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645)화 (645/649)

   

   그러면서 레토는 서서히 뒤돌아섰다. 나를 향해서, 그리고 한 걸음.

   

   “그게 네 ‘책임’이냐? 넌 지금 네 잘못을 책임지겠다는 양 굴고 있는데, 틀렸어… 넌 그냥 책임감 있는 ‘척’을 하고 싶은 거야.”

   

   나와 레토의 거리는 그 이상 좁혀지지 않았다.

   

   우리 둘의 시선이 우뚝 마주치기에는 충분한 간극이었으니까.

   

   “네 죄를 모두 되돌리고 싶지? 그렇게 하면 책임을 다한 것만 같아서… 아니야, 이안. 그건 그냥 존나 이기적이고 비겁한 결론이거든. 결국에는 아무것도 책임지고 싶지 않아서, 당장의 의무조차 방기하고… 사소한 확률에 목숨을 쳐걸지. 너뿐만 아니라 모두의!”

   

   “레토.”

   

   내 나지막한 호명에도 레토의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다.

   

   단지 으득, 하고 이 갈리는 소리와 함께 한 마디가 그 잇새로 새어 나왔을 뿐.

   

   “그런데 이젠, 네 뜻대로 안 되니까 멋대로 죽어버리겠다고?”

   

   침묵, 정적, 아무튼 무엇이든 간에.

   

   그 짧은 시간 동안 나와 레토의 시선은 몇 번이나 허공에서 부닥쳤다. 물론, 끝내 레토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좆까, 이안.”

   

   이를 끝으로 레토는 다시 등을 돌렸다.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그가 내딛는 발걸음에는 어떠한 망설임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는 술이라도 더 마실까 싶어 위스키 병을 들었다가, 텅 빈 무게감에 짜증스레 한숨을 내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금 실감했다.

   

   도무지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예전에는 자그마한 돌파구라도 보였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막막한 미래만이 남아 나를 꾹 짓누르는 듯한 느낌.

   

   솔직히 말해서 레토의 독설 중 틀린 말은 없었다. 어쩌면 나도 내심은 알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내 선택이 무책임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러니 레토를 제대로 설득할 수 있을 턱이 있나.

   

   전망은 자꾸만 절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정녕 이대로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두 손으로 낯가죽을 쓸어내렸을 즈음.

   

   딸꾹,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떽!”

   

   낯선 어조를 쓰는 소녀와 함께.

   

   곧장 방을 나서려던 레토의 시선이, 서서히 뒤로 돌아갔다. 나 또한 그 소리의 진원지로 눈동자를 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곳에는 낯빛이 새빨갛게 상기된 황녀가 앉아 있었다.

   

   아차!

   

   허공에서 마주친 나와 레토의 눈은 동시에 한 가지 감정을 말하고 있었다.

   

   “두, 두리… 싸후는, 싸호는……? 아무튼, 딸꾹! 안 대여!”

   

   너무 논쟁에 몰입해 버렸다.

   

   설마, 황녀의 존재를 잊어 버리다니.

   

   멍청한 짓이었다. 하지만, 이는 황녀의 탓도 어느 정도는 존재했다. 조용히 눈치만 살피며 술만 홀짝이고 있는 소녀를 어찌 주목할 수 있단 말인가. 당연히 자연스레 우리의 의식 속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제 와서 후회해 봐야 늦은 뒤였다. 지금 당면한 문제는, 황녀가 만취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자고로 만취한 권력자가 품은 가능성은 무궁무진한 법이었으니까.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나는 그만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설마 술 먹고 딸꾹질을 하는 소녀의 비위를 맞추게 되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곧장 어조를 가라앉히고, 헛기침을 하며 아이를 달래는 투를 가장했다.

   

   “싸우다니, 무슨 참담한 말씀을… 단지, 절친한 친구 사이에 의견 교환이 있었을 뿐입니다.”

   

   “에? 아니, 아니혔는데……?”

