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632)화 (632/649)

   

   “피, 필요 없어요…….”

   

   덜덜 떨리는 음색과 몸, 갈 곳을 잃고 내 시선만을 허겁지겁 피해 다니는 눈동자가 시야에 새겨졌다.

   

   마치 접촉 자체를 두려워하는 어린 야생동물처럼.

   

   공포가 척수 깊숙이 파고든 인간만이 보일 수 있는 반응이었다.

   

   상상도 못했던 모습에 나는 잠시 침묵을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설마, 그토록 당당하던 여인이 이처럼 나약한 몰골을 보일 줄은 몰랐으니까.

   

   또 한편으로는 불길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셀린의 손속이 이처럼 잔혹했던가? 아무리 원한이 깊더라도, 내가 아는 셀린이라면 절대…….

   

   그 즈음에서 나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처량할 만큼 악몽에 젖은 여인에 대한 마지막 예의였다.

   

   사실 시에네 선배가 어떤 꼴을 겪던 내 알 바는 아니었다. 다만, 내 소꿉친구가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 내 발목을 붙잡고 있을 뿐.

   

   내 목에서는 일부러 고저 없는 음색이 토해졌다.

   

   “그러시든지요.”

   

   무관심한 태도로 한 걸음.

   

   그러자 시에네 선배는 잠시 눈치를 살피더니, 이내 종종걸음을 치며 내 뒤를 따랐다. 그래봐야 다리가 하나밖에 없어 지팡이가 나머지 다리 대신 총총거려야 했지만 말이다.

   

   산책의 끝은 정해져 있었다.

   

   건물의 가장 깊은 곳, 그 자리에 잠든 공주가 누워 있었으니까.

   

   막 칠한 담벼락처럼 새하얀 피부, 하얗다 못해 창백하기까지 한 머리카락. 더불어 살포시 감긴 눈꺼풀은 마치 이 여인이 연극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스스로를 구원해 줄 왕자를 기다리는 연극.

   

   차라리 입맞춤으로 깨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비극의 주인공은 루나 알펜하우저, 다름 아닌 시에네 선배의 쌍둥이 동생이었다.

   

   여동생을 앞둔 시에네 선배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 또한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신음 한 마디 없는 루나 선배가 이상해 슬쩍 화두를 꺼냈다.

   

   “……알펜하우저가 주도했습니까?”

   

   흐릿한 은빛 동공이 슬쩍 나를 향한다. 질문의 의도를 읽어내겠다는 듯이.

   

   괴로운 시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물어야만 했다.

   

   내게는 시간이 얼마 없었으니까.

   

   “하스터 가문의 몰락 말입니다. 사실, 그 탓에 셀린은…….”

   

   “우리가 아니에요.”

   

   지나치게 평탄한 진술이었다.

   

   그래서 난 일순 그 증언의 무게를 눈치 채지 못하고, 살짝 미간을 찌푸려야만 했다. 도대체 이 여자가 무슨 소리를 하나 싶어서.

   

   그럼에도 시에네는 동요 없이 증언을 이어갔다.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알펜하우저가 아닌 특정 파벌이 주도했다고 봐야겠죠. 알잖아요? 제국의 5대 귀족 가문이 일찌감치 유력 황위 계승자의 뒤에 줄을 서야 한다는 걸…….”

   

   그 말대로였다.

   

   제국의 5대 가문의 후계자는 실상 차기 황제에 의해 정해진다.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는, 델핀 선배처럼 혈통 문제에서 압도적인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 인물뿐이었다.

   

   그러나 고위 귀족의 사회는 무한 경쟁의 사회.

   

   당연히 그토록 자손이 적은 경우는 희귀할 수밖에 없었다. 후계 구도 사이에서 다툼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아마도 알펜하우저도 마찬가지이리라.

   

   시에네 선배를 비롯해, 수많은 적통들이 경쟁에 나서고 있을 터였다. 각자의 주군을 모시고, 각자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나는 이미 시에네 선배의 주군을 알고 있었다.

   

   “선배가 아이리스 황녀의 뒤에 섰듯이?”

   

   “흐, 그렇죠. 그렇지만 한참 전부터 황실에는 후계 자리를 두고 경쟁이 있었어요.”

