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75화 (75/220)

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75)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목소리만 들었는데도 감정이 들뜨는 엿 같은 경험을 하는 걸 보니 해독제를 먹지 못한 게 분명하다.

게다가 어딘가 모르게 기운이 없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엘리아스와 함께 구속되었을 때 내게 걸렸던 마법사용 구속구가 딱 이런 느낌을 주었다.

“너무한데요.”

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코프먼을 처리할 때에서야 풀 수 있었는데, 재료만 다르지 똑같은 걸 또 가져왔네.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 대답했다.

“여태 사람을 까맣게 속이고 진심을 위장해 쫓아다닌 것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너무한 것 같아요?”

“둘 다 만만치 않은 걸로 하죠. 그보다….”

나는 고개를 돌려 겔다를 바라보며 말했다.

“생각보다 능력이 좋네요. 직접 정신 조작 마법까지 쓸 수 있다는 건 못 들었는데요.”

“나도 무기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숨기고 있었다?

역시 경계심을 무너뜨리기 위해 내 감정에 약을 동원한 것에 대해서는 후회할 여지가 없다.

전에 동족의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봐도 맞는 것 같다.

‘일단 제대로 생각 좀 해 봐야겠는데.’

스트라우치도 그렇고 다들 이런 면에서는 관대한지, 사지를 못 움직이게 만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여겨야 할 점은, 겔다 아스만이 나보다 15cm는 더 작다는 점이다.

‘믿는 구석이 있나 본데.’

아까 쓴 그 능력을 계속 쓸 생각인가.

주먹 날리기 전에 쓰면 확실히 몸싸움이고 뭐고 계속 잠자는 수밖에 없기는 하다.

‘출구는….’

출구까지 가기 전에 잠들게 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리고 겔다 아스만의 펜던트가 없으면 문을 연다 해도 우리 세계가 펼쳐지지 않는다.

그때, 이제야 겔다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빛이 무서울 만큼 어두컴컴했다. 서 있는 자세를 보니 반쯤 넋이 나간 것 같기도 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겔다가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언제부터였어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비텔스바흐제 약 말이에요.”

겔다가 왜 아까보다 더 충격받은 얼굴로 서 있었는지 이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작정하고 약을 마시고 만나 왔다는 사실을 입 밖에 내 사람을 더 비참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

“그래요, 대답하지 않아도 돼요. 이제 와서는 의미가 없죠. 당신이 코프먼 씨를 죽이려고 절 이용한 마당에 뭘 바라겠습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겔다 아스만에게는 납득되지 않겠지. 나 역시 내게 이용당한 당사자에게 이해를 바라지도 않는다.

겔다 아스만

호감도 +9*

‘…왜 이렇게까지 호감도가 올랐냐.’

분명히 독감 전까지만 해도 아스만에게 있어 나는 그냥 흥밋거리로 데리고 있는 정도 아니었나?

아니면 시작부터 잘못 판단했던 건가.

‘…이쯤에서 특성 좀 빠져서 +6을 만들어 주면 얼마나 좋냐.’

어쨌든, 돌아가려면 상대방 입맛에 맞춰 주는 게 빠르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해요.”

“사과하지 마세요.”

겔다가 내 말을 잘랐다.

“…….”

왜 하지 말라는지는 짐작이 간다.

내게 있어 25살 겔다 아스만이 평면적인 악당일 때 처단하기 편리한 것처럼, 겔다 아스만 역시 내가 철저하게 사기꾼이어야 나를 공격하기 쉬우니까.

그리고, 사과한다면 내 입으로 이용했다는 걸 인정하는 셈이기도 하다.

‘일단 달래자.’

그래야 마이너스 감정을 심는 약이라도 먹이지. 그러면, 과정은 썩 좋지 못해도 결과적으로 편안해질 수 있다.

나는 입을 열었다.

“…시작이 어쨌든 제 감정은 거짓이 아닙니다. 아스만 씨라면 지금 제가 어떤 상태인지 바로 아셨을 텐데요.”

“거짓은 아니겠지만, 가짜이긴 하지요. 물약 하나로 생겨나고 물약 하나로 지워지는 감정이 가짜가 아니고 뭔가요?”

