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72)
“편지 한 번 더 쓸 거야?”
“그래야지.”
아직 못 담은 내용이 있다.
증거 자료로 쓸 것이니, 더 확실하고 명시적으로 세세한 이야기까지 담으면 좋지.
레오가 시계를 보며 말했다.
“우리는 이제 슬슬 나갈 준비 해야 해. 마지막으로 네 편지만 코팅하고 나갔다 올게.”
“어디 가?”
내 물음에 나르케가 대신 입을 열었다.
“에릭 아스만하고 대화하러.”
“음?”
“엘리아스랑 레오가 어제부터 다녀왔어. 벌써 투자 얘기도 하더라.”
이제 슬슬 그쪽에도 손을 써 보자고 제안하려 했는데, 알아서 시작했네.
하긴, 저 둘이 가만히 있을 놈들이냐.
애초에 하이리겐지 보육원도 엘리아스가 처음부터 끝까지 해결했던 일이었지.
그때, 나르케가 캐비닛에서 약병을 하나 꺼내더니 비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하자, 엘리아스.”
“어, 그래.”
엘리아스가 실실대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뭘 하길래 저렇게 비장하냐.’
나르케가 침을 꿀꺽 삼키며 완드를 꺼냈다.
엘리아스의 양쪽 어깨를 완드로 살짝 두드린 순간, 엘리아스의 얼굴이 급격히 늙기 시작했다.
엘리아스가 책상에 엎어 두었던 거울을 집어 들고 얼굴을 감상했다.
“…!”
“진짜 완벽하네. 고마워, 나르케.”
나르케가 힘없이 웃으며 구석에 있는 소파에 주저앉았다.
엘리아스는 얼굴만 늙은 게 아닌지, 목소리도 중후하게 내려앉아 누가 봐도 중년으로 보였다.
“…뭐냐?”
“40년쯤 움직여 봤어. 전에 의회도 갔다 왔잖아. 목발 때문에 눈에 띄고, 얼굴도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서 평범한 변장으로는 안 되겠더라고. 어때, 괜찮지?”
나르케가 레오가 건네는 비텔스바흐의 엘릭서를 두 병째 들이켜며 답했다.
‘놀랍네.’
그리 익숙한 마법은 아닌데, 많이 쓰이지 않는 마법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다들 못하기 때문이다.
나르케쯤 되는 놈도 약을 끊임없이 들이마시면서 써야 하는 마법을 어느 누가 휙휙 쓸 수 있을까.
그래도 레오의 변장은 대대적으로 갈아엎는 마법이 아닌지, 나르케가 앉은 자리에서 완드를 휘둘렀다.
그리고 나는 또다시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
“…누가 루카스 입 좀 막아 봐.”
레오가 머쓱한 얼굴로 내게 고갯짓했다. 나는 길게 내려온 그의 흑갈색 머리칼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다들 들킬 일은 없겠네.”
“생각보다 사람 인상이라는 게 몇 가지 요소만 바꿔도 쉽게 변하더라고. 둘 다 내가 고른 대로 바꾼 건데, 재밌었어.”
나르케가 다시 엘릭서를 들이마시며 웃었다.
그야 상아색을 검은색으로 바꿔 놓고 어제 이발한 머리를 3년쯤 기른 머리처럼 늘여 놓으면 당연히 인상이 변하겠지. 눈썹 색이 어두워지니 이목구비가 같이 뚜렷해졌다. 레오는 그걸로도 걱정이 되는지 안경까지 쓰기 시작했다.
레오와 엘리아스 모두 언론에 얼굴이 자주 팔려 위험 부담이 있었는데, 이 정도면… 절대 알아볼 일 없다.
‘다들 철저하니 마음에 드네.’
나는 겔다 아스만 쪽에만 집중하면 되겠다.
그때, 옷을 제대로 갖춰 입고 나온 엘리아스가 내게 감각 전이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를 건넸다.
“갔다 온다. 편지 쓰면서 잘 듣고 있어!”
* * *
[투자금 그거 우리 의식하지 말고, 어? 우린 바라는 거 없으니까 일단 해 볼 수 있는 거 다 해 보세요. 50만 펠이 뭐야, 앞으로 더 줄 수 있다니까?]
한 시간쯤 지나자 엘리아스는 에릭 아스만을 끌고 술집으로 이동했다. 방을 잡았는지 아까 크게 들려오던 소음이 급격히 사그라들었다.
