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래에서 온 연애편지 (646)화 (646/649)

   

   

   **

   

   

   “어라, 달빛이…….”

   

   공터를 거닐던 기사의 입에서 자그마한 탄성이 새어 나왔다. 내내 구름 속에서 몸을 감추고 있던 아루스의 눈이 그 자태를 드러내자, 어둑하기만 하던 대지에 안개처럼 빛이 내려앉았다.

   

   그래봐야 곁에 있던 동료 기사까지 감동시키지는 못했지만.

   

   천성적으로 감수성이 부족한 동료는 이내 헛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고작 달빛 가지고 왜 그래? 요즘따라 감수성이 예민해지셨어.”

   

   “그런가?”

   

   기사가 고개를 갸웃하자, 동료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이랬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이.

   

   다만 그 까닭마저 짐작하기 힘든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외로움이라도 타나 보지. 얼마 전에 딸 낳았다며?”

   

   기사는 동료의 말에 쓴웃음을 머금는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그 말대로였다.

   

   얼마 전 득녀를 한 기사는 한창 가족이 그리울 무렵이었다. 그 자그마한 핏덩어리의 얼굴이 어찌나 그리운지, 고작 몇 달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딸아이의 모습을 누가 중계라도 해주었으면 할 정도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대륙은 전례 없는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고, 기사가 맡은 임무도 이와 무관하지는 않았다.

   

   아카데미의 파괴된 숲.

   

   ‘대마녀’와 ‘흡혈귀’가 정면으로 충돌한 이곳은 곳곳에 불길한 마력이 흐르고 있었다. 아직도 흡혈귀의 혈족들이 설치한 결계의 잔해가 남아있다는 뜻이었다.

   

   기사와 동료는 이를 제거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이 작업도 벌써 몇 달째 진행 중이지만, 여전히 결계의 잔재를 모조리 치우지 못했다는 점이 놀랍기까지 했다.

   

   어떻게 아카데미에 숨어들어 이만한 준비를 마쳤단 말인지.

   

   기사는 소름이 돋으면서도, 혹여 그들을 마주칠까 두려워 성실히 탐색에 임하고 있었다. 음산한 분위기의 공터는 마치 어딘가에 위험을 숨긴 듯 보였으니까.

   

   물론 상념은 길지 못했다.

   

   동료가 쿡쿡, 팔꿈치로 기사를 찌르며 장난스레 물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초상화 보여주면 안 되냐?”

   

   “얼마 전에도 봤잖아?”

   

   “너보다 제수씨를 너무 닮아서 그런다, 임마. 네 얼굴만 보니까 이제 슬슬 헷갈리잖아!”

   

   그러면서 킥킥대는 동료를 보고, 기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손을 허리춤으로 향했다.

   

   주머니에는 가족을 그린 소중한 초상화가 들어 있었다. 일부러 소형화까지 마친 물건으로, 기사는 언제나 힘이 들 때면 그 그림을 보며 힘을 내곤 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마땅히 주머니를 뒤지고 있어야 할 기사의 손은 허공을 스치고 말았다.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아래를 내려다 본 순간.

   

   없었다.

   

   주머니가, 다리가, 아니 하반신이.

   

   기사의 눈동자가 멍하니 측면을 향하고, 그곳에는.

   

   웃는 낯을 한 채 허공을 나는 동료의 골통이 보이고 있었다. 목과 완전히 분리된 채로.

   

   “으, 아……!”

   

   “쉿.”

   

   팍, 하고.

   

   핏빛의 채찍이 한껏 벌려진 양 뺨을 관통하고 목을 강하게 조였다. 공포에 젖은 기사의 눈동자가 등 뒤를 향하자, 그곳에는 놀랍도록 고혹적인 금빛 눈동자가 위치하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 이를 부정하기라도 하는 듯한 새하얀 피부까지.

   

   여인은 지독히도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 내가 막 탈출해서… 힘이 좀 없거든? 우리 ‘거래’를 하자.”

   

   기사는 바둥거리며 목을 죈 핏빛의 채찍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으나, 불가능했다. 이미 하반신을 잃은 지 오래였으니까.

