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54)
나르케는 한참 미소만 짓고 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말한 게 맞아.”
“…….”
신부도, 주교도 아니라고 하면 폭이 상당히 좁혀진다.
레오와 엘리아스의 표정이 변하는 걸 보던 나르케가 손뼉을 쳤다.
“자, 분위기가 너무 삭막해졌는데~”
“…….”
“천천히 하자. 어차피 너희에게 계속 숨길 생각은 없었거든.”
“우리한테?”
레오가 의문스러운 부분을 짚으며 되물었다.
“그래.”
나르케가 레오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 깊이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다.
“너희가 묻고 싶은 건 이거지. 교황청의 마법사가 굳이 정체를 숨기고 제국2교육원에 온 이유가 뭐지?”
“그래.”
그가 교황청 소속인 것은 쓰는 신력만 봐도 이상하지 않다.
그쪽에 등록된 마법사 중 이 나이쯤 되는 놈들이 없을까?
차고 넘친다. 특히 품계가 높을수록 더 그렇다.
교황청은 시대가 변하면서 인재 유출이 가속되자 신력을 확보하기 위해 점점 더 어린 나이부터 마법사를 성직에 앉히기 시작했다.
그러니 그가 17살임에도 교황청의 마법사인 것은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일하고 있어야 할 자가 왜 제국의 고등학교에 왔으며, 또 왜 신분을 숨기고 왔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하나만 물어보자. 너희는 나를 믿지 못하고 있지?”
“믿어. 그런데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 놓이니까 내 믿음이 애매해지는 느낌이네.”
레오가 나르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답했다.
“그래, 이해해. 솔직히 말하자면 너희를 속이려고 했던 건 아니야. 나도 루카스처럼 내가 누구인지 밝힐 수 없었던 것에 가까워.”
“밝히면 네가 위험해지는 거야?”
엘리아스가 물었다.
“하하, 그건 아냐. 루카스와 비교하면 내 문제는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아. 그냥 나는 여기 오는 대신 신원을 밝히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온 거라서.”
말 못 한다는 상황만 비슷하지 위험 차원에서는 같은 점이 없어 보이는데, 교황청과 약속했을 텐데도 강제성은 없어 보인다.
“아직 잘 알지는 못하지만, 나는 솔직히 너희가 마음에 들어. 너희는 나를 친밀하게 여기지는 않겠지만.”
‘…음.’
그야 혼자 마음에 들 수밖에.
통찰 능력이 있으니 나르케는 타인의 됨됨이가 어떤지, 믿을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 곧바로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반대는 아니다.
‘통찰 단점 하나 알겠네.’
말해 주지 않은 것까지 알 수 있는 쪽은 상대의 내면에서 자신과의 공감대를 찾고 친밀감을 형성할 수 있지만, 상대방은 아니다.
나르케의 말이 사실이라면 벌써 관계의 비대칭이 생긴 셈이다.
나르케의 말에 레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솔직히 아주 친하다고는 못하겠지만 아직 두 달도 안 봤고, 여태 모임 회의할 때나 제대로 마주쳤잖아. 그런 상황에 비하면 빨리 익숙해졌다고 생각해. 굳이 그렇게 벌써 친밀감이 어떤지 단정 지을 필요가 있어?”
반 친구가 갑자기 부정적인 말을 꺼내서 그런지, 레오가 반장 일을 할 때나 쓰던 말투로 그를 달랬다. 내내 별생각 없는 얼굴로 듣던 엘리아스도 동조했다.
“그래, 그냥 접점이 많지 않았는데 벌써 그렇게 말하면 앞으로 어떻게 친해지냐~. 나도 너 마음에 들어!”
“하하, 그렇게 받아들여지는구나. 속상하다는 말은 아니었는데, 괜히 마음 쓰이게 만든 건 아닌가 싶네.”
