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66)
‘죽을 것 같다.’
시계를 볼 수가 없지만 대략 세 시간은 지난 것 같다.
세 시간 내내,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훈련한 탓에 이제는 땀이 물처럼 흐르고 있다. 그 탓에 눈도 제대로 뜨이지 않았다.
평소에도 세 시간 정도는 훈련했지만 이번에는 평소와는 훈련의 밀도가 달랐다.
놈이 미친 듯이 쏟아내는 공격을 막기 바빠, 내가 놈에게 온전한 공격을 날릴 틈도 없었다.
‘…이 새끼 화풀이를 나한테 하나….’
당연히 아니겠지만,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 만큼 어처구니가 없는 훈련 강도였다.
“일어나.”
“…….”
레오가 어서 일어나라는 뜻으로 손뼉을 쳤다.
놈도 오늘처럼 미친 듯이 달린 적은 드물어 지친 기색이었지만, 나처럼 체력이 바닥나지는 않은 듯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본의 아니게 다시 엎어져 드러눕자, 레오가 전혀 진심이 담기지 않은 말투로 물었다.
“조금 쉴래?”
“…….”
스트라우치에게 피해를 입은 날로부터 나흘밖에 지나지 않았기에, 내 체력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그 마당에 이렇게 극한까지 밀어붙이고 있으니 죽을 맛이다.
‘…그래도,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니지.’
플레로마의 경고 대상은 니콜라우스고, 바이에른은 나를 지원한 대가로 피해를 입었다.
그걸 생각하면 이 정도는 견뎌야 한다.
나는 무릎을 짚고 일어나 다시 완드를 들었다.
“아니, 계속해.”
* * *
“주말까지는 푹 쉬어야겠네요. 담임 교수님께 연락드려 놓을 테니 이틀 정도 입원합시다.”
그날 저녁, 나는 교내 병원에 찾아갔다.
다음 날인 목요일부터 이틀간은 수업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합법적으로 빠질 수 있게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래도 꾀병을 부려 휴식 권고를 받아 낼 필요는 없었다.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식사 1시간을 제외한 11시간을 풀로 훈련한 탓에 이미 걸어 다니는 좀비였기 때문이다.
‘좀비는 원래 걷지….’
이거 봐라. 두뇌 상태도 영 아니네.
나는 시선을 방황시키다, 사람을 앞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고 차분히 답했다.
“기숙사에서 쉬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이 정도면 그냥 병원에서 쉬는 게 좋을 텐데요.”
“저는 제 방이 제일 편해서요.”
“음, 그러면 금요일에 다시 오세요. 그때 다시 한 번 상태 좀 봅시다.”
됐다. 이걸로 기술 4점을 만들 시간은 마련되었다.
나는 병원을 나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꼭 비가 올 것처럼 부연 안개가 길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사고의 영향으로 학교에는 돌아다니는 학생도, 건물에서 들려오는 말소리도 없었다.
당장 어제가 축제였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했다.
어제 있던 일을 떠올리니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빠르게 걸어 생각을 떨쳐 냈다.
‘이동 시간에 잠깐 상태창 확인 좀 할까.’
루카스 르네 아스카니엔
칭호: 니콜라우스 경
체력: +1.4 (+0.1) [+4.4]
정신력: -0.9 (+0.2)
마력: ?
기술: +2.85 (+0.15) [+5.85]
인상: -9.9 [-6.8] [+6.61517849]
행운: +1.25 (+0.1)
특성: 여명777, 신력, 매력 (Lv.2), 재시도 (Lv.1)
처음 시작할 때 2.7이었지.
12시간이 지난 지금은 0.15 올랐다.
양수다 보니 0.001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약으로 다 죽은 체력을 회생시켜 가며 훈련한 덕에 나름 빠르게 올릴 수 있었다.
기숙사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훈련장으로 이동하자, 구석에 가방을 놓고 앉은 레오가 내게 봉투 하나를 건넸다.
“조사 결과 왔어. 네가 보육원 후원자 명단 찾았었지.”
“빠르네. 고맙다.”
