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637)화 (637/649)

   

   살 수 있단 말인가?

   

   내게는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이 남아있었다. 또, 아직 이별하고 싶지 않은 소중한 사람들도 많았고. 만일 살 수만 있다면, 더는 이러한 걱정을 할 필요는 없으리라.

   

   검공은 한참 동안이나 조카 손녀의 떠받듦을 즐긴 뒤에야 말했다.

   

   “좋아, 그럼 일단 자리를 옮길까!”

   

   내 목숨을 부지할 수단에 대해서.

   

   

   **

   

   

   “문제는, 네 육체와 심상이 조화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지.”

   

   아카데미 모처의 한적한 뜰.

   

   그곳에서 검공은 나와 황녀를 수강생 삼아 강의를 진행 중이었다.

   

   “네 심상은 비대하고 어지러워. 너무 많은 비전을 익힌 탓이겠지. 그러니 네 육체가 그 상태를 따라가려다 망가지는 거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미 익힌 비전을 잊어버릴 수도 없는 노릇인데.”

   

   “잊어버릴 필요는 없다.”

   

   내 반문에, 검공은 그리 답하며 씩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히려 너는 그 비전들을 극한까지 수련해야 해. 아니, 모든 비전을 익힐 필요도 없다… 단 하나의 비전이라도 극에 달해, 그 진의를 엿보고 ‘경계’를 넘어설 수 있다면?”

   

   그제야 나는 검공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눈치 챘다.

   

   비전을 극한까지 익히고, 그조차도 모자라 ‘경계’를 넘어서야만 닿을 수 있는 경지는 오직 하나뿐이었으니까.

   

   ‘마스터’.

   

   검공은 지금 내게 인류의 네 번째 마스터가 되라고 권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렇게 되면 더는 신경 쓸 필요 없다. ‘마스터’란 육체와 심상이 완전히 일치하는 경지, 육체와 심상의 부조화 따위는 애초에 생겨날 수 없지.”

   

   “심상이 불안정하더라도요?”

   

   “만일 하나의 심상이라도 극에 달한다면.”

   

   검공은 그렇게 말하며 제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톡톡 두드렸다. 일평생 검을 수련해 온 인물이었으니, 그의 심상 또한 오직 외길을 걸어왔으리라.

   

   “나머지 심상들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다. 사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마스터’가 되는 길이지. 번민, 고집, 미련… 그 모든 것을 하나의 심상으로 녹여내, 너의 신체이자 무기로 삼는다.”

   

   슥, 하고.

   

   검공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으나 칼바람이 내 살갗을 살짝 스치고 지나갔다. 찰과상조차 남지 않을 만큼 옅은 접촉.

   

   그러나 이 참격이 내 목젖을 노리고 있었다면?

   

   거리도, 강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심상을 통한 육체의 전권 획득, 더 나아가 일대를 지배하고 왜곡시키는 억지력이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그것도 하나의 과제로서.

   

   “지금부터, 시간이 남을 때마다 나를 찾아와라. 내가 심상을 가다듬는 데 도움을 주마.”

   

   “그런다고 마스터에 오를 수 있을까요?”

   

   “모를 일이지.”

   

   무책임하다 싶을 만큼 시원스러운 대답을 내뱉으며, 검공은 묵묵한 시선을 내게 던졌다.

   

   “하지만 네가 마스터에 오를 재목이라면, 최소한의 성과는 있을 터다. 그 정도라도 네 수명을 연장하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 그래서, 해보겠느냐?”

   

   해보겠냐니.

   

   목숨이 걸린 문제였다. 당연히 내게 선택지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나는 진중한 표정을 한 검공과, 눈을 반짝이는 황녀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검공의 말한 대로 심상을 수련하기 위해서였다.

   

   “자, 그럼 우선 첫 단계… 심상을 끌어올려 보거라. 무엇이든 상관없이, 네 가슴 깊숙한 곳에 묻혀 있는 무언가를.”

