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으, 흐으. 숨을 몰아쉬며 스크롤을 쥔 손에서 서서히 힘을 뺐다.
어느덧 두 사람의 거리는 지척.
아이리스는, 울먹이며 물었다.
“내, 내가… 내가 잘못한 건가요? 하지만, 나는 분명… 그래! 당신, 우리 큰할아버님이 무섭지 않나요?! 제국 황실을 건드리면 그분께서 결코……!”
그것이 끝.
푹, 하고 태도가 아이리스의 명치를 관통했다. 끄륵, 하고 피거품이 올라오며 여인의 의식이 흐릿해졌다.
“오라고 해.”
털썩, 하고 여인의 몸이 무너져 내리고.
복수를 끝마친 소녀는 말없이 등을 돌려 사라졌다. 또 다시, 아무도 모를 곳으로.
아이리스의 품에서 연녹빛 액체가 흘러나오는지도 모른 채.
제국의 제2황녀가 중태에 빠진 전말이었다.
**
아이리스 황녀의 중상.
이를 듣고 달려 온 이는, 비단 나와 시에네 선배뿐만이 아니었다. 신전의 집중치료실에는 낯익은 선객이 우리를 반겨 주었다.
“이, 이안 경!”
제국의 제5황녀, 시엔.
그녀는 오늘도 울상을 지은 채로 내게 총총거리며 다가왔다. 제 가슴 앞에 가지런히 모은 두 손이 황녀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어, 언니께서… 언니께서……!”
“괜찮으실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치료를 해도 의식이 되돌아오지 않는데……!”
“황녀 전하.”
나는 최대한 침착을 가장하며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내 두 손이 어깨에 얹어지자, 그제야 비에 젖은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하던 시엔이 흠칫 몸을 떨었다.
“괜찮으실 겁니다.”
“네, 네…….”
시엔은 어쩐지 얼빠진 목소리로 답하며, 슬쩍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러자 가장 먼저 아이리스에게 달려든 쪽은 바로 시에네 선배였다.
“전하!”
그 떨리는 목소리에서 시에네 선배의 동요가 느껴졌다. 감히 아이리스의 육신에는 손조차 대지 못하고, 단지 그 어림을 헤매는 손 또한 바들바들 떨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찌, 누가 감히……!”
사실 시에네 선배도 알고 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대략적인 정보는 들었으니까.
황녀를 호위하던 인력들은 환상에 시달리며 신음하고 있다. 어느 사건의 피해자와 판박이처럼.
‘셀린’이구나.
이를 직감한 내 두뇌를 전례 없는 두통이 습격했다. 무심코 입술 사이를 비집고 신음이 새어 나왔을 만큼.
시엔도 이를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니 우물쭈물하며, 나를 부축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내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이겠지.
나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제국 황실을 건드리지 못하는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국제적 문제로 번질 수 있으니까.
제국 첩보부는 어디에나 숨어 있으니까.
억만금의 현상금이 걸릴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단지 부수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대륙의 모두가 제국 황실을 우러르며, 또한 감히 손 대지 못하는 까닭.
그것은 단 한 사람의 존재 때문이었다.
단신으로 대륙의 권력 구도를 재편할 수 있는 인물이자, 제국이 지니고 있는 최대의 억지력.
그가 움직이리란 사실은 자명했다.
무려 차기 황위를 두고 다투는 유력 계승자의 중태였다. 이러한 폭거를 내버려 둘 정도라면, 애초에 세상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 할 까닭이 없었다.
이는 단 몇 분만에 증명되었다.
쾅!
집중치료실의 문이 형편없이 박살 나 흩어진다. 괴력에 터져 나간 섬유질이 안개처럼 흩어지며 먼지 구름을 만들었다.
그 너머에서, 누군가 오고 있었다.
저벅저벅 걸음을 내딛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흐릿한 윤곽선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저 중년의 정체가 무엇인지.
온 세상 사람들이 경애해 마지않는 존재 중 하나가 아니었던가.
제국의 검공.
대륙의 단 셋밖에 없는 마스터이자, 제국 황실의 큰어른이었다.
그의 난데없는 등장에 나를 제외한 모두가 굳어 버렸다. 나야 검공이 원체 예측 불가능한 인물이니 그러려니 했지만, 나머지는 검공을 어려워하는 기색이 강했으니까.
대륙 제일의 검객은 흔해빠진 인삿말 하나도 건네지 않았다.
단지 걸음을 옮겨, 말없이 창백한 낯빛을 하고 누운 아이리스의 곁에 섰을 뿐.
시에네 선배는 그 전에 화들짝 놀라 허겁지겁 자리를 비킨 지 오래였다.
그리고 침묵.
시엔도, 시에네 선배도 검공이 무슨 말을 할까 싶어 몸을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혹은 검공이 무의식적으로 흘리는 기도에 숨이 막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정적은 한참 뒤에야 깨져 나갔다.
“애송아.”
“네, 검공 어르신.”
이제는 익숙해진 호칭에, 나는 얌전히 고개를 숙이며 검공의 곁으로 다가섰다. 옆에서 살짝 훔쳐 본 그의 낯빛은 드물게도 딱딱이 굳어 있었다.