   

   시에네 선배는 되다 만 웃음을 터트리며 그리 말했다.

   

   “당시 저는 이를 반대하고 말고 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어요. 그렇잖아요? 당신보다 고작 3년 일찍 태어났을 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하스터 가문의 멸망을 독촉한 세력과 연이 있는 건 사실이죠.”

   

   “그게 누굽니까?”

   

   “제 주군.”

   

   즉, 제2황녀 아이리스 황녀 측이 이를 주도했다는 뜻이었다.

   

   그 사실을 담담히 전하던 시에네 선배의 입에서 난데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제 꼴이 우습기라도 하다는 투였다.

   

   “큭큭, 따라서 그 죗값이야 심복으로서 감수해야 하지 않겠어요? 다만, 다만… 저도 끝내 인간인지라 이러한 생각은 들어요.”

   

   처음으로 듣는 진심이었다.

   

   정신적으로 한계에 몰린 탓일까. 혹은, 잠깐 그녀를 붙들었던 손의 온기가 못내 그리웠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만 시에네 선배는 슬쩍 내 시선을 피하며 고백했다.

   

   “이것이 나의 죄인가요?”

   

   마땅히 그렇다.

   

   당신은 가문의 축복 아래서 태어났고, 가문의 이름으로 승승장구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가문의 오명조차도 당연히 당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 아니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제 얼굴의 절반을 가린 붕대가 촉촉이 젖어 드는 꼴을 보고 어찌 그리할 수 있단 말인가.

   

   한참을 망설이던 나는 이내 본론을 다시 꺼냈다.

   

   “미끼가 되어 주십시오.”

   

   여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입술을 한 차례 짓씹었을 뿐.

   

   “사실, 저에게는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설득이라도 한 번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러다 실패하면?”

   

   “실패하지 않습니다.”

   

   강한 확신을 담아, 나는 그리 단언했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언젠가는 성공시킬 겁니다. 그게 바로 저니까요.”

   

   “솔직히 말할까요? 저는, 원수를 갚고 싶은 거예요. 누구를 구원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러든 말든 협력해 주셔야겠습니다.”

   

   강경한 어조에 여인은 하,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잃어 버린 팔과 다리, 눈과 얼굴.

   

   이를 생각하면 내 제안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따라서 시에네 선배가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필연이었다.

   

   “손도끼 경, 아직도 이해를 못하겠나요? 나는 당신 소꿉친구 탓에 평생 얼굴도 보이지 못하고 살아갈 운명……!”

   

   “화상은 저주의 일종입니다. 신성력으로 치유가 불가능한 상처는 그게 유일하니까.”

   

   상대의 말문이 막힌다. 나는 이 틈을 노려 말을 이어갔다.

   

   “절 도와주시면 모든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완치가 되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당신의 화상, 당신의 흉터…….”

   

   “그게 당신의 죄는 아닐 텐데요?”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시에네 선배는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단지 몸을 부르르 떨면서, 입술을 열고 닫기를 반복하다가.

   

   마지막에는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한 마디를 건넸을 뿐이었다.

   

   “……미친 새끼.”

   

   은근한 열기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여인은 말했다.

   

   “좋아요, 멋대로 해봐요. 어차피 병신이 된 몸… 당신 뜻대로 장난감이 되어 드리죠.”

   

   그리고 이틀 후.

   

   어김없이 셀린은 습격을 감행했다.

   

   단지, 알펜하우저 가문이 아니었을 뿐.

   

   “아이리스 황녀께서 위독하십니다!”

   

   그렇다.

   

   내 소꿉친구가 겨누고 있는 곳은 알펜하우저 가문이 아니었다. 황금 요새의 습격은 그저 복수의 서장에 불과했을 뿐.

   

   셀린은 제국 황실을 불태우려 하고 있었다.

   

   그것도 진심으로.

   마차를 둘러싼 행렬이 서서히 걸음을 옮긴다.

   

   대륙의 심장이라 불리는 중부, 그중에서도 아카데미는 온갖 문화의 재물이 모이는 장소였다. 수만에 이르는 인구가 상시 거주 중인 교육의 장은 이미 하나의 도시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따라서 아카데미로 이르는 이 길목에 행렬이 등장했다는 사실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다.

