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13화 (13/220)

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13)

나는 계단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역시 소문이 퍼졌다.

그만한 금액을 하루 만에 쓸어 가는 경우는 흔하지 않으니 당연했다.

“들었어. 레오랑 레오 수행원이라며. 둘 다 마법사라 그렇게 쓸어 담은 것 같아.”

“레오라고?! 갑자기 왜 간 거야?”

“레오 말로는 그 수행원이 들르고 싶어 해서 간 거라는데. 교황령에서 여행 온 사람이래.”

“그래? 이름은 들은 거 없어? 마법사면 그쪽도 귀족일 텐데.”

“몰라. 외국 성씨라 기억이 안 나. 근데 그쪽 관리인이 말하기로는 귀족 성씨가 아닌 것 같다던데.”

“레오랑 같이 다니는 마법사가 귀족이 아닐 리가 있나? 가명인가 보네.”

“그렇겠지. 가면도 쓰고 왔대.”

“응?”

나는 턱을 매만졌다.

귀족 성씨를 쓰면 꼬리를 밟힐 게 눈에 선해 내 원래 성씨를 적었다.

소식이 교황령까지 퍼지는 건 순식간일 테니, 괜히 실제 귀족 성씨를 사용해 가문 간 트러블로 번지게 할 필요는 없었다.

‘사실 외국인 마법사가 수도까지 들어와 이런저런 활동을 하는 것도 일단 한번은 확인받아야 하는 일이긴 한데.’

그런 체계까지 잡혀 있지는 않았고, 소설에서도 중반 즈음에 주인공이 황실에 폭탄 같은 사건을 하나 던져 주고 나서야 부랴부랴 법이 개정된다.

그전까지는 그저 ‘이만한 가문이 허가를 내려 줬다면 신원은 확실하겠지’ 하며 느긋하게 굴기만 했다.

‘물론 레오 쪽 가문에서는 금시초문이겠지….’

허가해 준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이건 레오가 알아서 처리했을 테니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일단, 지금으로서는 예상 범위 안에 있다는 것. 그 정도면 충분하다.

나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학생들의 대화를 뒤로하고 자리를 떴다.

정오가 되어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소식은 금세 학교를 비롯한 수도 전체에 퍼졌다.

“이거 들었어?! 그 파란 눈의 사냥꾼이 내일도 거기로 나올 거라는데?!”

“커흡…."

강의실을 찾아 이동하던 나는 어디선가 들려온 외침에 사레에 들렸다.

‘…방금 그 호칭은….’

나를 말한 건가? 그보다 누가 내일 간대?

한번 의식하기 시작하니 주위에서 비슷한 소리가 몇몇 들려오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상태창.’

루카스 르네 아스카니엔

칭호: ???의 사냥꾼

체력: -3.5 (+0.3)

정신력: -8.2 (+0.5)

마력: ?

기술: +1.015 (+0.5)

인상: -10

행운: -6.985 (+0.5)

특성: 여명777, 신력

그냥 혹시나 하는 마음에 켜 봤는데 진짜 칭호가 바뀌었다. 여기 기준으로 내가 어떻게 불리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건가….

‘칭호 저 모양인 걸 보면 당분간은 계속 저러겠네.’

심지어 아직 키메라 이리는 보도되지도 않았다. 상부에서 그 건을 보도하기로 결정한다면, 지금의 열기는 더욱 오래 갈 것이다.

나는 신문을 들고 다니는 학생들을 흘끗 보며 생각했다.

* * *

알고 보니 그 호칭은 학생들이 알아서 지어 부른 게 아니라, 최초로 보도했던 신문에서 사용한 호칭이었다. 다른 신문사에서도 똑같은 이름을 쓰는 걸 보니 이미 완전히 굳은 듯했다.

사실 상황만 따지자면 나보다는 레오의 상황이 더욱 심각했다.

나야 그냥 이해할 수 없는 이름을 좀 참으면 되지만, 레오는 수많은 학생들의 질문과 관심을 그대로 받아야 하니까.

역시나 길에서 마주칠 때마다 안색이 어두워져 있었다. 늘 웃는 놈이 험상궂은 인상이 되었다면 이미 말 다했지.

다음 날 저녁, 레오는 훈련장 바닥에 털썩 앉아 한참을 말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레오를 내려다보다 한마디 던졌다.

“괜찮냐?”

“아니.”

