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55화 (55/220)

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55)

내심 안도감이 든다.

학교생활 주제라면 니콜라우스 얘기를 꺼내는 것보다는 훨씬 편안하지.

다시 입을 열기 전, 그가 찻잔에 손짓했다.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질문에 답했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평소에 많이 도와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 반대 아닙니까?”

“예?”

“왕세자가 피곤하게 굴지는 않고요?”

피곤?

나는 귀를 의심했다. 소설에서 봐 왔던 바로 이 사람은 자기 자식을 이렇게 비하할 사람이 아니었다.

“전혀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왜 그러느냐는 얼굴로 쳐다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왕세자가 학생의 마법에 대해서는 이야기 안 했습니까?”

“…아.”

이제야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이분도 당연히 레오의 마법에 대한 열정을 알고 있을 수밖에 없다.

“하셨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놈이 말한 적은 없지만, 어쨌든.

국왕이 한결 풀어진 분위기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같은 반 친구 시민증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떼를 쓸 때부터 이상했는데, 역시나. 그 친구가 루카스 아스카니엔이라면 그럴 만하죠.”

“그런가요.”

“어릴 적 소원을 풀었을 겁니다. 어릴 때부터 원하는 선생을 죄다 붙여 줬더니 친구도 그렇게 만들 수 있는 줄 알더군요.”

이미 소설에서 레오의 내면 서술로 읽어서 알고 있지만, 이런 걸 막 말하면 자식 입장에서는 좋지 않을 텐데.

레오가 이 자리에 있었으면 국왕의 입을 막고 싶었을 것이다.

‘뭐, 지금 둘이 공통으로 아는 사람이 레오밖에 없으니….’

본론이 나오기 전까지 레오에게 마이너스인 대화는 끊임없이 나올 것 같다.

그가 창밖의 경치를 보며 미소짓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루카스 아스카니엔인 당신과는 이미 만난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예.”

“그 어린 나이부터 가문 역사상 최고의 마법을 내는 아이라니, 다들 장차 가문의 기둥이 될 것이라 기뻐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안할트 공작께서 그러셨죠.”

“…….”

이제 와서 이런 꿈같은 이야기를 해 봤자….

나는 루카가 아니지만, 내가 만인에게 그로 인식되고 또 그로서 인생을 살아가야만 하는 지금 이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영광에 대해서는 누구나 그리 편하게 듣고 있지만은 못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경의 마법적 자질이 얼마나 뛰어난지 호엔촐레른에서 양자로 들이고 싶어 했는데 알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예?”

나도 모르게 물음이 튀어 나갔다.

사실 낮은 가문에서 태어난 강한 마법사를 더 부유하거나 격이 높은 가문에서 스카우트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대체로 그렇다는 이야기일 뿐, 격이 비슷한 가문 사이에서도 종종 요청이 오간다.

순전히 정치적 목적이다. 마법적 강함이 바로 부이고 명예이며 사회에서의 입지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흔한 일이라고 해도 황가는 황가다.

직계는 이미 계승권자가 있으니 루카를 데려가겠다고 했던 곳은 방계 중 어딘가였겠지만, 어찌 됐든 남 주기 아까워서 그 좋은 기회를 걷어차 놓고 이딴 식으로 키워?

‘…후….’

한참 전에 끊었던 담배가 생각난다.

하여간 인생에 도움이라고는 조금도 되지 않는 놈들이 항상 가족이라고 있어서는….

“반응이 격하군요.”

“아닙니다….”

“아스카니엔에서 단칼에 거절했으니 모를 것 같기는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진지하게 고려한 적은 없지만 우리 측에서도 한번 이야기가 나왔군요.”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기억을 짚어 나갔다.

“두 번째 방문 직후였는데, 이미 경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가 돌 때라 적절한 시기는 아니었지요.”

“…….”

두 번째 방문이면 이미 여섯 살이고, 루카가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이 돌 때다.

