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23화 (23/220)

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23)

“레오.”

“아, 왔구나, 멜빈.”

레오가 기숙사 방에 찾아온 한 학생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학생이 긴장한 얼굴로 주위를 살피며 물었다.

“어어, 무슨 일로 부른 거야?”

“별 건 아니고. 우선 숨 좀 돌려. 뭐로 마실래?”

레오가 찻잎이 든 병을 향해 손짓했다.

“으음, 난 아무거나….”

“그래, 지금부터 네가 무슨 맛을 좋아할지 고민해 봐야겠네. ”

레오가 웃으며 대답하고는 능숙하게 차를 타 학생의 앞에 내려놓았다.

“카밀러야. 수업도 끝났으니 피로에 도움이 되는 걸로 만들었어.”

“아, 고마워.”

“뭘, 입에 맞았으면 좋겠다.”

“고, 고맙…. 그래서, 무슨 일로 부른 거야…?”

그 말에 레오가 학생의 앞자리에 앉았다.

“멜빈. 혹시 요즘 플레로마가 무슨 짓을 벌이고 다니는지 알아?”

“플레로마?”

학생의 낯빛이 살짝 변했다. 내내 긴장에 주체할 수 없이 움직이던 눈동자가 레오에게 향했다. 학생이 똑 부러지는 말투로 대답했다.

“알지. 요즘 계속 무덤 파고 다니잖아. 어제도 국경에 있는 공동묘지에서 시체 세 구가 사라졌다고 기사 났어.”

“음, 잘 알고 있네. 안 그래도 그걸 보고 널 부른 거거든.”

그 말에 학생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나? 그게 나랑 왜…?”

“내가 이번에 친구랑 플레로마의 동향에 대해 연구하는 모임을 하나 만들었어. 알다시피 플레로마가 점점 대범하게 움직이고 있잖아? 그들이 나타난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전혀 나아진 게 없지. 우리가 대학에 가고, 졸업할 때쯤까지도 그들이 계속 활동하고 있을 가능성이 커.”

학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아무래도.”

“교수님께 들었는데, 네가 대학을 졸업하고 황실 산하의 플레로마 처리반에 들어가길 희망한다면서.”

레오의 말에 학생의 표정이 일변했다. 학생이 당황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아, 교수님께는 그렇게 말씀드렸지만… 사, 사실 될 가능성이 그렇게 크다곤 생각 안 해. 난 성적도 아주 좋은 편이 아니잖아. 그냥 내 소망이지. 하하….”

특별반 동의서 나눠 줄 때 이름 불리지 않았나?

학과 10등 안에 들어 놓고도 이렇게 생각하다니.

레오가 양손을 맞잡고 테이블 위에 올렸다.

“될 가능성이라니? 내 생각은 좀 달라. 난 너처럼 열정을 가진 사람이 드물다고 생각해. 많은 친구들이 플레로마의 이야기에 열을 내지만, 사실 기사 헤드라인만을 보고 공포에 떠는 것뿐 그 이상으로 깊이 생각하지는 않아.”

“어! 맞아…. 그렇긴 해. 오랫동안 이어진 문제다 보니 다들 이제 깊게 알아보기 피곤한 거겠지.”

“그래, 하지만 넌 아니야. 다른 학생들이 어쩌다 한 번씩 피상적인 공포를 툭툭 던질 때, 넌 항상 본질에 관심을 가져 왔어. 널 몇 년 전부터 봐 오며 느꼈던 점이야.”

학생이 조금 들뜬 얼굴로 물었다.

“그, 그래? 신기하다. 그렇게 보였어?”

“당연하지. 그래서 난 네가 우리와 딱 맞다고 생각했어. 우리는 플레로마의 범죄 행각을 조사해 그들이 앞으로 어떤 패턴으로 움직일지 예측해 볼 거야. 우리가 만든 시스템이 높은 정확도를 보인다면, 황실에 우리 모형을 제안해 봐도 좋겠지.”

학생의 눈이 커졌다.

레오가 그 변화를 놓치지 않고 몸을 가까이 하며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플레로마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면 앞으로 일어날 피해를 줄일 수 있지 않겠어?”

“이, 이, 이걸 나랑 같이 해도 되는 거야…? 난 최상위권도 아니고, 레오 너처럼 똑똑하지도 않은데….”

레오 너처럼… 뭐? 레오가 돋아 오는 소름에 입술을 콱 깨물려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당연하지. 난 지금의 너도 충분히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네 등수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래? 그건 고작 숫자일 뿐이야. 더 멀리 봐야지.”

