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왜 죽습니까? 그까짓 죽을지도 모른단 소리, 여태껏 몇 번이나 들어왔는데요. 그래서 제가 죽었습니까?”
“그래도, 흑… 그, 그래도오…….”
“공연히 걱정하실까 싶어 일부러 숨기고 있던 겁니다. 남은 시간 동안, 제가 알아서 해 보겠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슬그머니 내 손을 쥔 황녀의 손을 떼어냈다. 황녀는 내 손을 놓고 싶지 않은 듯했으나, 워낙 손이 덜덜 떨리는 탓에 내 힘을 이겨내지는 못했다.
이윽고 나와 검공이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친다.
“제 이야기는 한동안 비밀로 해주십시오.”
“무슨 헛소리냐? 못 들었어? 네가 살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이려면, 다같이 달려들어도 모자라다니까!”
“그런다고 제가 살 확률이 얼마나 됩니까? 냉정히 말해서요.”
그때였다.
시종일관 달구어진 목소리로 외치던 검공의 반론이 끊긴 것은.
나의 반문에, 검공은 이내 침음을 삼키며 고개를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3할? 2할? 아니라면… 1할?”
끝까지 긍정의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확률은 그 이하.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마지막 부탁을 입에 담았다.
“부디 비밀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저한테는 아직 할 일이 많은데, 공연히 걱정을 끼쳤다가는 옴짝달싹도 못하는 몸이 될지도 모르고… 무엇보다 절 아시잖습니까. 여태까지 잘 해왔다는 걸.”
그렇다.
제일 두려운 건, 내가 운신이 불가능해지는 상황이었다.
셀린은 알펜하우저 가문과 제국 황실을 적으로 돌렸다. 엠마는 얼마 뒤에 내게 유서를 쓰고, 이 모든 것을 막을 수 있는 인물은 오직 나뿐.
어떻게든 신체의 자유가 간절한 시점이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또, 혹시나 드리는 말씀이지만 만일 제 소식을 앞서 말씀하셨던 분들께 전하시면… 콱 죽어버릴 겁니다. 그럼 이만.”
그 농담 반, 진담 반의 경고가 마지막.
나는 그렇게 위태로운 걸음을 옮겨 울음소리만이 남은 병실을 뒤로 했다.
그리고 몇 초 후.
쾅!
“고얀 놈!”
검공이 남은 분노를 토해내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나는 결코 발길을 돌릴 생각이 없었다.
목적지?
딱히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으리라.
운명이 날 부르고 있을 테니까.
여태껏 그랬듯이 말이다.
나는 멍한 정신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 끝이 어디로 이어지는지도 모른 채.
*
“고얀 놈! 제 목숨이 걸린 문제인데, 끝까지 고집을 부려? 알리면 콱 죽어버리겠다고? 알리지 않아도 죽을 놈이!”
“크, 큰할아버지이…….”
시엔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제 큰할아버지를 불렀다. 그 목소리에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었으나, 어쩌겠는가.
천하의 검공이라도 사람의 마음을 조종할 수는 없었다.
단지 그는 분을 삭이듯 씩씩대며 선언했을 따름이었다.
“일주일!”
후우, 후우, 하고 거칠던 숨결이 잦아든다. 검공 또한 백 년 넘게 심신을 수련한 무인이었다.
제 감정을 가라앉히지 못할 리가 없었다. 다만, 방금 전에는 이안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극한의 상황이 그를 흥분시켰을 뿐.
냉정을 되찾은 그의 입에서 잘근잘근 씹힌 맹세가 흘러나왔다.
“그 이상은 못 기다려… 그러고도 콱 죽어 버리겠다면? 어디 내가 이기나 제가 이기나 해보라지… 검이고 다리 몽둥이고 모조리 부러트려서 입원시켜 줄 테니!”
어떡하지.
새하얗게 질린 시엔의 머릿속을 떠다니는 의문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음영이 사라진 눈으로, 제 손의 손톱이란 손톱은 모조리 씹어대며 소녀는 생각했다.
죽어서는 안 돼.
난생 처음 발견한 ‘진짜’였다. 스스로 선택한 보물이었고, 그 곁에 달빛처럼 머무를 수만 있어도 좋겠다고 생각한 상대였다. 이제야 좀 그 옆에 설 자신이 생겼는데, 죽어 버린다고?
지나치게 잔인한 결말이었다.
비단 시엔의 사랑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동안 그는 온 힘을 다해 사명을 완수했고, 선의로 타인을 대했으며, 수많은 사람을 구해 왔다.
그런데 그 대가가, 고작 이것?
안 돼.
이안이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시엔은 제 눈깔을 뽑아 바치라 해도 그럴 용의가 있을 만큼,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다.
어떻게든 구할 수는 없을까?
명석한 두뇌가 곧장 계산을 개시했다. 그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나 혼자서는 불가능해.
불가능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인간의 사고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기 위해 존재했다. 불가능하다면, 불가능의 원인을 제거하면 된다.
그래, 나 혼자가 아니라면.
하지만 이안은 방금 선언해 버렸다. 만일 이 사실을 ‘앞서 말씀하신’ 분들에게 전하면 죽어 버리겠다고.
따라서 성자와 대마녀는 선택지에서 제외.
성녀와 엘시? 이안이 직접 언급했던 인물 중 하나였다. 유르디나 가문도 마찬가지였고, 이안이 바보가 아닌 이상 ‘앞서 언급하지는 않았다.’라는 이유로 이따위 편법을 받아들일 리가 없지 않은가.
요컨대 중요한 점은 하나였다.
알리더라도, 이안의 목적을 부정하지 않을 사람. 더욱이 마법과 주술, 신화에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으면 더 좋았다. 머리가 좋다면 더더욱 좋고.