‘그보다 벌써 50만 펠 줬냐….’
5,000만 원을 턱턱 던지다니 역시 황가 놈이다.
본인 말로는 돈이 없다고 하는데, 내 생각에는 이럴 때 쓰려고 모아 두는 것 같다.
이미 나는 겔다와 편지를 여러 번 교환해, 이제 마지막으로 보낼 편지를 쓰고 있다.
또다시 한 시간을 한 귀로 흘리며 듣고 있을 때, 이제 엘리아스의 입에서 쓸 만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실 말이야…. 그쪽 좀 아냐?]
[예에? 그쪽이요?]
에릭 아스만은 이미 취했는지 말이 조금씩 늘어지기 시작했다.
[거 있잖아, 축복받으려면…. 어? 이거 여기서 말하긴 좀 그렇고~ 우리 다 알잖아, 그치?]
[아, 그거는 말하면 안 되죠…. 죄송해요.]
[아잇, 그러지 말고. 사실 내가 지금 좀 간절해. 건강이 많이 안 좋아져서 말이야. 내가 먹여 살려야 하는 가족이 몇이야, 어? 지금 벌어 놓은 거 많아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안 그래?]
그 뒤 엘리아스는 참을성이 떨어졌는지, 술을 더 시켜 에릭 아스만의 입에 몇 번 부었다.
무언가 탁자에 떨어지는 충격음과 접시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를 박은 것 같다. 얼마나 먹여댔으면 머리 하나 간수도 못 할 만큼 취하냐….
‘얘랑 술 마시지 말아야지.’
나도 저렇게 될까 두렵다.
엘리아스가 속삭였다.
[그래서, 네 여동생하고 너 말고 또 있냐? 이번에 그쪽 된 애들 말이야.]
[…저 좀만, 아, 진짜 조금만 잘게요. 저 진짜 5분만 자면 딱 될 거 같거든요?]
[뒤질래?]
[으에?]
[…가 아니고. 야, 나 진짜 급하다니까? 그래서 또 된 애들 있냐고.]
[몰라요. 근데 없는 게 낫죠… 아니, 없어야 해요. 그게 왜냐면은… 거 뭐야, 비트리올 받으려면 경쟁자 좀 줄어야죠.]
에릭 아스만은 뭐가 좋은지 실실댔다.
‘상대적으로 모자란 놈이군.’
겔다 아스만의 철저함과 경계심에 비하면 이 자는 플레로마 측에서 쓰기 좋지 않은 말이다.
물론, 사업에 눈이 먼 자에게 5,000만 원을 쾌척하는 투자자는 더없이 자애로운 인간으로 보일 테니 경계심이 빠르게 무너진 것도 이해는 간다.
[그거 어떻게 받냐? 조금만 알려 줘 봐.]
[사명만 달성하면 돼요. 그니까, 우리는 하청인 거죠… 뭐 정해진 건 없는데 거기 원래 계시던 분들 있잖아요. 그분들 눈에 들면 될걸요? 아시죠?]
말하는 게 조금 허술해 보이지만, 어쨌든 겔다 아스만이 내게 해 준 말에 관해 교차검증은 가능하겠다.
[그니까 그 사명은 어떻게 오는 거냐고. 나도 받고 싶다, 야.]
[그거 그냥… 뭐였더라? 태어날 때부터 머릿속에 있었던 거라 저도 잘 몰라요. 헤헤….]
[에라이 머저리 새끼야!]
[고정하세요.]
레오가 이를 악무는 것이 아티팩트 너머로도 느껴진다.
엘리아스는 방금 화를 내놓고 이제 온화한 목소리로 에릭 아스만을 달랬다.
[어, 아무튼 잘 들었다. 야, 니 없었으면 난… 너 진짜 내 은인이다.]
[아이, 제가 뭘요.]
[그래서 말인데 오늘 대화는….]
콰앙―!
[기억하지 말자고.]
“…….”
그래, 원래 이런 놈이었지….
엘리아스가 에릭 아스만의 머리를 어딘가에 박아 버린 것 같다. 벽이겠지. 신음이나 비명이 들려오지 않는 걸 보니 곧바로 기절한 듯했다.
엘리아스가 개운하다는 듯 말했다.
[뇌 손상은 기억 잃기에 직방이지.]
[이미 화학적으로 뇌 손상 시킨 것 같은데? 술이 대체 몇 병이야.]