“아, 아무리 생각해도 난 그럴 사람이 아닌 것 같아. 미안하지만….”

여기서 빠지면 안 되지.

이왕 시작한 거 끝까지 가야 해.

레오가 당장이라도 책상 아래로 들어갈 것처럼 몸을 움츠린 학생을 다독였다.

“멜빈. 네 실력은 전혀 나쁘지 않아. 여긴 제국에서 제일 들어오기 힘든 학교야. 이곳에서 상위권씩이나 하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져도 돼. 너는 네가 아직 부족하다는 증거로 성적이 최상위권까지는 닿지 못했다는 점을 들었지만… 역설적이게도 네가 객관적으로 부족하지 않다는 걸 그 성적이 말해 주고 있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

학생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눈을 여기저기로 굴렸다.

됐다. 반응은 저래도 거의 넘어온 셈이다. 레오가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우리가 널 선택한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어.”

“뭔데?”

“우리에겐 신뢰가 중요해. 우린 10년 넘게 이어진 플레로마의 기행을 반드시 멈출 거야. 그런 만큼 우리 모임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그 누구의 귀에도 들어가선 안 돼. 무슨 일이 있어도 말이야.”

루카스의 말로는 한마디도 새어 나가지 않을 필요는 없다고 했다. 그래도 말은 이렇게 해 둬야지.

“그건…! 당연하지! 내가 다른 애들한테 말할까 봐 그래? 어디에 말하고 다니진 않을 거야. 그 자식들 좋은 일을 시킬 수는 없잖아.”

“그래, 오랜 시간 널 지켜본 바로는, 넌 누구보다도 생각이 깊었고 함부로 말을 하지 않았어. 우리에겐 너처럼 신중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 필요해.”

레오의 말에 학생이 주저하며 입을 달싹였다.

이제 마무리만 하면 되겠네.

레오가 학생과 눈을 맞추며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멜빈, 나는 네가 우리랑 같이 연구해줬으면 해. 너는 어때? 이 일을 하고 싶어, 아니면 하고 싶지 않아? 그것만 말해 줘.”

* * *

눈앞에서 모래색 머리칼이 흔들린다.

금발은 처음 해 보는데 상당히 낯설다.

살 것이 있어 학교 밖으로 나와야 하는데, 검은색 머리칼과 분홍색 눈으로 길에 나다닌다면 곧바로 나를 알아볼 테니 그대로 나갈 수는 없었다.

전처럼 약의 부작용을 이용해 눈 색을 바꿀 수도 있겠지만 내 얼굴을 아는 학생이 학교 밖을 돌아다니고 있을 수도 있으니, 안전하게 머리 색도 바꿔야 했다.

그래서 그냥 신력을 썼다.

얼마 전 암기한 마법인 데다 색깔별로 수식이 달라 실제로 사용해 볼 시간이 없었는데, 다행히 효과가 났다. 혹시 몰라 정신 조작 계열의 인지 기능 저하 마법도 걸었다.

‘이 정도면 처음에 신력 안 골랐으면 어쩔 뻔했냐.’

이렇게 생각하기는 했지만 사실 반대지. 신력의 활용 범위를 알고 있었기에 고른 것이다. 지식을 그대로 체화시켜 준다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적당히 유용한 것에 낭비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신력은 자연적으로 발현되는 마력을 인위적으로 변성시켜 만든 힘이고, 그 영향인지 닿은 대상의 성질까지 변화시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신력으로 정신을 조작할 수 있는 것도, 머리와 눈 색에 쓴 마법도 전부 그러한 특징으로부터 나온 효과다.

아무튼….

‘속눈썹 색까지 바뀌니까 이미지가 확 달라지네.’

나는 금속에 비추어진 얼굴을 슬쩍 살피며 공공도축장 관리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관리자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피 한 병이요? 그걸 어디에 쓰시게요?”

“동물용 마법약 실험 보고서를 쓰는데, 새로운 재료를 좀 넣어 보려고 합니다. 여기서 좀 구할 수 있을까요?”

나는 눈을 부드럽게 휘며 최대한 순수한 의도를 가졌다는 것을 어필했다.

이 순간을 위해 교복도 안 갈아입고 그대로 왔다.

관리자가 내 재킷의 휘장을 흘끔 보고 대답했다.

“음… 피도 가끔 마법약 재료로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어요.”

“그렇죠? 효과가 훨씬 좋아지거든요. 그래도 요즘은 플레로마 이야기로 많이 뒤숭숭하니 쓰기 꺼려지기는 하네요.”