   

   만일 단련된 기사가 아니었다면 지금껏 목숨을 부지하지도 못했으리라.

   

   부릅떠진 눈동자를 마주하여, 여인은 싱긋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너는 내게 피와 영혼을 바치는 거야. 대신, 그 대가로…….”

   

   여인의 새하얀 손가락이 서서히 사내의 눈꺼풀을 뒤덮고.

   

   “네가 가장 바라마지 않던 꿈을 줄게.”

   

   달콤한 속삼임과 함께 사내의 고개가 힘없이 꺾였다.

   

   다만 그의 눈동자는 안온한 빛을 품고 있었는데, 마치 가족의 품에 되돌아 가기라도 한 눈빛이었다.

   

   소녀에게는 별 상관 없는 이야기였지만.

   

   시체로부터 검붉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 소녀는 자연스레 그 아지랑이의 한가운데에 서서, 엉망이 된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아, 진짜 죽을 뻔했네… 망할 ‘질투’ 년. 얌전히 죽어 줬으면 좀 좋아?”

   

   시간이 지날수록 두 기사의 시체는 메말라 가고 있었다. 반면, 소녀의 피부에는 혈색이 점차 되돌아왔으며 생채기도 아물어 갔다.

   

   이윽고 비틀린 호선을 그리는 소녀의 입술.

   

   “그래도, 뭐…….”

   

   달을 올려다보는 소녀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 망막에 비치는 것은 달이었으나, 실제로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은 짐작키가 힘들었다.

   

   나지막한 읊조림이 고요에 잠긴 밤을 두드린다.

   

   “늦지는 않았으니까.”

   

   파스스-

   

   서서히 생기를 잃어 가던 시체들은, 끝내 갑옷째로 재가 되어 버렸다. 소녀는 흩날리는 잿가루에 일말의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다만 기지개를 쭉 펴며, 하늘을 향해 외쳤을 뿐.

   

   “아아, 우리 오빠랑 아이 만들고 싶다!”

   

   밤은 마찬가지로 깊어 가고 있었다.

   

   셀린의 습격까지는, 아직도 이틀.

   

   

   **

   

   헐떡이면서, 엠마는 눈을 떴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이불과 베개를 잔뜩 적신 끈적한 습기에 절로 불쾌한 감각이 오를 만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엠마는 당장 이불을 빠져나오거나 하지 못했다.

   

   우선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킬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악몽.

   

   그래, 또 다시 악몽이었다. 벌써 몇날며칠이나 엠마를 물고 늘어지는 꿈.

   

   마치 악질적인 포식 어류에 물리기라도 한 듯한 느낌이었다. 끝없이 떠오르는 기억 속에서 유쾌한 추억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냉소, 절망, 원한.

   

   혹시라도 가슴에 품을까 두려운 감정뿐이었다. 엠마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내저으며, 늘어진 몸을 억지로 일으켜 침대를 빠져나왔다.

   

   냉수를 들이키고, 냉수로 세안을 하고, 땀에 젖은 몸을 씻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거친 뒤에야 엠마는 비로소 침착을 되찾을 수 있었다. 사제들이 어째서 중요한 의식을 앞두고 몸을 깨끗이 하는지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다만, 끝내 엠마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장면은 있었다.

   

   이안이 보였던 것 같은데…….

   

   어째서 그토록 흉측한 꿈에 이안이 나오는 걸까. 심지어 그는 어딘가 낯설어 보이기까지 했다.

   

   또한 몸부림을 치며 의식을 되찾을 때 들었던 목소리들.

   

   ‘아직도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아직은.’

   

   ‘아니, 괜찮아.’

   

   희미한 시야 너머로 보이던 눈동자.

   

   ‘잠깐 정도는, 괜찮을 거야.’

   

   다시금 악몽을 떠올린 엠마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직전의 꿈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이질적인 꿈은 언제나 그 눈동자를 보며 끝을 내곤 했다.

   

   옷매무새를 마저 정리한 엠마는 후우, 하고 숨결을 가다듬었다. 어서 끔찍한 꿈을 털어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는 것이겠지만.

