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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636)화 (636/649)

   

   사실 대마녀가 제자를 파문할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내며 나를 바라보는 후배를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이내 나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지원 사격에 나섰다.

   

   “검공 어르신, 어차피 제가 있잖습니까. 한동안은 저와 시에네 선배가 함께 대표 역할을 수행하겠습니다.”

   

   그때였다.

   

   내 도움에 반색을 하던 황녀가, 그대로 얼어붙은 것은.

   

   “흐음, 그렇기는 하다만… 괜찮겠느냐, 애송아? 네 짐이 무거울 텐데.”

   

   “네, 괜찮습니다. 혼자도 아니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시에네 선배?”

   

   난데없이 호출을 당한 시에네 선배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한동안 허둥지둥하던 여인은 흠흠, 하고 헛기침을 한 뒤에야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시에네 선배는 이내 가식적인 수사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물론입니다, 검공이시여… 이미 저희 둘은 밤을 지새우며 함께 협력하는 사이, 부디 맡겨만 주시기를.”

   

   ‘밤을 지새우며 협력’?

   

   하기야, 지난밤을 지새우며 셀린의 습격을 기다리기는 했다. 정작 습격을 당한 쪽은 제2황녀 쪽이었지만 말이다.

   

   나는 헛웃음을 터트리며 시선을 돌려 버렸다. 시엔도 이만하면 만족하지 않았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시엔은 창백한 낯빛을 한 채 나와 시에네 선배를 번갈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를 본 내 고개가 갸웃 기우는 사이, 검공은 결심을 굳힌 듯했다.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나도 조카손녀를 더 다치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렇다면 한동안은 둘이서…….”

   

   “저, 저 할래요!”

   

   자그마한 손을 번쩍 들면서 외친 말.

   

   시엔의 갑작스러운 변심에, 좌중의 시선이 모두 그녀를 향했다. 하지만 시엔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팔을 치켜든 채  외쳤다.

   

   “저 할게요! 그거, 아이리스 언니의 대리!”

   

   검공의 고개가 갸웃 기울었다. 그 또한 손녀의 마음이 이해 가지 않기는 마찬가지인 듯했다.

   

   “하지만, 방금 전에는 위험하다고……?”

   

   “용의 피를 타고 난 자가 어찌 제 안위만 이야기할 수 있나요? 의무는 핏줄의 숙명! 부디 제게 맡겨 주세요, 큰할아버지.”

   

   그러면서 훗, 하고 제법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기까지.

   

   단 몇 초만에 달라진 시엔의 태도에, 나와 검공의 시선이 허공에서 멀뚱히 마주쳤다. 물론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애초에 시엔이 하지 않겠다고 해서 내린 결정이었다. 무슨 까닭에서든 다시 하고 싶다고 나서는데, 굳이 결정을 번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검공은 이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하거라."

   

   "됐다!"

   

   만세를 부르면서, 시엔은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의욕으로 가득 찬 호언장담이 뒤를 따랐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게요, 큰할아버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평정을 잃지 않고, 용의 핏줄답게 대범한 태도를 보여 드릴 테니까요!"

   

   그리고 얼마 후.

   

   검공의 호출을 따라 간 나는, 시엔과 함께 밀실에서 검공을 대면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검공이 뱉은 첫 마디는 다음과 같았다.

   

   "애송이, 네 남은 수명이… 아마 한 달 정도였던가?"

   

   

   느닷없는 폭탄발언에 말문이 막혔다. 이처럼 민감한 문제를 아무렇지도 않게 물어볼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내 눈이 급히 시엔을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그래.

   

   부릅뜬 연회색 눈동자가 나를 향하고 있었다. 더없이 창백해진 낯빛을 하고서.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말았다.

   시한부(時限附).

   

   수명이 얼마 남지 않는 이들을 이르는 말이었다. 본래라면 뒤에 ‘인생’이라는 낱말이 따라붙어야겠으나, 이러한 어휘는 삶이 끝난다는 사실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감이 있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비극이었으니까.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의 친인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그들은 일부러 ‘인생’이라는 낱말을 빠트려 말한다. 어떻게든 한 생명의 종막을 응시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그럼에도 진실은 언제나 잔혹하리 만치 담백하다.

   

   나는 죽는다.

   

   그것도 한 달 이내에.