플레로마 소문이 계층을 불문하고 제국 전역에 퍼진 것은 그로부터 몇 년 후의 일이지만, 귀족 사회에서는 살인 사건 직후부터 루카가 플레로마가 아니냐는 의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얘기가 나왔다고?

‘누가 꺼냈는지 알겠다.’

살인 사건 이후에 비텔스바흐에서 입적 얘기를 꺼낼 놈은….

우리 공국에 방문했던 어린 레오밖에 없지.

‘친구 하나 사귀자고 무서운 소리를 하네.’

레오가 아무리 정통성 있는 피를 가지고 태어났다지만 마력만이 최고인 이 세상에서 사람 하나 잘못 들였다가 계승권 싸움이라도 나면 그냥 끝이다. 친구 하나 만들려 했다가 일생의 숙적이 되는 수가 있다.

그래도 보통 여섯 살이 거기까지 보지는 않지. 딱 그 나이다운 발상이긴 하다.

표정에서 내 생각을 읽었는지, 국왕이 이해한다는 듯 크게 웃었다.

“하하하,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군요.”

“예….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래요. 이제 와 적을 옮기라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습니다.”

국왕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압니까?”

“짐작 가는 바는 있습니다.”

“좋습니다. 첫 번째 방문과 두 번째 방문 사이의 일로 기억합니다. 그 아스카니엔의 둘째가 사람을 죽였다더군요? 플레로마의 기질을 타고나서 말입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강한 마력은 우리의 편일 때나 경외의 대상이 되지, 악의 편일 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 강한 마력으로 장차 무엇을 하게 될지 뻔하지 않습니까? 그 뒤 아스카니엔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군요.

“알고 있습니다.”

국왕이 말없이 차를 마시고, 차분히 입을 열었다.

“아직 몸은 괜찮습니까? 더 식기 전에 마시죠.”

“…….”

멀쩡히 대답했다고 했는데도 점점 말이 빨라지고 있었다.

과거 이야기를 할 때마다 기분이 가라앉고 있는데, 아마 이제 그 이름의 무게는 전부 내가 져야 하기 때문일 테다. 나는 적당히 답을 떠올리고 짧게 사과했다.

“실례했습니다, 전하.”

“아니요. 당연한 반응이죠.”

알면서 이러시네….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최대한 얼굴에서 지워 내며 생각했다.

“그즈음에 황실에서 경을 보내라고 여러 차례 경고했던 것이 아직도 기억나는군요. 황실 입장에서는 아스카니엔 역사상 가장 강한 후계자가 플레로마가 되는 것을 두 눈 뜨고 볼 수 없을 테니, 어떻게든 손을 써 보려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죠?”

“예.”

“그 결과 아스카니엔에서는 제국을 절대로 어지럽히지 않겠다고 맹약을 하고서야 경을 저택에 둘 수 있었죠.”

루카를 황실에 보내는 순간 플레로마가 아니라는 사실이 탄로 날 것이기에, 형은 필사적으로 루카를 감싸며 황실과 맹약했지.

남의 입으로 이렇게 듣기는 또 처음이지만, 여기까지는 이미 잘 아는 이야기다.

하지만 루카도 아는 이야기를 이렇게 진지하게 하자고 나를 여기까지 부른 것은 아닐 테다.

그런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국왕이 내 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맹약에 참여한 감시국 중 하나가 바로 바이에른입니다.”

나는 그의 새파란 눈을 마주 보며 생각에 잠겼다.

‘감시국이라.’

맹약에 아스카니엔과 황실만 참여한 게 아니군.

확실히 이건 새롭다.

“황실에서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 가장 먼저 참여했죠. 그날부터 바이에른은 플레로마인 당신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

“배신감이 드나요?”

국왕이 여유롭게 웃으며 테이블 위에서 양손을 겹쳐 잡았다.

나는 국왕의 얼굴을 빤히 보다 미소지었다.

배신감이 들 리가 있나.

마음만큼은 고맙게 느껴지는데.

“아닙니다.”

