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35)
루카의 기억에서 줄곧 아버지와 형의 곁에 있어 왔던 아스카니엔의 시종장이다.
마법사가 아니기에, 제 나이 그대로 늙어 가는 그의 얼굴에는 굵은 주름이 선명했다.
“안녕하십니까.”
“못 본 사이에 몰라볼 만큼 변하셨습니다. 꼭 어릴 때의 총기를 되찾으신 것 같아 기쁩니다.”
남한테 그렇게 말해 봤자.
나는 그의 손에 들린 상자를 흘끗 보고 대답했다.
“어릴 때를 기억하시는군요.”
“예, 분명 이렇게 총명한 눈빛을 가지셨죠. 크면서 체질 탓에 많이 힘들어하시는 걸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모릅니다.”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사실 제가 도련님의 기숙사까지 찾아뵈어야 맞지만, 교내로는 외부인 출입이 불가능해 부득이하게 이렇게 뵙게 되었습니다. 근처의 찻집으로 안내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예, 가죠.”
시종장이 씩 웃어 보이고는 길을 안내하듯 팔을 앞으로 펼쳤다. 나는 그의 옆에서 보폭을 맞춰 걸었다.
학교 외곽을 빙 돌아 후문에 가까이 왔을 때, 그가 굽이진 골목을 찾아 들어갔다.
한참 걸어 올라가 숨이 차기 시작할 즈음, 드디어 작은 문 앞에 멈추어 섰다.
사람 하나를 간신히 들여보낼 만큼 작은 문이었지만, 안으로 들어가니 세모꼴로 넓게 펼쳐진 공간이 나타났다.
훤히 뚫린 창으로 수도의 강과 그 주위의 숲이 내려다보였다.
“제가 도련님 나이 때에 자주 들렀던 곳입니다. 그대로군요.”
“이곳 졸업생이셨죠.”
“그렇습니다. 도련님의 아버지와 같이 다녔었지요. 저는 제국2교육원까지만 나왔지만요.”
미소를 지어 답하자, 그가 차를 주문하고 안부를 물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날이 갈수록 건강이 악화되셔서 걱정이 많았습니다.”
“괜찮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아직도….”
그가 근심 어린 눈으로 나의 눈을 마주했다.
나는 눈썹을 올리고 답했다.
“그래도 공부를 할 수 있을 만큼은 됩니다.”
“아, 그렇죠. 지난주에 학교로부터 연락받았습니다. 학과 10등 내에 드셨다고요. 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큰 도련님께서 정말 기뻐하셨습니다. 공작님께서도 놀란 기색이셨고요.”
“그렇군요.”
그때 점원이 우리의 앞에 찻잔과 스푼을 내려놓았다.
나는 말이 끊긴 사이 그에게 본론을 꺼냈다.
“오늘 찾아오신 이유는 뭡니까?”
“다름이 아니라, 도련님께 사흘에 한 번씩 약을 직접 먹여 달라는 부탁이 있었습니다.”
“…….”
사흘에 한 번.
욕심이 지나치다.
그가 검은 나무 상자를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형님의 말씀이죠?”
“당연히, 그렇습니다.”
그가 상자 클립을 열어 그 안에 든 다이아몬드꼴 병을 건넸다.
“지금 차와 함께 드시지요. 마침 모레면 새롭게 드실 날이 돌아온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차를 내려다보았다.
향이 진한 얼그레이 밀크티, 그리고 그 앞에는 각설탕 병이 놓여 있다.
독약 병을 받아 들자, 그가 각설탕 병을 열어 작은 집게로 설탕을 꺼내 내 잔에 두어 개 넣었다.
늘 그래 왔다. 루카의 기억에도 선명한 장면이었다.
나는 다이아몬드꼴 병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부탁이 아니죠.”
그가 말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명령입니다.”
단어에서 나오는 폭력성을 해명하듯 그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아드리안 도련님께서 황실 소속으로 일하시니 플레로마의 소식을 빠르게 접하십니다. 최근 기류가 심상치 않다고 하십니다.”
