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626)화 (626/649)

   소문 하나가 아카데미를 불길처럼 태우고 지나고 있었다.

   

   믿기 힘든 내용이었다. 그 유명한 ‘황금 요새’가 단 한 명의 습격자에 의해 잿더미로 주저앉다니.

   

   수성(守城)이 공성(攻城)보다 유리하다는 사실은 상식이나 다름없었다. 굳이 전략을 전공하지 않았더라도, 전쟁에 대한 얄팍한 식견이라도 존재한다면 누구나 이에 동의할 터였다.

   

   그러니 소식을 접한 이들로서는 코웃음을 칠 수밖에.

   

   재차 고민해 봐도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알펜하우저의 ‘황금 요새’가 어떤 곳인가.

   

   온갖 장치와 함정이 숨어 있는 마경(魔境)이었다. 보초를 서는 경비병 중 가장 하급이라 불리는 자마저 오러를 다룰 줄 알았고, 익스퍼트에 달하는 기사나 고위 마법사도 몇 명이나 기거하는 장소였다.

   

   이들이 공간의 이점을 점하고 한꺼번에 덮쳐온다면?

   

   하이 익스퍼트나 대마법사라 하더라도 생환을 장담할 수 없었다. 또 그만한 귀인들이 함부로 목숨을 건 도박을 벌일 까닭도 없으니, 알펜하우저의 ‘황금 요새’는 실로 무적이라 불릴 만했다.

   

   최소한 오늘 아침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새벽녘의 찬 공기를 이겨내지 못한 폐허가 폭삭 내려앉았다. 새하얀 재가 흩날리고, 잔불처럼 피어 오르는 검은 연기만이 지난밤의 참상을 증언하고 있었다.

   

   잿가루처럼 모여든 군중들은 하나같이 침묵을 택했다.

   

   당장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소문의 진위 여부를 의심하던 이들이었다. 하지만 이토록 명명백백한 증거 앞에서, 상식 따위가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단지 그들의 텅 빈 머릿속을 물들이는 낱말이 하나 있었을 뿐.

   

   알펜하우저의 몰락.

   

   딱히 논리적인 결론은 아니었다. 고작해야 거점 하나가 무너져 내렸을 뿐이 아닌가. 알펜하우저의 저력은 그보다 더욱 깊고 강할 터였다.

   

   그럼에도 참상을 목도한 이들은 무심코 그러한 미래를 떠올리고 말았다. 마치 하늘에서 계시라도 내려온 것 마냥.

   

   내려앉은 구경꾼의 침묵을 가르고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카데미의 고위 관계자들이었다. 속속들이 당도하기 시작하는 유명인사들의 이름이 군중 속에서 하나둘씩 흘러 나왔다.

   

   두개골 수집가 데렉.

   

   지상 최강의 마탄술사 아드리아나.

   

   낙성의 길잡이 델레모어.

   

   대륙에 위명이 쟁쟁한 강자들이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군중 속의 동요는 파도처럼 커져 갔다. 그러다가 문득, 어느 사내가 어슴푸레한 새벽녘을 가르고 나타났을 찰나.

   

   “이안 페르쿠스다……!”

   

   그 나지막한 탄식을 끝으로 정적이 일대를 찍어 눌렀다.

   

   흑발에 금안을 지닌 사내의 낯빛이 그만큼 침중했던 까닭일까.

   

   아카데미의 제복을 갖춰 입은 사내가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인파가 자연스레 찢겨졌다. 고독히 가라앉은 금빛 망막 위로 불타 버린 알펜하우저의 황금 요새가 반사되고, 이윽고 시선은 아래로.

   

   그곳에는 신음하는 알펜하우저의 기사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 아악……!”

   

   “사, 살려 줘… 모, 몸이… 몸이이이이익……!”

   

   단 한 명의 예외조차 없이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는 부상자들.

   

   이안은 한동안 말없이 그 끔찍한 풍경을 시야에 담고 있다가,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앞길을 가로막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고 현장을 통제하고 있던 위병들조차 마찬가지였다. 구경꾼들을 철두철미하게 통제하던 그들이었으나, 사내만큼은 제지하는 손길이 없었다.

   

   이를 두고 불만을 품는 이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비록 사내가 아카데미의 제복을 입고 있기는 하지만, 그 위상은 일개 아카데미 재학생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으니까.

   

   대륙의 신성, 인류의 적을 수없이 참한 영웅.

   

   음유시인이 이르기를 ‘새벽별’이라 이름 붙은 기사가 바로 사내였다.

   

   특별한 존재를 특별 취급하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었다. 별다른 언질 없이도 이곳의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따라서 통제선을 넘어 온 사내를 본 이들도 딱히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적갈빛 머리카락을 지닌 사나운 인상의 중년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이안.”

