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76화 (76/220)

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76)

“…….”

겔다가 나를 빤히 내려다보다 약을 주머니에 넣고 한 발짝 물러섰다.

“믿는 게 있나 보군요?”

“이제 맨정신으로 버티기 힘들어서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스만 씨가 방금 그렇게 말했잖아요? 당신 대상으로 효과를 몇 번 봤으니 껄끄럽지 않을 거라고.”

“…….”

그래도 나를 믿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겔다는 그 뒤로 주사기 세 통을 더 쓰고서야 또다시 나를 잠에 빠뜨렸다.

그 뒤 현실 시각으로 한 시간, 그러니까 이곳에서 여섯 시간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철저하기는….’

나는 텅 빈 방을 둘러보고, 혹시나 해 심장에서부터 마법을 끌어냈다.

결과는 당연히 실패였다.

수사국에서 사용하는 것과 비슷한 완성도를 보이고 있었으니, 쉽게 풀릴 리가 없지.

‘대체 왜 이렇게 피를 뽑아 가는 거냐…. 고작 피 하나 뽑으려고 이렇게 구는 것도 신기하네.’

가장 그럴듯한 가능성은 두 가지다.

첫째로, 강해지기 위해서. 둘째로, 살기 위해서.

내 생각에는 둘 다일 것 같다.

부활한 시체들은 피가 없으면 생을 유지할 수 없다.

겔다는 이곳 시간으로 엊그제부터 플레로마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었으니, 위로부터 피를 공급받지 않아도 살 수 있게 대비하는 중이겠지.

한 번에 뽑아 가면 될 것을 10mL 주사기로 여러 번에 걸쳐 뽑고 있는 것도 보관을 위해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데리고 다니면서 피 공급원으로 써먹을 생각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필요에 의해 나를 붙잡아 두고 있는 이상 상대방은 나의 상태를 아예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구속구 각각을 해제하는 도구가 필요하다.

이 상황에서 내가 택할 전략은… 일단, 고통을 참지 않는 것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아무리 팔이 파란색이 되었다고 해도, 그 위에 바늘을 찌른다고 해서 비명까지 나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간단히 그냥 드러눕기로 했다.

“바이첼 씨.”

슬슬 눈 뜰 힘이 사라져 갈 즈음, 시기 좋게 겔다가 나를 불렀다.

“죽은 건 아니죠?”

“…….”

“마취제라도 구해 올게요.”

“아뇨. 이쯤 했으면 됐죠. 보내 주시죠.”

겔다는 말없이 내려다보기만 하더니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

‘보낼 생각이 없네.’

무력은 통하지 않는다.

거기에 사건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도 없지.

‘그래도, 이 사건 안에서 내 행동이 실패하면 돌릴 수는 있어.’

그렇다면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여태까지 잡았던 특성 연기를 계속해 보는 수밖에.

개인적으로 더는 하고 싶지 않고, 지금 이상으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일을 저지르고 싶지는 않지만… 아무것도 통하지 않는 지금 방법이 없다.

‘레오랑 다른 애들이 여길 못 찾은 지도 이미 현실 시간으로 한나절이 다 되어 가는 걸로 아는데.’

이 정도면 더 기다려도 해답이 보일 것 같지 않다.

그때 겔다가 계단을 내려와 내게 말했다.

“일어나 보세요.”

나는 오른팔로 눈을 누른 채 대꾸하지 않았다.

겔다의 목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서 들려왔다.

“아까 말했던 약 가져왔으니까, 마시고 조금 기다리세요. 마취제가 안 되면 진통제라도 가져올 테니까요.”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지는 않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전략은 일부 성공했다.

허튼짓을 벌일까 두려워서 주지 않았던 약을 이제 와서 준다?

내가 상황 자체를 피하려는 것 같으니 생각을 바꿔 놓을 필요가 있겠지. 계속해서 공급원으로 써먹을 거라면 협조를 얻어야 할 테니까.

거기에 내가 다른 행동을 하지 못할 만큼 힘이 빠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짧게 대답했다.

“됐어요.”

“…….”

“왜 이러는 건지 이유를 알 수가 없네요. 제게 원한이 생겨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럼 마취제를 가져올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이게 대체 뭘 위한 상황인지 제가 여기서 어떻게 더 이해해야 하죠?”

겔다가 내 옆에 앉아 팔을 치웠다.

“마시죠. 잠깐만 참으면 아까보다는 훨씬 나아질 거예요.”

내 말에 답해 주지 않고 다른 소리를 한다.

겔다 아스만

호감도 +9*

여전하다.

정말로 내키지는 않지만, 이 값이면 해 볼 만하다.

“믿으세요. 문제없을 거예요.”

“안 마신다고 했잖아요.”

나는 겔다의 손을 쳐 냈다.

그러고 할 수 있는 최대한 비웃음을 섞어 말을 이었다.