나르케가 할 말을 정리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렇게 표현하는 게 좋겠다. 너희는 조금 부담스러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너희를 다른 친구들보다 더 믿고 있어. 그렇다고 믿는 정도가 완벽하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래.”
“그래도 너희를 남들 이상으로 믿지 못했다면 출동 명령을 거부했을 거고, 너희랑 같이 수사국에 앉아 있었겠지? 나의 신원을 걸어가면서까지 국민 모두가 주목하는 사건에 얼굴을 들이밀지 않았을 거란 말이야.”
“그랬겠지. 그 점에서 네게 정말 고맙게 생각해.”
아무 반응 없이 나르케의 말을 듣던 레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뭘, 처음부터 우리 둘 중 누군가가 투입되는 걸로 계획을 세웠잖아. 아무튼, 나는 너희가 내 이야기를 어디에 말하지 않을 거라 믿고 이 일을 맡았어. 말한다 해도 내가 너희를 탓하지는 않겠지만, 내 얘기를 듣기 전에 그거 하나만은 알아주고 갔으면 해.”
나르케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5년 전에 추기경으로 서임됐어.”
“…….”
예상했음에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아까 주교가 아니라고 확실하게 대답했지.
추기경 서임이 되려면 주교품이어야 하는 걸로 아는데, 주교가 아니라고 강하게 말한 것을 보면 내가 알던 현실과 체제가 다른 것 같다.
신원 문제도 있겠다 숨길 거면 철저히 숨기지 주교복은 왜 입었나 싶은데, 겉으로 보이는 급의 문제도 외교 차원에서는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저만한 고급인력을 보내 놓고 일반 마법사를 보냈다고 오해받는 건 여러모로 낭비다.
엘리아스가 정적을 깨고 물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추기경? 그때면 열두 살 아니야?”
“맞아. 나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바로 신력을 쓸 수 있었거든.”
“이야, 그냥 타고났네.”
나르케가 가볍게 웃고 말을 이었다.
“솔직히 너희가 거리감을 느낄까 봐 걱정이 되는데… 사실 너희도 일반적이진 않으니까 상관없지?”
“어어~ 그냥 편하게 말해. 여기 다 똑같은 인간들이야.”
엘리아스가 손을 휘휘 흔들었다.
“굳이 제국2교육원에 온 이유는… 그래, 너희가 나를 경계한 가장 큰 이유가 이거지. 내가 아까 거의 태어날 때부터 신력을 썼다고 했지? 서임 되는 나이를 최대한 늦춰서 열둘에 그 자리에 올랐지만, 사실 그 전이라고 해서 평범히 지낸 건 아니야.”
‘…….’
잠깐. 여기 왜 왔는지 예상되는 게 하나 있는데.
나는 조용히 질문했다.
“신학교는 얼마나 다녔어?”
“서임 되기 전에 반년 정도. 사실 나이가 되어서 서류상에만 올려 둔 이름이야.”
“오래 안 다닌 이유가 있어?”
“음… 이유가 많은데, 어른들께서 내 일에 지장이 갈 거라고 판단하셨거든.”
“뭔 일을 했는데 학교도 못 가?”
엘리아스가 한마디 툭 던졌다.
“하하, 제대로 말하는 건 규정에 걸려서… 이 세상이 뭐로 굴러가는지 알지?”
“마력으로 돌아가지. 하나부터 열까지.”
“그래, 그거야.”
나르케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
모두의 말이 없어졌다.
내용을 굉장히 많이 잘랐지만 가장 말이 되는 가설을 생각해 보면, 가문을 유지하는 데에 쓸 신력을 제공했다는 말로 들린다.
아까부터 신원을 밝히기 어렵다, 나랑 비슷한 처지다, 같은 이야기만 늘어놓는 걸 보니 존재 자체가 대외비였던 것 같다.
슬슬 모두 나르케가 여기에 왜 왔는지 짐작한 듯했다.
