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24)
“뭐?”
멜빈이 입을 벌린 채 그대로 굳었다.
이미 내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는 나르케와 레오의 얼굴도 더욱 진지해졌다.
이쯤에서 확인 좀 해 보자.
안 그래도 이 친구는 내가 처음 학교에 왔을 때 호감도를 확인해 봤던 학생이다. 그때 전혀 놀랍지 않게 -10이라는 수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하는 이야기가 납득시키기 쉬운 이야기는 아니니 특성의 설득력이 적용되고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멜빈 클로크너
호감도 –8*
칭호: 성실의 대명사
체력: +4
정신력: -1.5
마력: +4.5
기술: +4.5
인상: +5
행운: +1
특성: 신뢰 (Lv.3)
‘됐네.’
호감도 변동이 생길 만한 일이 없었음에도 호감도가 -10에서 -8로, 딱 2점 올랐다. 마찬가지로 여태 없던 *가 생긴 걸 보니, 특성이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설득력도 멀쩡히 작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나는 멜빈을 향해 몸을 기울이며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물었다.
“멜빈, 네가 지금까지 알던 나는 어땠어? 정리도 안 된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니면서, 뭘 물어도 대답도 못 하고 우물쭈물하기만 하는 인간 아니었어? 힘없이 터덜터덜 다니기나 하고, 백날천날 기숙사에 처박혀 있기만 했잖아.”
“뭐야? 되게 잘 아네.”
나는 레오의 말을 무시하고 멜빈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 그렇긴 했지… 마법도 전혀 못 쓰고.”
“그래, 지금은?”
“…다른 사람 같아. 여러모로.”
“그렇게 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나는 희미하게 미소를 띠며 멜빈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말문이 막힌 멜빈이 눈만 껌뻑이다, 심란한 얼굴로 입을 우물거렸다.
“그, 그럼 지난 일 년간 연기하고 다녔다는 얘기야? 맞지?”
“글쎄, 복잡하네. 하지만….”
나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내가 2학년이 되고 변화를 드러낸 이유는 하나야. 이제 슬슬 계획을 실행에 옮길 때가 됐어.”
“…….”
다른 학생들은 초중등학교에 해당하는 3교육원을 다녔지만, 루카는 이곳이 처음이다.
지난 1년 외에는 나를 판단할 자료가 없다.
아주 어릴 적부터 쭉 작년처럼 살아왔다는 걸 알면 곤란했겠지만, 그게 아니니 해 볼 만하다.
멜빈이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은 몰라도 일부러 그렇게 지내왔다는 말인 거겠지. 아까 플레로마 소문이 네가 만든 헛소문이라고 했잖아. 네가 작년에 그렇게 다닌 거랑 관련이 있는 거지, 그치?”
나는 말없이 멜빈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멜빈이 계속해서 입을 뻐끔거리며 할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네가 다른 사람처럼 바뀐 건 사실이야. 솔직히, 네가 그렇게 교수님께 멀쩡하게 대답할 수 있을 줄은 전혀 몰랐어. 특별반에 들 만큼 성적을 올릴 수 있는 줄도 몰랐고, 필립한테 맞기까지 해 놓고 걔네한테 밀리지 않을 줄도 몰랐어. 그러니까… 정신적으로 말이야.”
필립이면… 지난달에 날 때린 놈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멜빈의 말을 들었다.
“다들 나랑 같은 생각일 거야. 가끔 친구들끼리 네 이야기가 나오면 어떻게 그렇게 다른 사람처럼 변했냐는 이야기가 매번 나와. 네 말이 정말 사실이면… 상황이 전부 맞아떨어져.”
나는 반응 없이 멜빈의 말을 경청했다.
미간을 찌푸리고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던 멜빈이 주저하며 나를 쳐다봤다.
“그런데, 아직 이해하기 어려운 게 있어. 왜 네가 플레로마라는 소문을 퍼트린 건데? 아무 이득도 없잖아. 전혀 이해가 안 되는데….”
그 말에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본론이다.
“멜빈, 나는 플레로마를 이 세상에서 제거할 거야.”
“으, 으응…. 그래. 좋은 생각인데… 그래서?”
“너라면 알겠지만, 지난 12년간 황실도 플레로마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동선과 불규칙한 행동 시기가 한몫하지. 그들이 쓰는 특수한 마법도 마찬가지야. 이 모든 걸 파악하기 위해서는 아무도 잡지 못하는 본질을 직접 잡아채야 해.”
나는 추측할 시간을 주기 위해 한 템포 쉬고 말을 이었다.
“나는 이 연기를 지속해서 플레로마와 접촉할 거야, 멜빈.”
멜빈의 눈이 커졌다.