   

   “데렉 교수님.”

   

   이안의 다소 힘 빠진 목소리에, ‘데렉’이라 불리는 중년은 말없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눈빛에 어린 짙은 피로가 중년의 기분을 대변하고 있었다.

   

   두개골 수집가 데렉.

   

   이름 난 마수 사냥꾼으로, 온갖 사선을 넘어 온 노련한 검사였다. 그러한 데렉마저 눈앞의 참상을 보기 괴로워 하는 기색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만큼 끔찍한 풍경이었다.

   

   수십에 달하는 기사들이 울부짖는다. 고통에 몸부림 치는 육체는 그 자체로 보는 이로 하여금 심적 피로를 더하는 효능을 지니고 있었다.

   

   이 어찌나 지독한 광경인지.

   

   이안은 이내 그 참상으로부터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지 않아도 머리가 지끈거려 죽겠는데, 더욱 머리를 복잡하게 할 이유는 없었으므로.

   

   다만 그는 짤막한 의문을 입에 담았을 뿐이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짧지만 모든 용건이 담긴 물음이었다.

   

   사실, 이안은 이 사태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새벽녘부터 급히 달려 온 알펜하우저의 시종이 그를 찾기에 옷차림새만 갖추고 곧장 찾아왔을 뿐.

   

   데렉은 시원스러울 만큼 곧장 원하던 정보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지난밤 알펜하우저의 황금 요새가 습격당했네. 총원 칠십이 넘는 기사들이 도륙 당했어. 대부분은 반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지. 익스퍼트와 고위 마법사도 몇 명이나 머무르고 있었는데…….”

   

   “침입자의 숫자는요?”

   

   “단 한 명.”

   

   이안의 입에서 나지막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질끈 감기는 눈에서 그의 복잡한 심경이 엿보였다.

   

   못해도 하이 익스퍼트, 혹은 그 이상의 실력자일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만한 강자가 느닷없이 튀어 나올 턱은 없었다. 만일 가능성이 있다면, 수천 년 동안 꼬리를 감춰 온 막후의 세력뿐.

   

   흉수는 아마도 ‘암흑교단’이리라.

   

   이처럼 암묵적인 결론을 내렸을 때였다.

   

   “아아, 아아아아아아악! 끄아아악! 녹아, 녹는다… 내, 내 몸이… 으극, 끄르르르르륵……!”

   

   우드득, 하고.

   

   제 몸이 엉망진창으로 꺾이도록 폐부를 쥐어짜는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입에서 거품이 올라오고 있으나 절규를 내지르는 사내의 눈동자에는 어둑한 공포만이 내려앉았을 따름이었다.

   

   가슴을 비스듬히 휘감은 붕대의 테두리 너머로 녹아내린 살점이 얼핏 비치고 있었다. 그리고 화륵, 하고 피어 오르는 불티까지도.

   

   일순 걸음을 멈칫한 이안의 미간이 좁아졌다.

   

   “……화상?”

   

   “수십이나 되는 사제들이 신성력을 때려 박아도 해도 치유가 되지 않는다더군. 알다시피, 화상의 통증은 상상 이상이라… 저렇게 환각을 보는 환자도 있지.”

   

   데렉의 친절한 설명을 들은 이안의 눈동자가 더욱 깊이 가라앉았다.

   

   시선이 울부짖는 사내의 육신을 구석구석 훑는다. 발달한 근육, 흥분으로 인해 뿜어져 나온 마력의 밀도,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요소들.

   

   결론은 금세 내려졌다.

   

   최소한 익스퍼트.

   

   이안의 의문은 더욱더 깊어졌다.

   

   “저만한 검사가 말입니까?”

   

   “혹은 어떤 금지된 주술의 결과물일 수도 있겠지. 그도 아니라면,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패한 정신적 충격 때문일 수도 있고… 아직 확실히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네.”

   

   흐음, 하고 침음을 삼키며 이안은 다시금 걸음을 내딛었다.

   

   불길한 예감이 끊이지 않았다.

   

   심장을 무언가가 앙상한 손가락으로 톡, 톡 두드리는 듯한 이 감각.

   

   그동안 상대해 온 암흑교단의 일원들은 하나같이 난적이었다. 당연히 금번의 적 또한 만만하지는 않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초조한 기분이 든 적이 있었던가.

   

   어째서일까.

   

   아무리 고민해 봐도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일부러 눈을 돌리고 있을지도.

   

   이안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대로 멈춰서기라도 하면 무언가를 직면해야 할 것만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던 탓이었다.