레오가 10년은 늙은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훈련장에 모였지만, 저걸 보니 오늘은 딱히 훈련할 컨디션이 아닌 것 같다.

‘내내 질문 공세에 시달렸을 테니 어쩔 수 없지.’

이런 의미에서는 신원을 감추고 다니는 게 꽤 이득이긴 하다. 나는 좋은 쪽으로 해석하며 그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레오가 힘없이 말을 꺼냈다.

“오늘 자 일간지 다섯 종류에 우리 기사 뜬 거 알아? 다들 뭐 이렇게까지…. 어제는 인터뷰 요청만 세 건이 왔어.”

“네가 고생이 많다.”

이만하면 적당히 줄어들 거라 예상했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점점 더 커졌다.

‘신비주의 때문이겠지.’

그냥 레오와 얼굴 까인 레오 하인이 같이 마수 토벌을 했다, 정도면 레오에 대한 미담 정도로 끝이 났을 테지만, 여러모로 수상한 점만 모인 인간 탓에 사람들은 더 광적으로 이야기를 불리고 있었다.

그리고 조사 결과 그 이리는 제국에서 보이는 종류가 아니었고, 황실은 범인이 플레로마에 속한 자일 가능성이 크다고 발표했다.

사이비 집단이 엮인 범죄에 웬 마법사 둘이 시기 좋게 나타나 사고를 막았으니 화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안 들켜서 다행이네.’

왜 하필 플레로마를 들먹이냐.

플레로마가 아닌데도 이미 내가 그런 이미지로 몰리고 있는 상황이니, 여기서 들키면 정말로 끝장이었다.

그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니 지금은 꽤 좋은 상황이었다.

“아.”

레오가 옆에 있던 소포를 발견하고는 내게 건넸다.

“이거 주는 거 잊을 뻔했네. 오늘 도착했어.”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네.”

“최대한 빨리 만들어 달라고 했거든. 그리고 원래 만드는 데에는 얼마 안 걸려.”

그렇다 해도 하루 만에 여기까지 날아올 줄이야.

나는 레오가 건넨 상자를 받아들었다.

“고맙다.”

“뭘, 살아서 열심히 마법 써야지.”

“뭔….”

“응?”

“됐다.”

‘건강해져야지’도 아니고 ‘열심히 마법 써야지’는 또 뭔 소리냐.

매번 느끼지만 마법에 미친놈답다.

나는 레오의 말을 무시하고 포장을 풀었다.

“와….”

레오가 속포장을 보면서부터 감탄을 하더니, 물건을 보고 난 후에는 조금 다른 의미로 감탄하기 시작했다.

“우와, 진짜 평범하네.”

기억에 제대로 남지 않을 만큼 평범하게 생긴 손목시계와 은으로 만든 목걸이 줄이 들어 있었다.

피부를 관통하도록 만들어야 가장 좋은 효과를 내기에, 피부 아래에 작은 칩 비스름한 것을 투입하거나 귀걸이 등을 이용한다.

전자는 심리적 거부감이 커 시도하지 않았고, 그나마 나은 쪽이 후자였지만… 마법사가 귀를 뚫는 것은 누가 보아도 아티팩트를 쓰고 있다는 뜻이다. 형을 만났을 때 위험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도 손목시계와 목걸이 정도면 신체에 밀착하는 종류이므로 효과가 나쁘지는 않았다. 효과를 높이기 위해 아티팩트에 피와 마력을 넣어 축성하기도 했고.

이 중 시계는 몸에 도는 마력을 감추는 용도, 그리고 목걸이 줄은 코어를 안정화하는 도구다. 지금 쓰는 목걸이는 펜던트만 아티팩트라 줄을 바꾸어 써도 문제 되지 않았다.

전부 거금을 들여 마력 유출을 철저히 차단해 일반 장신구처럼 보이게 하는 기능을 넣었는데, 그럼에도 아직 1,000만 원가량이 남았다.

‘다시는 안 나가야지.’

마법사에게 천은 금방 쓰고 사라질 돈이겠지만… 내가 또 마수 때려잡으러 가나 봐라. 나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빨리 써 봐. 궁금하다.”

“그래.”

나는 레오의 재촉에 시계를 대충 손목에 감았다.

“…!”

나의 피와 마력을 담은 덕인지, 피부를 관통한 물건도 아닌데 알 수 없는 감각이 손목에 감돌았다.