자신이 뭘 들은 건지 의심하는 얼굴이었다.
내내 멜빈의 뒤에 서 있던 레오가 나지막이 말을 던졌다.
“아까 말한 대로, 이게 루카스가 여기 있는 이유야.”
레오의 말에 멜빈의 얼굴에 또 다른 충격이 드러났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레오의 말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멜빈이 눈썹을 구기며 나와 주위를 번갈아 보다, 입을 벌리고 시선을 떨궜다.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여태까지는 납득되지 않는 이야기들의 나열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면, 모든 이야기를 꺼낸 지금은 스스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었다.
한참 정적이 이어진 후, 나는 입을 열었다.
“이쯤에서 내가 황실에 잡혀가지 않은 이유도 설명해야겠네. 황실은 오래전에 내가 플레로마가 아니라고 공인했지. 기억해?”
“알아, 어릴 때 들었어.”
“그런데 넌 왜 내가 플레로마라고 생각하지? 왜 황실의 발표를 받아들이지 않아? 너뿐 아니라 전 국민이 마찬가지야. 왜 그럴까?”
멜빈이 말문이 막힌 듯 고개만을 기울였다.
나는 한참 멜빈이 생각할 시간을 주고 입을 열었다.
“질문을 바꿀까? 플레로마는 크게 두 부류로 이뤄져 있어. 1세대, 그리고 2세대. 둘 중 나는 어느 쪽으로 여겨지고 있지?”
1세대는 자연 발생한 시초의 플레로마를 의미하고, 2세대는 그들이 살려 낸 시체들과 플레로마의 교리에 깊은 충성심을 가진 신도를 의미한다.
멜빈은 이 질문에 지체 없이 답했다.
“1세대.”
“그래. 내가 산 자라는 것도, 플레로마의 교리에 동조하지 않는 것도 황실의 검증을 받았어. 2세대로서의 자격 요건에 부합하지 않아. 그런데도 사람들이 나를 기피하는 건 내가 1세대의 자질을 타고났기 때문이지.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게 소문이 퍼져 있기 때문이야. 그렇지?”
“맞아.”
“하지만 황실이 그런 자질을 내게서 발견했다면, 황실은 내 신앙에 관계없이 나를 당장 잡아들였을 텐데? 그런데 난 왜 잡혀가지 않고 여기에 있지?”
실상은 이 역시 가문의 자체 조사와 황실과의 맹약으로 유야무야 넘긴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는 달리 알려져 있다.
“그야 넌 코어 등급이… 최하위니까. 그래, 잠깐만! 마법을 못 쓰는데 플레로마 안으로 잠입하겠다고?!”
“못 쓴다고 언제 그랬어?”
“응?”
멜빈이 얼뜬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콰앙―!
완드를 꺼내 책상을 살짝 두드리자, 돌풍이 일었다. 마법 발동과 함께 퍼져 나간 새하얀 빛이 두 눈을 찔렀다.
“윽!”
거센 바람에 멜빈이 양팔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다, 입을 벌린 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뭐야? 방금 뭐야?”
그러더니 제 몸 주위를 맴도는 하얀 빛을 보고, 내 눈을 바라봤다.
“발동 범위가… 아냐. 잠깐만. 왜… 왜 하얀색이지?”
“왜겠어?”
“이, 이거 신력 아냐?! 설마 나르케 네가….”
“음, 나 아냐.”
나르케가 양손을 펴 흔들었다. 레오가 아무렇지 않은 말투로 한마디 툭 던졌다.
“루카스도 신력 쓸 수 있어, 멜빈. 믿기 어렵겠지만.”
멜빈이 또다시 영혼이 나간 얼굴로 입만 뻐끔거렸다.
“어때, 승산 있지 않겠어? 난 있다고 생각해서 여기 꼈는데.”
나르케가 턱을 괴고 웃으며 제 주위의 흰 빛을 툭 건드렸다. 그러더니 나를 보고 멜빈 쪽으로 고개를 까딱이며 눈을 찡긋거렸다.
끝났다는 신호였다.
* * *
띠링―!
〈 Chapter 3. 끊임없는 물방울이 돌을 뚫는다 (1) 〉
제안 3: 인생은 과감하게! 10명의 조원을 모집하세요. (10/10) (1시간 07분 18초)
* Route 1 ― 〈 Chapter 4. 끊임없는 물방울이 돌을 뚫는다 (2) 〉
* Route 2 ― 〈 Chapter 4.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라 〉
한 시간.
한 시간 남기고 성공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레오가 고개를 숙인 내게 물었다.
“왜 그래?”
“아니다….”
눈을 감은 와중에도 내 시야에는 하얀 빛이 번쩍였다.
축하합니다!