겔다가 투명한 액체가 담긴 병을 흔들었다.

‘…….’

해독제다.

분명 재킷 안쪽 주머니에 넣어 뒀는데, 내 마력을 틀어막으면서 내가 가지고 있던 물건까지 전부 가져간 것 같다. 다시 보니 재킷도 내게 없다.

무어라 반응하지 않았는데, 겔다가 곧바로 뚜껑을 열어 병을 뒤집었다.

촤악―

“…….”

“미안하네요. 못 줍니다.”

겔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구두로 물기를 쓱 밀었다.

겔다는 또다시 내 옆에 앉았다.

나는 정적이 이어지는 사이 고개를 틀어 몸을 바라봤다. 팔에 지혈 테이프가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묻기도 전에 상대방이 입을 열었다.

“효과 좋더군요. 바이첼 씨가 준비됐을 때까지는 마시고 싶지 않았지만… 뭐, 저도 다 알아 버렸으니, 미안하단 말은 생략하겠습니다. 괜찮지요?”

“아뇨. 교회에서 흡혈이라니 상식 밖이네요.”

물론 어디서 해도 상식 밖이라는 점은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내 행동이 더 상식 밖이라는 둥 약간의 반박이 들어올 줄 알았지만, 아스만은 의외로 담담하게 물었다.

“그래요?”

“…….”

“부활 이전에는 저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해요. 아니, 생각해 보면 애초에 사람 피를 마신다는 것 자체가… 생각의 선택지에 없던 일이었죠. 동화나 민담에나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잘 아네.

그보다 사상교육이 풀렸나, 왜 이렇게 멀쩡한 생각을 하지.

“플레로마를 미친 사이비 집단이라고 생각하죠?”

“예.”

“바이첼 씨는 플레로마가 아니지요. 예비 신도 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요. 저를 통해 플레로마의 계획을 저지하러 온 거예요. 그렇죠?”

“정확하네요.”

아스만의 뜻대로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플레로마의 계획을 저지했다는 점에서는 절대로 미안하지 않았다.

“나는 진심인 줄 알았어요.”

“…….”

“그래서 묻는 말에 의심 없이 답해 준 것이고요.”

안다.

지금 무슨 감정일지 안다.

내가 어떤 수단을 선택했는지 알았고, 그게 이런 결과를 낼 것이라고도 알고 있었다.

“다시 태어나 보니 남은 게 아무것도 없더군요. 어느 날 눈을 뜨니 제가 40년 후로 이동했고, 사실 저는 이미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라지 뭐예요?”

이 상황에 본인 이야기를 해 봤자….

서로의 마음만 불편해질 뿐인데.

그래도 일단 묵묵히 들었다. 여기서 더 원망을 사고 싶지는 않았다.

“나 혼자 남은 세상에서 믿어 볼 만한 사람이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시작부터 틀린 선택을 했군요.”

뭐라 해 줄 말이 없었다.

범죄를 막기 위해서는 이게 최선의 방법이었다는 걸 설득해?

‘아주 잘도 되겠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내게는 겔다 아스만의 감정보다는 생명이 중요하다. 약을 마셨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뭐, 바이첼 씨는 아동 납치범 사정 따위는 관심 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저라도 그럴 것 같아요. 바이첼 씨가 플레로마의 계획을 저지하려 했던 걸 이해합니다.”

“이제 와서?”

사람 납치하기 전에 그렇게 생각하든가.

하지만, 그런 동시에 왜 겔다 아스만이 아까부터 계속 ‘정상적인’ 말을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아까, 코프먼 씨와의 연결이 끊어지고 나서 무언가 상황이 이상하게 굴러가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요. 무언가를 바라서 아이들을 데려온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무얼 바랐는지는 떠올릴 수가 없어요.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더 플레로마를 믿을 수 있겠어요?”

“마침 말이 나온 김에 말씀드리는 건데, 더 일이 커지기 전에 지금 당장 돌려보내세요.”

“그러지 않아도 다들 있던 곳으로 보냈어요.”

맥이 탁 풀렸다.

이렇게 쉽게 돌려보냈다고?

장난하나?

‘아니… 물론 환영할 일이긴 한데.’