[너는 몇 잔 마셨어?]
[한 잔.]
[재미없어~ 지금 더 시켜 줄까?]
나는 둘의 대화를 한 귀로 흘리며 생각에 잠겼다.
‘태어날 때부터 머릿속에 사명이 있었다니… 겔다 아스만이 거짓을 말한 건 아니군.’
그리고, 또 핵심적인 정보를 알았다.
저들은 비트리올을 쓰지 못한다.
‘겔다 아스만이 왜 그렇게 빠르게 움직이려 하는지 알겠네.’
‘원래 계시던 분들’, 그러니까 지금까지 하이리겐지에서 사람을 납치했던 그들은 중간 관리자다.
그들의 눈에 들기 전까지는 비트리올을 쓸 수 없다.
감정을 읽는 특수능력은 써도 비트리올을 쓸 수 없다면 반쪽짜리일 뿐이다.
‘그리고, 이번에 플레로마가 된 자가 더 있냐는 질문에 모른다고 했지.’
플레로마가 하이리겐지만을 타깃으로 삼았을 리가 없다.
그러니까, 어디까지 세력을 뻗쳐 사람을 수급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내 관계도 겔다 아스만 선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겔다 아스만을 통해 플레로마 내부로 들어가야만 한다.
엘리아스는 머저리 새끼라고 했지만, 좋은 정보원이 되어 주었다.
이제 그 중간 관리자를 만날 때다.
그 후부터는, 내 능력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 * *
약속한 날이 되어, 나는 겔다 아스만의 집으로 찾아갔다.
“몸은 좀 괜찮아요?”
“네. 덕분에요.”
겔다가 무슨 말이냐는 듯 눈썹을 들어 올렸기에 나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편지를 기다리다 보니 아픈 것도 잊게 되더라고요.”
“아.”
상대가 웃으며 차를 마셨다.
웃음이 나오겠지. 대화하며 겸사겸사 내 감정도 읽어 봤을 테니까.
이 납치범 광신도를 맨정신으로 사랑해 볼 수가 없어서 10단계짜리 약을 마시고 왔다.
레오에게 여기서 더 높여 줄 수 있냐고 물었는데, 가능은 하지만 만들어 팔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거절당했다.
‘어쨌든 이 정도면 효과적이네.’
순간의 분노에 일을 그르치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나는 잡다한 대화를 받아 주고 본론을 꺼냈다.
“슬슬 시작할까요?”
“아, 그래요.”
지금 시각은 새벽 3시.
모두들 잠에 들어 있을 시간이다.
에릭 아스만은 오늘도 엘리아스와 레오가 붙잡아 놓았기 때문에, 누가 들어올 걱정은 없다.
“사실 그사이 아이 하나를 더 구했어요. 아마 전에 우리가 같이 구했던 아이와 함께 이동하게 될 거예요.”
“그렇군요.”
나는 겔다를 따라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
겔다가 복도 끝의 문 앞에 서, 펜던트를 손에 쥐고 문손잡이를 돌렸다.
펼쳐진 광경은 내 눈을 의심케 했다.
서늘한 겨울바람이 밀려왔다.
높은 층고와 아치형 천장, 스테인드글라스… 저 멀리 놓여 있는 종교적 표지까지, 이곳이 어디인지는 분명했다.
“성당이군요.”
“그렇죠. 지금은 제가 쓰는 보관소예요.”
아마 우리 세계에도 있는 성당이겠지만, 스트라우치가 그랬듯 이곳도 우리 세계의 좌표와는 다른 좌표계일 것이다.
나는 무단 점거니, 뭐니 하는 생각을 무시하고 중요한 질문부터 던졌다.
“분명히 저희는 집에 있었는데, 놀랍군요. 이곳에서 아이들을 이동시키는 마법을 쓰는가 보죠.”
“음, 사실 어디서든 표적 저주술에 이동 마법을 걸 수는 있어요. 그래도… 바이첼 씨가 지난 며칠 내내 이곳에 와 보고 싶어 했잖아요.”
“생각해 주신 건가요? 기쁘네요.”
내가 상대를 내려다보며 웃자, 겔다가 말없이 나를 쳐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
갑자기 뭐냐?
겔다 아스만
호감도 +8.5*
‘8.5?’
분명 전에 봤을 때는 7.5였는데, 왜 이렇게 빨리 오르지.
