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633)화 (633/649)

   

   ‘자애와 합리,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십니까?’

   

   ‘합리.’

   

   ‘단 한 줌의 자애조차 말입니까?’

   

   의뭉스러운 어조였다.

   

   흥미 같기도 하고, 조소 같기도 하고, 혹은 단지 의례에 불과한 웃음이 사내의 입꼬리에 걸린다. 하지만 아이리스의 답변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단언컨대 합리. 그 외에는 없어요.’

   

   그것만이 유일한 해답이다.

   

   알펜하우저의 대리인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대답했다. 이름이 아마도 ‘달턴’, 이었던가.

   

   ‘역시, 전하께서는 알펜하우저와 어울리십니다.’

   

   알펜하우저는 주군의 명을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그 신념에 보답했다.

   

   하스터 가문에 닥친 비극은 알펜하우저를 중심으로 한 고위 귀족 가문의 담합으로 처리되었다. 이후에 구제를 해주는 등의 후속조치도 논의되었으나, 이는 자연스럽지 않다는 사유로 각하되었다.

   

   알펜하우저는 황금을 노리고 남의 금광을 강탈한 가문이어야 했으니까. 물론 또 다른 5대 귀족 가문이 개입하면 가능은 하겠으나, 그렇게 되면 판이 너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제국 5대 귀족 가문 간의 정면충돌?

   

   세인의 이목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눈과 귀가 많아지면 자연스레 비밀을 지키기 어려워지는 법.

   

   여태껏 아이리스는 그 선택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해 왔다.

   

   며칠 전, 심복에게 닥친 비보를 접하기 전까지는.

   

   “설마 그 가문의 딸이 그렇게 될 줄이야.”

   

   아예 멸문을 시켜야 했나.

   

   모질도록 차가운 후회가 일순 아이리스의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귀족 가문 하나가 멸문한다는 건, 부자연스러울 뿐더러 또 다시 눈길을 끌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을 터.

   

   그렇다면 내가 틀렸다는 건가?

   

   이러한 자문은 한순간에 그쳤다. 이내 아이리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스스로 떠올린 의심을 뇌리에서 지워 버렸다.

   

   나는, 틀리지 않았어.

   

   심복이 다치기는 했으나 그 뒷수습을 위해 아이리스가 몸소 행차 중이었다. 계획이 틀어졌어도 아직까지는 대처가 가능한 범위에 속했다.

   

   적어도 상상도 못할 변수가 등장하지 않는다면.

   

   덜컥, 하고 마차가 갑작스레 정지한 것은 그때였다.

   

   “저, 전하. 송구하지만 낯선 여인이 행렬을 막고 있어서… 잠시만 대기해 주십시오.”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들려 온 상황 설명이었다.

   

   ‘낯선 여인’이라.

   

   뚝, 하고 실이 끊기는 듯한 소리가 들린 듯한 감각.

   

   아이리스는 본능에 따라 마차의 문을 벌컥 열고 나섰다. 그러자 수행 기사 중 하나가 당황한 표정으로 따라붙었다.

   

   “전하, 외부는 위험하니까 부디 마차 내부에…….”

   

   탁, 하고 여인의 발이 땅을 밟는다.

   

   그 청색의 시선이 멀리 던져진다. 일직선의 선 위로 하나의 인물화가 흐릿하게 떠올랐다.

   

   칠흑.

   

   검은 후드를 푹 눌러쓴 여인의 낯은 그림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고개 숙인 채 말없이 선 여인의 몸뚱어리는 미동조차 하지 않아서, 가만히 보다 보면 조각상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기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무참히 깨어졌다.

   

   여인의 고개가 서서히 들리기 시작했으니까.

   

   그림자가 가리고 있던 눈동자가 도깨비불처럼 떠오른다. 그 색은, 황갈색.

   

   사막의 모래처럼 메마른 색조였다.

   

   여인의 손이 측면으로 뻗어진다. 타오르는 불길과 함께 나타나는 태도.

   

   이를 움켜쥔 여인이  드디어 걸음을 내딛었을 찰나.

   

   “당장 죽여!”

   

   비명처럼 내질러진 명령에, 빛줄기가 쏘아진다.

