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56화 (56/220)

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56)

확실히, 바이에른 국왕의 도움이 있다면 이 상황을 빠르게 종료할 수 있다.

이만한 기반이 있다면 형이 약을 먹여 온 것을 발표해도 좋겠지. 잠시 든 생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못합니다.”

멀리 봐야 한다.

형이 10년 가까이 아스카니엔 가문의 모든 이가 알 만한 짓을 벌이면서, 그것이 공론화되었을 때의 일을 대비하지 않았을까? 사용인만 해도 100명이 훌쩍 넘는다.

‘황실과의 맹약을 이유로 들겠지.’

지금 내가 떠올려 봐도 바로 해명할 거리가 나온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묻히긴 했지만, 아스카니엔 역사상 최고의 마력을 가진 자가 어느 순간부터 마법도 못 쓰는 일반인이 된 점은 충분히 의문스러운 일이다.

아마 맹약 관계자 일부는 아스카니엔이 내게 기질을 제거하는 약을 먹여 온 걸 알 것이다.

그렇다면 오래전의 살인 사건이 형의 짓이었다고 밝혀야 할까?

그 어떤 증거도 없는 상황에서 그걸 어떻게 밝혀야 하는가? 이건 바이에른 국왕이 뒤에 있다고 해도 입증이 불가능하므로 통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방법이 없다면, 형을 보낼 건수를 잡기 전까지 대외적으로 그의 발목을 잡고 늘어져서는 안 된다.

‘그럼, 형을 공격하지 않으면서 국왕의 신임을 무기 삼아 내가 니콜라우스라는 것을 밝히는 것은 어떨까.’

이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지지도는 단순히 누군가 밀어주고 있다는 점 하나로 오르는 것이 아니다.

남의 이름표만을 믿고 정체를 밝혔다가는 조금의 공격에도 쉽게 무너질 수 있다.

더 치밀한 성공을 위해서 니콜라우스의 전국적 지지도를 높여야 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내 대답에 국왕이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만족스럽게 미소지었다.

“그래요. 내 생각도 같습니다. 신민들이 황제 폐하보다 아드리안 아스카니엔을 더 신뢰하는 이 상황에서는 바람직하지 않죠.”

“…….”

나를 시험한 건가.

헛웃음이 나긴 해도, 나는 국왕의 입장에서 어제 처음 만난 자이니 어쩔 수 없지. 뭘 얼마나 믿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까지 하는 걸 보니 이제 그의 제안이 얼마만큼의 규모와 의미를 가질지 궁금할 뿐이다.

“자, 슬슬 당신에게 진짜 제안을 해도 되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나는 당신이 어떤 방식으로 정체를 밝히고, 어떻게 니콜라우스를 처리할지 모릅니다. 아마 니콜라우스의 지지도가 그대로 루카스에게 옮겨진 뒤 니콜라우스는 그대로 버려지겠지요.”

신원 통합 이후의 이야기가 나오다니, 새롭네.

나는 그와 눈을 맞추며 그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하지만 니콜라우스 에른스트가 루카스 아스카니엔이 된 후에도 경이 가진 시민권의 효력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

신원을 밝힌 후에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시민권은 당연히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싱거운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지. 그는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니콜라우스의 신원은 말소되지 않을 것이고, 왕국민으로서의 의무도, 왕국군 마법사로서의 의무도 철저히 집행할 것이라 말하고 있다.

“안할트 국민이자 바이에른 국민으로 살아가라는 말씀이시군요.”

나는 정원 건너편의 바이에른 궁을 눈에 담고, 웃음을 띠며 물었다.

“제안이 아니지 않습니까?”

“강제는 아닙니다. 그저 바람일 뿐이지요.”

그가 마주 웃으며 다시 한 번 쐐기를 박았다.

“하지만 내 생각을 말해 보자면, 나는 경이 쌓은 공적을 안할트 공국에 고스란히 넘겨줄 생각이 없습니다. 그럴 마음으로 당신의 시민권에 도장을 찍어 준 게 아닙니다.”