“…뭔가 끌어당겨지는 것 같긴 한데, 그 외에 다른 건 안 느껴지네?“

“아냐, 마법 한번 써 봐.”

레오가 흥분한 얼굴로 팔을 휘적이며 훈련장 저편을 가리켰다. 나는 완드를 뽑아 레오가 가리킨 곳에 마법을 쏘았다.

콰앙―!

“오.”

평소와 다르게 무언가 길이 만들어진 느낌이었다. 여태 비포장도로를 달리고 있었다면 지금은 좀 후지지만 어쨌든 포장은 된 도로를 달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너도 느꼈지? 그리고 마법 쓰기 전후로 네 주위에 감도는 마력이 많이 죽었어. 훨씬 깔끔해졌다고.”

“그래? 출력한 양은 평소랑 같았는데.”

“그럴 거야. 이건 출력한 다음에 흩어지는 마력만을 죽이는 거니까.”

“좋네.”

나는 다시 상태창을 불러냈다.

루카스 르네 아스카니엔

칭호: ???의 사냥꾼

체력: -3.5

정신력: -8.2

마력: ?

기술: +1.015 [+4.015]

인상: -10

행운: -6.985

특성: 여명777, 신력

‘음?’

기술이 3점이나 올랐다고?

어딘가 깔끔해졌다는 레오의 말은 사실일 수밖에 없었다. 찔끔찔끔 소수점 단위로 오르다 시원하게 확 올라간 숫자를 보니 놀라웠다.

나는 완드를 다시 허리춤에 쑤셔 넣고 목걸이 줄을 만져 보았다.

이것도 아직 별다른 효과는 느껴지지 않지만… 막상 쓰면 또 다를지도 모르지.

목걸이 줄을 바꾸고 펜던트를 셔츠 안에 넣어 정리했다.

레오가 주위의 마력을 느끼기 위해 완드를 살짝 휘젓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시계 효과 때문에 그런가, 이건 나한테는 곧바로 느껴지지는 않네.”

“…그래?”

하지만 나에게는 아니다.

나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심장께를 꾹 눌렀다.

여태까지와 달리 코어가 존재 자체를 인식할 수 없을 만큼 가볍게 변했다.

루카스 르네 아스카니엔

칭호: ???의 사냥꾼

체력: -3.5 [-0.5]

정신력: -8.2

마력: ?

기술: +1.015 [+4.015]

인상: -10

행운: -6.985

특성: 여명777, 신력

‘체력도 3점 올랐어.’

손에서 불꽃을 피워 보았다.

마법을 쓸 때마다 느껴지던 미세한 균열과 충격은 이제 없었다. 아니, 그게 균열이고 또 충격이 주어진 상태라는 것 자체를 몰랐다.

그런데….

‘원래 이런 거구나.’

이게 평범한 코어가 작동하는 방식이겠지.

정확히 표현하자면 -0.5의 코어가 이런 감각이다.

나는 코어 없는 21세기 인간이고, 루카 역시 코어가 손상된 지 오래되어 어떤 상태가 건강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 일로 확실히 알게 되었다.

여태까지와는 달리 호흡과 마력 운용이 훨씬 자유로워졌다.

나는 펜던트를 셔츠에서 빼 피부에서 걷어 냈다.

아티팩트가 코어에서 멀어지자 다시 가슴이 콱 막힌 듯 무거워졌다.

이걸 쓰기 전에는 몰랐지만, 건강한 코어의 감각이 어떤 것인지 알아버린 이상에는 절대 이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코어를 완전히 치료하면 이 이상으로 좋아지겠네.”

“뭔가 다른가 보네? 잘 골라서 다행이다.”

강화제를 만들면 이런 감각을 아티팩트 없이도 느낄 수 있겠지.

치료제를 만든다면 강화제의 약효가 떨어진 뒤에도, 그러니까, 영구적으로 건강한 코어로 살 수 있을 거고.

약이 만들어지기만을 기다리는 건 무모했다.

정상적인 코어를 내버려 두고 자칫하면 잔뜩 손상된 코어로 마법을 배울 뻔했다.

나는 컨디션이 후져진 레오를 기숙사에 보내고 혼자 마법을 연습했다.

슬슬 숨이 차기 시작할 때쯤 시계를 확인했다. 훈련장에 진입할 때만 해도 자정이었는데, 벌써 새벽 세 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무리 마법에 체력이 많이 쓰인다지만 세 시간은 조금 아쉬웠다. -0.5의 체력으로도 이게 한계인 듯했다.