“너무 가라앉는 거 아냐? 하하, 나는 별로 안 힘들었어! 내가 평민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또 모를까, 아니잖아. 그렇게 막무가내로 이뤄진 일도 아니고, 솔직히 오냐오냐 자라서 철없이 컸거든.”
그거야 당연히, 집안의 부와 권력과 미래가 놈에게 달린 상황이니 상전 대하듯 해야 했겠지.
나는 잠자코 그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그래도 한 번쯤 경험해 보고 싶어서. 그쪽의 마법학교에는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많아. 학교에서도 같은 삶을 살 거라면 아예 나를 모르는 곳으로 오는 게 훨씬 마음이 편하지.”
“…내가 널 다그쳤다면 미안하다.”
레오가 어두워진 얼굴로 미간을 누른 채 사과했다.
“아냐, 애초에 내가 너희에게는 알릴 수 있다고 판단해서 말한 건데, 뭐.”
“갑자기 잠깐 의심했던 내가 쓰레기가 된 것 같은데! 하하하!”
엘리아스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다시 등을 의자에 기대며 중얼거렸다.
“거참, 조카 유배 보낼 생각만 하는 우리 큰아버지도 학교는 안 막았는데.”
“그런 거 말하지 마.”
“너무 걱정하지 마, 레오. 여기 너희 집이잖아.”
“…….”
엘리아스가 레오의 부릅뜬 눈을 외면하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다행히 이제 조금 있으면 축제네~ 너 연극에서도 분량 완전 많은 역 맡았잖아. 학교생활 제대로 즐기고 돌아갈 수 있겠어.”
“그치.”
“좋겠다. 난 다리 때문에 놀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근데, 잠깐만. 너 대학은 제국에서 다닐 수 있어?”
“음, 내 소속만 들키지만 않으면 여기서 다닐 수 있을 것 같아.”
나르케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 말에 엘리아스가 눈을 번득이더니 손뼉을 착착 쳤다.
“야, 뇌 비우자, 얘들아~ 방금까지 우리 무슨 얘기 했는지 아는 사람?”
“어디 가서 말 안 해.”
“…….”
나는 레오의 무미건조한 답변에 헛웃음을 지었다.
교실에서는 이럴 때 누군가 엘리아스의 헛소리를 받아 주는데, 여긴 전부 그런 성격이 아니네. 그나마 엘리아스가 어떤 반응에도 굴하지 않으니 다행이다.
‘아무튼….’
저 둘은 몰라도, 나는 시시덕거릴 상황이 아니지.
말만 들어서는 이상한 점이 없다.
그 나이에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가 그럴 만한 자격을 가진 것도 사실이다.
또 수많은 가문에서 강하게 태어난 아이들의 마력을 뽑아 부를 축적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말 제대로 된 학교생활을 하고 싶었다면, 그래서 무조건 교황령을 떠나 제국으로 교환을 와야만 했다면, 소설에서도 그 이야기가 나와야 맞다.
그런데 나는 나르케의 이야기를 단 한 글자도 읽은 적이 없지.
평범하게 살아 보고 싶어서 이곳에 왔다는 말은 진실일지도 모른다. 그 정도 힘을 가졌으면 평범하게 살기가 더 어려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일의 원인이 딱 하나만 존재하리란 법은 없다.
그를 소설과 달리 행동하게 한 또 다른 요인이 있다.
‘그 시기에 소설에서 없던 변화가 생겼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겠지.’
내가 아는 선에서는 나 하나다.
하지만 교황령에 소문이 들어갈 만한 변화는 아니었다. 그저 질문에 한두 번 답하고, 수업 중 작게 마력을 쓰는 정도였으니까.
2주쯤 되는 기간에 내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교환을 준비할 수 있을까?
이렇게 보면 나의 변화는 그가 여기로 온 원인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끝내면 안 되지.’
나는 그를 보며 호감도 창을 열었다.
나르케 파르네세
호감도 +7.5
처음 만났을 때부터 호감도가 7이었지.
어떻게 일면식도 없던 자에게 이만한 값을 가질 수 있을까.