이어지는 말을 기다리듯 말없이 바라보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직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제국 북부에서 플레로마가 생화학 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습니다.”
웃음이 날 뻔했다.
나는 입술 안쪽을 살짝 깨물어 표정을 진정시켰다.
이렇게 빨리 전달됐다고?
분명 의회로부터 황실로 흘러갔을 텐데, 아직 진지하게 심각성을 느끼는 의원이 있을 줄은 몰랐네.
“도련님이 플레로마의 체질을 가지신 건 맞지만 아스카니엔의 사람들은 도련님에게 악의가 없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외부인은 다릅니다. 이렇게 플레로마의 범죄가 심각해질 때는 도련님의 안위 또한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요는 플레로마적인 체질로부터 나를 안전하게 보호하겠다는 의미다.
약을 직접 먹이겠다는 걸 보니 형의 의심병과 완벽주의가 놀라울 만큼 커진 모양이다.
“아드리안 도련님께서도 그 점을 걱정하셔서 저를 시켜 이곳에 오게 하신 겁니다. 도련님 혼자 매주 약 두 병을 마시기에는 심리적 부담이 크니까요.”
그러니까 지금… 정말로 한 주에 두 병을 마셔야 한다는 말이지.
‘…후.’
말려 죽이는 속도를 올리겠다는 말이군.
내 코어가 전보다 더 강해졌으니, 첫날 지하실에서 눈을 떴을 때보다는 견딜 수 있겠지만….
‘역시 미친놈이군.’
“형님께서는 정말 세심하시군요.”
“그렇지요.”
부드럽게 미소 지은 그가 무언가를 권하듯 손짓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이 상황에서 막무가내로 여기를 벗어나거나 거부한다면 끝장이다.
가장 빠르고 간편하게 죽고 싶다면 해 볼 만한 방법이다.
독약 병의 뚜껑을 손가락을 밀어 떨어뜨리고 액체를 차에 부었다.
검은 액체가 엷은 잿빛의 표면에 떨어지더니 금세 무겁게 가라앉았다. 티스푼을 가볍게 한번 젓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찻잔 끝을 입가에 대었다.
밀크티에 희석된 덕에 목이 곧바로 타들어 가지는 않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금세 혓바닥부터 식도까지 찌릿한 통증이 퍼져 나갔다.
위장의 위치가 어디인지 알 것만 같다.
독을 피하듯 온몸의 피가 아래로 빨려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순간 시야가 새빨갛게 변했다가 검게 변해, 눈을 뜨고 있음에도 앞이 보이지 않았다.
욕설이 목 끝까지 올라온다.
나는 미소 지으며 잔을 내려놓았다.
“많이 의연해지셨군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적에는 많이 우셨는데요. 맛이 없다면서요.”
“그랬나요.”
루카의 기억에 따르면 굳이 어릴 적까지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나중에는 맛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괴감 때문이었지만, 그가 그런 것까지 알 턱은 없고 알 필요도 없다.
내가 그저 미소만 짓고 있자 그가 눈가에 주름을 만들며 웃었다.
“예전에는 사람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셨는데, 많이 나아지셔서 다행입니다.”
“형…콜록. 형님의 이름에 누를 끼칠 수는 없으니 노력했습니다. 저 때문에 형님께 안 좋은 이야기가 나올 때가 종종 있어서요.”
가오 안 살게 기침이나 하고 있네.
하지만 상대방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다.
루카의 기억에도 약을 먹고 토하기 직전까지 기침하는 건 일상이었다.
그런 기억과 한 달 전의 경험을 떠올리면, 독이 갑자기 들어간 지금은 효력을 더 강하게 느껴져야 하는데, 확실히 이 정도로 끝내고 참을 수 있는 걸 보니 예전보다 체력이 많이 좋아진 게 느껴진다.
“그랬군요. 학생들이 많이 어리다 보니….”