국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잠깐 당황할지, 아니면 바로 알지 궁금했는데, 역시 바로 알아차리는군요.”

“모를 리가요. 제 목숨이 걸린 일이었습니다.”

“그래요, 당사자인 경이 바로 파악하지 못하는 게 더 이상하군요. 나는 경을 죽이려는 황실을 막으려 아스카니엔의 편에 섰습니다. 감시국, 감시 가문이 가지는 의미가 그것이죠.”

플레로마 소문이 거짓이라는 것을 누구도 몰랐다는 걸 생각하면, 죽이지 않는 대가로 감시하겠다며 자발적으로 나선 국가들은 오히려 루카에게 악감정이 없었다는 것이므로 좋게 생각할 수 있다.

사실 내가 그대로 황실에 잡혀갔다면 형의 계획은 전부 박살 났겠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감시국이 형의 계획을 성공시킨 중요 요인이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애초에 황실의 입장에서는 아스카니엔에서 제안한 맹약을 마다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아스카니엔이 맹약까지 해 가며 루카를 책임지겠다고 선언한 이상, 앞으로 어떤 문제가 생겨도 황실은 모든 책임을 아스카니엔의 앞으로 돌릴 수 있다.

“나는 경이 플레로마의 특질을 타고났건 아니건 관심 없습니다. 뭘 타고났든 미래는 아스카니엔의 교육과 지원에 따라 달라질 테니, 나는 경에게 일반적으로 살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런데….”

“…….”

“애초에 그 특질조차 없었다니?”

그의 얼굴에서 이제는 완전히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 반응에 의문이 들 즈음, 그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아드리안 아스카니엔이 안할트 공국의 통치자가 되기 위해 네 살짜리 동생을 모략했다…. 얼핏 들어서는 헛소리로 느껴질 만큼 터무니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래 봤자 14년 전에 그자는 고작 열한 살이었으니까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렇게 느낄 만하지.

하지만 어떻게 느껴지든 이미 일어난 일이다.

여기서 열한 살이면 한국에서는 열두 살이지.

어떻게 열두 살이 그런 머리가 되느냐, 어떻게 치밀하게 계획을 짤 수 있느냐, 하는 말은 의미가 없다.

나이가 어리다고 지능이 낮은 것은 아니고, 또 형은 기질 자체가 좋게 흘러가면 정치인, 나쁘게 흘러가면 사기꾼인 놈이었다.

그리고 어떻게 열두 살짜리가 그런 마음을 먹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사후적으로 짚어 봤을 때 답이 나오지.

‘동생 말고 내가 출세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사람을 죽인 꼴을 보면, 나이가 어리고 말고 근본부터 남들과 다르게 글러 먹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황실이 사살해야 할 쪽은 따지고 보면 내가 아니라 형이다.

“하지만 직접 검진해 상태를 확인하겠다는 비텔스바흐의 제안을 계속해서 거절한 것, 그리고 경의 마력이 발현되고부터 아드리안 아스카니엔이 어디서도 안할트 공작위의 계승권자로 여겨지지 않던 것을 생각해 보면, 아주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더군요.”

국왕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물론 그 정도로 왕세자의 말을 확신할 수 있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내가 경의 정체를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이었다면, 그러니까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나는 아무리 왕세자의 말이라 해도 이 사실을 믿지 않았을 겁니다.”

“이해합니다.”

“그러니 나는 왕세자와 경에게 왜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느냐고 다그칠 자격은 없군요. 우리 제국이 10년 넘게 거짓에 휘둘려 왔다는 이야기는 정말로 믿지 못했을 테니까요.”

솔직하시네.

사실 이게 일반적인 입장이지.

그가 한참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뒷짐 지고 서 있을 이유는 없지요. 그러니 경에게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그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양손을 맞잡았다.

“그 전에, 이야기 하나만 듣고 갑시다. 경은 언제 정체를 밝힐 생각입니까? 내 도움이 있다면 지금 밝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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