   

   느닷없이 도래한 현실에 시엔은 무어라 말을 얹지 못했다. 입만 뻐끔거리는 그 낯빛에서는 불신과 당혹의 빛이 물씬 묻어나왔다.

   

   마치 악질적인 농담이라도 마주했다는 양.

   

   검공의 담담한 폭로는 계속되었다.

   

   “육체가 무너지고 있다고 들었다. 심상의 폭주 탓에, 무슨 짓을 해도 육체가 다시 무너질 뿐이라고?”

   

   입술을 짓씹은 내 눈이 황녀의 낯빛을 살폈다. 새하얗게 질린 소녀의 얼굴은 모든 감정이 표백된 도화지와 같았다. 그 위를 뒤덮은 순백의 이름을, 나는 알고 싶지 않았다.

   

   단지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을 뿐.

   

   그에 반해 검공은 실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기색이었다. 잔혹할 만큼 담백하고, 직설적인 사내의 어조가 이를 방증하고 있었다.

   

   부정은 소용없었다.

   

   상대는 제국 황실의 큰어른이자, 대륙 최강의 검객이었다. 하릴없이 내 죽음을 농담의 주제로 소비해야 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지금 당장은 도리질을 치더라도 시엔의 영특한 두뇌는 곧 깨닫고 말 터였다.

   

   검공의 증언이 옳다는 사실을.

   

   끝내 내 입에서는 한숨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말았다.

   

   “일단은, 그렇습니다.”

   

   “흥, 쓸데없는 말장난을 배웠구나. ‘일단’이라? 그럼 좀 더 고민해 보면 방도가 있단 말이냐?”

   

   예리한 지적이었다. 또한, 눈치 없는 반론이기도 했고.

   

   이미 핏기가 가신 지 오래인 황녀는 딸꾹, 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손과 속눈썹이 소녀의 마음 속에 인 태풍을 짐작케 했다.

   

   이래서 숨기려고 했던 건데.

   

   내 원망을 담은 눈빛에도 검공은 시종일관 태연하기만 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불퉁한 기색이었다.

   

   나로서는 억울할 따름이었다.

   

   내게 무슨 죄가 있다고?

   

   단지 열심히 싸우다 시한부 판정을 받았을 뿐이었다. 위로와 동정을 받진 못할 망정, 늙은이의 심술을 받아 주어야 하는 신세라니.

   

   슬슬 내 입술이 삐쭉 내밀어지기 직전이었다.

   

   검공이 쾅, 하고 책상을 내리친 것은.

   

   “얼빠진 놈!”

   

   진심을 담은 마스터의 일갈은 상상 이상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묵중한 충격파가 대기를 타고 줄기줄기 뻗쳐 흘렀다. 심장을 북처럼 두드리는 기파에, 나조차도 깜짝 놀라 자세를 바로 세웠을 정도였다.

   

   넋을 놓고 있던 시엔도 마찬가지였다.

   

   화들짝 놀란 소녀의 몸이 감전이라도 된 듯 일으켜지다 말았다. 그 탓에 잠시 공중에 체류하다가, 이내 다시금 의자로 폭 들어가는 자그마한 체구.

   

   이윽고 그 앙증맞은 입술을 비집고 긴장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네… 큰할아버지.”

   

   정작 검공이 혼낸 쪽은 시엔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검공도 딱히 황녀를 신경 쓰지는 않았다. 워낙 자그마한 목소리였던 탓에, 일부러 반응할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고.

   

   검객의 불타는 푸른 눈동자가 나를 겨누고 있었다.

   

   “그렇다면 당장 내게 알리고 도움을 구했어야지! 너 혼자 힘으로 무얼 할 수 있다고! 그래서, 살아남을 방법은 찾았더냐?”

   

   “저, 아직…….”

   

   “아직도 찾지 못했다고?”

   

   나는 난데없는 검공의 분노에 식은땀을 흘리는 수밖에 없었다.

   

   마치 부모한테 혼나는 자식이 된 느낌이라고 할까. 혹은, 스승에게 혼나는 제자라고 해도 좋았다.

   

   내 입이 생각나는 대로 핑계를 주워섬기기 시작했다.

   

   “당면한 과제가 너무 많았습니다. 우선, 셀린의 알펜하우저 가문 습격에 제 친인 중 하나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첩보가…….”

   

   “그게 네 목숨보다 중요하더냐?”

   

   당연하다고.

