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68)
“…….”
나도 모르게 몸을 휘청였는지, 나르케가 내 등을 살짝 짚었다.
지금까지 완성된 플레로마 그 자체만을 생각했지, 평범한 인간이 플레로마가 되어 나타난 것을 보니 충격이 앞선다.
내가 의식하지 않은 내 목소리가 들렸다.
“…겔다 아스만 씨라고요.”
“네, 접니다.”
상대방은 미소를 유지한 채 말을 이었다.
“중요한 용건인가요? 비도 오는데, 우선 들어오세요.”
* * *
나르케는 딱딱히 굳은 얼굴로 방을 둘러보았다.
전에 왔을 때와 다르게, 방 곳곳에 있던 각자의 가족사진은 전부 사라져 있었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태도가 놀랍다.
‘우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그럴 가능성이 크다.
죽은 60세를 20세로 부활시킨다면, 20세 이후의 40년의 기억은 날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만에 하나 그가 우리를 기억한다 해도, 문제가 된다면 나르케가 내게 언질을 주었을 것이다.
겔다 아스만이 탁자에 찻잔을 내려놓았다. 알싸한 민트 향이 퍼졌다.
“그래서, 무슨 일이시죠?”
“며칠 전 겔다 아스만 씨와 인터뷰를 했는데, 추가적인 질문이 생겨서 이렇게 직접 뵈러 왔습니다.”
“아, 인터뷰.”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우리를 쓱 훑더니, 안타깝다는 듯 미소지었다.
“아쉽지만 답변을 드릴 수는 없을 것 같군요. 그 이유에서라면 아마 제 할머니인 겔다 아스만을 찾아오신 듯한데… 며칠 전 작고하셨습니다.”
―“…아니, 본인이야.”
나르케가 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럴 수밖에.
지금 그의 말에는 오류가 있다.
며칠 전 그들과 대화하며 알아낸 바로, 겔다 아스만의 가족은 모두 그들이 젊었던 시절에 죽었다. 아이들이 성년이 되기도 전이었다.
이 시대 인간들은 대체로 20대에서 30대 사이에 결혼하니, 그에게 손주가 있을 리가.
“그렇군요. 슬픔이 크실 텐데 제가 공연히 그분의 기억을 되살리게 한 것은 아닌지 죄송스럽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분의 선행을 기억하고 찾아 주시는 분이 계신 것에 위안이 되는데요.”
“아스만 씨께서는 그분과 가까우셨나요?”
“예, 자주 뵙지는 못해도 제 정신적 지주나 다름없는 분이셨습니다. 제게 있어 평생 자랑스러운 분이셨죠.”
겔다 아스만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환히 웃음 지었다.
“…….”
플레로마는 부활 이후의 시나리오도 짜 주는 모양이지.
연기력 좀 챙기라고 하고 싶군.
죽음을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이상하지 않지만, 연기할 때 그런 자신의 사상을 드러낼 것이 아니라면 보편성에 기대는 것이 낫지. 존경하는 조부모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는데 환히 웃는 것은 상대방에게 의아함만 줄 뿐이다.
나는 겔다 아스만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성함이 같으신가 보군요.”
“부모님이나 조부모님 이름을 따는 건 꽤 있는 일이죠.”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아스만이 잠시 말없이 있다가, 입을 열었다.
“스물다섯이에요. 왜 그러시나요?”
저 공백이 거슬리네.
본인 나이가 몇인지 짚어 본 게 분명하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 여쭤본 건 아닙니다. 저와 나이가 비슷한 것 같아서요.”
“펠릭스 바이첼이라고 하셨나요? 바이첼 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스물셋입니다.”
한국 나이로 24살이라고 한 셈이다.
친구들과 상의해 정한 것이지만, 고2인 걸 생각하면 조금 많이 갔나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하지만 내 기억에 스타일은 변해도 얼굴이 특별히 변하지는 않았던 것 같으니, 이 정도 뻥튀기는 이상하지 않다.
“옆에 계신 분도 그런가요?”
“예.”
“그렇군요. 새로운 언론이라니, 잘 되었으면 좋겠네요.”
아스만이 내가 준 명함을 읽으며 말했다.
슬슬 할 말이 없어진 듯해, 나는 본격적으로 그에게 물었다.
“아스만 씨께 드리고 싶은 질문이 있습니다. 기사화가 될 것은 아니고요, 단순한 질문이니 편하게 생각해 주시면 됩니다.”
“말씀하세요.”
“조모님께서 하시던 후원을 지속해 나가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하이리겐지 보육원 이야기군요.”
그가 턱을 쓸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분의 유지를 저라도 이어받아야지요. 그분께 남은 가족은 저와 제 오빠밖에 없었거든요.”
시작이다.
그래, 그는 보육원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플레로마는 자선 사업을 하지 않는다.
부활의 대가, 축복을 받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는 그 제물로서 보육원의 아이들을 플레로마에 넘길 것이다.
나는 며칠 전 보았던 것과 달리 또렷한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오빠가 있으시군요. 그분께서는 보육원 후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지금은 사업 생각밖에 없는 듯한데요.”
