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처리되지 않은 불쾌한 알콜향이 흩날린다. 그 냄새를 맡은 황녀의 낯빛은 더욱 울상이 되고 말았다.
내 손이 연달아 두 번째 잔을 채웠고, 마지막 잔을 채우기 직전.
“저, 저……!”
소녀의 다급한 목소리가 나를 멈춰 세웠다.
내 우묵한 눈동자가 황녀를 향하자, 폭 내려앉으며 커튼을 만드는 암청빛 머리카락.
“조, 좀 더 달콤한 건… 없나요……?”
음, 못 먹는구나. 독한 술.
실로 소녀다운 사유에 나는 일순 고민에 잠기는 수밖에 없었다. 성녀가 마시던 포도주가 남아있던가?
아니, 그럴 리가.
술만 마시면 자제력을 상실하는 성녀였다. 당연히 대개는 끝을 보아야 했고, 그러지 않으면 다소 강압적인 방식을 동원해 제지해야만 했다.
그럴 때마다 기묘하게도 흥분에 불이 붙곤 했지만.
옛 추억을 더듬거리던 내 고개가 이내 내저어졌다. 사실, 이제 와서 소녀의 취향을 일일이 맞출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위스키병은 그대로 기울었다. 쪼르륵, 하고 잔이 황갈빛으로 차오를 때마다 황녀가 더욱 울상을 짓긴 했지만.
누가 음주를 강요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라는 생각을 하며 술잔을 들었을 때였다.
“누구한테 말했냐.”
나는 대답 대신 잔을 살짝 높이 들었다. 레토는 여전히 날카로운 시선을 풀지 않았지만, 일단 내 장단에 맞추어 잔을 들어주기는 했다.
얼떨결에 분위기를 타 버린 황녀까지도.
내가 독주를 식도에 들이붓자, 레토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잔을 반 정도 비웠다. 그리고 끝까지 망설이던 황녀는 눈을 질끈 감고 한 모금.
이내 으엑, 하고 혀를 내밀고 질색을 하기는 했지만.
아무튼 술이 들어갔으니 이야기를 털어놓을 조건은 갖춘 셈이었다. 나는 슬쩍 시선을 피하며 나지막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아직, 아무도.”
“페르쿠스 자작님이나, 자작부인께도? 아론 형이나 리아는?”
“몰라.”
레토는 대답 대신 한 손으로 제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잔에 남은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너, 진짜 미쳤냐?”
“말해서 뭘 해? 걱정만 끼치지… 어차피, 통상적인 방법으로 치유될 상태도 아니야.”
“그럼 이대로 죽겠다고? 가족들은 마음의 준비도 못했는데?”
탁, 하고.
거칠게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레토의 심문이 잠시 멎은 틈을 타 다시금 술병을 기울였다.
술은 찬다. 그야, 잔이 깨지지 않았으니 당연하겠지.
내 몸뚱어리와는 정반대였다.
“죽기는 누가 죽어? 방법을 찾아내면 되지… 언제나 그랬듯이.”
“이안, 너는 신이 아니야… 그렇게 형편 좋은 일이 몇 번이나 일어날 것 같아?”
“신이 아니더라도 길은 찾을 수 있으니까.”
슬슬 레토가 화를 낸 시점이었다.
그래서 나는 레토의 빈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일단 잔에 술이 남아 있으면, 레토는 화를 내는 대신 술을 더 마시기를 택하기 때문이었다.
과연 레토의 다음 행동은 내 예상에서 한 치도 빗나가지 않았다.
단번에 술을 식도에 털어넣고, 소리가 날 만큼 잔을 거칠게 내려놓기.
가득 차 있던 위스키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우리 둘 사이에 낀 황녀는, 오들오들 떨다가 급히 꼴깍꼴깍 술을 억지로 삼키는 도중이었고.
“좋아, 좋아… 일단 들어나 보자. 최소한 단서는 있겠지?”
“마스터가 되면.”
일단 말을 꺼내기는 했으나, 나조차도 확신하기 힘든 가능성이었다.
당연히 말끝이 흐려질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살짝 일그러진 레토의 미간이 내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지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내친김이었다.
나는 술기운을 빌어 말을 이어갔다.
“마스터가 된다면, 심상이 하나로 통합되면서 치료가 가능하다고 했어.”
“어떻게 마스터가 되려고? 너, 심상만 끌어올려도 피를 토한다며.”
“그건…….”
또 다시 막히는 말문, 기우는 술잔.
어느덧 위스키는 반절 넘게 사라져 있었다.
한숨 소리, 달구어진 숨결, 이젠 불쾌한지도 모르겠는 싸구려 위스키 특유의 향까지.
섞이고, 섞이고, 섞여든다.
“어떻게든 해봐야지.”
“이안…….”
레토는 더 이상 한숨을 내쉬지 않았다. 다만 두통을 견디기 힘들다는 듯, 손가락으로 제 관자놀이를 꾹꾹 압박하고 있을 뿐.
“장난하냐? 그럼 결국 원점이잖아!”
서서히 높아지는 언성이 레토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사실, 나로서는 할 말이 없기도 했고.
그럼에도 오랜 시간 누적된 피로는 심신을 지치게 만든다. 신경은 자연스레 날카로워졌고, 취기에 섞여 자제심은 흐려진다.
내 입에서 다소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온 이유였다.
“어떻게 해, 그럼? 내가 신경 써야 할 문제가 그뿐인 줄 알아?”
야료인지, 한탄인지.
드디어 흘러나오기 시작한 본심에 레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술을 또 다시 몇 배를 돈다.
