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욱, 하고 두 손이 손잡이를 쥐자 셀린의 자세가 살짝 낮아졌다. 당장이라도 도약할 듯 구부러진 다리와, 무소의 뿔처럼 정면을 향하는 검극.
“네가 치러야 할 대가까지도.”
더 이상의 대화는 무용했다.
쾅, 하고 터져 나온 폭음은 도리어 늦은 편이었다. 소리조차 쫓아가지 못하는 초속의 세계, 충돌은 이미 도래한 사건으로 현실에 도달해 있었다.
셀린의 손은 어느덧 어깨 위에 위치해 있었다. 그 과정에서 검극이 정면을 향하게 되었지만, 사실 이는 부차적인 효과에 불과했다.
채찍처럼 검이 휘감긴다.
회전력을 최대한으로 높인 일격은 검신의 길이에 비례하는 위력을 더해주었다. 폭음이 탄생한 순간은 그 직후였다.
검과 검과 마주치고, 첫 충돌을 일으킨 기사가 몸을 뒤로 젖혔다.
셀린의 불꽃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그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곧장 그 탐욕스러운 혀를 드러내는 염화(炎火).
하지만 상대는 검으로 일가를 이룬 실력자였다.
보통이라면 몸을 젖힌 순간부터 다시 일어나는 데 주력하겠지만, 상식 따위는 전투에서 무용한 것.
벼락 같이 섬광이 쏘아진다.
더불어 또 하나의 검이 하늘에서 정수리를 노리고 내리찍어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셀린의 남은 수는 오직 하나, 후퇴밖에 없으리라.
그렇게 되면 하나둘씩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거리, 시점, 종래에는 제 목숨까지도.
이것이 협공의 두려움이었다. 혼자서 대응하기 위해서는, 상대의 몇 배나 되는 전력을 내지 않으면 안 됐다.
그것이 상식.
하지만, 그래.
상식 따위는 전투에서 무용하다.
셀린은 살짝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것이 모든 회피 동작의 끝이었다.
푹!
“무, 무슨… 커헉!”
몸을 젖혔던 기사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상식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왜냐하면, 셀린의 몸에는 두 개의 검이 모두 꽂혀 있었으니까.
고개를 기울인 덕에 정수리는 지킬 수 있었지만, 목덜미를 깊이 파고든 칼날은 거의 쇄골 어림까지 파고들고 있었다. 더욱이 몸을 젖힌 기사의 검은 소녀의 명치를 관통하고 있기까지.
즉사.
누구라도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셀린은 여전히 담담한 눈빛으로 몸을 젖힌 기사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의 가슴에는 셀린의 태도가 반쯤 파고든 뒤였다.
불신을 가득 담은 눈이 억울함을 호소했다. 부상의 정도로 친다면, 분명 소녀 쪽이 더욱 극심할 텐데.
목숨을 잃은 쪽은 도리어 기사뿐이었다.
원한을 담은 기사의 손아귀가 태도를 움켜쥐었다. 목숨을 잃었더라도 도움은 되겠다는 듯이.
그 각오를 본 마지막 기사가 이를 악물었다.
“제이드!”
그러나 너무 늦었다.
태도를 붙들린 김에, 셀린은 마치 둔기처럼 기사의 시체를 휘둘렀다. 그 뒤는 언제나 마찬가지.
쾅!
불꽃이 터져 나오고,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한 기사가 땅 위로 널브러졌다. 셀린은 메마른 표정으로 제 몸에 꽂혀 있던 검을 빼냈다.
탁, 하고 주인 잃은 검이 애처롭게 땅 위를 구른다.
셀린의 몸에서는 피가 흐르지 않았다. 대신 화륵, 화륵, 하고 불티가 흩날리며 서서히 상처를 아물게 했을 뿐.
황갈색 눈동자가 최후의 희생양을 향했다. 아이리스는 떨리는 목소리나마 허세 넘치는 평가를 남겼다.
