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73)
대신, 찝찝함을 피하기 위해서 머리가 벽에 닿지 않도록 해야 했다.
‘기껏 마법으로 구부려 놨더니 포마드….’
이 시대에는 수성 약품이 없나.
머리카락 끝의 유분이 거슬린다.
어쨌든 자리에 맞게 세팅되었으니 문제는 아니다.
손재주가 없어 걱정했는데 다행히 겔다 아스만에게도 시종 격의 인물이 하나 붙어 있어, 그의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또 거슬리는 건….’
겔다의 자질 판단력은 정확했나 보다.
1세대로 보이는 플레로마들이 계속해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시선을 마주하면 다들 예의상 고개를 돌리긴 하지만, 내 눈치는 보지도 않고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놈이 몇 있다.
이 자리에 2세대도 올 수 있다고 들었으니 자격도 안 되는 놈이 여기에 왜 왔나 싶은 시선은 아닐 것이다.
“바이첼 씨.”
나는 다른 플레로마와 춤을 추고 돌아오는 겔다 아스만을 보며 잔을 앞으로 살짝 내밀었다.
겔다가 잔을 하나 들어, 내 잔에 부딪혔다.
나는 겔다의 해맑은 웃음에 마주 웃으며 물었다.
“즐거워 보이네요.”
“당연하죠. 저는… 이런 자리에 온 게 처음이에요. 춤도 며칠 전에 여기서 아는 분께 배운 게 다인데, 이런 자리에서 직접 춰 보니 생각보다 재밌네요.”
겔다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젊었을 적에는 풍족하지 않았다고 했지.
평민이라도 사교계에 입성하는 게 불가능한 일이 아니고, 또 중류층끼리는 파티도 자주 있는데… 아무래도 젊었을 적 환경을 생각하면 참여할 자리가 없을 만도 했다.
“이제 저랑 추실래요?”
“좋죠. 그런데 바이첼 씨는 자주 와 보셨나 봐요.”
“글쎄요.”
나도 사실상 처음인데.
춤은 학교에서 교양으로 배웠고, 루카도 아예 모르지는 않았기에 문제없다.
나는 겔다의 손을 잡고 홀로 나갔다.
곡이 중반부에 다다를 즈음, 나는 고개를 들어 홀 저편을 바라봤다.
겔다와 춤을 추기 시작한 순간부터 시선이 더 끈질기게 따라붙고 있다.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겔다에게 조용히 물었다.
“저분은 누구죠?”
“음?”
겔다가 스텝에 맞추어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내가 눈짓한 자를 보고 표정을 굳혔다.
겔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기까지만 추고 나갈까요?”
“누구길래 그래요?”
“…….”
겔다가 무표정으로 주위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저분이 절 플레로마로 만들어 주신 분이에요.”
그러니까, 에릭 아스만이 말했던 ‘원래 계시던 분들’이군.
그동안 일어났던 하이리겐지 납치 사건의 주범일 테고.
나는 웃음이 나는 걸 참아야 했다.
그래, 바로 윗사람이 이 자리에 없을 리가 있나.
물론 지금은 제가 창조한 플레로마의 ‘실적’을 가로챌 생각을 하는 모양인데….
나는 겔다를 안심시키고, 잠시 바람을 쐬고 오겠다 말하고 연회장 바깥 복도 끝 발코니로 갔다.
잠시 밑을 내려다보며 시간을 죽이다,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금연을 유지 중이라 빨 생각은 없지만 지금은 필요한 물건이다.
‘뭐라도 말문을 트이게 하려면 건수가 있어야지.’
나는 마력으로 돌아가는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때,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궐련을 피우시는군요.”
누군가 내 옆의 난간에 기대며 말을 걸었다.
겔다 아스만이 말했던 그자다.
“수입산이네요. 주변에서 최근 들어 많이 피우던데, 이렇게 보니 반갑네요.”
‘적극적이네.’
나야 환영이다.
나는 케이스 뚜껑을 열며 물었다.
“하나 피워 보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저는 피우던 게 있어서요.”
그가 손에 들고 있던 파이프를 흔들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연기를 목 뒤로 넘겼다.
“…!”
나는 반대쪽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숨을 참았다.
순간 기침이 나올 뻔했다.
‘젠장…. 이거 내 몸 아니었지.’
생각해 보니 신체 나이도 걸리는 상황이다.
함부로 다루면 안 되겠다.
괜히 중독시켰다가 남의 수명 줄이는 수가 있다.
나는 가져온 빈 양철 케이스에 궐련 끝을 비벼 껐다.
내 행동을 지켜보던 그가 물었다.
“어디 안 좋으신가요?”
“몸살을 앓았더니 컨디션이 좋지 않네요. 완전히 나을 때까지는 좀 신경 써야겠습니다.”
“그렇군요. 몸도 좋지 않은데 이곳에 오신 건가요?”
“제게 중요한 분의 공로를 축하하는 자리라서요. 초대받았으니 빠질 수는 없죠.”
“누구와 오셨나요?”
