. 당신의 소꿉친구가 얼마나 당신을 찾아다녔는지 아나요? 이 자리에서 제안하죠. 지금이라도 그만 두고, 소꿉친구의 얼굴을 봐서라도 우리와 거래를 한다면……!”
물론 무의미한 시도였다.
언제나 앞머리에 가려져 있던 루나의 눈동자가 휘둥그레 뜨였다. 살갗이 따금거릴 만치 심상치 않은 열기를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저 너머.
소녀가 타고 넘어온 복도에서, 불길이 악마의 형상으로 괴성을 내지르려 하고 있다.
이를 깨우치자마자 루나는 제 몸을 날리며 외쳤다.
“피하세요, 언니!”
빛이, 온 세상을 잠식한다.
루나의 몸을 지키는 강력한 호신 유물의 힘이었다. 마치 해일과도 같은 기세로 일어난 마력은, 이대로 불꽃을 틀어막고 건물 전체를 휩쓸어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푹, 하고.
울려 퍼지는 소리가 아니었다면.
“어, 아, 으……?”
흐리멍텅한 의문성.
루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복부를 더듬거렸다. 그러자 낯선 감각이 느껴진다.
내장을 관통한 서늘한 날붙이의 냉기.
울컥, 하고 핏물이 차오른 직후.
소녀가 무자비하게 칼을 뽑자, 여인의 몸이 힘없이 땅 위로 엎어졌다.
애써 유지하고 있던 평정이 깨진 것은 그때였다.
“……루, 루나아아아아아아악!”
영혼이 찢겨 나가는 듯한 절규를 내지르며, 시에네는 허겁지겁 내달려 제 동생을 끌어안았다.
어떻게든 소녀와 조금이라도 떨어지기 위해 루나의 몸을 질질 끌며.
"아으, 아… 으으… 조, 조금만 기다려… 이, 이 언니가 사, 살려줄… 루, 루나?"
옷과 손이 더러워지는 것 따위는 신경조차 쓰이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단지 시에네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길로 루나의 맥박을 짚다가, 이내 이를 악물고 뒤를 돌아보았다.
황갈색 눈동자.
아무런 감정조차 섞이지 않은, 차갑고 삭막한 눈빛이 시에네를 내리쬐고 있었다.
시에네는 그 사실을 참을 수가 없었다.
“감히, 감히… 당신 따위가 우리 알펜하우저를 건드려?!”
어느덧 시에네의 안구는 실핏줄이 모조리 터져 나가 붉게 물든 지 오래였다. 턱 관절이 으스러져라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시에네는 증오 가득한 발악을 토해냈다.
“후, 회하게 될 거야…! 설마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우리 알펜하우저는, 결코 원한을 잊지 않……!”
“잊지 마.”
그때 처음으로.
시에네는 여인의 변해 버린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감정 따위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차가운 음색.
다만 착각일까.
그 나지막한 한 마디는, 언뜻 강렬하면서도 먹먹해 보여서.
시에네가 혼란을 채 벗어나기도 전이었다.
으득, 하는 소리가 환청처럼 고막을 스쳤고.
“내가 그랬듯이.”
핏물이 허공에 비산하며 심야의 아카데미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단 몇 분.
이상할 정도로 뒤늦게 소식을 접한 이들이 뛰어왔을 때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건물에 불이 번진 뒤였다.
마치 화형대의 장작처럼.
가을은 끝나고, 어느덧 계절은 겨울.
시련이 움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