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37)
“요구를 전부 들어주시겠다고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차피 이 소송은 자격 요건만 보아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각하 판결이 날 소송이니, 애초에 요구를 들어줄 필요도 없지요.”
그 말에 상대가 헛숨을 내뱉었다.
“예? 아니, 그럼 왜….”
“7일 이내, 그것도 전국 실시간 송출. 이것이 가지는 의의는 신민의 관심이 사그라들기 전에 전국에 의견을 표출할 장이 만들어진다는 것이죠.”
“당연합니다. 그러니 더더욱 발언할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상대가 답답하다는 듯이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발언은 그쪽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예?”
“그 발언의 장을 우리가 이용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상대가 조급한 반응을 멈추고 무언가 알아챈 얼굴로 총리를 바라봤다.
“대중이 문제의 화살을 황실에 돌리는 우를 범하지 않게끔, 우리 역시 입장을 표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침 상대가 엘리아스 공작이죠. 논리적인 주장과 반박 없이, 성질을 못 이겨 분노만 표출하다 갈 겁니다. 거부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렇군요. 확실히 대중에게 보이기에는 좋은 상대라고 생각하지만… 성립 요건이 충족되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요. 소송은 적법한 절차를 거친 뒤 각하될 겁니다.”
그가 말을 멈추고 탁자에 놓인 신문을 흘끗 보았다.
[엘리아스 호엔촐레른 황실 치안본부 상대로 행정 소송… 왜?]
“이미 소송이 제기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정부가 무언가 잘못한 게 아닐까 하는 의문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
“자칫하면 각하 판결이 여론을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성이 흐려진 대중은 그저 정부를 향한 소송이 물려진 것에 분노할 테니까요. 각하까지 반년 정도 걸리겠지만, 이 문제가 예상보다 크다면 반년의 시간으로는 해결이 나지 않을 공산이 큽니다. 그러니, 지금 바로 화제의 주도권을 가져올 생각은 변치 않습니다.”
그가 두 손가락을 접어가며 말을 이었다.
“재판이 아니라, 연방위원회 비정기 회의에 참가시키지요.”
* * *
소송으로부터 나흘이 지나, 우리는 연방위원회 청사의 대기실에 모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네. 어떻게 이렇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네가 말한 대로 움직이냐~?”
엘리아스가 정장 재킷을 걸치며 웃었다.
레오가 그 모습에 눈을 찌푸렸다.
“너 셔츠랑 베스트 어깨 재봉선도 안 맞추고 재킷 입은 거 알아?”
“그래? 보기엔 괜찮은데.”
“입었을 때 불편하지도 않아?”
“어. 네가 도와줘.”
“…하아….”
레오가 깊은 한숨을 끄집어냈다.
엘리아스가 온 뒤로 레오의 피로도가 두 배로 뛴 것 같다.
아무튼, 대체로 예상한 바 안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내민 조건 2개가 모두 ‘전 국민에게 말할 자리를 달라’는 신호니까.
두 조건 모두 전례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재판에 대고 저런 뜬구름 잡는 소리를 하는데, 시기상 저걸 순수하게 재판을 원한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
‘그렇게 받아들였으면 정치인 하면 안 되지.’
물론, 다 알면서도 그냥 판결이 각하되길 기다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약간은 도박이었지만, 그래도 놈들이 엘리아스와 접촉을 시도하리라는 쪽에 힘을 실을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제국 귀족층에게 있어서, 엘리아스는 세상 물정도 모르고 감정에 치우쳐 행동하는 골칫덩이로 여겨진다.
그런 자가 한때의 정의감에 불타 황실의 반대편에 서서 제국민 전체를 향해 발언할 자리를 요구한다?
‘쉬운 상대지.’
이 억지 요구를 총리가 직접 자리까지 옮겨가며 들어준 걸 보면, 저런 치기 어린 젊은이 하나쯤은 가볍게 정치적-경제적 논리를 동원해 짓누를 수 있으리라 여겼을 것이다.
그 생각을 보여 주는 증거가 여기에 있다.
[연방위원회-엘리아스 호엔촐레른 공개 담화 D-4]
[연방위원회-엘리아스 호엔촐레른 공개 담화 D-1]
[의원 아닌 민간인 참여, 연방위원회 회의 사상 ‘최초’]
[크리스티안 슐리펜 연방위원회 부의장 “실시간 송출되는 공개 담화, 많은 관심 부탁”]
[최초 제보자 니콜라우스, 엘리아스 호엔촐레른 측 자문인으로 참가]
지난 나흘간의 제국신문 1면 보도다.
연방위원회는 이걸 전혀 막지도 않고 대대적으로 광고까지 하고 있다.