‘그래도 내일을 위해서 쉬어 둬야지.’

나는 기숙사로 이동해 가방을 책상에 던져놓고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음?”

시선이 닿은 곳에 이질적인 무언가가 끼어 있었다.

툭―

문을 열자 쪽지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대충 접힌 노란 종이를 펼치자, 마찬가지로 대충 갈겨 쓴 글씨가 나타났다.

[다 알고 있어.]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나는 싸늘한 눈으로 쪽지를 바라보았다.

[지금 바로 기숙사 밖으로 나와.]

나는 쪽지를 노려보다, 힘을 풀고 웃음을 터트렸다.

뭘 알고 있다고 하는지는 모르지만….

내 약점을 잡고 있다면, 어디 언론 기관에 가서 나도 모르게 내 정체를 털지 않고 나와 대면할 생각을 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지금으로서는 마수 사냥이 가장 유력한가.’

그 일을 알고 불러냈을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쪽에서는 별다른 증거를 잡지 못한 채 심증만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에는 무슨 약점을 잡은 줄 알고 나왔냐며, 이런 경고에 나왔다는 것 자체가 그 사냥꾼이라는 걸 입증하는 증거라고 추궁할 것이다.

만약 그렇게 나온다면… 내 쪽에서는 그냥 모르쇠 하면 된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루카라면 가능하다.

무슨 일인지도 모르면서 일단 나오라니까, 무슨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 같으니까 일단 따르고 보는 놈이니까.

‘물론 그건 지난 1년의 이야기지만….’

어차피 증거도 없겠다, 그냥 뭔진 몰라도 나오라니까 나왔다고 웅얼거리면 그 성격상 상대도 확신을 하기 쉽지 않다.

‘나가서 생길 문제는 해결이 가능한 상황이지.’

그럼 당연히 나가야 한다. 이 경우는 선생에게 말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이런 일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뭔가 미심쩍음을 아는 놈이 제 발로 내 앞에 나타나 주겠다면 나야 환영이다.

나는 망설임 없이 쪽지를 다시 문틈에 끼워 넣고는 계단으로 향했다.

기숙사 정문을 열고 나서자, 한 학생이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저… 혹시….”

말하는 걸로 봐서 쪽지를 보낸 놈은 아닌 것 같고.

말없이 그를 빤히 바라보자 학생이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내 눈치를 살폈다.

“왜요.”

“그, 쪽지 보셨죠? 마법학과 선배님들이 데려오라고 하셔서요.”

“정확히 누군데요?”

“저도 잘….”

그냥 길에 다니는 사람을 붙잡았나 보네.

보통은 모르는 사람이 누구 데려오라는 부탁을 하면 거절할 텐데 여기 있는 걸 보니… 위협이라도 했나.

말없이 앞쪽으로 손을 휘젓자 학생이 재빨리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이 지나도 도착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학생의 뒤에 대고 말을 툭 던졌다.

“꽤 멀리 가네요?”

“예?! 아, 예…. 저도 잘 몰랐는데 그러네요. 그래도 이제 곧 도착할 거예요.”

이미 학교의 주요 건물은 저 멀리 작아진 상태였다.

주위에는 이제 쓰지 않는 건물과 학교 외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선배들이 따로 저에 대해 말한 게 있어요?”

“아, 아뇨. 그냥 선배님께서 곧 나올 테니까 데려오라고만 하셨어요.”

“그렇군요.”

그때, 저 멀리서 사람 네댓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폐건물이라 안에 들어가지는 못했는지, 건물의 가운데 공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하자, 학생이 사람이 서 있는 곳까지 도착하기도 전에 황급히 뒤돌아 자리를 떴다.

나는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뭐야…. 진짜 오네.”

“야, 나한테 오만 펠 넘겨.”

“이거 미친놈 아냐, 어쨌든 네 말대로 쪽지 썼잖아.”

학생들이 저들끼리 킬킬댔다.

내가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기만 하자, 학생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야.”

한참 내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학생이 턱을 앞으로 쭉 뺐다.

“너 여기 왜 왔어? 뭐 찔리는 거 있어?”

“나오라며.”

내 심드렁한 대답에 뒤에 서 있던 사람 몇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 새끼 뭐래….”