나는 그를 흘끗 보고 답했다.
“겔다 아스만 씨와 왔습니다.”
“아, 오늘의 주인공이시죠. 다시 태어나신 지 5일 만에 첫 사명을 달성하다니, 그분께서는 장차 우리 교구의 귀감이 될 겁니다.”
꼴에 교구도 있고….
스트라우치 덕에 체계를 알고는 있었지만, 평행세계 비슷한 것 하나 만들어 놓고 저들끼리 잘들 논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나를 위아래로 훑더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제 막 열흘이 되었는데 그동안 이렇게 새로운 분도 만나시고, 굉장히 성실하신 분이셨군요. 물론 저희는 많은 분께서 축복을 맘껏 활용하길 바라니, 환영입니다. 뭐든 행복이 우선 아니겠습니까.”
그걸 왜 날 보면서 말하냐.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참고 어깨를 으쓱였다.
“전달해 드릴까요?”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안 했네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펠릭스 바이첼입니다.”
“그렇군요. 저는 마르셀 코프먼이라고 합니다. 바이첼 씨는 이곳에 오신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정확히 세진 않았지만 한 달도 되지 않았습니다. 예비 신도 교육을 받는 중이라 이름도 올라가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군요. 그래 보였어요.”
여태까지 다른 1세대에게 안 끌려가고 남아 있다는 점에서 그래 보인다는 거겠지.
나는 쓸 만한 재료를 보는 듯한 코프먼의 눈빛을 외면하며 입을 열었다.
“실례지만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코프먼 씨.”
“아, 그래요. 그런데… 바이첼 씨.”
나는 그가 붙잡는 소리에 뒤돌았다.
“말씀하세요.”
“지금 예비 신도 교육을 받고 있다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곧바로 사제가 될 방법이 있습니다.”
“…….”
“지금 모습 그대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예비 신도부터 시작해 사제가 되려면 10년은 더 걸릴 텐데, 되도록 20대의 모습을 유지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20대의 모습이라….
죽었던 겔다 아스만이 40년을 거슬러 20대로 나타난 걸 직접 봤는데, 뭔.
어차피 사제 될 때 시간 돌려 줄 거면서 이렇게 사람 심리를 건드리네.
나는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나이가 느껴지는 행동거지와 달리, 그의 얼굴은 나와 별 차이가 없었다.
그가 내 쪽으로 다가오며 어깨를 툭 짚었다.
“저는 겔다 아스만 씨께 두 번째 생명을 준 브란덴부르크대교구의 신부입니다. 이걸 드릴 테니, 생각 있으면 언제든 제 집무실로 오세요.”
그가 명함을 건넸다.
주소는 쓰여 있지 않았다. 찢는 순간 이동 마법이 발동되는 물건일 테니 당연히 필요가 없겠지.
그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내 어깨를 한번 두드리고 자리를 떴다.
이걸로, 중간 관리자를 만나겠다는 내 계획은 반쯤 성공했다.
‘이쯤에서 한번 생각해 보자.’
마법사로서의 격은 스트라우치보다 내가 더 높았다.
그리고 스트라우치는 부주교였지.
품계와 실력이 비례한다 치면, 높은 확률로 저자가 스트라우치보다 약하다.
‘괜찮네.’
나는 생각을 마치고 겔다를 만나러 연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 * *
파티가 끝날 무렵, 나는 창밖에서 동이 트는 것을 보고 뒤돌았다.
“이제 돌아가야겠네요.”
“벌써요?”
“마음 같아서는 더 있고 싶지만 오늘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겔다가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아직 아침이 아니라면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거죠?”
“물론 그렇지만 지금 해가 뜨고 있는데요.”
“아직 그쪽 시간으로는 새벽이에요.”
“…….”
시간이 다르게 흘러?
나는 최대한 표정을 변화시키지 않고 물었다.
“원래 이런가요? 제가 아직 익숙지 않아서 그런지, 놀라운 것만 가득하네요.”
“저도 놀랐어요. 요즘 들어 이런 문제가 생기고 있더군요.”
‘문제’라고.
적보다 시간을 많이 쓸 수 있다는 이점이 있으니 좋아해야 마땅할 텐데….
더 큰 리스크가 존재하는가 보다.
불현듯 스트라우치가 ‘우리 세계는 굉장히 견고하게 완성되어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던 것이 떠오른다.
‘그게 이 문제라면 기억해 둬야겠는데. 그리고… 검증 한번 해 볼까.’
여명777
― 최종 결말 ‘Chapter X. 사망’까지 674일 7시간 11분 35초
― 변경 가능성: 19.2%
마지막에 18.6%였는데, 내가 확인하지 않은 사이 0.6%p 올랐네.
그보다 중요한 건 시간이다.
이곳 시계로 한 시간쯤 흘렀을 때, 나는 다시 상태창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여명777
— 최종 결말 ‘Chapter X. 사망’까지 674일 7시간 00분 45초
— 변경 가능성: 19.2%
1시간 지났는데 현실에서는 10분이 지났네.