그가 눈썹을 늘어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형님은 저를 이 나이까지 살게 해 주신 분이니, 제가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형님의 이름에 먹칠하는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노력하셨군요. 멋진 각오입니다. 분명 공작님과 큰 도련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사실 아직 많이 어렵기는 합니다. 공께서는 가족 같은 분이시니 그나마 고향 생각도 나고, 마음이 많이 편해져 노력한 만큼 나오고 있는 듯합니다.”
“편히 여겨 주시니 기쁘군요.”
나는 웃음으로 대답하고, 시계를 확인했다.
“벌써 수업 하나가 끝날 시간이네요. 슬슬 가 봐야겠습니다.”
“그렇죠. 정문까지 데려다드리겠습니다.”
나는 그와 말없이 가게를 빠져나와, 구불구불한 골목을 지나 학교 외곽을 빙 돌아 정문까지 도착했다.
“빠지신 교시는 제가 학교에 말해 두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
“사흘 뒤에 뵙겠습니다, 도련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정문을 지나 학교로 들어갔다.
이 추운 날씨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미 났던 것일지도 모른다.
빠른 걸음으로 가장 가까운 건물로 들어가, 벽에 기댔다.
긴장이 풀려 그런지, 아까 겪었어야 할 것이 이제야 몰려온다.
개인적으로 못 견딜 정도는 아니지만 초점이나 걸음걸이 때문에 남들이 보기에는 좀 이상해 보일 수 있다.
여기서 정화 한번 하고 가?
아니, 외피에 생긴 문제가 아닌 이상 자기 자신에게 거는 마법은 따로 익혀야 한다.
게다가 이건 정화로 끝나지 않을 수준이기도 하고, 기숙사도 아닌 곳에서 마법을 쓰기에는 리스크가 크다.
“…….”
건물 후문 턱에 앉아 쉬고 있을 때, 무언가가 저 앞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더니 내 목으로 올라탔다.
익숙한 털 덩어리였다.
“루카스! 나르케가 루카스한테 가래.”
“으음.”
나름 성의를 다해 대답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다행히 파이는 내 후진 답변에도 개의치 않았다.
파이가 바닥에 내려놓았던 풀뿌리를 물고 내 앞에 들이댔다.
“이거 먹어!”
“…이거 네가 물고 왔던 거 아냐…?”
“나르케가 루카스가 그렇게 말하면 가릴 때인 것 같냐고 말하랬어. 그리고 깨끗해!”
이런 것까지 예지한다고? 헛웃음이 난다.
파이가 가져다준 뿌리를 집자, 손끝이 꼭 신력으로 축성한 성수에 넣은 것처럼 싸해졌다.
느낌이 나쁘지 않아 입에 넣고 대충 씹어 삼켰다.
“…!”
금세 목의 통증이 사라졌다.
여전히 힘은 없지만 걸을 정신은 생겼다. 파이가 앞에 서서 내 얼굴을 이리저리 들여다봤다.
“괜찮아?!”
“괜찮아.”
동물도 웃나? 왜인지 파이에게서 웃는 얼굴을 본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이제 수다를 떨기 직전의 표정을 짓는 파이를 보며 똑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교황령에서도 나르케가 사람들한테 자주 해 줬던 건데! 나도 많이 옮겼어.”
“그렇구나.”
“이제 가자!”
“그래.”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교실에 도착했다.
갑자기 불려 나간 이유가 뭔지 듣고 싶어 하는 얼굴이 몇몇 보였다. 전부 모임의 친구들이었다.
아쉽지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나르케에게 고마움을 담아 눈짓하고 그대로 노트만 챙겨 의무실로 향했다.
‘수업은 빠지면 빠질수록 좋지.’
이런 식으로 빠질 줄은 몰랐지만, 누워서 생각도 정리할 겸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
약 처방 기록이 늘어날수록 형은 더욱 기뻐할 테니 일거양득이지.
정리를 하자면, 형은 내가 빠르게 죽길 바란다.
내가 마법을 쓰는 걸 모르는 상황에서 약을 더 먹인다는 건 그냥 일찍 죽어 버리라는 얘기다.