   

   중무장한 기사들은 은빛의 포탄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의지를 가지고, 그물처럼 사냥감을 옥죄는 포탄.

   

   곧장 후방의 마법사들이 웅얼거리며 영창을 시작한다. 조금의 지체도 없는 기민한 대응이었다.

   

   그 믿음직한 모습을 보며, 아이리스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일부러 찾아오기까지 했다고?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그 누구도 제국 황실의 핏줄을 건들지 않는 까닭이 있는 법이었는데.

   

   도리어 아이리스는 이 만남이 천신의 은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모든 비틀림을 바로 잡을, 절호의 기회!

   

   셀린 하스터는 아무 말도 없이 두 손으로 태도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소실.

   

   흩어지듯 땅을 박차고 뛰쳐 나간 소녀의 신형이 은빛의 포탄과 조우했다. 하나같이 180cm를 넘는 거구들에 비해, 한참이나 작은 셀린의 몸집은 너무나 왜소해 보였다.

   

   하지만 충돌의 결과는 정반대.

   

   캉, 하고 불꽃이 튀기며 앞서 달려들던 기사의 검이 땅에 처박혔다. 그리고 이를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측면에서 폭사되는 찌르기.

   

   합공을 하고 있음에도 검로가 결코 뒤섞이지 않는다. 철저히 계산된 시점과 궤도는 능숙한 사냥꾼처럼 소녀를 몰아가고 있었다.

   

   유일한 오판이라고 한다면, 그래.

   

   소녀는 결코 사냥감 따위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컥!”

   

   가속하던 셀린의 몸이 그대로 미끄러지듯 젖혀졌다. 섬뜩할 만치 빠른 검광이 그 위를 아슬아슬 스쳐 지나가고, 첫 충돌을 일으킨 기사의 입에서 단말마가 터져 나왔다.

   

   무릎을 굽히고, 몸을 뉘이듯이 땅바닥을 쓸던 소녀의 태도가 그의 턱밑을 그어 버렸던 탓이었다.

   

   우선 하나.

   

   소녀의 무심한 눈동자가 곧바로 다음 사냥감을 찾아 움직였다.

   

   사냥은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팍, 하고 핏물이 터져 나오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한 기사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몸을 일으키는 동시에, 셀린이 그 중무장한 육체를 던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단 한 손만을 이용해서.

   

   검을 내지르던 기사의 혼란은 필연이었다. 옛 동료의 시체에 시야가 가려진 사이, 등 뒤에서 달려들던 기사들이 연달아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볼 틈 따위는 없었다. 온전한 외통수, 처럼 보였는데.

   

   푹!

   

   달려들던 기사의 몸이 멈칫하며, 울컥 넘쳐 흐른 핏물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내렸다. 소녀는 아직도 등을 돌리고 있었건만.

   

   비정상으로 긴 칼날이 여인의 겨드랑이 사이를 비집고 솟아 있었다. 그 서늘한 빛의 선은, 기사의 심장으로.

   

    태도의 사정거리를 한계까지 이용한 전략이었다.

   

   그럼에도 남은 기사들은 멈추지 않는다. 셀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내지르는 검격에 맞추어, 뒤돌아 선 소녀는 기사의 품을 파고들었다. 이윽고 역수로 태도를 쥐고 있던 손이 다시 정(正)자세로 이행하고.

   

   카각, 하고 칼날을 비튼 여인의 손이 죽음의 섬광을 흩뿌렸다.

   

   일섬(一閃).

   

   태도를 타고 흘러내린 지옥의 업화가 단숨에 주위를 달군다.

   

   

   “끄아아아아악! 저, 저항 갑옷이… 어째서어어어억…….!”

   

   이를 무시하고 달려들던 기사 하나가 비명을 내지르며 엎어졌다. 온몸을 불태우는 불길은, 각종 마법으로 보호되는 갑옷조차 용서 없이 물어뜯고 있었다.

   

   화염의 효용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화륵, 하고 터져 나온 불꽃이 기사들의 시야를 제한했다.

   

   그 너머에서 날아든 빛의 궤적이 기사 하나의 생명을 또 다시 앗아간다. 근위 기사들은 의외의 저항에 동요를 숨기지 못하면서도, 불꽃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화염의 벽을 찢고 소녀가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셀린의 느닷없는 질주에, 그 다음 희생자는 미처 대응하지 못했다. 셀린이 그러지 않아도 자그마한 몸뚱어리를 한껏 낮춘 자세로 쏘아졌던 탓이었다.

