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77화 (77/220)

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77)

더 나은 선택지가 있었을까.

끝까지 내 손으로 속죄의 길을 영영 막아 버린 것이 아닐까.

기억을 지우는 것 외에 좀 더 본질적인 해결책이 있지 않았을까?

‘약을 통해서 감정을 지울 수도 있었지.’

지금도 기억을 되살리고 약을 먹이려면 충분히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이 이상으로 고통을 느끼길 바라지 않는다.

겔다 아스만이 내게 원한을 가지고 분노를 표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다.

대의를 떠나 개인의 감정 차원에서는 잘못을 저지른 것이 맞으니 이런저런 변명과 당위를 덧붙여 내 잘못을 피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그러면?

원망하게 두는 것으로 끝인가?

‘그럴 리가.’

악에 받친 감정이 내게 향할 때, 피해를 입는 것은 나뿐이 아니다.

어떤 종류든 감정에 이끌려 다니는 자는 스스로 고통받기 마련이다.

해결되지 않는 과거 탓에 밤낮으로 시달리고, 원한에 이를 갈며, 첫 만남의 첫인사까지 되짚어 가며 자신이 다르게 행동했다면 이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까—다르게 전개되었을지도 모를 수만 가지 경우를 상상하고 자책하고 증오심을 느낄 미래가 내게는 선명했다.

‘…물론 그 과정을 거쳐서, 나중에는 자유로워질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나는 겔다 아스만이 내가 낸 상처에 허덕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과거를 관조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을까?

제삼자는 그것까지 내가 감당해야 하는 죄의 영역이라 말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럴 수 없다.

어떤 상처는 지난한 과정이 따르더라도 딛고 일어설 수 있지만 어떤 상처는 그럴 수 없다.

또 상처가 성장으로 이어지리라는 보장은, 그가 눈을 감는 날까지 타인을 믿지 못한 채 불신에 찬 삶을 보내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이겨 냈다 여겨도 인생에 뿌리 깊이 남는 것이 있다.

더는 그날 꿈을 꾸지 않아도 존재 자체에 스며드는 것이 있다는 걸 알지 않는가.

‘과거를 바꿀 수는 없더라도, 앞으로 이 모든 과정을 겪지 않게 할 수 있다면….’

당연히 나는 이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루카스, 나 좀 봐.”

반응 없이 허공을 바라보자 레오가 나와 눈높이를 맞춰 앉아 어깨를 두드렸다.

“…!”

레오는 기어코 내 표정을 확인하고서야 뒤로 물러났다.

나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 물었다.

“해독제 있어?”

“가져왔어. 몇 단계?”

“10단계 두 배. 지금 만들 방법은 있어?”

레오가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벌린 채 나와 겔다를 번갈아 바라봤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혹시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죠? 왜 여기 계신 거고, 저희가 혹시 뭘….”

겔다가 말을 끝내지 못하고 미심쩍은 눈초리로 자신과 내 행색을 살폈다.

그 말에 레오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는 것이 보였다.

타인의 입장에서는 범죄자가 저런 말을 하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겠지만, 나는 겔다가 내게 상처받지 않은 얼굴로 평범하게 말하는 것을 보니 끝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무것도요.”

나는 여전히 메인 목에서 희미하게 소리를 끌어냈다.

“그동안 미안했습니다.”

“네?”

이걸로 아스만과는 끝이다.

이제 감정을 처리해야 할 쪽은 나다.

지금까지 있던 모든 일을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나는 목을 가다듬고 레오를 불렀다.

“레오.”

“말해.”

“이따 신력 관련해서 수사국에 전달 좀 해 줘.”

레오는 상황을 파악했는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겔다 아스만에 대한 조사는 본인의 자백보다는 내가 입수한 문건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

기억을 지웠으니 본인이 한 일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지.

“다른 애들은? 계획은 제대로 실행했어?”

“지금 이 상황에 계획부터 묻는 거야?”

레오가 내게 치유 마법을 사용하며 말을 이었다.

“엘리아스는 이제 곧 여기로 올 거야. 다른 지역 플레로마도 찾아서 세뇌 풀었고, 나르케가 다른 교황청 마법사들이랑 대기 중이야. 적어 두고 간 건 다 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래, 고맙다. 지금 현실 시간으로 몇 시야?”

레오도 이미 두 세계 사이의 시간이 다른 것을 아는지, 별 물음 없이 답했다.

“저녁 6시 다 된 걸로 기억해.”

내가 새벽에 이곳에 왔었지.

이곳에서 오래도 있었네. 체감상 이틀은 넘은 것 같긴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보도는 벌써 나왔겠네. 지금 그쪽으로 넘어갈 수는 있어?”

“아슬아슬할 텐데.”

그렇겠지. 그럼, 내가 직접 하는 수밖에.

나는 곧바로 겔다를 바라봤다.

“아스만 씨. 아직 선택할 것이 남았습니다.”

“선택이요?”

“아스만 씨는 본인이 플레로마라는 걸 기억하시죠?”

겔다의 얼굴이 전과 같이 굳었다.

“플레로마가 절 만들었다는 건 알지만, 저는….”

무슨 말이 이어질지 안다.

세뇌를 완전히 제거했으니 플레로마에 우호적인 생각이 없겠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보다, 시간이 없어서요.”

“…시간이 없다뇨?”

“이제부터 축복을 회수당할 겁니다. 그러니 상황이 되기 전에 다시 묻겠습니다. 살고 싶어요?”