“…….”

“물론 그건 경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하는데, 아닙니까?”

“맞습니다.”

당연히 그럴 생각이 없지.

내가 누구 좋으라고 아버지와 형 좋은 일을 하지?

물론 내가 아스카니엔의 성을 달고 있는 이상, 니콜라우스의 공적이 안할트의 자부심으로 작용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멀리 보면 그 역시 좋은 일이다. 형을 처리한 후 안할트 공작위의 계승권을 누가 가질지는 뻔한 일 아닌가.

어쨌든, 당장의 일에 있어서는 바이에른도 니콜라우스를 양보할 수 없다는 말이다.

선심 써서 내버려 두었는데 단물만 빼먹고 버리게 할 수는 없지.

“저 역시도 바이에른을 저버릴 생각이 없습니다. 국왕 전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이걸로 이야기는 끝났군요.”

국왕이 만족스레 미소지었다.

‘…간단하네.’

의외로 결정적인 곳에서 부드럽게 넘어가는군.

그럴 만하지.

그는 내가 안할트에 큰 애정이 없다는 걸 알고, 아버지와 형에게 좋은 감정이 없다는 걸 안다. 그가 계산하기에도 내게는 바이에른을 저버릴 이유가 없다.

“알다시피 바이에른은 마법 이후의 시대에서 의학에 정진해 왔습니다. 구인류의 의학이 해결하지 못하던 것을 마법으로 해결하게 된 덕에, 우리는 제국과 대륙의 생명을 쥐고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현실에서도 그 자리에 섰다고 말하면 어떤 반응일지 궁금하다.

뭐, 마법이 없으니 비교해도 의미가 없긴 하지만.

그가 손가락을 휘저어 테이블 위에 마력을 흩뿌렸다.

바이에른 의학 박물관 내부의 모습과, 작은 약병 수백 개의 영상이 이어졌다. 언젠가 교양 의학서적에서 신세대 인간의 재료로 보았던 것이었다.

“경의 신체도 비텔스바흐의 기술이 동원된 결과물이지요. 그리고 그건 우리 시대의 마법사라면 대부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제 수명을 최대 세 배까지 늘릴 수 있게 됐고, 마력을 이용해 생명을 만들 수 있게 됐죠. 불가능한 일을 가능한 일로 바꿔 온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가 손가락을 거둬 영상을 꺼트렸다.

“우리는 이제 다른 발전이 필요합니다.”

전투 마법 분야의 발전을 꾀하는 것일 테다.

사실, 이미 바이에른의 마법 군사력은 상당한 수준에 있다.

‘그런데도 거기서 만족하지 않네.’

마음에 든다.

순 비실거리기만 하던 2교육원 학생들만 보다, 이런 자를 보니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가 내 표정에서 그 기미를 읽었는지 입꼬리를 씩 올렸다.

“니콜라우스 경은 우리 왕국 최고의 마법사가 될 겁니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면 내가 지원하도록 하죠. 루카스 아스카니엔에게 필요한 것이든, 니콜라우스 에른스트에게 필요한 것이든 말입니다.”

우리 왕국 최고의 마법사라.

나는 그 말을 굳이 반박하지 않고 가볍게 웃었다.

‘기대치가 높으시네.’

니콜라우스를 필사적으로 성공시켜야만 하는 내 사정을 알고 있으니, 챙겨 둬도 손해는 없겠다고 판단했을 테다. 앞으로도 광고 효과가 큰 업적을 이뤄 낼 테니까.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다.

지원이 있다면 나쁠 것 없다. 지금까지도 무리는 없었지만, 바이에른 마법사로서 규모가 큰 업무에 참여할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

또 니콜라우스의 공적이 아스카니엔으로 완전히 넘어가는 것을 막으면서, 니콜라우스의 지지기반을 안할트와 바이에른 양국에 만들어 두는 일이 된다.

나는 미소지으며 답했다.