“내 말 맞잖아. 그냥 아무것도 안 쓰고 나오라고 해도 나온다니까? 변한 거 하나도 없어.”

“그러네.”

“그러니까 오만 내놓으라고.”

“XX, 안 줘. 좀 닥쳐 봐. 너 때문에 분위기 못 잡잖아.”

놈들이 서로 피식대더니 갑자기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같은 반 학생들이었지?’

오다가다 자주 마주친 얼굴들이다.

레오와 같은 상위권 학생들과는 거리가 멀다.

마법은 쓸 줄 알아 이곳에 들어왔으나, 딱히 성적이나 인품 면에서 잘난 부분이 없으며 인간관계를 모조리 서열로 파악한다.

레오같이 집안도 성적도 좋은 학생들에게는 잘 보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지만, 루카처럼 누구나 꺼리는 대상은 어떻게든 발아래에 두려 애쓴다.

‘플레로마에 대해서는….’

딱히 두려워하지는 않는 것 같네.

나와 교류가 없는 바깥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교내에서는 내 성향을 알고 깔보는 이들이 몇 있었다.

‘그래도 수가 적은 걸로 아는데 운 나쁘게 이 새끼들하고 같은 반이네.’

역시나 루카의 짤막한 기억에도 끔찍한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1학년 때 루카는 쥐를 산 채로 먹었다는 소문에 시달린 적이 있는데, 그 소문을 만든 놈들이 이 학생들이었다.

본격적으로 루카를 깔보기 직전, 루카가 어느 정도의 장난까지 가만히 당하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그때 가장 앞에 선 놈이 목소리를 깔며 가까이 다가왔다.

“별 건 아니고. 네가 좀 이상해진 것 같아서.”

“…….”

“요즘 좀… 무슨 일이라도 있어?”

뒤쪽에 앉아 낄낄대던 학생이 일어나 내 어깨에 팔을 올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봐? 원래 안 그러잖아.”

“하하하하! 눈깔 생생하네. XX, 무서워서 못 쳐다보겠다.”

그 말에 나는 짧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없으면 섭하지. 이런 놈들 한 번쯤은 만날 줄 알았다.

여태까지 어깨에 힘을 주고 있던 이유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놈들은 내가 우려한 부분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다.

그저 나를 괴롭히기 위해 부른 것뿐.

‘다 알고 있다’는 말은 정말 나를 겁줘 밖으로 나오게 하려는 의도였다.

‘안 나오면 죽인다느니 하는 말을 쓰면 본인들이 문제가 생겼을 때 빠져나갈 구멍이 사라지니까.’

협박하려는 의도가 아니었다고 뻔뻔스레 우기면 통할 만큼만.

딱 그만큼의 단어와 문장을 사용했다.

애들 서열 놀이에도 응해 줘야 할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잘됐네.’

머리 아픈 일이 아니니까.

나는 점점 험악해지는 학생들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불렀는지나 말해.”

“이 새끼 이제 한숨 쉬네, 야.”

“야, 됐어. 말해야지, 그래. 너 같은 놈들이 멀쩡한 척 고개 들고 다니는 게 마음에 X나 안 들어. 알겠어?”

“나 같은 놈들이 뭔데.”

“몰라? 몰라서 물어? 그냥 이미지 바꾸는 김에 뇌도 좀 빼 보려고?”

놈이 웃음을 터트리며 머리를 쓸었다.

“아오, XX. 말이 많아. 작년에 하고 다니던 꼬라지가 딱인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정상적인 척을 하냐고, 그냥.”

“아냐, 말을 하지 마. 이 새끼 못 알아들어.”

“그럴 것 같다. 야, 알아들었어? 못 알아들었으면 직접 알려 주려고.”

놈들이 아까처럼 킬킬대기 시작했다.

바닥에 앉아 있던 학생이 손을 까딱였다.

“내놔.”

“뭘, 새끼야.”

“…하하하하…. 아, 얘 욕도 하네. 진짜 당황스럽다. 나 충격받아서 말이 안 나오는데.”

놈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웃옷을 가리켰다.

“재킷 내놓으라고, 인마.”

“…….”

나는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물지 못하다, 웃음을 터트렸다.

‘이 새끼들….’

뻔하지. 내가 이걸 넘기는 순간 옷을 못 쓰게 만들 거다.

나는 싸늘한 눈빛으로 놈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이거 생각보다 괜찮은 일일지도 모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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