겔다 아스만이 웃었다.
“…….”
나는 표정이 어두워지는 걸 필사적으로 막아야 했다.
아빈 아스만도 플레로마가 된 게 분명하다.
며칠 전 만난 그는 사업에서 손을 떼고 젊은 시절 벌어둔 돈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20대 때의 사고방식으로 돌아갔어.’
그렇겠지. 그 시절의 그들을 부활시켰으니까.
대체 부활의 원리가 어떻길래 모든 것을 젊은 시절로 돌려놨는지는 몰라도… 지금 그들은 내가 며칠 전 만난 자들이 아니다. 40년이면 사람이 몇 번이고 바뀌고도 남을 시간이다.
그리고, 40년 사이에 제국도 많이 바뀌었다.
그들이 상전벽해 수준으로 바뀐 세상에 아무렇지 않게 적응해 사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부활이고 뭐고 저들에게 이건 타임워프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당장 내가 이곳에 떨어졌을 때만 해도 초반 몇 주간은 마음 편히 웃었던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 어떤 이질감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마치 어제와 다를 것 없는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편안한 얼굴로 미소짓고 있다.
‘그에 상응하는 이득과 충격이 있었던 모양인데.’
40년의 세월을 이동해도 얻을 가치가 있는 이득이 주어졌을 테다. 이전의 불만스럽고 답답했던 삶을 깡그리 갈아엎을 수 있는, 그런 이득 말이다.
물론 플레로마의 교조적 세뇌가 있었겠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이 가졌던 가장 큰 욕망이 충족되었다면?
그러니까 그들이 바뀌지 않는 현실에 순응하기 전, ‘한때는 마법사가 되고 싶던 적이 있었다’는, 그 시절이라면….
“마법에 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관련 없는 질문이겠지만, 저희가 사회 개혁에 관련해 특집 기사를 실어 볼 생각입니다. 마법 위주로 돌아가는 세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최대한 많은 분들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마법이 없었다면 우리 세상이 이렇게까지 빠르게 발전하지는 못했겠지요. 바이첼 씨의 의견과는 다를 수 있어도, 저는 조금 불공평한 점이 있기는 해도 지금 이 구조가 잘못되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겔다 아스만 씨는 마법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며칠 전과 같은 테이블에, 같은 자리에, 같은 인간을 두고 같은 질문을 한다.
나는 며칠 전 노인이 떨리는 손을 맞잡고, 비록 색이 바래 흐릿해졌지만 완고함이 녹아 있는 눈동자로 우리에게 했던 답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마법사가 되고 싶다는 비마법사 청년에게 어린 날의 자신을 겹쳐 보는 듯한 그 눈길도 아직 기억에 선명하다.
‘…제발.’
나는 무엇인지도 모를 것에게 기도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 고민하던 겔다 아스만이 환히 웃으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물론이죠! 기회만 된다면 정말 그렇게 되고 싶군요. 솔직히 말해서 비마법사로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니까 말이지요. 마법만 조금이라도 쓸 수 있다면… 적어도 모자란 인간 대접을 받으며 살지는 않으니까요.”
“…….”
나르케가 입술을 깨물었다.
잔뜩 굳었던 어깨가 절로 풀어졌다.
나는 진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그에게서 시선을 뗐다.
정정하자. 이제 그는 같은 인간이 아니다.
내가 며칠 전 보았던 노인은 죽어 없고, 내 앞의 인간은 그와는 단절된 다른 존재다.
‘장례식장에 와 있는 기분이네.’
나는 조용히 답했다.
“잘 알겠습니다.”
“기록은 안 하나요?”
“괜찮습니다. 간단한 문답은 돌아가서 정리할 생각이라서요.”
나는 아스만의 연락처를 받아 나와, 말없이 기숙사로 향했다.
나르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참 달려 학교에 가까워졌을 무렵, 나르케가 입을 열었다.
―“고인 모독이네. 과연 아스만 씨가 이런 걸 원했을까.”
―“그러게.”
플레로마의 부역자로 사는 것은 결코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예상보다 그들이 젊었을 적 가졌던 마법에 대한 선망이 상당히 컸던 듯하다.
나르케가 씁쓸함을 지우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내게 말했다.
―“루카스, 오늘 내가 알아낸 게 좀 있어. 자정에 학생회관 지하에서 만나자. 레오랑 엘리아스도 부를게.”
* * *
나는 오늘 약속한 4개국의 정화를 마치고, 자정 직전에 학교로 돌아왔다.
수도나 바이에른이나, 길거리에 무장한 마법사들이 살벌한 얼굴로 돌아다니고 있다.
플레로마가 사건을 벌인 지 일주일쯤 되었지만, 길에 돌아다니는 사람 수는 사건 전과 비교하면 아직도 확연히 줄어 있다.
나는 기숙사에서 학교 밖의 풍경을 흘끗 내려다 보고, 오늘 자 신문을 읽으며 모임 장소로 워프했다.
엘리아스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왔네.”
셋은 미리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미 플레로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책상에는 하이리겐지 사망 기사가 펼쳐져 있었다.