“이러면 또 다짜고짜 이상한 기억 끄집어내면서 재워 버리겠죠. 틀려요?”

“…….”

겔다가 잠시 주저하고는 내 턱을 눌렀다.

나는 인상을 쓰며 또다시 손을 치웠다.

“좀 기다려 봐요. 마셔 본 적 있어요? 마신 사람을 본 적은?”

겔다가 그런 나를 쳐다보더니 답해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열었다.

“없고, 바이첼 씨 말고는 본 적 없네요. 왜요?”

“실험은 해 본 거예요? 이런 말을 직접 하기는 미안하지만, 이미 10단계 약을 마시고 왔습니다. 약효가 남은 상태에서 그 두 배나 되는 약을 또 마시면 어떻게 될 줄 알고….”

“제가 잘 살펴볼게요.”

내 직설적인 인정이 신경을 긁었는지 겔다가 말을 자르고 내 입에 약을 흘렸다.

또다시 있는 힘을 다해 겔다의 손을 떨쳐 내자 약이 바닥에 떨어졌다.

어두운 시야 한쪽에서 겔다가 황급히 약병을 바로 세우는 것이 보였다. 그렇다 해도 이미 내 입에서는 익숙한 맛이 느껴졌다. 이어 겔다와도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 순간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몸을 움츠렸다.

“왜 그래요?”

진짜로 문제가 생길 줄 몰랐는지, 겔다가 가까이 몸을 숙였다.

‘…레오가 왜 안 만들어 줬는지 알겠다.’

여기까지 의도한 바였으나, 벌써부터 사고력이 흐려져 내가 세워 뒀던 계획을 떠올리는 것에 집중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다 접고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이 불쑥 들었는데, 효과를 두 배까지 늘린 약을 먹고도 맨정신이 남아 있다는 걸 엘리아스가 알면… 무조건 졸업할 때까지 기계 소리를 들을 것 같다.

나는 눈에서 초점을 지우려 노력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무슨 말과 행동을 하고 있는지는 굳이 의식하고 싶지 않지만, 어쨌든 하나는 분명했다.

방금 내가 겔다의 어깨를 바닥으로 밀쳤음에도, 작정하고 무력을 쓰려고 했을 때와는 달리 잠에 들지 않았다.

‘이게 될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이렇게 했을 텐데.’

겔다는 여태 그랬듯 감정을 읽었을 테고, 내 행동이 위협이 되지 않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사실, 지금도 감정을 이용하고 있는 셈이라 양심이 아프지만 방법이 없다.

어쨌든 지금 나는 상대방에게 손익을 따져 볼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

불편한 자세를 유도한 덕인지, 별것 하지 않았는데도 겔다가 손에 쥐고 있던 약병을 떨어뜨렸다. 나는 약병을 주워 겔다의 앞에 들이밀었다.

“마셔 볼래요?”

“…….”

“나만 이러는 건 억울한데요. 잠깐만 이렇게 있다가… 해독제 마셔요.”

나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입에 약을 털었다. 나사 빠진 연기나 하는 마당에 안 될 것까지야. 물론 나야 그렇다고 쳐도 상대방이 이제 와서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도로 뱉으면 안 된다.

그러면 재시도해서 이 상황을 또 겪어야 하는데….

‘한 번에 끝내자고.’

나는 겔다의 입을 손으로 가볍게 막았다가,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서 입을 열었다.

“봐요.”

“…!”

흠.

됐다.

나는 겔다의 얼굴에 나와 같은 빛이 도는 것을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평소와 달리 상황이 잘 풀리고 있다는 마음에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내게도 약효는 들고 있었으니 그런 염치없는 생각을 아무 가책 없이 할 수는 없었다.

겔다 아스만

호감도 +10

‘특성 빠졌네.’

천장을 찍어서 더 보이지 않을 뿐, 내가 보기로는 +10은 훨씬 넘긴 것 같다. 애초에 이 자는 엘리아스가 말하는 그런 기계 같은 인간은 아니었으니, 1단계부터 10단계 사이의 약만 마셔도 충분히 효과가 났을 것이다.

‘나한테 나타난 효과를 보고 그게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거라 생각하면 안 되는데.’

이미 그렇게 여겼으니 내 제안을 막지 않았겠지.

나는 루카에게 미안하지 않을 만큼만 상황을 몇 분 이어간 뒤, 손목을 내밀었다.

“아무리 견뎌 보려고 해도 불편한데… 풀어줄 수 있나요?”

“…아뇨.”

겔다가 흐릿한 눈빛과 달리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그 직후 겔다의 눈빛에 불안이 깃들었다.

‘눈치 빠르긴….’

세상 모든 플레로마들의 눈치가 0이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좀 더 자발성을 발휘하게 도와주려 했는데, 안 되겠다.

나는 겔다의 재킷 안주머니에서 찾았던 작은 아티팩트를 꺼냈다.