   

   내 가슴 깊숙한 곳이라.

   

   눈을 감고, 서서히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흐트러트린다. 수없이 해보았던 명상이었다. 지금이라고 해서 어려울 턱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말 그대로 ‘무언가’를.

   

   그것은, 무어라 할까.

   

   검이나 용? 호랑이나 악마, 고래나 짐승. 혹은 나를 응시하는 어떠한 눈동자.

   

   무정형이라고 표현해야 할지도 몰랐다. 언어의 지평 아래에 잠들어 있던 존재가 날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 심상을 끌어내기 위해 서서히 손을 옮겼고.

   

   “쿨럭!”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리고 암전.

   

   *

   

   풀썩, 하고.

   

   이안이 피를 토하고 쓰러진 뒤에도 한동안 검공은 입을 열지 못했다. 시엔도 황망하다는 눈빛으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시엔의 목젖을 치고 뱉어지는 음성은 없었다. 단지 눈을 부릅뜬 채로, 몇 번이고 제 짝사랑을 가리켰을 뿐.

   

   그 손짓에는 일종의 간절함마저 서려 있었다.

   

   그러기를 얼마쯤.

   

   검공은 조심스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좆됐구나.”

   

   이안 페르쿠스, 회생 불능 판정.

   

   검공의 두 손이 제 낯가죽을 덮었다.

   꿈, 혹은 현실.

   

   나는 또 다시 몽롱한 정신으로 길을 걷는다.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는지는 알 턱이 없었다. 단지 시야가 걷히면, 나는 메마른 사막을 걷고 있었다.

   

   한때는 풍요의 상징이었을 장소를.

   

   무너져 내린 성벽 너머로 말라죽은 산이 보였다. 비록 내 시력이 일반인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화되어 있다지만, 이 거리에서도 보일 만큼 높은 산은 얼마 존재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드높은 성벽까지 거느리고 있는 산은.

   

   저 산의 이름은 ‘시엔델’, 한때 성국의 중심이라 불리던 성지(聖地)였다.

   

   “오랜만이네.”

   

   물방울이 쟁반 위를 구르듯 아리따운 음색이었다.

   

   내 눈이 멍하니 그 진원지를 향했다. 바로 내 옆에서, 뒷짐을 진 채 걸음을 옮기고 있는 여인의 옆얼굴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이처럼 잔혹한 시대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적갈빛 머리카락, 연녹색 눈동자가 차례대로 붓처럼 시야를 두드렸다. 물감이 퍼져나가듯 여인의 모습이 서서히 뇌리 깊숙한 곳에 각인된 뒤에야, 나는 혀의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뭐?”

   

   “너와 하는 산책, 오랜만이잖아? 아카데미 신입생 시절 이후에는 없었던 것 같은데.”

   

   그래, 그랬지.

   

   조각 나 부유하던 현실 감각이 하나둘씩 짝을 맞추며 내 의식을 일깨웠다. 나는 지금 이 여인과 함께 임무를 하러 가던 도중이었다.

   

   나는 여인이 꺼낸 낡은 인연에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미 잊어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몇 년만에 등장한 동문이 떠올리게끔 한 과거는 결코 아름다운 추억이 아니었다.

   

   한동안 입술을 달싹이며 망설이다가.

   

   내 혀가 살짝 입술을 적신 후에야 말문이 열렸다.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어떻게 살아남은 거야?”

   

   직설적인 물음.

   

   나는 이를 내뱉고 나서 아차, 하는 심정이 되고 말았다. 지나치게 배려 없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탓이었다.

   

   하지만 여인은 굳이 내 실수를 탓하지 않았다.

   

   다만 싱긋, 하고 눈웃음을 머금으며 내게 되물었을 뿐.

   

   “언제를 말하는 거야? 아카데미, 혹은 ‘영생학파’?”

   

   그제야 나는 잊고 있던 사실을 하나 떠올렸다.