   

   수행 기사가 아이리스에게 대피를 권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전하, 도망치십시오!”

   

   바로 그때.

   

   후방에서 주문을 영창하던 마법사들의 손이 번쩍 들렸다. 기사들이 목숨을 바쳐 확보한 시간 동안, 기어코 마법을 완성했다는 뜻이었다.

   

   어떤 괴물이라 하더라도 궁정마법사들의 합격을 견딜 수는 없다.

   

   여태껏 통용되는 상식은 오늘도 여지없이 그 위력을 발휘하리라.

   

   딱, 하고.

   

   손가락을 퉁기는 소리가 울려 퍼지기 전까지는, 아이리스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아아아아아악!”

   

   화르륵, 하고 바닥에서 치솟은 불길이 궁정 마법사 하나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아무리 비명을 내질러도, 몸을 비틀어도 불꽃은 꺼지지 않고 도리어 탐욕스레 그 몸집을 불려 나갔다.

   

   주문이 취소된 것은 물론이었다. 단지,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어서.

   

   아이리스와 마법사의 시선이 소리의 근원을 향했다. 다시금 딱, 하고 손가락을 퉁기는 소리.

   

   “끄윽?! 어, 어떻… 아아아아아악!”

   

   이글거리는 불꽃, 일렁이는 풍광 속에서 소녀가 서서히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어느덧 앞장 서 달려갔던 기사들은 전부 반응이 없었다. 전투의 여파로 후드가 벗겨진 여인은, 탐스러운 흑빛 머리카락을 궤적처럼 흩날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가 딱, 하고 손가락을 퉁길 때마다.

   

   “끄아, 아아… 아아아아아악!”

   

   궁정 마법사의 비명이 겹친다.

   

   아무런 전조조차 없고, 모든 방어 마법을 무시하고 솟구치는 불꽃.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주술이었다. 그제야 아이리스의 이마에 자그마한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불타는 대지를 뒤로 한 셀린이 우뚝 멈춰 섰다. 마지막까지 아이리스의 곁을 지키던 수행 기사들의 실력을 알아보기라도 했다는 듯이.

   

   단 두 명이지만, 이들의 실력은 가히 최고라 불려도 어색함이 없었다.

   

   하이 익스퍼트.

   

   두 사람 중 하나는 대륙의 단 스물 남짓한 강자 중 하나였으며, 남은 하나 또한 그에 살짝 못 미치는 실력자였으니까.

   

   승패는 명확했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상대는 하나고, 이쪽은 둘이었다. 심상을 제대로 다룰 줄 아는 하이 익스퍼트는 여타의 기사들과 비교되지 않는 전력이라고 봐야 했다.

   

   그래, 틀림없이.

   

   놀란 가슴을 달래던 아이리스는 그제야 냉정을 되찾았다. 아니, 혹은 되찾은 척을 하고 있을 뿐일지도 몰랐다.

   

   달싹이는 입술이 살짝 떨리고 있었으니까.

   

   “당신…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나요?”

   

   표독스러운 언어였다.

   

   명백한 적의와 살의를 담은 음색과, 시선. 반면 되돌아 온 대답은 재처럼 퍼석거리는 감마저 있었다.

   

   “너는?”

   

   ‘너’라니.

   

   살면서 몇 번 들어보지 못한 호칭에 아이리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일말의 존경도, 존중도 느껴지지 않는 호칭은 고귀한 황녀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불평을 내뱉을 틈 따위는 없었다.

   

   “너는, 네가 저지른 짓이 무엇인지 전부 이해하고 있나?”

   

   그렇게 묻는 황갈빛 눈동자는 텅 비어 있었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다 못해, 다소 지친 듯 느껴지는 시선에도 아이리스는 일순 대답을 망설였다.

   

   어째서일까.

   

   저 무감정한 목소리에서, 묘한 위기감이 느껴졌다. 시각이나 청각을 넘어선 직감이 울리는 경보였다.

   

   이윽고 태도가 바로 선다.

   

   “지금부터 알게 해줄게.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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