“미안하지만 이미 찾았습니다. 가지고 계시더군요.”

옷에서 옅게 마력이 느껴져 쉽게 유추해 볼 수 있었다.

겔다의 얼굴이 순간 차게 내려앉는 것이 보였다.

“직접 가지고 다닐 줄 알았습니다. 혹시나 다른 플레로마가 이곳에 들어올 가능성을 생각하면, 도주할 때 짐은 만들지 말아야 했을 테니까요. 그렇죠?”

나는 아티팩트를 팔의 구속구에 가져다 댔다.

어디 있었는지 모를 이음새가 벌어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겔다는 약효가 제대로 들었는지, 충격받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마지막 구속구를 바닥에 떨어뜨리는 순간, 겔다가 쥐어짜듯 말을 꺼냈다.

“설마, 지금까지….”

“미안해요, 아스만 씨. 이제 나갑시다. 플레로마가 건 세뇌를 풀어줄게요.”

운에 맡겨야 했다.

겔다 아스만이 아직 나에게 마음이 약해져 있는가, 아닌가. 그것에 달린 도박이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해도 또다시 사람의 마음을 이용했다는 사실에, 내가 마지막까지 잡고 있던 일말의 인간성이 모조리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원래대로라면 하지 않았을 게 분명한 말이 나오려는 것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전에도 말했듯이, 더는 안 돼요. 제 판단으로 상처를 드린 것에 대해서는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얼마든지 비난해도 괜찮습니다.”

“…제가, 지금 이해가 잘 안 되는데요.”

안 되겠지. 역시 안 만드는 약에는 이유가 있다.

웬만해서는 약이 통하지 않고, 통한다 해도 금세 효력이 꺾이는 나마저 사고가 제대로 되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당신이 저지른 범죄 외에는 전부 원하는 대로 하세요. 제가 전부 처음으로 돌려드릴 테니까요. 원한다면 수사도 도와드리겠습니다. 당신의 범죄에는 플레로마의 세뇌가 크게 영향을 미쳤으니… 보석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

“지금까지 미안했어요. 나가서 새 삶을 사세요.”

분명 내게 마법을 쓸 수 있음에도, 아무런 공격도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차마 상대방의 눈을 볼 자신이 없어, 말없이 주위에 굴러다니던 돌조각을 주워 피부를 찔렀다. 나는 바닥에 떨어지는 피를 바라보며 마력을 끌어내 주문을 외웠다.

―너희들은 이제 신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리라.

콰아앙―!

얼마 전 파이를 소환했을 때와 달리 폭발음이 들려왔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내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을 떠올리고,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저에 대해서는… 그래요. 제가 명함을 드린 날로 할까요?”

내내 입 다물고 있다가 이제 말을 시작한 것도 아닌데, 꼴사납게 말끝이 떨린다.

나는 겔다의 손길을 밀치며 지울 내용을 떠올려 가며 수식을 완성했다.

‘…내가.’

내가 다시는 이딴 약 이용하나 봐라.

내가 마시는 거라면 윤리적으로도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지난날의 나를 한 대 치고 싶을 지경이다. 잠깐만 마시면 될 거라고, 플레로마에 진입할 때까지만 연기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도 전부 오산이었다. 마지막까지 감정을 건드리는 방법 외에 다른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나는 겔다의 이마를 짚고 입을 열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이 상태로 약물의 효과를 상쇄할 만큼 강한 조작 마법을 쓸 수 있을까, 플레로마의 세뇌를 완벽히 지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이마에 올렸던 손을 떼는 순간, 겔다의 몸에서 힘이 풀렸다.

“…….”

죽은 듯이 눈을 감은 겔다에게 신력을 흘려보냈다.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히 눈을 떴다.

이제 겔다의 눈빛에서는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조사를 위해서는 플레로마에 관한 기억은 남겨 두어야 했는데, 다행히 이곳이 어디인지는 알아챈 듯했다.

이제 위층의 폭발음이 더 가까이 들리기 시작했다.

주위를 둘러보던 겔다가 나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누구시죠?”

“…….”

“분명 전에 본 적이 있는데. 혹시 그 청년새언론…. 맞나요?”

끝이다.

이걸로 내가 할 일은 완전히 끝이 났다.

돌아가서 니콜라우스의 이름으로 이걸 발표해 인상 점수가 오르는 걸 관찰하고, 이제 다음 계획을 세우기만 하면 되는데….

“…….”

상대방이 내 반응에 의아함을 느꼈는지 눈을 좁혔다.

“왜 그러세요? 잠깐, 밖에서 지금 뭘 하길래….”

콰앙―!

입구를 찾지 못한 건지, 제실 바깥에서부터 폭발 마법을 썼는지 1층의 햇빛이 지하까지 들어왔다. 내가 벽돌의 분진과 오랜만에 보는 빛에 눈을 찡그린 사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미안, 너무 늦었지.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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