원인이 무엇인지 떠올려 봐도 생각나는 게 없었다. 장소 분위기 탓인가, 아니면 사소해 빠진 잉크 선물과 편지 때문인가, 아니면 10단계짜리 감정 때문인가.
대화가 없어지자 겔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지금 시간대에 이동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어요. 오늘 제 첫 성과에 대해 축하연이 잡혔거든요.”
그런 것도 하고, 하여간 이놈들 사람이 궁하긴 한가 보다. 어떻게든 다독여 생산성을 높여 보려는 마음이 잘 드러난다.
내가 말할 타이밍을 놓쳤는지, 겔다가 나를 보며 물었다.
“그래서, 같이 가실래요?”
“물론이죠. 영광이에요.”
소설 전개 그대로였다면 에릭 아스만과 갔을 것 같은데, 이거….
‘잘됐네.’
다른 플레로마를 접할 수 있는 장소라면 내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진다.
내가 계속 얼굴을 보고 있자, 겔다 아스만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제 소환이나 할까요.”
우리는 제실을 통해 지하로 내려갔다.
제단이 마련된 방에 들어가, 나는 벽에 기댄 채 주술을 지켜봤다.
‘본인의 피를 쓰는군.’
나중에 원리에 관해 자세히 물어봐야겠어.
겔다 아스만이 또다시 펜던트를 손에 쥐고 입을 열었다.
―너희들은 이제 신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리라.
창세기다.
하지만 그런 동시에 파우스트에 나오는 구절이기도 하다.
하나 의문이 드는 건, 저것이 악마의 말이라는 점이다.
말이 끝나자마자, 겔다 아스만은 웃으며 뒤돌았다.
“간단하죠? 지금쯤 도착했겠네요.”
* * *
잠시 기다리라 하고 먼저 위로 올라가더니, 겔다 아스만은 정리를 마쳤는지 다시 1층으로 나를 불렀다.
신도들이 앉는 의자가 있어야 할 곳에 대리석으로 된 상자들이 무덤처럼 줄지어 있었는데, 다가가 보니 핏기 하나 없는 아이들이 정자세로 누워 있었다.
겔다 아스만이 그 앞에 서서 아이를 내려다보며 턱을 쓸었다.
“이 친구는 제 밑에서 직접 키워 볼 만한 친구네요.”
“그래요?”
“자질이 보여요. 이 정도면 잘하면 1세대까지 갈 수도 있겠어요. 음, 옆에 있는 친구는 혈액 재료로 올려 보내야겠습니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냐?
어쨌든, 이게 플레로마 측에서 말하는 자질이군.
“보자마자 알다니, 대단하네요. 왜 바깥 세계에서는 쓰지 않았습니까?”
“거기서 알 수 있었으면 진작 플레로마는 제국을 지배했겠죠. 플레로마의 영역권이 아닌 곳에서는 적합성을 알기 힘들어요. 내 생각엔 공기가 달라서 그런 것 같은데….”
스트라우치도 이 공기에 중독이 안 되네 어쩌네 했었지. 이놈들 공기를 재료로 자주 쓰네.
나는 어떤지 한번 알아볼까.
플레로마의 세계에 왔으니, 내가 그들에게 어떤 가치를 가졌는지 알아 둬서 나쁠 것 없다.
‘어쩌면 내 적합성을 다른 플레로마에게 이용할 수 있을 거고.’
“그럼 저는요?”
“…….”
겔다의 눈이 별로 알아내고 싶지 않은 빛으로 번득였다.
‘완전히 적합한가 보네….’
그야 내 마력만 봐도 답이 나오지.
추측이 옳음을 증명하듯, 겔다가 내 손을 잡아 올리며 말했다.
“…파티 가지 말까요?”
“당신 업적을 축하하는 자리인데 가야죠.”
이 기회를 놓칠 것 같냐.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겔다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1세대로 만들어 줄게요.”
“…….”
“대신 약속하세요. 다른 플레로마가 저와 같은 말을 한다고 해도 듣지 마세요.”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사명’에 대한 실적 경쟁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여기서 잠재적 고급 인력에 속하는 거고.
‘이거 일이 잘 풀리는데.’
나는 미소지으며 겔다의 손을 돌려 내 손 위에 겹쳤다.
“제가 다른 사람 말을 들을까요?”
* * *
듣는다.
들을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다.
나는 음악이 흐르는 연회장을 둘러보며 벽에 기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