제안 3: ‘인생은 과감하게! 10명의 조원을 모집하세요.’ 성공!
‘Chapter 3. 끊임없는 물방울이 돌을 뚫는다 (1)’ 완료!
‘Route 1 ― 〈 Chapter 4. 끊임없는 물방울이 돌을 뚫는다 (2) 〉’를 확정합니다.
나는 창을 날려 버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탈 없이 성공했으니 됐다.
안 그래도 챕터 하나당 특별 보상도 하나씩 주는 것 같은데, 드디어 다음 챕터로 넘어갔으니 만족한다.
‘슬슬 특성 레벨업 하는 법을 알면 좋겠는데.’
이번 일곱 명을 설득하며 느낀 것인데, 몇몇 부분은 설득력 20% 증가의 영향을 받아 수월하게 넘어간 부분이 있었다. 레벨을 올린다면 앞으로 대화가 더 빨라질 것이다.
호감도 역시 특성의 효과로 7명 전부 양수에 도달했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멜빈의 호감도는 +1.
물론 특성을 제해도 -1이고, 처음의 -10을 고려하면 -1로 오른 것도 드라마틱한 변화였다.
멜빈뿐 아니라 나머지 여섯 명의 학생들도 비슷한 수치였다. 레오 때도 그렇고, 내 오해를 확실히 풀기만 하면 0에 가까운 수로 대폭 호감도가 오르는 듯했다.
“루카스, 안녕…!”
멜빈이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웃으며 손을 살짝 흔들었다.
“안녕.”
“오늘부터 시작 맞지?”
“응.”
내 대답에 멜빈이 자리에 앉아 반짝거리는 눈으로 자료를 꺼내 들었다.
약속한 시간이 되자, 내가 설득했던 학생들이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안녕, 루카스. 아, 난 아직도 안 믿기네. 루카스 네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그러니까.”
나는 학생들의 대화에 웃음으로 답하며 생각에 잠겼다.
이 모임은 내 계획보다 더 좋은 효과를 낼 것이다. 고작 학교 동아리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나는 앞으로 10년간 플레로마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안다.
세세한 것까진 아니어도, 앞으로 어떤 굵직한 사건들이 터지고, 또 어떻게 주인공이 그것을 해결하는지는 안다. 초반에 노트 한 권을 다 채울 만큼 떠오르는 것을 전부 적어 두었던 것이 도움이 되었다.
‘물론 전개가 바뀔 것도 생각해야 해.’
그래서 나는 기존 플레로마의 움직임을 분석했다.
전개가 바뀔 때는 기존 패턴에서 어떤 부분이 변형되었고 또 어떤 부분이 잔존하는지 파악해 새로운 결과를 도출할 수 있다.
내가 끝에 있다면 다른 끝을 내게 붙이면 된다고 했던 말은 허풍이 아니다. 플레로마로 오해받던 인물이 플레로마를 제거하는 것만큼 사람들의 뇌리에 깊게 남는 것은 없다.
나 홀로 신력을 쓰고 플레로마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며 평범한 사람처럼 구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점진적이고 느긋한 변화는 물밑에서나 이뤄져야 하고, 대중에게는 그래서는 안 된다. 형이 나의 변화에 맞추어 또 다른 시나리오를 만들 시간을 남긴다면 끝이다.
한순간에 대중을 충격에 빠뜨릴 이 방법은, 형이 더는 내게 손을 쓸 수 없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러니 나 역시 이 일에 진심으로 임해야 한다. 이보다 더 좋은 무기를 찾을 수 없으니.
나는 책상에 지도를 펼쳐 놓고 이야기를 꺼냈다.
“다들 시간 내줘서 고맙다. 슬슬 시작하자.”
* * *
다음 날 아침, 조례 전 특별반에 짐을 가져다 놓기 위해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동안 제안을 달성시키느라 특별반에 나가지 못했다. 이 이상으로 출석하지 않는다면 경고를 받을 수 있으니, 아침 시간에라도 나가 있어야 했다.
덜컥―
“어.”
문을 연 나는 걸음을 우뚝 멈췄다.
한 학생이 내 방 앞에 서 있었다. 학생이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방문이 열려 놀랐는지 한 발짝 물러섰다가, 목을 가다듬었다.
“편지 전달해 드리려고 왔습니다.”
학생이 편지가 든 바구니를 슬쩍 들어 보이고는 맨 위에 놓은 편지를 집었다. 교황청의 봉인이 찍힌 편지가 내게 건네졌다.
곧바로 편지를 뒤집었다. 맨 위, 왼편에 방금 쓴 것처럼 빛나는 암녹색 글자가 정갈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아드리안 아스카니엔.
형에게서 온 편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