‘플레로마의 새로운 실험’이라는 아주 좋은 구실을 잡자마자 곧바로 행동을 실행에 옮긴 걸 보니, 형은 아직도 중간고사의 망령에 시달리고 있는 게 분명하다.
내가 정말로 성적을 올릴 줄은 몰랐으니, 엄청난 충격으로 작용했을 법도 하다.
성적을 올리라는 말은 그저 이루지 못할 걸 알면서도 내 처지를 한번 더 확인시키고 좌절케 하려 던진 말이었으니까.
그런데 말 한마디로 단박에 전교 꼴등에서 10등으로 올랐으니, 완전히 눈엣가시로 보일 수밖에.
“발악을 하는구나.”
내 것이 아닌 두려움과 공포로 인해 피부가 창백하게 질리고 손끝이 잘게 떨리기 시작한 와중에도, 비웃음이 난다.
형이 날 말려 죽이든 말든, 내 계획은 바뀌지 않을 테니까.
띠링―!
〈 Chapter 4. 끊임없는 물방울이 돌을 뚫는다 (2) 〉
제안 2: [인상] 점수 5 달성 (0/1) (167시간 59분 55초)
* Route 1 — 〈 Chapter 4 특별 보상 〉
* Route 2 — 〈 Chapter 5. 저녁이 되기 전에 하루를 칭찬하지 말라 〉
* * *
전략회의 날, 한 학생이 불안한 듯 손톱을 뜯으며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루카스? 의회가 저렇게 나오는데 방법이 있다고?”
“방법이 있어.”
“…….”
내가 한 대답이 아니다.
엘리아스가 뺀질뺀질한 얼굴로 말했다.
“언론에 넘겨.”
“어, 언론?”
“오.”
“야, 여태 그 생각을 왜 못 했냐.”
원작에서도 의회는 거의 자동응답기나 마찬가지인 답변을 보냈고, 엘리아스는 언론을 찾았다.
하지만 치안본부가 직접 설정한 결계가, 그것도 한두 개도 아니고 열에 가깝게 제구실을 못한다?
누가 보아도 황실의 잘못이다.
‘그리고 언론은 황실 친화적이지.’
황실―정부의 마력 지원이 없으면 이 나라의 언론은 굴러갈 수조차 없다.
그러니 엘리아스의 제보는 무시당할 게 분명했다.
“잠깐만, 난 언론이라고 해서 치안본부나 의회랑 다를 것 같진 않은데?”
“근데 내 생각에도 그래.”
“어. 내 생각에도 그래.”
“?”
학생들이 엘리아스의 대답에 어처구니가 없이 그를 바라봤다.
“원래 높은 분들은 친절하게 말하면 못 알아듣는 법이야. 하지만 커리어가 걸려 있으면?”
“커리어?”
“국장 언론인 인생을 걸면 보도를 안 할 수가 없지. 걱정하지 마, 얘들아. 무조건 나가게 돼 있어.”
언론이 기사를 내보낼 것 같지 않자, 엘리아스는 언론사 국장의 약점을 잡고 협박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통 크게 나간 제국신문 메인 기사에, 다른 수많은 언론사도 앞다투어 안을 보도했다.
국민의 분노를 자극해 다급히 의회 안건을 통과하게 했으니, 소기의 목적은 완벽히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결계가 강화된 덕에 플레로마가 날뛸 수도 있었지만, 정부 마법사가 동원되었으니 결과적으로 플레로마에게 타격을 준 셈이었다.
하지만 평판의 입장에서는?
“그건 좀 위험할 것 같다, 엘리.”
“…그래? 네 생각은 어떤데?”
엘리아스가 어디 한번 들어 보자는 표정으로 웃으며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댔다.
소설 속 엘리아스의 공으로 제국의 수많은 사람이 안전해졌고 플레로마의 폭주에 브레이크가 걸렸지만, 그는 응당 받아야 할 대우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언론과 황실의 합작으로, 엘리아스의 공이 전혀 알려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존 방법을 유지하면 나까지 같이 황실과 언론을 적으로 돌리게 된다.
그리고, 당연히 그렇게 둘 수는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