이를 확인한 나는 그만 아랫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셀린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지?
검공을 막을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성국의 성자나 남부 열왕국의 대마녀를 제외한다면, 그 누구라도 이 자의 검 앞에서 죽음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네 소꿉친구가 한 짓이냐?”
직설.
완곡함 따위는 약자의 전유물이라는 듯, 그의 물음에는 거침이 없었고 또한 담백했다. 나는 일순 가슴이 죄어 오는 느낌에 한동안 말을 꺼내지 못하다가.
이내 고개를 푹 숙이며 입술을 달싹이는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그렇습니다.”
“그렇군.”
검공은 그렇게 담백한 대답을 남기고, 또 다시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이러다 질식해 버리지 않을까 싶을 무렵.
“예전에 내가 말했던 적이 있던가? 모든 마스터들은, 족쇄를 하나씩 달고 있다고.”
“네, 아마도…….”
“내 족쇄는 이 아이다. 아니, 제국 황실의 모든 아이들이 그렇지.”
나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대마녀의 족쇄는 ‘흡혈귀’였다. 그렇다면 검공은 대마녀가 흡혈귀에게 그랬던 만큼 제국 황실의 핏줄에 구애받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그럼에도 나는 최대한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든 셀린의 목숨을 보전받을 방법을.
아니, 내게 기회를 달라고 한다면.
어차피 남들은 알지 못한다. 미래가 어떻게 흘러갈지, 그 끝이 얼마나 비참하고 끔찍할지도.
‘셀린’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남들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겠지. 하지만, 나라면?
내가 이러한 말들을 하나둘씩 떠올리고 있을 찰나.
“네가 하겠느냐?”
허탈할 만큼, 금세 얻어 낸 희망사항에 나는 얼빠진 표정을 짓고 말았다.
“……네?”
“네가 하겠냐는 말이다. 네 소꿉친구의 처단.”
“하지만, 이는 검공께서…….”
“하고 싶지 않다면 좋다. 나도 제국 황실의 일원으로서, 제 조카손녀의 원수를 갚고 싶은 마음은 누구보다 간절하니까.”
나는 직감했다.
아, 고민할 틈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구나.
검공의 의도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내게는 어떻게든 검공으로부터 기회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으니까.
내 대답은 즉각적이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러자 검공은 묵직하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도무지 그 저의를 알 수 없는 인물이었다. 왜 느닷없이 내게 셀린의 처단을 맡겼는지, 그 사실조차 알 수 없을 만큼.
화가 나지 않은 것도 아니면서.
“남은 이야기는 따로 만나서 하지. 그리고, 시엔.”
“네, 넷! 큰할아버지!”
검공은 시엔의 귀여운 화답에도 엄숙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태어나서 몇 번 보지 못한 검공의 진지한 모습에, 시엔은 이가 딱딱 떨릴 만큼 긴장한 티를 내고 있었다.
검공의 용건은 간단했다.
“아이리스의 역할은 한동안 네가 이어받는다. 제국 황실의 대표로서, 아카데미에서 활동하거라.”
그 묵직한 음색에는 묘한 힘이 담겨 있었다. 듣는 이로 하여금 마땅히 그 뜻을 따르게끔 하는 마력이.
무엇보다 거절할 까닭이 없는 제안이었다.
임시로나마 제국의 유력 황위 계승권자의 권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더불어, 중태에 빠진 아이리스가 이대로 깨어나지 못하면 자연스레 시엔이 그 후계자로 떠오르겠지.
정치에 무지한 나조차도 파격적이라 느껴지는 제안이었다. 시에네 선배 또한 의외라는 눈빛으로 검공을 바라보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처럼 거부하기 힘든 제안에 황녀는.
“엣.”
하고, 묘하게 심심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지만.
검공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왜 그러느냐, 시엔? 혹시 마음에 들지 않더냐?”
“아, 아니이… 그, 그러니까 말이죠. 에헤헤.”
시엔은 귀여운 웃음으로 위기를 돌파하려 들었다. 정작 근엄한 태도의 검공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지만.
전략의 실패를 직감한 시엔의 표정은 이내 울상으로 바뀌었다.
“위, 위험하잖아요?! 아이리스 언니도 저 꼴이 났는데… 제가 아이리스 언니의 대리를 맡으라고요? 또, 또 요즘 대마녀 님께서 일러 두고 가신 수행을 하느라 좀 바쁘기도 하고… 참, 참. 아이린 경은 빌려드릴 수 있어요!”
필요 없는데요.
내가 무심코 나올 뻔한 말을 가까스로 삼켜 내는 사이, 시엔은 최후의 희망을 담아 내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이안 경! 아니, 아니. 대사형! 아시잖아요… 스승님께서 얼마나 제자를 굴리시는지. 저 이러다 파문당할지도 몰라요?”
다분히 검공을 의식하고 하는 발언이었다.
대마녀의 비전을 익히는 건, 제국 황실에도 중요한 일이었다. 만일 시엔이 파문이라도 당했다가는 낭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