   

   이내 엠마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이는 너무나 대단한 사람이라, 평민 계집애에 불과한 엠마가 시간을 뺏기조차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도 나름대로 바쁠 테니까.

   

   그렇게 털어도 털어도 털어내지지 않는 미련을 달래고 있을 무렵.

   

   똑똑.

   

   이른 아침부터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엠마의 시선이 우뚝 멎었다.

   

   누구지?

   

   그러한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해소되었다.

   

   “저에요.”

   

   상대가 문을 열기도 전에 제 소개를 했으므로.

   

   “제국의 제5황녀, 시엔.”

   

   다소 음울해 보이는 목소리였다.

   낯익은 길목에 낯선 침묵이 감돈다.

   

   벌써 3년이 넘도록 걸어 온 아카데미의 중앙대로였지만, 이처럼 어수선한 분위기는 처음이었다. 걸음을 옮기는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는 기묘한 광경이라니.

   

   수백에 달하는 행인들이 조성하는 정적의 조감(鳥瞰)은 기괴한 행위 예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일대를 아우르는 감각을 지닌 이들만이 목도할 수 있는 풍광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겠지.

   

   ‘흡혈귀’가 아카데미를 덮친 지는 고작 몇 달밖에 되지 않았다. 희생자도 나왔고, 아직 사건의 후속 조치도 끝나지 않은 마당에 새로운 대피령이 떨어진 것이다.

   

   심지어 이유조차 알려 주지 않으면서.

   

   일각에서는 아카데미에 임시 휴교령을 내려야 한다는 소리까지 들려 올 정도였다. 먼 옛날 제국의 정복 전쟁 이후, 전례가 없던 일이긴 했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누구에게나 제 피붙이의 목숨은 소중했으니까.

   

   학부모들의 항의는 지당했다. 1년도 채 되지 않아 아카데미에서 벌어진 사건이 몇 건인가. 그러다 보니 아카데미의 상주 인구 사이에서도 균열이 감지될 수밖에 없었다.

   

   더는 일상을 유지하기 힘들지도 모르겠다는 의심.

   

   아카데미는 시작에 불과했다. 이제 곧 온 대륙이 그러한 의문을 품기 시작할 테고, 그때부터 진정한 의미의 전쟁이 시작되리라.

   

   암흑교단은 언제나 사람의 여린 부분을 파고드니까.

   

   물론 지금의 내가 걱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오, 형제여.”

   

   새하얀 대리석으로 지은 신전의 집무실,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자리에 노인 하나가 서 있었다.

   

   빛을 투과하는 흰머리와 수염이 인상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허름한 사제복과 수수한 묵주를 갖추고 있었는데, 단출한 차림새만 보아서는 시골의 토박이 사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진정한 신분은 영 딴판이었지만.

   

   대륙에 퍼져 있는 수십 개의 교구를 총괄하는 거물이 바로 이 노사제였으니까.

   

   나는 그의 나지막한 부름에 고개를 숙임으로써 예를 다했다.

   

   “……아인델 총주교님.”

   

   “드문 일이군요. 그대가 나를 찾아오다니… 혹여 상의할 일이 생겼습니까? 그렇다면 곧 있을 회의에서 말씀하셔도 되었을 텐데요.”

   

   노인의 눈동자는 깊고 깊어서 그 바닥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 안면 근육에 일어나는 미묘한 변화를 보고, 그가 내 방문을 의외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추가 가능했다.

   

   혹은 저마저도 능청에 불과하거나.

   

   실로 대하기 껄끄러운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아쉬운 쪽은 나였기 때문에, 아인델 총주교의 의문에 답하는 내 목소리는 정중했다.

   

   “개인적인 용무가 있어 찾아뵀습니다. 그런데…….”

   

   이대로 곧장 본론을 꺼내려던 내 눈이 슬쩍 실내의 풍경을 훑었다. 무언가 위화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신전의 집무실은 나 또한 몇 번 와본 적이 있었다. 성녀가 머물고 있을 때도 많았고, 고위 사제들도 비슷한 개인실을 배정받곤 했으니까.

   

   하지만 오늘의 집무실은 무언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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