담화를 구색 갖추기식으로 대했으면 기사는 단 한 줄도 나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곤충 이슈가 커지면 정부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텐데, 아예 시작부터 정부의 대척점에 있는 인물 하나를 공박해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는 쪽이 더 선전하기 좋은 그림처럼 보였겠지.
한참 레오와 재킷으로 씨름하던 엘리아스가 마침내 준비를 마치고 대기실 소파에 털썩 앉았다.
엘리아스가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당장이라도 웃음을 터트릴 것처럼 입을 꾹 눌렀다.
“너 뭔 말 할 거면 차음 마법 걸어.”
레오의 충고에 엘리아스가 손가락을 튕겨 마법을 펼쳤다.
“됐지? 아니, 난 진짜 아직도 안 믿기네. 네가 그 니콜라우스라고?”
“어.”
나는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임의 학생들은 레오의 언질이 있었기에 오염 곤충 발표를 니콜라우스의 명의로 진행한 걸 알고 있지만, 그가 나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같이 자리에 서야 하는 엘리아스에게는 소송을 걸기 전에 내가 니콜라우스라는 것을 이야기했다.
‘네가 니콜라우스라고?’ 질문에 쉰 번쯤 답해 주다, 보다 못한 레오가 새까만 가면을 눈앞에 들이민 뒤에야 간신히 그를 납득시킬 수 있었다.
‘험난했다.’
대신 엘리아스의 호감도 하나는 확실히 올랐다.
사실을 말하기 직전 확인한 호감도는 2.5.
그리고 지금은 4.5로, 내가 니콜라우스라는 사실 하나로 2점이나 올랐다.
엘리아스는 니콜라우스를 좋게 평가했던 모양이다.
엘리아스가 웃으며 내 얼굴을 가리켰다.
“가면 좀 다시 벗어 봐. 너 눈썹이랑 홍채 색까지 바뀌니까 진짜 다른 사람 같아.”
“…안 돼. 여기서 들킬 일 있냐.”
의회 안에서도 가면을 벗지 않아도 된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바이에른 왕실의 도움을 받았다. 아무리 그래도 허가가 나지 않을 수 있는데, 왕실에서 신원을 보증해준 덕분에 큰 문제로 번지지는 않았다.
비록 지켜보는 사람들은 좀 이상하게 여기겠지만… 그 정도야 감수해야지.
이때, 가면을 썼어도 잘못하면 목소리로 나인 것을 알아챌 수 있기에, 적절한 마법 수식을 찾아 목소리를 살짝 바꾸었다.
듣기에는 이상하지 않지만 기존에 나를 알던 사람들은 나인 것을 알 수 없게 변했다.
그때, 대기실 문이 열렸다.
“준비하세요. 30분 뒤 송출 시작합니다.”
“예에에~”
“대답은 짧게 해.”
“예.”
“나한테 하지 말고, 앞으로!”
레오가 미간을 누르더니 한숨을 쉬었다.
“너한테 여길 맡겨도 되는지 모르겠어….”
“왜 안 돼? 루카는 날 전적으로 믿고 있어. 너도 날 믿어 봐.”
레오가 옆에 앉은 나에게 따가운 눈길을 보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쟤가 네 생떼를 전부 들어줬지. 대체 왜?”
“이기고 올 테니까.”
내 간단한 대답에 엘리아스가 목발 끝을 바닥에 두드렸다. 손뼉 대신인 것 같았다.
“야, 진짜 듣기 좋은 말이네.”
“…그래. 이미 가게 된 거 어쩔 수 없는데, 제발 이상한 거 하지 말고.”
“안 해. 난 그냥 설득만 하다 올 거야.”
“물리적으로?”
“아니, 다른 방법으로 할 수는 있겠는데…. 아무튼 때리지도 않을 거고 마법도 안 쓸 거야. 걱정 마.”
“다른 방법으로 하는 건 뭐야?!”
“진정해, 레오. 어차피 여기서 가장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야. 길이 하나밖에 없으면 그냥 즐겨.”
사실이다.
엘리아스는 이번 일의 적임자다.
레오나 내가 전면에 나서는 것은 그냥저냥 먹힐 선택지는 될 수 있어도, ‘최고의’ 선택지는 될 수 없다.
같은 일을 해도 행위자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수년 전부터 깽판을 쳐왔지만 늘 한량처럼 살아왔으니 그러려니 여겨졌던 주인공과 달리, 레오나 니콜라우스는 그렇지 않다.
평범한 말 한마디에도 잃을 것이 많다.
엘리아스는 숨 쉬듯이 사고를 치고 다닌 전적과 생각 없는 이미지 덕에, 허용되는 언행 수위의 폭이 비교적 넓다.