“뭘. 시계 맞춰 놨으니까 30분부터 훈련하자.”
내 부탁에, 비텔스바흐 측에서 프로이센 수사국에 연락해 주었다.
그런 만큼 이번에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바이에른에 맡겼을 때와 비슷한 속도로 결과물이 도착했다.
나는 파일을 넘겨 이름을 죽 읽었다.
‘흠…. 극 초반 엑스트라여서 그런가, 짚이는 이름은 있는데 확실하지는 않네.’
오래 기억하려면 복습을 좀 해 주어야 하는데, 애초에 내가 여기 온 지도 두 달이 넘었다.
목록에 있는 후원자 수는 20여 명.
근 1년 이내에 정기 후원한 사람만을 찾아 달라고 했기 때문에 폭이 이미 좁혀졌다.
‘그래도 20명을 다 찾아다니기는 시간이 걸리는데.’
다행히 두 플레로마가 서로 가족이었고, 회차마다 꽤 많은 돈을 후원해 왔다는 점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 점을 따지면 후보자는 4명으로 좁혀진다.
‘가족이니까 두 팀 조사한다고 생각하면 되겠네.’
두 팀 정도면 직접 만나 볼 만하지.
이제, 나르케와 함께 어떤 직업군으로 위장해서 그들에게 접근할지 생각해 두면 된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그 뒤는 엘리아스와 함께 움직이고.
내가 명단을 읽고 있자, 레오가 가방을 집어 들며 물었다.
“병원에서는 뭐래?”
“병원에서야 당연히 쉬라고 하지.”
“며칠?”
“알 거 없다. 어차피 훈련할 거잖아.”
“…….”
레오가 차마 그건 그렇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회복할 시간도 없이 너무 빠르게 가르쳤나?”
“이제 와서 장난하냐? 그냥 하던 대로 해.”
“아니…. 그럴까 봐 집에 부탁해서 약 좀 지어 왔거든.”
“이미 학교 병원에서 받았는데?”
“이게 더 효과 좋을걸.”
레오가 가방에서 가죽 파우치를 꺼냈다.
자신감이 대단하네. 하지만 비텔스바흐라면 그럴 만하지. 나는 별 대꾸 없이 레오가 분류해 둔 약을 꺼내 먹었다.
레오가 가방을 뒤지다 상자를 꺼내며 내게 말했다.
“아, 이것도 친구들이 전해 달래.”
“음?”
얜 가방에서 뭐가 계속 나오네.
열어 보니 학교 표장이 찍힌 잡다한 필기도구가 들어 있었다.
딱 학교에서 상품으로 줄 법한 비주얼이라 놀랍지 않다.
그와 함께 딸린 투명한 상자에는 크라펜과 블랑망제가 줄지어 들어 있었다.
“연극 나간 애들한테 주는 건데, 아마 음식은 애들이 넣었을 거야. 나와줘서 고맙다고 그러더라.”
간식을 먹을 생각은 안 들지만, 안 그래도 뒤숭숭한 마당에 챙기기 어려웠을 텐데 마음은 고맙네.
월요일에 감사 인사나 해야겠다.
그때 레오가 내가 든 파일을 가리켰다.
“그래서, 너는 이 명단 중에 플레로마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밑져야 본전이니까 한번 찾아보려는 거지. 어차피 나르케도 변장해서 나가는 거 좋아하니까, 의심되는 쪽은 다 뒤져 볼 거야.”
그래, 이번 일에서도 변장을 해야 한다.
단, 니콜라우스 상태로는 안 된다.
행적 하나하나에 걸린 게 많은 니콜라우스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만 나가야 한다.
그전에는 루카도, 니콜라우스도 아닌 무언가로 얼굴을 들이미는 게 최고다.
레오도 더 묻지 않고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래…. 찾기에는 나르케가 제격이네. 뭐로 변장할 건데?”
“지금부터 생각해야지.”
삐빅―
말이 끝나기 무섭게 초시계가 울렸다.
레오가 시계를 꺼내 뚜껑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미소 지었다.
“훈련할 건데, 생각할 수 있겠어?”