   

   나는 그렇게 말하려다가, 이내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내리깔아야 했다.

   

   날 응시하는 검공의 시선이 너무나 엄중했으니까.

   

   난생 처음 보는 눈빛이었다.

   

   “쯧쯧, 아직 어리구나. 아직도 애송이야… 네 목숨은 이제 네 것이 아니다. 너는 제국을 대표하는 샛별이고, 무수한 백성의 희망과 기대를 짊어진 존재란 말이다. 네 죽음이 너 하나로 끝날 줄 알았더냐?”

   

   “하지만…….”

   

   “넌 죽지 못한다.”

   

   단언이었다.

   

   반론 따위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단단한 어조를 내뱉으며, 검공은 더욱 깊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다만 어째서일까.

   

   나는 그 눈빛이 조금 쓸쓸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너는 죽어서는 안 돼. 그러기에는, 이미 네가 짊어진 것이 너무나 크고 무겁다. 알겠느냐? 이건 동정이나 배려 따위가 아니야. 네가 묶여 살아야 할 족쇄다.”

   

   쯧, 하고 혀를 차는 그 목소리는 일견 꾸지람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검공의 진심을 살짝 알 것만 같아서.

   

   말없이 고개를 떨구고 경청을 하는 척이라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도리어 나를 대신해 입을 연 쪽은 따로 있었다.

   

   “그, 그래요!”

   

   바로 황녀였다.

   

   여태껏 입을 다물고 있던 소녀는 곧장 자그마한 주먹을 말아 쥐며 외쳤다. 낯빛에는 여전히 혈색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만큼은 섬을 발견한 난파선의 선원만큼이나 반짝이고 있었다.

   

   “아직 끝이 아니잖아요, 이안 경… 그, ‘심상’? 그까짓 거야 어떻게든 할 수 있잖아요! 네? 제국 황실의 힘을 빌린다면……!”

   

   “황실도 딱히 해줄 수 있는 지원은 없다.”

   

   청천벽력 같은 선언.

   

   또 다시 ‘시엔’이라는 소녀의 육신에서 감지되던 모든 생명 활동이 일순 멎었다. 그리고 두근, 하고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하자 여인의 눈망울에는 옅은 물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울먹이는 황녀 앞에서도 검공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애초에 ‘심상’이 무엇인지도 불분명한 상황이다. 수많은 학자들이 달려들었지만, ‘심상’이 무엇인지 대략적인 정의만 내릴 뿐 면밀한 분석에 이르지는 못했어… 하물며 ‘심상의 폭주’? 나도 백 년이 넘게 살아왔지만, 난생 처음 듣는 이야기구나.”

   

   “그, 그럼……!”

   

   “하지만 단 하나, 방법이 있기는 하지.”

   

   당장이라도 방울방울 눈물을 떨굴 듯하던 황녀의 낯빛에 화색이 돌았다.

   

   꺼져 가던 불씨를 살린 원시인도 이보다 기쁜 표정을 짓지는 않았으리라. 존경과 찬탄을 담아 빛나는 조카 손녀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검공은 팔짱을 낀 채 훗 하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 장면을 보고 확신했다.

   

   일부러 마지막까지 말하지 않고 있었구나.

   

   나를 살릴 방법이 있단 사실을.

   

   하여간 어린아이 같은 면이 있는 어르신이었다. 극적인 효과를 연출하기로 한 모양인데, 그 전략은 황녀에게 확실히 먹혀들었다.

   

   두 손을 모은 시엔의 눈동자가 별빛을 담아 일렁인다. 그 어여쁜 입술에서는 끊임없는 찬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대단해요, 큰할아버지! 역시 큰할아버지라면 무언가 수가 있으리라 생각했어요!”

   

   “허허, 별 것도 아닌 걸 가지고… 아무려면, 설마 내가 후계자를 죽게 내버려두겠느냐? 나중에는 우리 제국의 수호자가 될 놈인데!”

   

   “과연 검공! 제국 황실의 수호자!”

   

   사랑하는 조카 손녀의 감탄에 검공의 우쭐한 미소를 점점 더 짙어지고 있었다.

   

   하기야, 한때는 ‘암캐’ 취급까지 당했었으니.

   

   나는 일련의 과정을 상처받은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한 가부장의 슬픈 발버둥으로 이해해 보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정작, 나 또한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누를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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