“……인간이 아니군요.”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암흑교단에 납치된 정황이 확실한 이상, 그 육체가 개조되었으리라고는 쉽사리 짐작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만한 불사성이라니.
치명적인 급소를 두 곳이나 찔렸다. 그럼에도 셀린은 비명을 내지르기는커녕 피조차 흘리지 않았다.
누가 이 괴물을 ‘인간’이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아이리스의 명석한 두뇌가 단숨에 결론을 도출해냈다.
“아마도 ‘칠죄성’… 하지만, 어째서 하잘 것 없는 당신 따위가?”
“그렇게 평생 내려다보고 있었구나.”
또 다시, 고저 따위 없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이리스는 무심코 살짝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난생 처음 겪어보는 치욕이었다.
그러든 말든 셀린은 텅 빈 눈동자로 아이리스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지만.
“아무런 죄책감도 없었겠지? 개미를 밟아 죽이고 마음 아파하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우리 가문을 지우고, 지옥에 빠트리고 나서도 쭉.”
“그래야만 하는 사정이 있었으니끼.”
“알아.”
팍, 팍.
셀린이 다시금 걸음을 내딛자, 땅바닥에 질질 끌리는 태도의 끝에서 불꽃이 터져 나오다 흩어졌다. 아이리스는 굳은 낯빛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다.
“내게도 있거든… 널 죽여야만 하는 사정.”
복수.
가장 완벽한 대의명분, 이 이상 명료하고 정당한 사정이 어디 있단 말인가.
죽음을 앞둔 아이리스의 손이 제 품속을 향했다. 그곳에는 황궁을 좌표로 삼은 전이 마법의 스크롤이 위치하고 있었다. 아무리 위험해도, 단 한 번은 목숨을 구명할 수 있는 기회.
마지막까지 전투를 지켜보며 필요한 정보를 수집했다. 이를 제대로 전할 수만 있다면, ‘셀린 하스터’의 토벌을 위해 마스터의 차출이 이루어질 수도 있었다.
아니, 요청할 필요도 없나.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리스 황녀가 스크롤을 발동시키려 할 찰나.
“……전하, 안 됩니다!”
발악처럼, 어느 사내의 외침이 터져 나오고 이내 검과 검이 맞부딪힌다.
캉!
불꽃에 휩싸여 있던 마지막 수행 기사였다. 하이 익스퍼트에 이른 실력자답게, 그의 몸뚱어리에는 화상이 몇 군데 생겼을 뿐 치명상을 입은 듯 보이지는 않았다.
아이리스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는 수밖에 없었다.
“당장 도망치십시오! 이곳은 제가 맡겠습니다! 스크롤은 결코, 이 자의 근처에서 찢어서는… 최대한 멀리 도망치셔야 합니다!”
의문을 품을 새는 없었다.
쾅, 쾅, 쾅!
시야의 한계를 넘어서는 공방에 아이리스는 재빨리 도주하기 시작했다.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직감이 수행 기사의 충의를 믿으라 하고 있었으므로.
어느덧 격돌 끝에 거리를 벌린 셀린의 시선이 잠자코 기사를 향했다. 그러자 최후의 기사는,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 불꽃, ‘심상’을 불태우는군… 그래서 결코 꺼지지 않았던 거야.”
물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셀린은 단지 검 손잡이를 쥔 손을 쥐었다 펴며, 제 몸 상태를 점검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애송아, 넌 아직 몰라. ‘하이 익스퍼트’는 너처럼 하루 아침에 닿을 수 없는 경지거든… 최소한 너한테 단숨에 당할 정도는 아니다.”
그렇게 기사의 검극이 다시 셀린을 겨눈 순간.
수백 개의 검이 모습을 드러낸다. 허공에 도열한 검들은 얼핏 보기에 환상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셀린은 알았다.
