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22화 (22/220)

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22)

들뜬 소란은 사라지고,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경악에 찬 백 개의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처음으로 교수의 질문에 답했던 날이 떠오르는 광경이었다.

누구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아, 나만 빼고 시간이 멈춰 버린 것만 같았다.

내가 강의대에 도착할 때까지 교실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교수마저도 자신이 쥔 봉투만을 내려다볼 뿐, 이렇다 할 말을 하지 않았다.

한참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다 입을 열었을 때, 교수가 말을 시작했다.

“…학생도 특별반에 들어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요? 몇 번이고 확인해도 마지막 특별반 인원은 학생이 맞더군요.”

“예, 처음입니다.”

“단숨에 98등에서 10등까지 오르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얼마나 많이 노력했을지 감이 잡히지 않는군요. 앞으로도 학생에게 좋은 결과가 있길 바랍니다.”

교수가 처음으로 나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다 좋은데….’

98등이었던 건 왜 대놓고 말씀하시지….

뭐, 됐다. 루카가 이름도 모르는 동급생에게 0점짜리 성적표를 받았을 거라 여겨질 정도면 이 성적을 모르는 놈이 있을 리가.

나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따뜻한 미소를 지어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교수님.”

* * *

“축하한다.”

오늘도 쉬지 않고 훈련장에 이동했다. 역시나 레오도 훈련장에 와 있었다.

“너도.”

“나야 이제 놀랍지도 않은데, 네가 정말 특별반에 들 거라고는….”

“예상 못 했어?”

“아니, 네 근성이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 상황이 되니까 놀랍네.”

레오가 제 옆자리를 툭툭 쳤다.

나는 그 옆에 철퍽 앉아 벽에 등을 기댔다.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던 레오가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서, 슬슬 시작하려고?”

“해야지. 형님 상대로 시간만 끌어서는 안 돼.”

“아까 애들 반응 봤지?”

고개를 끄덕이자 레오가 말을 이었다.

“우리 반만 그런 게 아냐. 지금 전교가 다 똑같은 반응이야.”

“알아. 금방 소문이 퍼져 나가겠지.”

“그래, 소문이 학교 밖으로 나가는 것도, 수도 밖으로 나가는 것도, 제국 밖으로 나가는 것도 순식간일 거야. 물론 고작 학교 성적 얘기일 뿐이니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않겠지. 플레로마에 관심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나 한두 마디 스쳐 지나갈 거야.”

레오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관심 많은 사람들에는 네 형님과 형님 동료들도 속해 있어. 그분들이 네 소식을 지금 바로 알 수 있다고. 각오한 거야?”

“그래, 어차피 누군가 신호탄을 쏘긴 해야 해.”

당연하게도, 형은 루카를 죽일 때까지 그 어떤 신호도 주지 않았다.

내가 먼저 전개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형이 700여 일 뒤에 그대로 나를 죽이는 결말만이 남게 된다.

레오가 뭐라 말을 꺼내려다 몇 번이고 입을 닫고, 조금 다른 주제를 꺼냈다.

“…그래. 네가 전에 말한 그 계획은 아직 유효하고?”

“당연하지. 이제 시작이야.”

그 말에 레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슬슬 해 보자.”

* * *

9월 월말평가 날.

나는 내 말에 집중하고 있는 레오 쪽으로 상체를 숙이며 양손을 맞잡았다.

“대신, 지금이 아니라 중간고사 이후에 실행할 일이야.”

레오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갔다.

“…뭔데.”

“조직을 만들 거야.”

“…….”

“…….”

나와 레오의 시선이 공중에서 한참 부딪혔다. 숨 막히는 침묵을 깬 건 레오였다.

“깡패라도 될 생각?”

“아니, 플레로마를 연구하는 비밀 조직을 만들 거야.”

나는 레오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걸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알다시피 플레로마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자리 잡고 있지. 우린 그간 발생했던 플레로마의 범죄를 분석하고, 예측 모형을 만들어서 앞으로 그들이 어떻게 움직일지 판단할 거야. 필요하다면 우리 모형을 황실에 제안할 수도 있겠지.”

“으음, 그래. 그럴싸하네.”

내 말을 들은 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살짝 달라진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대외용 설명은 알겠어. 그래서, 네 목표는?”

‘대외용 설명’이라. 알아서 착착 알아들어 주니 좋다.

당연히 레오에게 말해야 할 것은 이게 아니지.

“내 편을 늘리기.”

“네 편?”

“그래, 언제까지고 이렇게 플레로마로 오해받으면서 지낼 수는 없어. 너도 알다시피 형님은 제국에서도, 외국에서도 명망이 높아. 그런 형님에게 홀로 맞서는 건 불가능해. 형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다는 건 알지?”

“알지. 너희 형님은… 이러다 위인전에도 나오실 거야.”

레오가 미간을 좁히며 혀를 찼다.

나는 잠시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읽은 챕터에서 10년 후의 레오가 하는 대사와 비슷했다. 내가 토씨 하나까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할 뿐, 어쩌면 완벽히 똑같았을지도 모른다. 미묘한 반가움이 느껴졌다.