* * *
띠링―!
축하합니다!
‘‘기술’ 점수 4 달성’ 성공!
‘Route 1 — 〈 제안 2 〉’를 확정합니다.
“야, 애 죽어 가네. 당장 관짝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아.”
“…….”
구경 온 엘리아스가 혀를 쯧쯧 찼다.
그러면서 레오를 보며 외쳤다.
“스트라우치 만난 게 지난주야. 몰라?”
“알아. 안 그래도 나도 좀… 미안하다고.”
레오가 엘리아스 쪽 귀를 막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레오의 변명은 사실 맞는 말이긴 하다.
바이에른이 교황청과 손잡아 플레로마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부랴부랴 끼어드는 황실을 받아 주며 삼자 동맹이 형성되었을 즈음부터는 레오도 내 체력을 봐 가며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 배려심 넘치는 태도를 원상태로 돌려놓은 건 나다.
‘빨리 높일수록 나쁠 것 없지.’
이왕 하는 거 판 깔렸을 때 확 높여 놓아야지, 안 그러면 내가 전투 마법계보다는 정치계 쪽에 발을 담그고 있기 때문에 실력을 키우는 게 계속 늦어진다.
‘하루 일찍 달성했는데, 수치 좀 볼까.’
루카스 르네 아스카니엔
칭호: 니콜라우스 경
체력: +2.2 (+0.8) [+5.2]
정신력: -0.1 (+0.8)
마력: ?
기술: +4.0 (+1.15) [+7.0]
인상: -9.9 [-6.9] [+6.61523261]
행운: +1.75 (+0.5)
특성: 여명777, 신력, 매력 (Lv.2), 재시도 (Lv.1)
‘기술은 올랐어도 여전히 체력이 걸리긴 하네.’
10년에 걸쳐 저세상 간 건강이 어떻게 2개월 만에 완벽하게 회복되겠냐.
그나마 최종적으로 5.2점이라 마법 쓰는 데에 지장이 없으니 다행이지.
‘어쨌든, 이제 순수 기술 점수는 이곳 학생들의 평균치에 도달했어.’
이곳 놈들이 아무리 애들 같아도―물론 맞다―실력에 있어서는 같은 나이대에서 제국 최고 수준이다.
이전까지는 마력으로 밀어붙여 부족한 테크닉을 커버했다면, 이제는 그들과 비슷한 수준을 가지게 되었다.
엘리아스가 계속해서 레오에게 비난의 눈길을 보내자, 레오가 말을 돌렸다.
“그래서, 재료는 가져왔어?”
“당연하지.”
며칠 전, 엘리아스에게 변장 재료를 부탁했다.
항상 깽판을 치러 다니기 위해 철저히 준비한 덕에 그에게는 쓸 만한 재료가 많았다.
그런 정보는 소설에서 안 것이지만, 자연스럽게 말을 꺼내 보니 오히려 본인이 더 신나서 내게 이런저런 변장 재료를 보여 주었다.
엘리아스가 들고 온 가방을 소리나게 열었다.
“짠~”
“뭐야?”
“안경.”
엘리아스가 내 눈앞에 안경을 들이댔다.
“지식인 이미지에 딱 맞지. 써 봐!”
엘리아스가 가져온 안경은 얇은 은테 안경이었다.
내가 알던 안경과 달리 다리가 굽어 있지 않고 서로 붙어 있는 게, 박물관에서 볼 법한 디자인이었다.
당연히 알에 도수는 없었지만, 표면이 많이 훼손되어 거울을 보니 상당히 이미지가 흐리멍덩해 보인다.
‘만족스럽다.’
“옷도 가져왔는데 입어 봐!”
나는 그가 건네는 코트를 셔츠 위에 걸쳤다.
미적 감각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유행을 교묘하게 비껴간 데다 지나치게 무거워 보이는 계절감의 옷이다. 아무리 11월이라지만 어깨가 짓눌리는 털코트는 조금 과한 감이 있었다.