“전하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그래요, 좋습니다.”

그가 시원한 말투로 답하며 손을 내밀었다.

가볍게 맞잡자, 손목으로 마력이 흘러들어와 혈관을 옥죄었다.

충성서약 대신으로 맺는 맹약이다. 아스카니엔에서도 종종 봐 온 마법이라 잘 알고 있었다.

“자,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슬슬 스트라우치 일에서 발견한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눠 볼까요.”

“문제 말씀이십니까.”

“녹음은 전부 들었습니다. 아마 경도 지금쯤 무엇이 문제인지 파악했으리라 생각하는데, 의견을 좀 들어 보죠.”

상황 조언까지 들을 줄은 몰랐는데.

이미 어떻게 움직일지는 생각했지만, 머리가 둘이면 좀 낫기야 하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루카스 아스카니엔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니콜라우스 에른스트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루카스 아스카니엔의 이미지를 개선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 * *

다음 날, 나는 텅 빈 교실에 앉아 노트에 다음 계획을 끄적였다.

오늘은 모두 월말평가를 위해 수도 주위의 제한구역으로 이동했지만, 나는 코어 부적격 판정을 받아 교실에 남게 되었다.

‘아무도 없으니 쾌적하네.’

다른 학과에서 축제를 준비하며 생기는 소음만이 배경음처럼 깔렸다.

우리 분반은 연극을 연습한다고 시끄러웠는데, 그래도 오늘은 문제에만 집중할 수 있겠다.

‘일단 루카 인상 점수부터.’

적이 공격 수단으로 사용할 만큼, 아직까지는 루카스에 대한 반감이 니콜라우스에 대한 호감보다 크다.

‘일정 수준까지는 인상 점수를 높여야 해.’

목표하는 점수는, -8.

‘이미지를 개선한다’는 표현을 쓰긴 했지만 점수가 수직상승하길 바라는 것은 아니다.

내가 노리는 것은 상태창의 수치가 포착하지 못하는 콘셉트다.

똑같은 -10점이라도 무서워서 -10인 것과 한심해서 -10인 것은 다르니까.

이쯤에서 국왕과의 대화 끝에 나온 결론을 짚을 필요가 있다.

니콜라우스와 나와의 공통점을 만들면 추후 대중이 느끼는 간극이 줄어들고, 완전히 동떨어졌던 둘 사이를 연결 지어 볼 여지를 주게 된다.

지금 고려하는 것은 니콜라우스의 마법과 행적에서 비롯되는 평범치 않은 이미지다.

어떤 분야에서 특출난 면모, 일반적이지 않은 실력, 이런 특성은 생각보다 세부 분야를 넘어 연결되기 쉽다. 실제가 어떻든 사람들은 ‘역시 무엇을 잘해서 무엇도 잘하는구나’ 식으로 쉽게 연결 짓는다는 말이다.

‘그럼 루카스한테도 비슷한 이미지를 만들어 주면 되지.’

특정 분야에서 비슷한 이미지를 만들어 두면, 연관 면에서 플러스면 플러스지 마이너스가 될 일은 없다.

특히 루카는 무능과 무기력의 이미지가 2교육원 학생뿐 아니라 대중에게 짙게 깔려 있기에 이를 타파할 때 이미지 변신의 효과가 크다.

실기에서는 승부를 볼 수 없으므로 마법 외 학문에서 학교를 넘어서 전국 상대로 판을 키워야 한다.

‘자리는 그분이 마련해 보겠다고 하셨지.’

연말쯤 생각하고 계시니, 일단 기다리면 된다.

‘자, 이제 다음으로.’

스트라우치까지 처리했으니 슬슬 다음 계획으로 넘어갈 준비를 해야 한다.

이번 계획은, 실종자에 대한 계획이다. 엘리아스가 결계 적합성 이후에 해결한 사건이기도 하다.

‘이때부터 엘리아스가 점점 유명해지기 시작했지.’