나르케가 기울였던 몸을 바로 세우며 말했다.
“루카스도 왔으니까 본격적으로 얘기해 보자.”
“그래.”
“너희도 알다시피, 플레로마는 각자 특수한 능력을 받아. 그러니까, 평신도가 아닌 플레로마를 말하는 거야.”
다시 말해 1세대 플레로마지.
단순히 플레로마의 교리를 믿는 자가 아니라, 플레로마의 특질을 가진 자들.
나르케가 친구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겔다 아스만 씨가 받은 특수 능력은 내 것과 비슷해.”
“네 것?”
“나는 고유능력으로 통찰력이 있거든. 그렇게 대단한 수준은 아니지만, 말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대강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파악할 수 있어.”
“멋지네.”
엘리아스는 생각보다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하고 있었던 듯했다.
그보다, 비슷하다고 하면 상당히 곤란해지는데.
“겔다 아스만 씨도 나처럼 상대의 감정을 알 수 있어. 하지만 오로지 감정에 국한되어 있을 뿐, 나처럼 상황을 알거나 말해주지 않은 생각까지 알 수 있는 건 아니야.”
‘음.’
왜 그런 능력을 받았는지 알겠다.
물론, 받은 게 아니라 이게 그의 잠재력이었기에 플레로마의 타깃이 되었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그의 능력은 사람을 조종하는 데에 탁월함을 가진 능력이다.
특히, 아이들에게는 더 쉽게 적용되겠지.
마음을 읽어 상대가 원하는 것을 먼저 주는 사람에게 어느 누가 부정적인 감정을 가질까.
소설에서, 플레로마들은 후원자로서 보육원에 들락날락하며 자주 행사에 참여하고 아이들을 만났다.
이용할 환경은 이미 마련된 셈이다.
“아빈 아스만은 어떤 능력을 받았는지 잘 모르겠어. 하지만 일단 겔다 아스만만 보아도, 이 능력이 위험하게 쓰일 것은 분명해 보여. 루카스, 넌 그쪽이 보육원에 가서 일을 벌일 거라고 생각하지?”
나르케가 나를 보며 말했다.
이미 내가 내린 결론까지 파악한 듯한데,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라는 뜻에서 말을 꺼낸 것 같다.
“맞아. 나는 아스만이 그 지역에서 실종 사건을 일으킨 플레로마랑 연결되어 있거나, 곧 연결될 거라고 생각해.”
“한패로 움직일 거다?”
레오가 물었다.
“그래. 새로운 삶을 받은 값을 치르려면 괜찮은 성과물을 바쳐야 할 테니까. 어쩌면 플레로마 측에서는 어린아이들을 더 많이, 더 깔끔히 잡아가기 위해서 이런 짓을 벌였을지도 모르지.”
“으음, 문제는 실행 시기네. 우리가 24시간 붙어 있을 수도 없는데, 수도 북부 보육원에서 일어나는 일을 감시하려면….”
다들 생각에 잠겨, 정적이 이어졌다.
마침내 레오가 입을 열었다.
“플레로마가 쓴 수법을 똑같이 쓰면 되겠네.”
“어떤 식으로?”
“플레로마가 의심을 피하려고 보육원 관련자를 조력자로 만들었다면, 우리도 그쪽에 사람을 붙이면 되지. 사복 경찰은 알기 어려울 테니 지켜보다 이상이 생기면 바로 우리에게 연락해 달라고 하면 돼.”
괜찮은 방법이다.
“그래, 그건 그대로 실행하자.”
대신, 배치하는 인원을 매일 바꾸어 의심을 피하게끔 해야겠지.
나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더 필요해. 사복 경찰은 일이 터지고 나서야 문제를 포착할 수 있을 뿐이야. 머릿속에 든 계획까지 들을 수는 없지.”
“…맞는 말이네.”
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백날 나르케가 찾아가 그의 얼굴을 감상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생각해 보자. 방법이 분명히 있을 텐데.’
나는 잠시 눈을 감고 눈썹뼈를 꾹 눌렀다.
그러고는 거의 곧바로 눈을 떴다.
“…감정.”
“음?”
이곳에 와서 감정에 관한 마법 서적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마법약을 이용해 감정을 조작하는 방법이 있었다.
“레오, 사랑에 쓸 만한 약 좀 구해다 줄 수 있어?”
“뭐?”
레오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말하고 나니 머릿속에 스쳐 가는 노래 가사가 몇 있어 살짝 헛웃음이 나는데,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엘리아스가 손뼉을 치며 깔깔 웃다 간신히 웃음을 멈추고 내게 말했다.
“먹이려고? 플레로마를 너한테 반하게 만들려는 거야?”
“확실히 정보는 얻을 수 있겠네….”
레오가 헛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약은 있어. 불법의 경계선에 있기는 해도 대상이 플레로마라면 큰 문제는 없겠지. 하지만 그걸 무슨 수로 먹이고 유지하지? 매일 가서 몰래 차에 타기라도 할 건가?”
“아니.”
나는 고개를 젓고 말을 이었다.
“내가 마실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