“그런 놈들 때문에 공부하는 데에 방해가 되면 안 되죠. 어떤 동물 피가 필요하신데요?”

“아무 동물이나 상관없습니다.”

“그래요? 지금 뽑은 피가 있는지 살펴보고 올게요. 잠깐 기다리세요.”

관리자가 뒤를 돌아보더니 가장 가까운 도축장 건물로 들어갔다. 5분도 지나지 않아 그가 검은 유리병 하나를 들고나왔다.

그가 종이봉투에 병을 담아 건넸다.

“양 피예요.”

“얼마 드리면 되죠?”

“값은 됐어요. 어차피 전부 버리는 거라서요. 실험 멋지네요. 꼭 성공하세요.”

“예, 감사합니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봉투를 들고 밖으로 나와, 길에 다니는 마차를 하나 잡아탔다.

그나저나….

‘얘 뭔데 이렇게 잘하냐.’

아주 청산유수다, 청산유수.

나는 레오가 주고 간 통신 마법 도구를 귓바퀴에 고쳐 걸었다.

레오는 무언가 잘못 이야기한 것이 있으면 나중에라도 알려 달라고 이걸 주고 갔는데, 딱히 지적할 부분이 없었다.

나는 시계를 확인했다.

지금이 저녁 8시 반. 30분 뒤면 학교에 도착할 수 있다. 피부에 흡수시킨 신력도 한 시간만 있으면 효력을 다한다.

‘슬슬 때가 됐네.’

이제 곧 내 차례다.

* * *

“멜빈, 네가 알아야 할 게 있어.”

레오가 멜빈을 데리고 지하로 내려가며 입을 열었다.

“뭔데?”

“사실 네게는 조금 꺼림칙하게 느껴질 사람이 우리 모임에 있어. 나도 네가 느낄 감정을 이해하지만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인력이거든. 많이 놀랄 수도 있는데… 이따 설명할 시간을 줄 수 있을까?”

“으응? 물론이지! 난 다 괜찮아!”

멜빈이 의지 넘치게 대답했다.

레오가 애써 미소 지으며 지하 1층 맨 끝 방의 문을 열었다.

“왔어?”

“…어?”

자리에 앉은 이를 보자 멜빈의 얼굴이 덜컥 굳었다. 레오가 서둘러 어깨를 두드렸다.

“멜빈. 많이 놀랐….”

“어어어어어?!”

“잠깐만! 이해해. 내가 설명할게. 일단 우리에게는 루카스가 필요해. 네가 뭘 생각하는지 알지만….”

“아니, 쟤가 왜 여기에 있어?! 제일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사람 아냐?!”

레오의 해명에도 멜빈은 당황을 거두지 못했다.

레오보다 먼저 도착해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나르케가 학생의 반응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봤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의 앞에 다가갔다.

“멜빈이라고 했지. 전에 길 안내해 줘서 고마웠어.”

“아, 아, 아니… 잠깐만, 내가 뭔가 잘못….”

“아니야. 잘 들어 봐. 일단 네가 아는 모든 것이 전부 오해라는 걸 알리고 시작할게.”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널 해치려는 게 아냐. 조금만 들어주면 돼. 다들 이럴 걸 생각하니 벌써 해명하기 지치네.”

“아니, 오해라니. 해명? 뭘….”

멜빈이 여전히 충격에 빠진 얼굴로 불신에 차 고개를 저었다. 나는 레오에게 붙잡힌 멜빈의 어깨에 팔을 둘러 자리까지 데려왔다.

“그래, 다 너 같은 반응일 거라니까. 나도 이해해. 전부 다 설명해 줄 테니까 앉아 봐.”

“으, 어어어… 어….”

애가 다 죽어 가네. 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레오가 멜빈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근데, 잠깐만. 저건 뭐야…?”

멜빈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내 앞에 놓인 찻잔을 가리켰다.

아마 층이 분리되기 시작한 토마토주스나 색소 넣은 수프 정도로 답변해 주길 바랐을 테지만… 아니다.

“양 피.”

“뭐?!?!”

콰앙―!

멜빈이 여태까지 보았던 것 중 가장 격한 반응을 보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넘어졌다. 나르케가 황급히 흔들리는 잔을 마법으로 붙잡았다.

“진정해. 이게 내가 네게 할 해명이니까.”

나는 티스푼으로 분리된 층을 섞고, 곧장 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비린내와 구역감에 곧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토했다.