비슷한 예로 파이가 있지만, 파이가 초기부터 10의 호감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파이는 첫날 내가 자신을 구해 준 것으로 알고 있었고, 그날 나와 말이 통한다는 것을 알았다. 호감도가 높게 나온 것이 이해가 간다.
하지만 나르케는 왜 내게 7의 호감도를 보였지?
처음에는 그가 낯선 인물이라는 점에서 경계하기 바빴기 때문에, 이만한 호감도를 가지고 있다면 나를 해할 가능성이 상당히 낮아지므로 이 부분을 오래 문제 삼지 않았다.
나르케가 레오와 대화하던 중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미소지었다.
나는 그에게 부드럽게 웃어 보이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이 주제에서라면, 무슨 이유에서 그의 호감도가 다른 이들과 다르게 높았는지 짚어 볼 만하다.
* * *
그 뒤로, 자정이 넘어서까지 학교 이야기에서 스트라우치 이야기로 주제를 여러 번 오가고 나서야 잠에 들 수 있었다.
다 같이 있을 때는 답변을 듣기 어려울 테니, 나르케와 둘만 있는 자리를 만들기 전까지는 교환 온 진짜 목적에 대해 알아볼 수 없다.
무엇보다 그걸 알아보기 전에, 지금 집중해야 하는 일이 있다.
일요일 아침이 되어서 나는 국왕의 연락을 받고 그를 만나러 갔다.
내가 방에 들어서자 국왕이 시종을 전부 내보내고 간단히 인사했다.
“다시 보는군요.”
“예, 전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는 적당히 예법에 맞는 인사를 건네고 그가 가리키는 의자에 앉았다.
어차피 정체도 들켰겠다, 왕의 앞에서 가면을 쓰고 있는 것도 예의가 아니기에 가면을 벗어 무릎에 내려 두었다.
그가 꼭 엘리아스가 그랬던 것처럼 얼굴을 부담스러울 만큼 뜯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창문은 미리 처리해 뒀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 감사합니다.”
밖에서 안 보이게 손을 썼다는 말이겠지.
그때 국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제국부터 교황령까지 스트라우치 의원 일로 화제인데, 쉬는 동안 신문은 좀 봤습니까?”
“봤습니다. 그만한 위치에 있는 플레로마는 오랜만에 발각되어서 반응이 커진 듯합니다.”
“그래요. 그런 만큼 개인적으로도 경의 용기를 높게 사고 있습니다.”
그가 생각에 잠겨 말을 멈추더니, 고개를 비틀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경이 아니라 안할트 공국의 공자라고 해야 하나?”
“…….”
또….
하지만 말과 다르게 그의 얼굴은 굳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롭게 내 반응을 기다리는 듯한 표정이었고, 별다른 악감정은 없어 보였다.
소설에서 레오의 대사로 그에 대한 서술이 나올 때마다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평가가 종종 등장했는데, 왜 그런지 알 것 같다.
일단, 내가 해야 하는 말부터 하자.
“그동안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제가 어떻게 말해도 죄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국왕 전하를 속이려는 목적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래요, 전부 전해 들었습니다.”
“위법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처벌은 제대로 받겠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가짜 신분증인 걸 알면서도 거기에 도장을 찍어 준 공범자가 되는군요.”
그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음.’
그래. 다행히도 뜻이 같네.
내 입장은 이 정도면 전달되었다.
나는 이해했다는 의미로 침묵했다.
여기에 아니라느니, 내 잘못이라느니 답을 하면 상대에게 두 번 입을 열게 하는 셈이다.
그의 의도는 누가 보아도 명확했다. 법을 따지고 들자면 이 자리의 둘 모두 잘한 것 하나 없으니, 원칙적인 이야기는 이쯤에서 그만하자는 이야기였다.
역시나 그는 곧바로 다른 주제를 꺼냈다.
“왕세자와 친한 친구라고 들었습니다. 왕세자와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