아무튼, 지금으로서는 좀 과한 표현이지만 형이 쓸데없는 정치질만 안 하고 지금처럼 살면 충분히 그렇게 될 것이다.

“…그래, 그러니 나 역시도 내 편을 만들어야 해. 내가 플레로마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대의를 위해 뜻을 함께하는 동료를 만들겠다는 말이야.”

레오가 그 말에 입꼬리를 올렸다.

“대의라, 마침 플레로마라는 공통의 적이 있네. 네 계산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알겠다.”

“그래, 집단을 이용해야 해. 외부의 적을 이용하면 공동체 의식을 강화할 수 있어. 하지만 지금 나는 같은 학교, 같은 반에 있더라도 학생들에게 외부의 적인 셈이지. ‘정상성’ 차원에서 말이야.”

아까의 긴장은 완전히 사라졌다. 레오가 훈련할 때처럼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마음에 드네. 본격적으로 내집단의 중심을 이용하겠다는 말이잖아. 플레로마의 행동 경로를 예측해 그놈들을 처단하는 모임을 만들어서.”

“그래, 학생들이 날 집단 안에 편입해 줄 생각이 없다면, 내가 직접 집단 속으로 들어가면 돼.”

“보통은 그게 안 되는 거 알지?”

“알지.”

레오가 몸을 가까이 하며 입을 열었다.

“네가 내게 이 이야기를 꺼냈다는 건, 내 행동도 중요하기 때문일 텐데. 그렇지?”

“그래, 내 계획에서 네가 빠지겠어? 미리 고맙다.”

레오가 헛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참 영광이네…. 아무튼, 좋아. 네 큰 그림은 잘 알았어. 그런데 넌 이 문제의 극단에 서 있는 인물이야. 끝에 서 있는 네가 반대편으로 이동하기는 굉장히 어려워. 각오는 되어 있어?”

“난관까지야. 내가 끝에 서 있다면 반대쪽 끝을 내게 붙이면 되지.”

“…흐음.”

“그럼 고작 한 발자국 차이가 될 테니까. 안 그래?”

내 태연한 대답에 레오가 미소 지었다.

“그래, 다 생각이 있나 보네. 자세히 들어나 보자.”

“이 계획에서 핵심은 세 개야. 초대로 운영되는 회원제, 비밀, 그리고 신력. 나는 초대받은 사람들에게만 내 이야기를 알릴 거야.”

레오가 계속 말해 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안이 민감한 만큼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욕구를 확실히 자극해야 해. 완전히 우리 편이 되어 모임에 충성하고, 자발적으로 모임을 유지할 수 있게끔. 인정욕, 소속감, 자기 효능감 정도면 충분하지.”

레오가 당황한 듯 짧게 숨을 내뱉어 웃었다.

“…너 뭐… 아니다. 그래, 효과는 좋겠네. 비밀로 모여서 대의를 들먹이는 것도 소속감 면에서는 나쁘지 않겠어. 이걸 노리고 초대로만 운영하겠다?”

“선후가 바뀌었지. 내 처지에는 폐쇄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최선이었을 뿐이야. 거기서 이용할 점을 찾아본 거고.”

상황에 떠밀려 다니는 것과 그것을 이용하는 것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어차피 환경은 늘 제한적이다. 순조로운 시작을 위해 여건이 갖춰지기를 기다린다? 형의 손에 죽는 날을 기다리는 게 빠를 것이다.

생각이 말의 뉘앙스를 결정하고 그 미세한 차이로 상대에게 전달되는 메시지가 달라지므로, 내게 남은 선택지가 이것뿐이라면 떠밀려 다니지 말고 모든 요소를 분석해 적절히 이용해야 한다.

‘물론, 일차적으로는 내가 아니라 레오가 나서야 하니 앞서 말한 건 전부 레오가 의식하고 있어야 해.’

인정욕, 소속감 등등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동료 하나는 잘 골랐다. 놈도 이 정도 회전은 될 테니까.

레오가 웃음을 터트렸다.

“솔직하네.”

“솔직해야지. 넌 모임의 타깃이 아니고 동업자니까.”

“믿는다는 말을 이렇게 하네….”

“그래, 정정하자. 넌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친구야.”

“어, 그래. 그것참… 다행이다. 멋진 표현이야.”

레오가 의문 가득한 얼굴로 눈을 가늘게 떴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이렇게 반응할 거면서 뭔….

나는 레오의 반응에 웃으며 본론으로 돌아갔다.

“넌 이 일의 적임자야.”

“아까 인정욕을 자극하겠다고 대놓고 말했으면서 나한테 이런 소리를 하는 거야?”

레오의 웃음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네. 그냥 사실을 말한 거야. 내가 다짜고짜 찾아가 ‘플레로마를 연구하는 비밀 모임에 들어와 주십시오’ 한다고 그들이 인정욕을 느낄까?”

“헛소리로 듣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래, 하지만 제안하는 사람이 너라면, 달라. 네가 가진 사회적 위치와 신뢰라면 학생들의 인정욕을 단번에 채워 줄 수 있어. 그러니… 내가 얼굴을 비추기 전에 네가 먼저 친구들을 설득해 줬으면 해. 괜찮겠어?”