‘원래 그런 놈’이라는 이미지가 얼마나 강력한지, 상대의 말꼬리를 하나하나 잡아 따져드는 게 일상인 정치권에서는 더없이 훌륭한 특성이다.
‘다만 리스크는 예상하고 있어야지.’
소설에서 엘리아스는 종종 법적 문제에 휘말렸다. 말로 끝내지 않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미성년자기에 큰 처벌은 받지 않는 시기지만, 그래도 일행인 나까지 한두 번쯤 연행될 각오는 해야 한다.
엘리아스가 주인공인 소설에 들어온 이상, 또 그를 동료로 삼기로 한 이상 예정된 일이나 마찬가지다.
남들은 당연히 꺼리겠지만, 10여 년 후 이 나라의 권력이 누구의 손에 들어가는지 알고 있으니 이쯤은 감수할 수 있다. 상황을 최상의 컨디션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물불 가릴 때가 아니기도 하고.
‘물론… 엘리아스가 황제가 되기 전에 내가 이 미친 세상에 계속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그가 황제가 되는 시기를 앞당기면 될 일 아닌가. 어차피 이번 일 자체가 엘리아스에게 쏟아지는 관심을 반년가량 앞당기는 일이다.
나는 시계를 확인하고, 테이블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마지막으로 되짚어 보자. 오늘 의원들과 대화하는 쪽은 내가 아니라, 엘리, 너야.”
“좋지, 말싸움이 최고야.”
“그냥 넌 싸움이 최고 아니냐?”
레오가 중얼거렸다.
“나도 필요할 때 입을 열겠지만, 애초에 자문 역할로 참가하는 거지, 담화를 주도하는 입장에서 참가하는 건 아냐. 그보다는….”
“배신자를 찾을 거지. 맞지?”
“그래.”
나는 같이 참석하되, 이곳에서 플레로마와 관계가 있는 자를 찾아낼 것이다. 발목을 잡을 만한 싹은 시작부터 제거해야 한다.
나르케의 통찰 능력을 쓸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가 이곳에 참가할 명분이 전혀 없다.
그래도 상관없다. 내 선에서 끝낼 수 있는 일이니까.
“나는 기본적으로 모든 대화를 네게 맡길 거야. 그래도 첩자가 누구인지 찾아내려면 나 역시도 한두 번 입을 열어야 해.”
“그래, 상관없어. 그런데 알아볼 방법이 있나 보지?”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비록 내게 통찰 능력은 없지만, 방법은 간단하다.
올해 초, 결계 설치에 적극 찬성했던 자들의 호감도를 이용하면 된다.
* * *
“지금부터 연방위원회 긴급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플레로마 곤충 오염 문제에 대해 담화를 나누기 위해 엘리아스 호엔촐레른 공작과 니콜라우스 에른스트 경을 초청했습니다.”
연방위원회 부의장이 널찍한 회의장 한가운데에 서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엘리아스가 목발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 있게 미소 지었다.
“안녕하십니까, 엘리아스 호엔촐레른입니다.”
나는 엘리아스의 인사가 끝나고, 박수갈채가 멎어 들 즈음 소개를 시작했다.
“여기 계신 모든 분을 포함해, 제국의 신민 여러분께 처음 인사드리겠습니다. 니콜라우스 에른스트입니다.”
성은 원래 내 것을 썼더니 레오가 너무 눈에 띈다고 새로운 성을 붙여 등록시켰다.
아직 입에 붙지는 않았지만 듣기에는 훨씬 자연스럽다.
또다시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엘리아스가 내게 미소 짓고 다시 주위로 시선을 두며 인사했다.
“이 자리에서 치안본부의 마법공무원과 상원의원분들을 뵙게 되어 진심으로 기쁩니다. 비록 이 자리에는 계시지 않지만, 초청해 주신 알렉산더 총리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정말… 의외로 제대로 말한다.
물론 소설에서도 주인공의 진지한 면모를 종종 보긴 했지만, 이렇게 실제로 보고 있으니 놀랍다.
아무튼, 시작이다.
나는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사람들 주위로 하얀 글자가 반짝였다.
[호감도 +1]
[호감도 +1]
[호감도 +3]
[호감도 +2]
[호감도 0]
이렇게 여러 사람을 동시에 보는 건 처음이라 어색하다.
아무튼, 전부 별표가 붙지 않았다.
호감도 특성이 적용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앞줄에 앉은 자들은 주로 결계 찬성파와 중도.
뒷줄에 앉은 자들은 주로 결계 반대파다.
당연히 반대파 쪽에서 호감도가 훨씬 더 낮게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동질 집단 안에서 견주어 보았을 때 특별하게 호감도가 낮은 자는 없다.
그렇다면 이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들 중 급격한 호감도 변화를 보이는 자가 누구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