내 표정에서 황당함을 느꼈는지, 겔다가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제 행동을 막고자 곁에 있었던 거잖아요.”

“…그래요.”

“아직 뭐가 뭔지 머릿속이 복잡하지만, 바이첼 씨의 목적 하나는 분명히 알아요. 그러니까… 만약 내가 더 이상 그쪽에 서지 않는다면?”

겔다 아스만이 내가 평소에 했던 것처럼 내 손을 잡아 겹쳤다.

“그러면 어때요, 생각이 좀 바뀔까요? 아니면 그래도 여전히 나는 수단이자 목표물인가요?”

“…….”

그러니까… 내 반응 보려고, 나 때문에 돌려보냈다는 거네.

자신을 도구로 쓴 그 원인을 제거하면 내가 자신을 제대로 보지 않을까 해서?

플레로마의 세뇌에 혼란을 느끼지만, 아직 완전히 돌아온 것은 아니다.

“아뇨.”

“…그러면.”

“그렇다고 해도 관계를 이어 나갈 수는 없는 건 사실이에요. 미안합니다. 안일하게 생각한 제 잘못이었습니다.”

인정한다.

나는 지나치게 목표만 바라보고 달렸고, 거기에 따르는 사람의 감정까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상대방이 깊은 배신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겔다 아스만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더니 싸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거 안됐네요. 미안하지만 나는 피가 필요해요.”

슬슬 본색 나오는 거 봐라.

나는 마찬가지로 목소리에서 감정을 빼고 말했다.

“사회로 돌아갈 생각이라면 그런 활동에서는 손을 떼야 할 겁니다.”

“아뇨.”

겔다가 차가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가 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가 없을걸요.”

그 말을 끝으로, 또다시 의식이 끊어졌다.

* * *

‘나 참… 어이가 없네.’

스트라우치는 피는 안 처먹었으니 양반이라고 봐야 하나?

이곳 시간으로 하루가 지났더니 이제 눈앞이 돈다.

안 그래도 이 몸은 체력도 없는데, 이럴 거면 아주 사골까지 뽑아 먹지 그러냐.

그동안 혹시 몰라 무력을 써 보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내 피를 마시고 더 강해진 건지, 갈수록 실력이 더 좋아지고 있다.

재시도 역시 써 보려 했지만 사용조차 되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하다. 이 일이 일어나지 않게 돌리려면 2주 전으로 돌아가 겔다 아스만을 만나지 말았어야 했을 테니….

나는 파랗게 변한 왼팔을 흔들어 보고 입을 열었다.

“그만하고 협상 좀 하죠.”

“말해 봐요. 한번 들어 볼게요.”

“나가면 매일 피를 뽑아서 드리겠습니다. 회복할 기간만 지킨다면 양은 알아서 정하셔도 좋습니다.”

“뭘 믿고?”

“못 믿으시나요?”

겔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믿죠.”

그러고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여태까지 그쪽이 보인 모든 신뢰가 전부 약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면 말이에요. 물론 잘 됐다고 생각은 합니다. 이미 저를 대상으로 몇 번이고 약을 마셔 봤으니, 더 마신다고 해도 거부감은 없겠죠.”

“무서운 말이군요.”

지금 이해하기로는, 이렇게 된 거 약을 먹여 가면서 피를 뽑겠다는 말인 듯하다.

겔다가 생소한 약병을 들고 내 앞에 앉았다.

“피곤했을 테니 좋게 가죠.”

“몇 단계?”

나는 그가 든 병을 보며 물었다.

“그렇게 잘 알면 상처받는 거 아세요?”

“이제 와서?”

“10단계 두 배예요. 마셔 본 적 있어요?”

있을 리가. 마셨다가는 아주 끝장나겠네.

나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그동안 현실 시간으로 여섯 시간이 지났다.

‘레오랑 엘리아스는….’

좌표를 파괴할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는 거겠지. 나르케도 그럴 테고.

어떻게 할까.

전략을 실행하려면 우선 마력부터 풀어야 할 텐데.

나는 바닥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방법이….’

있기는 하다.

리스크가 크긴 하지만… 슬슬 집에 갈 때도 되었지.

마침 적절한 재료를 가져와 주니 고마울 뿐이다.

나는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그래요,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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