그게 과연 누구일까.
머릿속에 수천에 달하는 인명사전이 촤르륵 펼쳐진다. 그렇게 고뇌를 반복하던 시엔의 뇌리에, 문득 어떤 인물이 신의 계시처럼 떠올랐다.
그래, 그 사람이라면!
시엔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벌떡 일으켜졌다.
목적지는 이제 정해졌다.
남은 과제는, 진실을 알리는 것뿐이었다.
꿈이 어물어물한 과거를 헤집는다.
처음으로 분주했던 저택의 분위기가 떠오른다. 수군대는 목소리, 고용인들의 긴장한 낯빛, 늘 침착하던 부모님도 뜻 모를 한숨을 내쉬던 날.
되바라진 꼬맹이 하나가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늘 그랬듯이 도서관 구석에 박혀 지식을 탐구하던 도중이었다. 연약하기 짝이 없던 육체와는 달리, 빛나는 지성은 나날이 정당한 제 몫을 요구했다.
자고로 가치 있는 것에는 더 많은 대가가 필요한 법.
총명한 두뇌는 끝없이 지식을 요구했다. 그 욕망의 이름을 ‘갈증’이라 이름 붙여도 손색이 없을 만큼.
그러니 소년의 표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목 마른 사람이 목을 축이고 있는데, 강제로 끌려 온 마음이 어떨지는 굳이 추론해 볼 필요조차 없었다. 물론 소년의 부모님도 할 말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레토.”
“네, 아버지.”
불퉁한 태도와는 달리 유순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아인스턴 남작은 알았다. 그것이 소년의 기분을 대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어느덧 훌쩍 성숙해진 아이였다. 최소한 제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지 않을 만큼은 그랬다.
이 또한 ‘조숙증’이라고 불러야 할까.
부모로서는 쓴웃음밖에 보일 것이 없었다.
“네 마음이 어떤지는 안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책 바깥에 있단다.”
“글쎄요.”
흔해빠진 조언이었다. 천성부터 배배 꼬인 소년이 이를 듣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리는 만무했다.
더욱이 레토는 이미 책에서 온갖 수사법을 배운 뒤가 아닌가.
아들의 이른 사춘기에 아비의 한숨은 더욱 깊어지고 말았다.
“이따금씩이라도 좋으니, 제발 바깥에 나와서 사람도 만나고 하려무나. 아비는 네가 친구 하나 없이 살아가게 될까 걱정이다.”
“친구가 반드시 필요한가요?”
“그럼, 당연하지! 인간은 본디 외로운 존재라, 곁을 지켜 줄 사람이 하나는 있어야 한단다.”
꼼짝도 않던 아들의 마음이 흔들린다 생각했기 때문일까.
아인스턴 남작은 곧장 목소리를 높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 눈빛에서는 은은한 기대감마저 감돌고 있었다.
반면 아버지를 대하는 아들의 태도는 침착하기만 했다.
“그 말은, 반대로 제가 친구의 곁을 지켜 주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잖아요.”
“그게 무어가 어렵니? 친구란 본래 그런 사이인데.”
“셀린 하나 감당하기도 힘드니까요.”
그리고 침묵.
가문의 아픈 손가락이 언급되자, 아인스턴 남작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셀린’이 누구인가.
처가의 연줄을 통해 아인스턴 저택에 머무르고 있는 아이였다. 어린 시절에는 나름 활달한 모습을 보여 주었는데, 하스터 가문에 찾아온 비극은 아이 하나를 복수귀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 이후에는 매일 같이 검만 휘두를 뿐.
누구도 셀린을 건드리지 못했고, 이는 남매처럼 함께 자라 온 레토 또한 마찬가지였다. 당장 오늘만 하더라도 셀린은 수련을 이유로 가문의 행사에 불참하지 않았던가.
‘셀린 하나도 감당하기 힘들다.’
틀림없는 진심일 테지. 이를 모를 리가 없는 아인스턴 남작은, 끝내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아무튼, 기다려 보자꾸나. 네 또래 아이들도 온다니까.”
“중요한 손님이 오시나 보네요.”
아인스턴 남작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곧 알게 될 사실이기도 했고, 영특한 아들이라면 진작에 확신하고 있었을 테니까.
남작의 입술이 부연설명을 위해 천천히 열렸다.
“그래, 페르쿠스 가문이라고…….”
바로 그때였다.
“주, 주인님!”
우당탕탕, 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사용인 하나가 다급히 저택에 들어섰다.
창백한 안색이 그녀의 경악을 말해 주고 있었다. 자연스레 좌중의 이목이 쏠리자, 사용인은 더듬거리며 진술을 시작했다.
“아, 아가씨께서… 셀린 아가씨와 페르쿠스 가문의 도련님께서 싸움을……!”
“이런.”
그렇게 아인스턴 남작의 미간이 좁아진 직후.
레토는 당장 저택을 뛰쳐나갔다. 아무리 셀린의 성이 ‘하스터’라지만, 일단 식솔로 저택에 머무르고 있는 몸이었다. 그 행위의 책임으로부터 아인스턴 남작이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설마.
아무리 그래도 가문의 손님을 건드릴 줄이야.
레토는 셀린이 그만큼 분별이 없어졌다는 사실에 놀랐다. 혹은, 그동안 셀린에게 무심했던 대가를 치러야 할 차례인지도.
어떤 말을 해야 할까.
하스터 남작이 쓰러진 이후, 셀린은 텅 빈 인간이 되어 버린 것만 같았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터져서 사라질 듯한 그 아슬아슬한 분위기.
그래서 차마 손을 대지 못했다.
셀린이 무슨 심정일지, 무엇을 위해 검을 휘두르고 있는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