   

   상대가 겪은 생명의 위기는 한 번이 아니었다. 나 또한 그렇듯이, 이 시대의 생존자들은 누구나 몇 번의 우여곡절을 거쳐 제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리라.

   

   무심코 내뱉은 질문이 갑절은 무례해지는 순간이었다.

   

   내 입에서는 실로 오랜만에 평정을 잃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아니, 나는… 단지…….”

   

   내 허둥대는 꼴을 보며 여인은 쿡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학창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따스한 웃음소리였다.

   

   이래서야, 연상 앞에서 당황하는 어린아이 같은 꼴이 아닌가.

   

   스스로의 한심함을 자각한 내 입에서 옅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사실, 내가 해야 할 말은 오래 전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미안.”

   

   “응?”

   

   나의 옛 친구, 엠마는 내 느닷없는 사과에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어째서 내가 사과하는지도 모르겠다는 낯빛이었다. 그래서 나는 재차 과거의 죄를 고백해야 했다.

   

   “네가 힘들 때, 아무것도 못해서… 들었어. 마수에게 물려 혼수 상태에 빠졌었다고.”

   

   “아하, 그때 말이구나.”

   

   그렇게 맞장구를 치는 엠마의 동공이 슬쩍 정면을 향했다. 나와 눈을 마주치는 대신, 제 기억을 헤집고 싶다는 듯.

   

   내 입은 자꾸만 해묵은 죄책감을 토해내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해도 수가 없다고 들었어. 그나마 값비싼 제물을 쓰면 된다고 했는데… 미안, 아무것도 못해서.”

   

   끝내 오래된 사과를 끝마친 내 고개가 자연스레 살짝 숙여졌다.

   

   이를 보고도 엠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단지 으음, 하고 제 입술을 검지로 몇 번 두드렸을 뿐.

   

   침묵은 길지 않았다.

   

   “괜찮아.”

   

   허무할 만큼 시원스러운 대답이었다.

   

   내가 얼떨떨한 시선을 위로 향하자, 그곳에는 짐짓 눈을 감고 턱을 짚은 채 침음을 흘리는 여인이 위치하고 있었다.

   

   “으으음, 사실 이안의 잘못은 아니잖아? 어쩌다 당한 사고였고, 또 네 사정에 1만 골드에 이르는 제물을 준비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굳이 네가 사과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널 방치한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니까, 괜찮대도.”

   

   엠마는 그렇게 말하며 픽, 하고 웃음을 흘려버렸다. 별 걸 다 그런다는 듯이.

   

   “너만 그런 것도 아니었잖아? 무엇보다, 나는 완치되기도 했고.”

   

   “그래도…….”

   

   “우리 페르쿠스 도련님, 여전하구나?”

   

   절묘하게 치고 들어오는 목소리였다.

   

   나는 결국 입을 다물고, 엠마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여인의 낯에는 어느덧 상냥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특유의 따스한 눈빛과 잘 어울리는 웃음이었다.

   

   “여전히 착한 척을 잘해… 더는 그럴 필요 없는데, 가엾게도.”

   

   묘한 잔향을 남기는 말이었다.

   

   하지만 내가 무어라 캐묻기도 전에, 엠마는 다시금 한 걸음을 내딛어 앞서 가기 시작했다.

   

   “……물론, 싫지는 않지만.”

   

   그렇게 내 말을 끊어먹은 여인은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몇 년 전의 추억 이야기가 아닌, 지금 당장 직면한 임무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에서 무얼 해야 하는 거야? 착수금을 받은 이상, 나도 목표를 확실히 하고 싶은데.”

   

   나는 한동안 머뭇거리며 제자리에 멈춰 섰다가.

   

   끝내 한숨과 함께 엠마의 뒤로 따라붙는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앞서 가는 엠마를 그대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내 주군으로부터 하달 받은 임무를 요약할 시간이었다.

   

   “성도 시엔델의 남은 오염 조사, 새로운 칠죄성의 정보 수집, 지원군으로 파견되었던 로도스 백작의 잔존 세력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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