   

   특별한 것은 오직 하나, 그 행렬이 호위하고 있는 마차를 장식하고 있는 문양 뿐.

   

   금빛의 용.

   

   온 대륙의 권세가와 부호들이 모이는 아카데미라지만, ‘용’을 가문의 상징으로 삼을 수 있는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단 하나의 예외를 제외하고.

   

   제국 황실.

   

   명실상부 대륙 최고의 혈족 중 하나가 이 마차 안에 머무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당연히 그 주위를 둘러싼 호송 행렬의 마음가짐이 범상할 턱은 없었다.

   

   절제된 자세로 사주를 경계하는 기사들의 눈빛에서는 일말의 방심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실력자들이 내뿜는 기세는 그 자체로 무형의 폭력과 같아서, 행렬의 인근에는 참새 한 마리조차 내려앉지 않았다.

   

   찢어지기 직전의 종이처럼 팽팽한 긴장감.

   

   그 숨 막히는 공기의 유일한 예외는, 마차의 내부뿐이었다.

   

   은발의 여인이 나른한 하품을 내쉰다. 턱을 괸 채, 들고 있는 서류를 무료히 응시하는 그 시선에서 짙은 꿀과 같은 권태가 느껴졌다.

   

   정작 그 동공의 색은 시리도록 차가운 푸른색이었지만.

   

   “’하스터 가문’이라…….”

   

   새벽녘의 이슬처럼 읊조림이 또르륵 흘러내린다. 여인의 동공의 슬쩍 측면을 향하고, 이내 파묻어 두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망막 위로 맺히기 시작했다.

   

   그래, 그랬지.

   

   제2황녀 아이리스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렸다. 일평생을 병상에 누워 있던 그녀는 어느 날 거짓말처럼 건강을 되찾았다. 그렇게 국정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본래부터 총명했던 아이리스의 곁에는 곧 유능한 참모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다 접한 소식이 바로 ‘칠죄성의 유물’이었다.

   

   ‘주제 넘는 보물을 탐하는 자가 있다더군요.’

   

   창백한 안색을 가진 사내였다. 백발에 가까운 은빛의 머리카락, 흰자위와 그 경계를 분간하기 힘든 은빛의 눈동자까지.

   

   아이리스는 그날 처음으로 이해했다.

   

   어째서 알펜하우저 가문이 ‘눈 뜬 장님’이라 불리는지.

   

   도저히 시선의 방향을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란 흐릿한 미소밖에 없어서, 아이리스는 일순 유령을 앞에 두었나 싶은 착각이 일었을 정도였다.

   

   ‘황제 폐하께서는 이를 어찌 해야 할지 5대 귀족 가문에 여쭈셨습니다. 당연히 그중에는 저희 알펜하우저도 포함되어 있지요.’

   

   아이리스는 그때 무어라 대답했더라.

   

   찻잔을 움켜쥔 사내의 손가락이 소름이 돋도록 가늘고 길었던 기억이 났다.

   

   ‘알펜하우저의 뜻은 어떻죠?’

   

   ‘그야 전하와 같지 않겠습니까. 어찌 지팡이가 제 앞길을 결정하겠습니까?’

   

   ‘그래도 듣고 싶군요.’

   

   돌이켜 보면 우스운 장면이었다.

   

   고작해야 10대 소녀가, 알펜하우저의 대리인을 상대로 시치미를 뗀 채 대화를 나눈다. 서로의 속내를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당시 아이리스는 아군이 절실했다. 더욱이 알펜하우저는 그녀의 병을 치료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가문.

   

   아직 정치적 기반이 일천한 그녀 뜻대로 휘두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당연히 그 의견을 새겨듣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둘 다 이를 모를 만큼 어수룩한 이들은 아니었다. 또한 상대가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이따위 하찮은 연극을 해야 한다니.

   

   이것이 정치의 가장 추악한 면이리라.

   

   물론 티를 내지는 않았다. 어차피 잡생각을 계속 이어갈 여유도 없었고.

   

   알펜하우저의 대리인이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