“그래, 그 정도야. 어려운 일은 아니야. 그런데….”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던 레오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이게 낙관적인 시나리오라는 것도 알고 있지? 사람 마음이 그렇게 예상 범위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는 게 아니야. 지금까지 넌 일반론을 얘기했을 뿐이야.”

“그래서 초대할 사람을 신중히 선택해야 해. 그리고… 우리한테는 고유능력이 통찰력인 친구가 있지.”

사실 나르케를 염두에 두고 짠 계획은 아니다.

굳이 특성까지 동원하지 않아도, 레오는 이미 사람 보는 안목이 좋다. 이 학교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레오와 어릴 때부터 함께해 온 친구들이기도 하고.

나는 그 점을 담아 말을 이었다.

“물론 네 안목으로도 충분해.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늘 비딱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나 욕구가 없는 상대는 애초부터 초대해서는 안 되겠지. 너라면 내가 굳이 이런 것까지 말하지 않아도 분명 누가 적합한지 감을 잡고 있겠지만 말이야.”

“알지. 지금도 누굴 데려와야 할지 머릿속에 대강 그려졌어.”

빠르네.

레오의 안목에 나르케의 능력으로 한 번 더 검증을 거치면 위험 가능성이 대폭 낮아진다.

여기서 또 문제가 생길 것 같으면 정신 조작 마법을 쓰면 된다.

‘애초에 중간고사 이후면 필사적으로 내 정보를 숨길 필요도 없어.’

중간고사 성적이 형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이미 한번 변화의 신호가 터진 뒤면 괜찮다.

레오가 한참 생각에 잠겨 턱을 괸 손으로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렸다.

“실질적인 업무에 대해서는 계획이 있으니 굳이 이 모임으로 정한 거지? 대외적으로 성공할 자신도 있어?”

“당연하지.”

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내용만 들어서는 딱히 거절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 만약 네가 원서 철 전에 형님에게서 벗어난다면 모임의 대외적 성과를 대입 때 써먹을 수는 있겠어. 성과가 더 확실하다면 황실에 처음부터 높은 자리로 들어갈 수도 있겠지.”

어차피… 네가 황제 새로 만들 테니 그런 건 문제 없다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네가 플레로마가 아니라는 건 어떻게 설득할 생각이야? 형님 이야기를 꺼낼 생각은 아니지?”

“당연히 아니지.”

나는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형은 선역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이번 시나리오에서는.

* * *

다시, 중간고사가 끝난 다음 주.

“나르케는 몇 시에 온대?”

“한 시간 뒤에!”

“한 시간 뒤에 온대.”

레오의 질문에 나는 파이의 대답을 그대로 읊었다.

월말평가 날, 마차로 돌아온 나르케에게 계획을 이야기했더니 예상보다 더 격한 반응을 보이며 긍정적인 답을 주었다.

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오늘부터 모을 생각이지?”

“어.”

“몇 명 생각하고 있어?”

“주에 서너 명씩.”

빠르면 빠를수록 좋기야 하지만, 체력적인 문제도 생각해 적당한 목표를 잡았다.

띠링―!

〈 Chapter 3. 끊임없는 물방울이 돌을 뚫는다 (1) 〉

제안 3: 인생은 과감하게! 10명의 조원을 모집하세요. (1/10) (71시간 59분 59초)

* Route 1 — 〈 Chapter 4. 끊임없는 물방울이 돌을 뚫는다 (2) 〉

* Route 2 — 〈 Chapter 4.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라 〉

“…….”

나는 머리를 짚으며 레오를 불렀다.

“레오.”

“응?”

“너 내 조직에 들어와라.”

“이미 들어가 있는 거 아냐? 뭔 헛소리야.”

레오의 말을 흘려듣고 제안 창을 확인했다.

제안 3: 인생은 과감하게! 10명의 조원을 모집하세요. (2/10) (71시간 59분 47초)

‘좋아.’

나르케까지 하면 셋이다.

그럼 이제 72시간 이내에 일곱을 데려와야 한다는 말인데….

나는 루트 2의 제목을 다시 한번 읽었다.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라’.

제목으로 나한테 말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끼며 웃었다.

됐다. 빠르면 빠를수록 내게 좋기는 하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시도나 해 보자.

매일 둘에서 셋씩 데려오기만 하면 되겠다. 문제는 그 72시간이 전부 평일이고, 설득할 수 있는 시간은 저녁뿐이라는 점이다.

‘시간을 좀 절약해야 해.’

둘씩 한자리에 모아?

안 된다. 대체할 수 있다는 느낌을 조금이라도 남기는 방법은 배제해야 한다.

레오가 한 시간가량 학생을 설득하고, 그 뒤 나와 대화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나와의 대화가 핵심이다. 오해를 풀고 모임의 목적을 제시해야 하니까.

‘확실히 쐐기를 박을 만한 걸 하나 더 제공하면 얘기가 빨라질 것 같은데.’

방법이 있기는 하다.

고상하게 가기는 글렀네.

나는 제안 창을 날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오, 나 잠깐 나갔다 온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