게다가 나는 엘리아스와 키가 비슷한데도 옷이 상당히 컸다. 엘리아스도 일부러 고지식해 보이는 이미지를 위해 준비해 뒀던 옷인 듯했다.
“이야….”
“왜.”
엘리아스가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옆에서 구경하던 레오가 말했다.
“그래도 아직 루카스네. 좀 불법 선전물 돌릴 것처럼 생겼지만.”
“이제 색깔 바꿔야지~”
“불법 선전물 돌릴 것처럼 생긴 건 뭐냐.”
대충 도를 믿으세요 느낌이 나는 것으로 해석하겠다.
나는 엘리아스가 말하는 대로 손을 튕겼다.
시야에 내려오는 머리카락 색이 밝게 변했다. 아마 눈도 푸르게 변했을 것이다.
“으음, 안 돼.”
“갑자기 죄다 밝아져서 좀 그렇다. 이거 약간 아드리안 아스카니엔 보이는데.”
둘 다 반응이 이러니 그대로 가면 안 되겠다.
새로 공식을 외워야겠는데.
나는 가져왔던 신력 색상 책자를 꺼내, 레오와 엘리아스를 자리에 앉혔다.
“다 별로면, 색깔 좀 골라 보자.”
* * *
여러 우여곡절을 거쳐, 나르케와 나는 지역 신문 기자로 위장했다.
무언가 쓸 만한 직업을 찾으면 나이가 걸려 이용할 수가 없었다.
어린 나이에도 활개를 치고 다니는 게 쉽게 납득이 되려면 적어도 귀족이거나 마법사여야 하는데, 이 둘은 평민인 후원자들에게 큰 부담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래도 고등학교 2학년이면 스타일링만 잘해도 20대처럼 보이니, 그래도 이제 적당히 성인으로 보이기는 했다.
‘그리고, 이게 아니라고 해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야 하니 마법사인 건 숨겨야지.’
월요일이 되어, 나는 묘하게 기분이 좋아진 것 같은 나르케를 데리고 수도 북쪽으로 가는 마차를 잡아탔다.
후원자들에게는 진작 외부에서 사람을 시켜 인터뷰 허가를 받아 두었다.
나는 마부와 통하는 창의 커튼을 치고 나르케에게 말을 걸었다.
―“나르케.”
―“오, 너도 나처럼 이렇게 말하니까 느낌이 새로운데~?”
―“그래…. 이따, 내가 대화를 끌어 나가는 동안 능력을 사용해 줘. 조금 민감할 수 있는 이야기도 꺼낼 테니까 당황하지 말고.”
설득력 30% 뒀다 뭐 하냐.
조금 무례하게 들리거나 심기를 거스르는 이야기를 꺼낼 때 대화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게끔 활용할 수 있을 테니, 잘 써먹어 봐야지.
―“그래, 알겠어. 근데 빨간 머리 새롭네, 루카스.”
―“이상해?”
―“아니. 뭐라고 해야 하나? 색깔 때문은 아니고, 전체적으로 꾸며 놓은 게 딱 혁명을 원하는 20대 지식인 같아.”
―“…….”
어쨌든 다르다니 환영이지.
나르케는 생각보다 깔끔하게 입었는데, 머리를 죄다 넘기고 나처럼 안경을 써서 그런지 곧바로 내가 알던 나르케의 이미지가 떠오르지는 않았다.
나르케가 바깥을 구경하며 말했다.
―“둘 중 어느 쪽이 플레로마일지 궁금하네. 확실히 네 추측은 믿을 만한 것 같은데 말이야.”
내가 어떻게 둘을 추렸는지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통찰 능력으로 알아낸 듯하다.
―“짚이는 건 없어?”
―“응, 아직 만나지 않았잖아. 예측을 하려고 해도 내가 그 상황에 있어야 잘 돼서 말이야.”
그건 그렇겠지.
어차피 조금 뒤, 직접 만나기만 하면 밝혀질 테니 굳이 요행을 바랄 필요는 없다.
30분쯤 지나자, 마차는 수도 외곽의 길에 멈추어 섰다.
우리는 미리 받아 둔 주소의 건물을 두드렸다.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