심상으로 현실을 뒤틀 수 있는 하이 익스퍼트를 상대할 때, 허와 실은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저들은 허를 실로 만들어 버리는 존재들이었으니까.
마지막 남은 기사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나는, 루페미온 가문의 테온이다. 넌 누구지?”
셀린은 다시금 자세를 낮추었다. 그러기를 잠깐.
침묵을 지키던 소녀의 입이 마침내 달싹였다.
“……‘분노’.”
화르륵, 하고 불꽃이 검신을 타고 타오른다.
그 규모는 가히 압도적.
여태까지는 진심이 아니었다는 듯, 소녀의 불길이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타닥거리며 타는 소리로 고막이 따가워질 만큼.
“온 세상을 불태울.”
그 짤막한 덧붙임 직후.
수백 개의 검과 불꽃의 파도가 춤을 추었다.
*
아이리스는 시야가 흐릿했다.
어린 시절 병마로부터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여인이었다. 체질이 허약할 수밖에 없었고, 이처럼 필사적으로 달린 적은 맹세컨대 단 한 번도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만 멈춰 서고 싶었다.
그러나 수행기사 테온은 작별인사 대신 말하지 않았던가.
‘최대한 멀리 도망치셔야 합니다!’
더욱이 등 뒤에서 폭음이 터져 나올 때마다 온 산야가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어째서 아카데미에서 아무런 지원군을 보내지 않는지 의문일 정도로.
“꺄윽?!”
비틀비틀 내달리던 여인의 몸은 곧 한계를 맞이했다.
치마를 입은 채 달리고 있던 아이리스는, 끝내 제 옷자락을 밟고 엎어지고 말았다. 살갗을 찌르는 알싸한 통증이 실로 낯설게 느껴졌다.
설마 이딴 꼴을 당할 줄이야.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되돌아 가면, 최대한의 전력을 갖추어 사냥에 나서리라.
그렇게 헐떡이며 숨을 고르고 있을 때였다.
사박.
본능이라고 해야 할까.
그 자그마한 소음이, 온몸의 솜털을 곤두세울 만큼 선명히 다가왔다. 아이리스의 불신을 담은 시선이 서서히 등 뒤를 향했다.
황갈빛 눈동자.
검은 머리카락, 검은 옷자락, 열기와 탄내.
이 자는 불꽃이구나.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품은 감상이었다. 아이리스는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면서도, 의문을 흘리고 말았다.
“어, 어떻게……?”
하이 익스퍼트를, 이리도 단숨에.
고작해야 10분 남짓 지났을까. 이처럼 짧은 시간 내에 하이 익스퍼트를 제압 가능한 존재는 마스터를 제외하면 전무했다.
하지만 저 하스터 가문의 계집은 해냈다.
잊고 지냈던 과거가 부정할 수 없는 과오가 되어 찾아온 느낌이었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이 마치 필연이라도 되는 것만 같아서.
아이리스는 몸을 부르르 떨고 말았다.
“남길 말은?”
셀린의 담담한 물음에, 아이리스는 울컥한 심정을 숨기지 않고 외쳤다.
“웃기지 마… 제국의 황녀가 아무런 보험도 없이 외부에 나서는 줄 아나요?! 제 몸은 무려 48번이나 중첩된 결계로 보호…….!”
화르륵.
불꽃이 타오르며, 황녀의 가녀린 육신을 보호하고 있던 결계를 파먹어 가기 시작했다. 불길을 따라 뚝뚝 녹아내리는 술식을 보며 아이리스는 그만 울상을 짓고 말았다.
몸을 일으키려다 엉덩방아를 찧고.
우는 듯한 얼굴로 최후의 수단은 스크롤을 꺼내자, 메마른 당부가 이어졌다.
“그거, 찢지 않는 편이 좋을 텐데.”
그렇게 말하는 셀린의 표정에는 아무런 파문도 일지 않았다. 아이리스는 그 조언의 진의를 알 수 없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