   

   얼빠진 소리와 함께 고개를 갸웃한 황녀의 시선이 레토를 향했다. 그러자 레토는 급히 신색을 가다듬더니, 한 치의 거짓조차 말하지 않는 충신 같은 낯빛을 꾸몄다.

   

   그 매끄러운 말솜씨만큼이나 연기에도 능한 레토다웠다. 내가 속으로 헛웃음을 삼키는 사이, 그는 망설임 없이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네, 그렇습니다. 전하. 동부의 자그마한 지방에서 함께 나고 자란 사이라 종종 이렇게 되더군요. 우리 지방에서 절친한 친구 사이에는 주로 이렇게 대화를 나눈답니다. 목소리가 높아지다 보니 오해를 산 적이 몇 번 있죠. 하하하…….”

   

   물론 헛소리였다.

   

   도대체 어느 지방의 문화가 이토록 이질적이란 말인가. 남부 열왕국의 소수 부족이나, 호탕하기로 유명한 북부인들이 아닌 이상 그럴 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레토가 뻔뻔스레 거짓을 입에 담은 까닭은 하나였다.

   

   어차피 내일이 되면 기억도 하지 못할 테니까.

   

   혀까지 꼬일 정도로 만취한 소녀였다. 다음날까지 기억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우리 둘은 이미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정마할? 정말이에여, 이한… 딸꾹. 이한 굥?”

   

   “그렇습니다, 황녀 전하. 혹시 저를 믿지 못하십니까?”

   

   “에에.”

   

   황녀는 눈동자의 초점조차 잃은 채 허우적거리며 부정을 표했다.

   

   일단은 상황을 넘길 만한가.

   

   그렇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의 긴장을 풀었을 때.

   

   “토, 통샹… 통샹저긴? 방법, 아니면 되자나여?”

   

   스르륵 탁자에 머리를 박으면서 황녀가 내뱉은 말이었다.

   

   나와 레토의 시선이 다시금 만취한 소녀를 향했다. 지금 무슨 말을 했는지, 단숨에 떠오르는 맥락이 하나 있었다.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

   

   그 이야기의 연장이 아닐까, 하는 내 추측은 이내 사실로 밝혀졌다.

   

   “전뮨… 전뮨가? 잇셔… 아캬데히에…….”

   

   “전문가요? 무슨 전문가 말입니까?”

   

   “금, 지된 주술…….”

   

   당황한 나와 레토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난생 처음 듣는 정보였다. 도대체 황녀는 왜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단 말인가.

   

   문을 박차고 나가려던 레토는 곧장 발을 돌려 후다닥 황녀에게 달려들었다.

   

   “전하, 전하!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금지된 주술의 전문가라니요? 그럼 대륙 공적 아닙니까?”

   

   “비밀… 으응, 안 되뉸데… 금술, 위험해서… 인류 반역 행위…….”

   

   “일단 말이라도 해보십시오. 누가 금술을 쓴답니까?”

   

   드디어 발견된 또 하나의 실마리였다.

   

   고롱고롱 코를 콜며 잠들려던 황녀는 몽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인델.”

   

   비교적 명확한 발음으로.

   

   “아드리, 금지된 주슐… 조샤관이니 분명 연구, 보았을 텐데…….”

   

   쿠울.

   

   그렇게 소녀는 곯아떨어져 버렸다.

   

   폭탄과 같은 정보를 남긴 채로.

   

   내 눈이 자연스레 레토를 향했고, 레토는 흥분을 다스리기 위함인지 두 손을 모아 기도하듯 제 하관을 덮고 있었다.

   

   그러기를 얼마쯤.

   

   “……좋아.”

   

   그는 내게 시선조차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일단 알아보자. 그 ‘금지된 주술’이란 거.”

   

   “그런다고 내 몸이 나을 수 있을까?”

   

   의외로 비관적인 내 전망에도, 레토는 내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연녹빛 눈동자가 한꺼풀 깊어진다. 그의 뇌리에서는,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연상 과정이 이루어지고 있을 테지.