내가 시계를 보고 있을 때, 겔다가 나를 불렀다.
“이제 보관소로 돌아가죠, 바이첼 씨.”
이곳은 건물 곳곳에 마법이 연결되어 있어, 왔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구조가 많았다.
예를 들어….
겔다는 지금 저택의 가장 끝 방으로 이동해, 벽난로 위에 놓인 촛대를 오른쪽으로 옮겼다.
다시 방문을 열자, 저택 복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우리가 왔던 성당이 펼쳐졌다.
“편하죠? 기술이 이만큼이나 발전해 있다니, 솔직히 놀라워요.”
“그러게요.”
나는 간단히 답했다.
그 뒤, 우리는 현실 시각으로 30분이 지나갈 때까지, 그러니까 이곳에서 세 시간을 대화하며 성당에 죽치고 있었다.
‘말하는 것도 힘드네.’
상대방도 지쳐 보인다.
대화 말고는 할 게 없었다. 겔다 아스만도 아직 플레로마 세상을 잘 몰라, 돌아다닐 곳이 없었다.
그런데도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게 싫은지, 겔다는 먼저 현실로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정보는 많이 얻었다.’
플레로마가 사람을 고르는 기준, 표적 저주술을 걸고 원하는 장소로 연결하는 방법, 또 대체로 어떤 물건을 건드리면 직전 좌표로 이동하는지 등등.
겔다는 내가 묻는 말에 흔쾌히 답해 주었다.
질문의 수를 관심의 정도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러다 내 얼굴에서 피로한 기색을 읽었는지, 제실 쪽을 고갯짓했다.
“사탕이라도 줄까요? 표적 저주술이 걸리긴 했는데.”
“그럼 전 아스만 씨가 부를 때면 언제든지 여기로 올 수 있는 건가요?”
겔다가 웃으며 답했다.
“그런 셈이죠.”
내 가벼운 물음을 동의의 뜻으로 알았는지, 겔다가 사탕 바구니를 들고 와 내게 건넸다.
‘…진짜 먹으라고?’
뭐, 안 될 건 없지만… 굳이.
나는 겔다의 마음에 들 말을 골라 입을 열었다.
“사실 단 건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요. 대신, 가지고 있다가 적절한 아이를 찾으면 먹이고 아스만 씨에게 말해 줄게요.”
“음, 그거 괜찮네요.”
괜찮겠지. 네 실적 올려 주는 건데.
어쨌든, 이렇게 시간을 죽이고 있을 때가 아니다.
우리가 내내 찾던 중요한 인물을 마주쳤으니 전략 회의를 하러 가야 한다.
나는 이제 생각난 것처럼 놀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왜 그래요?”
“이렇게 가만히 있지 말고 게임이라도 할까요? 할 줄 아는 카드 게임 있나요? 아니면, 체스는 어때요.”
“음, 체스는 룰을 잊었고… 카드 게임은 솔리테어만 해 봤는데요.”
“1인용이네요.”
나는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포커는 어떠세요. 가르쳐 드릴까요?”
* * *
겔다 아스만은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나는 트럼프 카드를 가져오겠다는 명분으로 현실로 돌아와, 학교로 워프했다.
아직도 그들은 에릭 아스만을 데리고 있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나르케가 비상용 연락책을 남겨 놨다고 했는데….
‘그게 파이냐….’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책상 한가운데 쌓인 돌무더기에서 파이를 꺼내 깨웠다.
“으응?”
“미안, 파이. 엘리아스랑 레오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
“알 수도 있을 것 같아.”
이건 또 뭐냐.
시간 좀 주면 파악할 수 있다는 걸로 알겠다.
“그럼, 말 좀 전해 줄 수 있어?”
“응! 뭔데?”
“중간 관리자 찾았으니까, 전략회의 하자.”
“그대로?”
“응, 그대로 전해 주면 돼.”
나는 곧바로 종이를 꺼내 내가 전달해야 하는 사항을 갈겨 적었다.
내가 곧바로 캐비닛에서 트럼프 한 벌을 꺼내 가방을 챙기자, 파이가 고개를 기울였다.
“루카스는 어디 가게? 회의한다며.”
“내가 할 말은 전부 적어 놨어. 이제 그 친구들끼리 회의하면 돼.”
나는 그 말을 마치고 워프 마법을 전개하려다, 문득 든 생각에 파이를 바라봤다.
“파이.”
“응?”
“너도 여기 좀 껴야겠다.”
* * *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겔다에게 포커를 가르쳐 주자 세 시간이 지났다.
현실 시간으로는 30분이 지난 셈이다.
마침 겔다가 연회에서 긴장을 많이 했는지 졸려 보이는 기색이기에 재우고 나왔다.
나는 낮임에도 묘하게 어둑한 바깥을 바라보며 손안에서 명함을 찢었다.
그 순간 또다시 눈앞의 풍경이 바뀌었다.
마르셀 코프먼의 집무실은 온통 컴컴했다. 물건을 분간할 정도는 되었지만, 오래 있을 맛은 나지 않는 공간이었다.
그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