뭉글뭉글한 감촉이 혀에 그대로 남았다. 먹을 게 아닌 것을 먹었을 때의 이질감이 확 올라왔다.

“아, 어떡해. 말렸어야 했나?”

“어으….”

나르케의 웃음 섞인 걱정에 이어 레오가 한숨에 가까운 불평을 내뱉는 것이 들렸다. 나는 거의 좀비처럼 걸어 나와 멜빈의 앞자리에 털썩 앉았다.

“괜, 괜찮은 거야…?”

내 안색을 본 멜빈이 거의 반사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아차 싶었는지 다시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반쯤 노인이 된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괜찮을 리가? 그래도 이렇게 해서 내가 플레로마라는 오해를 풀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아, 아니, 생피를 마시면 그냥 누구나 토를….”

“누구나라니? 그 시체들은 진작에 이걸 다 마셨을 거야. 여기에 남의 마력만 섞으면 그걸 그대로 몸에 흡수할 수 있어. 그 자식들한테는 무엇보다도 익숙한 재료라는 걸 너도 알 거 아냐?”

나는 심각한 얼굴로 말하다 목을 콱 붙잡았다.

레오가 빨리 화장실이나 가라고 급하게 고갯짓하고 있었다.

“…물론, 정말 그렇긴 한데… 아냐. 잠깐만. 이 정도는 그 사람들도 연기할 수 있….”

나는 정말로 속이 뒤집히는 감각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 번 더 토를 하고 왔다.

슬슬 믿던 것에 의심이 생긴 멜빈이 심란한 얼굴로 나와 친구들과 피가 든 잔을 번갈아 바라봤다.

“…….”

“…애잔하다, 진짜.”

“다른 건 다 참아도 피는 어쩔 수가 없네.”

나는 레오의 말에 힘없이 답하고 고개를 저었다. 여러 번 정화를 거쳤음에도 피는 피였다. 흙탕물을 팔팔 끓였다 해도 그걸 굳이 마시고 싶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였다.

멜빈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약간은 경계심을 담아 나를 바라봤다.

“…그, 그럼 네가 죽였다는 그 하인은 뭔데? 10년 전에 떠들썩했던 사건이잖아…!”

좋아.

나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내가 플레로마일 것이라는 믿음에는 여러 근거가 있다.

내가 때려 부순 한 근거에 대해 얘기하던 중, 경로에서 이탈해 다른 근거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부터가 이미 반쯤 흔들렸다는 뜻이다.

처음부터 피로 강력한 충격을 주길 잘했다.

‘그리고, 이 뒤에 한 번 더 믿음을 박살 낼 무기가 있지.’

아무튼, 살인 사건의 진범은 내가 아니라 형이다.

하지만 그 사건은 황실의 조사를 받지는 않았다. 동생을 지키려는 형의 눈물겨운 방어로 가문 내 조사로 사건이 종결되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는 가문의 힘으로 사건에 대한 언론 보도까지 통제됐다.

형은 영지에서 가족 없이 홀로 자라왔던 이를 골라 죽였기에, 딱히 그의 죽음에 황실의 수사를 요청하는 사람들도 없었다.

‘…동생 하나 매장시키려고 애먼 사람을 죽이고 다니다니.’

다시 생각하니 씁쓸해졌다.

거짓 덕에 황실의 조사를 받지 않았으니 자세한 사건 기록도 없다.

그 말은, 이 사건을 이용해 내게 유리한 이야기를 짜낼 수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남의 죽음을 가지고 거짓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지금 진실을 밝히는 게 좋은 일인가? 그것도 아니다.

굳이 모든 요소에 세밀한 극본을 만들지 않아도, 적당히 문장 성분을 생략하고 말의 순서와 간격을 조절하면 미묘하게 초점이 다른 앞뒤 이야기를 같은 것으로 해석하게끔 유도할 수 있다. 어디까지 앞서 하던 이야기고, 어디서부터 주제가 바뀐 이야기인지 모르게 하면 되는 일이다.

“진실이 아냐.”

나는 짧게 대답하고 멜빈에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 곧바로 입을 열었다.

“내가 왜 이런 불명예스러운 헛소문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있었는지 궁금하겠지. 아직 그게 헛소문인지 아닌지도 혼란스러울 거고.”

“…그래, 맞아.”

멜빈이 조금도 경계를 놓지 않겠다는 듯 필사적으로 눈썹에 힘을 준 채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런 멜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답했다.

“당연해. 전부 내가 만든 소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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