   

   “당연히 육체는 낫지 않지. 결국, 문제는 심상이니까. 심상을 고치지 않으면 네 몸도 치료가 불가능해.”

   

   “그렇다면…….”

   

   “만일, 억지로라도 마스터에 오를 수 있다면?”

   

   레토의 새로운 대안에 내 입이 꾹 다물어졌다.

   

   억지로 마스터에 오른다?

   '마스터'란 어떤 존재인가.

   

   그 자체로 물리법칙에 균열을 일으키는 괴물들이었다. 심상으로 현실을 왜곡하고, 그 힘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단신으로 군단을 상대할 수 있는 이들.

   

   편법을 통해 그만한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그딴 건, 불가능하다.

   

   그래야만 할 텐데, 내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인물이 하나 있었다.

   

   ‘흡혈귀’.

   

   그녀는 본신의 힘을 온전히 쓰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계와 주술을 조합하여 한정적이나마 마스터에 준하는 힘을 다루지 않았던가.

   

   일순 멍해진 내 뇌리 속에 레토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온다.

   

   “한순간이라도 좋아… 마스터에 오르는 순간, 네 난잡하던 심상은 통합될 테니까. 혹여 경지가 되돌아가더라도 최소한의 안정성은 확보할 수 있을 거야.”

   

   죽지는 않을 만큼.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나는, 살기 위한 방도를 찾고 있었으니까.

   

   나머지 문제는 생존에 비하자면 부차적인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야, 일단 살고 나서 고민해 봐도 늦지 않았으니까.

   

   목숨을 부지할 가능성의 등장에 내 낯빛이 일순 밝아졌다. 이는 레토도 다르지 않은지, 그의 손이 미미한 흥분으로 떨리고 있었다.

   

   “좋아, 좋아… 이안, 너는 일단 내일 아인델 총주교를 찾아가.”

   

   “나 혼자서?”

   

   “그럼, 나 같이 생판 모르는 남이 가서 말할까? ‘당신 아들 뒈진 이유에 대해 좀 말해주세요.’라고? 개소리 말고, 어떻게든 정보를 캐내. 마침 넌 암흑교단의 주된 목표이기도 하니까 비술에 대비하기 위해서라고 둘러대도 될 거야.”

   

   단 몇 초만에 미래의 계획이 속속들이 세워지고 있었다.

   

   레토는 술에 취한 와중에도 내게 경고하기를 잊지 않았다.

   

   “대신, 이건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된다… 인류의 영웅이 금지된 주술을 써서 목숨을 연명한다? 충격이 클 거야. 당연히 정치적으로도 중대한 약점이 될 테고.”

   

   지금 정치적인 약점을 운운할 때인가.

   

   일순 이러한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우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껏 레토의 말을 들어서 손해 본 적은 없었으므로.

   

   그렇게 술잔을 기울인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

   

   제국의 제5황녀, 시엔.

   

   그녀는 탁자 위에 엎어진 채로 기억을 되짚어 나갔다. 오늘 이안은 술에 취해 있었고, 절친한 친구를 앞둔 탓에 실언을 하기도 했다.

   

   만일 황녀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면 그러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소녀는 이내 그들의 인지 내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그 덕에 들을 수 있었다.

   

   ‘세리아는 떠난 후에 연락 한 통이 없지, 엠마는 또 어떻고? 무엇보다 셀린이……!’

   

   가만히 눈을 감은 채 중요한 단어들을 정초한다.

   

   세리아, 엠마, 셀린.

   

   이중에서 가장 이질적인 인물은?

   

   자문할 것도 없었다. 이 사건에 직접 연관되지 않았으면서, 그에 못지 않은 비중으로 이안에게서 언급된 여인.

   

   두근거리는 시엔의 심장이 외치고 않았다.

   

   그 평민 계집애를 찾아가야 한다고.

   

   동상이몽(同牀異夢)의 밤이 깊어 간다.

   

   달빛을 가린 구름을 치워 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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