   

   하지만 그 바람은 오래지 않아 좌절되고 말았다.

   

   다름 아닌, 이안 그 자신에 의해서.

   

   말없이 희생자들의 면면을 훑던 이안의 낯빛이 우뚝 굳었다. 그의 부릅떠진 눈동자가 구강을 대신해 불신을 한껏 외치고 있었다.

   

   이윽고 새어 나오는 질식할 듯한 외침.

   

   “루나 선배……!”

   

   이안은 헐레벌떡 내달려 쓰러진 여인의 곁으로 향했다. 부디 제 시야가 잘못되기를 바라면서.

   

   물론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다.

   

   도화지 같은 새하얀 피부, 파리한 안색, 순은을 녹여 짠 듯한 은빛 머리카락.

   

   누가 보아도 ‘루나 선배’였다. 식은땀을 흘리며 신음만을 토해내고 있었지만, 닫힌 눈꺼풀도 도저히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사실만은 분명했다.

   

   이안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사태였다.

   

   알펜하우저의 직계가 당했다고?

   

   사건이 벌어진 줄은 알았지만, 설마 이만한 규모의 문제가 발생했을지는 차마 예상하지 못했던 이안이 아닌가. 그도 그렇지 않은가.

   

   아무리 권력에 무지한 이안이라 하더라도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알펜하우저의 직계가 습격당했다는 사실이, 어떠한 파장을 불러일으킬지는.

   

   시에네와 루나는 제국의 대표로서 칠죄성과 관련된 유물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따라서 전날 밤의 습격은 비단 알펜하우저뿐만 아니라, 제국 황실을 향한 도전이기도 하다는 뜻이었다.

   

   문제는 의심의 눈길이 어디든 뻗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칠죄성의 유물이 지닌 힘은 가히 무한.

   

   이를 독점하고 싶은 세력이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각국의 심부까지 암흑교단의 끄나풀이 파고들었다는 정보는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나 다름없었다.

   

   혹시 성국이나 남부 열왕국 측에서 암흑교단과 연수해 알펜하우저를 습격했다면?

   

   이안의 등 뒤가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들었다. 그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사태였다.

   

   최소한 레토나 성녀, 황녀 같은 이들과 대화를 나눌 필요가 있었다. 그러한 일념으로 다급히 몸을 일으켰을 찰나.

   

   이안의 몸이 곧장 얼어붙었다. 그 창백한 낯빛에는 희미한 공포마저 어려 있을 정도였다.

   

   “드디어 도착했군요, 손도끼 바보바보 경… 기다리느라 지쳤어요.”

   

   탁, 하고.

   

   뭉툭한 지팡이의 끝이 땅을 두드린다. 이안의 기억 속에 남은 여인의 모습과는 영 딴판인 몰골이었다.

   

   시에네 알펜하우저.

   

   언제나 도도하고 여유 넘치던 여인의 낯빛에는 희미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단지 그 호선이 사납고 날카로워서, 본능적인 경계심을 불러일으킬 뿐.

   

   하지만 그조차도 시에네의 변화 중에서도 지극히 작은 일부에 불과했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만신창이가 된 몸뚱어리.

   

   평소와 같은 차림새였지만 그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숨길 수는 없었다. 오른팔은 어깻죽지 아래로부터 허전해 소매가 텅 비어 있었고, 왼쪽 다리도 질질 끌릴 뿐 제대로 된 움직임을 보이지 못했다.

   

   심지어 그 낯은 어떤가.

   

   오른쪽 눈을 중심으로 칭칭 감긴 붕대에서는 노란 진물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얼굴의 절반 남짓을 가린 새하얀 천과 나란히, 은빛의 동공이 불길처럼 타고 있었다.

   

   증오와 원독을 담아서.

   

   지팡이 없이는 운신조차 불가능한 상태였다. 아니, 오른팔과 왼쪽 다리가 하나씩 불구가 돼 지팡이라도 짚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악의가 물씬 느껴지는 배려라고.

   

   이안은 아연해진 낯빛으로 그리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여인은 비틀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납고, 뜨겁게.

   

   극에 달한 분노는 때때로 희열과 분간할 수 없으니까.

   

   “당신에게 전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어요.”

   

   그것이 시작.

   

   새로운 계절은, 병든 여인의 모습을 하고 찾아왔다.

   

   절망을 속삭이면서.

   

   가을이 끝났다.

   시에네 선배의 설명은 간략하고 명료했다.

   

   아카데미의 주요 인물들과 자리를 옮긴 후, 사정 청취를 들은 지 단 몇 분. 이 자리에 참석한 대부분의 인사들이 짙은 침음을 삼키며 눈을 감았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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