취기가 오른 내 혀가 멋대로 미끄러져 내렸다.
“세리아는 떠난 후에 연락 한 통이 없지, 엠마는 또 어떻고? 무엇보다 셀린이……!”
간만에 마음을 터놓을 친구를 만난 탓일까.
실수를 깨달은 것은 그 직후였다. 나는 그대로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가.
이내 천천히 눈을 감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나를 바라보던 레토의 시선은, 무어라 해야 할까.
막 담금질을 끝마친 쇠붙이 같았다. 열기 대신 김을 풀풀 내뿜으며, 예기를 가다듬기 직전의 칼날.
그 눈빛에 비해 레토의 감상은 담백했다.
“셀린이, 뭐?”
나라고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저 시선을 살짝 돌린 채, 위스키를 홀짝였을 뿐.
슬슬 술이 부족했다.
하지만 고작 시선을 돌렸다고 피할 수 있을 만큼, 여동생을 잃은 오빠의 분노는 간단하지 않았다.
“셀린이 뭐 어쨌다고? 어서 말해 봐.”
“나는, 그냥…….”
무어라 말은 하고 싶었는데.
입술을 달싹이다가, 팔을 들었다가, 끝내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푹 숙이는 수밖에.
범아귀(엄지와 검지 사이)가 내 눈가를 덮는다.
“나는, 그냥 셀린을 구하고 싶을 뿐이야… 그게 당면한 문제니까. 내 목숨은 그래도 몇 주의 여유가 있잖아.”
“셀린을 그 꼴로 만들어 놓고.”
탁, 하고 술잔을 내려놓으면서.
레토는 상체를 앞으로 살짝 기울였다. 음영이 진 눈동자는 무섭도록 냉철하기만 했다.
“그러고도 그딴 말이 나와? 어떻게든 할 수 있다고? 그럼 셀린은 왜 그렇게 됐는데? 그 잘난 ‘어떻게든’에 셀린은 포함되지 않았나 보지?”
“레토, 나는…….”
“너는 신이 아니라고 했어, 이안.”
온갖 감정을 꾹꾹 눌러담은 단언이었다.
나는 끝내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리는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어떻게든’ 될 일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몰리지도 않았을 거야. 그 ‘어떻게든’이 누적된 결과가 지금이거든. 더는 우격다짐으로 끝낼 문제가 아니란 말이야.”
분명 화가 났을 텐데도, 목소리에서는 마땅한 고저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나는 입을 열기가 힘들었다.
분노까지 참아가며 나를 설득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널 찾아오기 전에 이미 조사해 봤어. 최소한 통상적인 방법으로 네 심상을 되돌릴 수단은 존재하지 않아… 너와 비슷한 사례조차도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아마 나뿐만 아니라 제국 황실도 마찬가지였겠지? 그러니까 고집 그만 부리고……!”
“그럼 셀린은?”
마침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반문에, 레토의 인상이 재차 구겨졌다.
“셀린은 어떻게 하고? 검공께서 내게 셀린을 맡겼어… 그나마 소생의 가능성이 있는 건, 지금뿐이야.”
“네가 가면 뭘 할 수 있는데? 그런다고 셀린이 돌아오나?”
“해보지 않으면……!”
“또, 또!”
쾅, 하고 분을 이기지 못한 레토는 탁자를 내리치며 몸을 일으켰다. 온기를 잃었던 연녹색 눈동자가 불길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딴 가망 없는 도박에 네 목숨까지 걸라고?! 너한테 딸린 목숨이 한둘인 줄 알아?!”
“아무리 그래도, 셀린은 못 버려.”
“그럼 진작 버리지 말았어야지.”
숨이 턱, 막힐 만큼 날카로운 언어.
레토의 말솜씨는 여전했다. 상대의 상처를 사정없이 쑤셔대는 그 독설에 내 말문이 곧장 틀어 막혔다.
“나라고, 응……? 나라고 셀린을 구하지 싶지 않을까?”
악문 잇새를 비집고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옅게 떨린다.
그 마음을 외면할 수 있을 만큼 만취하지는 못해서.
나는 말없이 술병을 들었다. 벌써 몇 병째인지, 최소한 두 병은 넘었을 텐데.
“셀린은 다른 사람들한테 맡겨. 그리고 넌 치료에 전념하고… 그게 최선이야.”
“나 없이도 셀린을 구할 수 있다고?”
“그럼 너 있다고 셀린을 구할 수는 있고?”
논박은 모두 끝났다는 듯, 레토는 잔에 남은 술을 마저 들이켰다.
그는 뒤돌아서며 내게 말했다.
“내일이 되면 알아야 할 사람들한테 네 상태를 알릴 거야. 한동안 얼굴을 보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작별인사 정도는 준비해 둬.”
나는 술잔을 기울이는 것으로 대답을 갈음했다.
다만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나 없이 셀린을 구할 수 있다고?
그럼 엠마는 어떻게 하지? 당장 이틀 뒤에 셀린이 찾아온댔는데, 그 꼴을 멀리서 지켜만 봐야 한단 말인가?
심지어 저들은 미래에 대한 정보도 없는데.
내 입이 무심코 한 마디를 토해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죽겠다고?”
그까짓 심정 따위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레토는 그렇게 반문했다.
어느덧 등 뒤의 내게 시선을 던지면서.
“네 마음대로 해. 널 구하려고 몇 명이나 무언가를 희생했고, 이제 네 어깨에 얹힌 생명도 무수히 많지만… 네 좆대로 하라고, 이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