방향을 바꿀 생각은 없으니, 이번에도 할 수만 있다면 엘리아스를 적극적으로 내세울 필요가 있다.

그때, 저 멀리 복도에서부터 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반복해서 들려왔다. 나르케를 따라가지 않고 남아 있던 파이가 고개를 들었다.

‘뭐야.’

쾅―!

“야, 아직도 여기 있었구만~”

발로 문을 차고 들어온 엘리아스가 무언가를 씹으며 내 옆자리 책상에 걸터앉았다.

나뿐 아니라 다리를 치료 중인 엘리아스도 부적격 판정을 받고 남았다.

내내 학생들을 배웅하겠다고 학교를 오르락내리락하더니, 뭘 하고 왔는지 이제야 교실로 돌아왔다.

엘리아스가 내 목덜미로 뛰어 올라간 파이를 향해 휘파람을 불었다.

“토끼도 안녕~”

파이가 대답 없이 눈만 끔뻑였다.

싫어하는 건 아닌 듯하지만, 나르케가 없을 때 엘리아스를 마주치면 귀부터 바싹 접힌다. 왜인지 모르게 무서워하는 것 같다.

나는 파이에게 쏠린 엘리아스의 관심을 돌리려 그의 손에 들린 작은 양동이에 고갯짓했다.

“그건 뭐야?”

실제로 대체 어디서 난 건지 모를 처음 보는 양동이였다. 안에 가득 든 과일까지 보니 정체를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거? 체리야. 내일 간식 부스 하는 애들이 갖다 놨더라.”

“그냥 가져온 건 아니지?”

“에이~ 내가 아무리 그래도 남의 음식 뺏어 먹는 놈은 아냐! 가서 구경하고 있으니까 주던데?”

엘리아스가 내 앞에 양동이를 내밀었다.

적당히 한두 알 집어먹고 하나는 파이에게 넘겼다.

그러는 동안 엘리아스가 체리를 한 주먹 퍼 입에 털고, 차음 마법을 걸며 중얼거렸다.

“이야, 학교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조용하냐. 아쉽네. 애들이 스트라우치 얘기하는 거 들어야 하는데.”

이미 조례 전에 들었다.

학생들로 모자라 교수까지 스트라우치 이야기를 꺼내는 바람에 레오의 기가 빠져나가는 걸 실시간으로 목격했다.

“굳이. 아침에 들었잖아.”

“들어도 들어도 짜릿하다고. 그 플레로마 때려잡은 사람이 여기 있다고 말해 주고 싶지 않아~?!”

그건 그렇네. 무슨 반응일지 궁금하긴 하다.

그의 말에 웃음만 짓자, 엘리아스가 말을 이었다.

“이제 슬슬 다음에 뭘 할 건지 얘기나 해 보자고. 안 그래도 내가 관심이 생긴 분야가 있거든. 내일이 축젠데, 너도 노느라 정신없을 거 아냐.”

“놀 수 있을지 모르겠네. 할 일 끝내면 도서관에 가려고.”

“맞다, 친구가 없지. 하하하! 나랑 플레로마 얘기하는 수밖에 없네!”

이렇게 뼈를 때리네….

나는 엘리아스의 호탕한 웃음에 피식 웃고 자리를 정리했다.

진짜로 친구가 없었으면 이런 장난도 안 친다. 오히려 탄식하면서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것이 적신호지.

아니나 다를까 엘리아스가 바로 눈을 찡긋거렸다.

“농담인 거 알지? 여기만 네 친구 열 명쯤 있잖아.”

비밀 모임의 친구들을 말하고 있다. 실제로 그럭저럭 친해지긴 했으니, 맞는 말이긴 하다.

물론 모임 밖에서는 다들 철저히 무시하고 있으니 같이 놀 만한 상황은 아니지만.

하지만 놀고 자시고, 그때쯤 나르케와 대화할 시기를 찾아봐야 하니 시간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 슬슬 얘기해 보자. 일단 자리부터 옮기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