“당연히…! 그렇죠. 잠시만요. 간단하게라도 설명해 주실 수는 없는 건가요?”

“루카스.”

레오가 연락을 받았는지, 귓가의 아티팩트를 만지며 나를 불렀다.

지금 이 시각에 올 연락은 내가 알기로 하나밖에 없다.

내가 다시 겔다에게 시선을 옮긴 순간, 겔다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아아아악!”

겔다가 심장께를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졌다. 손끝이 검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이런 건 또 처음 보는 광경이다.

물론 플레로마를 신력으로 살릴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들어 본 적 없다.

‘과연 성공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르케가 내 계획을 그대로 실행한 걸 보면 불가능하다고 못 박힌 일은 아니라는 말이겠지.

나는 학교에 들렀을 때, 아스만과 같은 플레로마가 존재할 경우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적어 두고 나왔다.

한 달 전까지 무고한 시민이었던 자들이 플레로마에 의해 또다시 죽임당할 것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코프먼을 의식불명으로 만든 시기부터 지도부에서 축복을 회수할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았지.’

그 뒤로 겔다 아스만이 이곳 시간으로 나흘 가까이 살아 있었던 것까지 생각하면 지도부와 말단 사이가 그리 긴밀히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가장 유력한 회수 시간대는 신문에 보도가 되는 시간이다. 아무리 연결이 되어있지 않다고 해도 신문은 볼 테니까.

나는 비명을 지르며 경련하는 겔다를 붙잡아 심장께를 세게 눌렀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안, 안 돼…. 아아아아아악!”

잠시 나아지나 했더니, 겔다가 또다시 비명을 질렀다.

나는 레오의 치유 마법이 몸에 스미는 것을 느끼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이번 신력 주문은 이걸로 끝이다. 하지만, 아직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계속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곧바로 다른 주문을 꺼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분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그 순간, 겔다의 몸에서 힘이 풀렸다.

죽은 것처럼 보인 탓에 레오가 다급히 맥을 짚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죽지 않은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신력이 자리를 잡았어.’

앞으로 적어도 반나절은 버틸 수 있다.

나는 겔다의 심장에서 천천히 손을 뗐다.

내가 다할 책임은 이게 마지막이었다.

웃기게도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처음에는 보육원 명단만 확보하면 끝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내심 간단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와서는 웃음만 날 뿐이다.

“루카스?”

고개를 번쩍 든 레오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길었던 계획도, 정말 끝이다.

그 생각과 함께 졸음이 쏟아졌다.

* * *

“일어났냐.”

나는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레오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엘리아스도 그 앞에 앉아 있었는데, 둘 다 생소한 제복을 입고 있었다.

바이에른에 와 있는지 전에 보았던 것과 같은 방이 보였다.

“왜 이렇게 늑장이야~? 너무 늦게 일어나는 거 아냐!”

내가 뭐라 입을 열기 전에 엘리아스가 웃으며 장난을 쳤다. 레오가 지금 그게 할 말이냐는 얼굴로 엘리아스를 바라봤다.

나는 그저 웃기만 하다 팔에 연결된 혈액 팩을 보고 물었다.

“수혈?”

“그래. 뽑힌 피가 많아서 어쩔 수 없었어.”

수혈까지 해야 할 정도인 줄은 몰랐는데, 시간이 길었던 만큼 많이 뽑혔나 보다.

내가 생각에 잠겨 있자 화제를 돌리려 했는지, 엘리아스가 제 어깨를 퍽퍽 두드렸다.

“봐, 루카. 나 이제 목발 안 쓴다.”

“축하한다.”

벌써 시간이 되었나 보네.

이제 12월이니 뺄 때도 되었지.

그간의 엘리아스는 치료 때문에 꽤 조용히 산 축에 속하는데, 앞으로 어떤 짓을 벌이고 다닐지 기대가 된다.

“너 그거 믿고 뛰면 안 된다.”

“에이, 안 뛰어~”

엘리아스가 전혀 신뢰감이 생기지 않는 말투로 대답했다.

놈들이 평소처럼 구는 모습을 보니, 오랜만에 일상에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르케는 어디에 있어?”

“잠시 포탈 열린 김에 교황령으로 돌아갔어.”

축복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신력이 필요했기에, 교황청에서 마법사를 불러 달라고 했었다.

그런데… 막상 포탈이 열린 것을 직접 들으니 교황령에 있는 형이 괜히 걱정된다.

그 새끼가 어떠한 명분을 대고 여기로 넘어올까 걱정하는 것이 맞다.

“그래, 포탈은 언제 닫힌대?”

질문의 의도를 알아챘는지 엘리아스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 잘했다, 루카. 레오가 선물 줄 거 있대.”

“뭐?”

레오가 헛웃음을 쳤다.

엘리아스가 신문 한 페이지를 찢어 불쑥 내밀었다.

교황령도 안전지대 아냐… 교황령 내 12개 지역 플레로마 영향권

그 아래에는 교황령에도 제국의 48개 지역과 같이 인력 수급을 위해 선정된 곳이 있으며, 이번 달 말부터 본격적으로 제국의 사례를 벤치마킹하기로 되어 있었다는 기사가 적혀 있었다.

이건 또 뭐냐.

이런 건 내가 찾은 적이 없는데?

“이건….”

“네가 서류 찾아서 보내고 나서 우리는 에릭 아스만을 통해서 위쪽으로 넘어갔거든. 나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얘가 협박해서 뜯어냈지.”

이 친구들이 위쪽까지 갔으리라는 건 예상하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가만히 있을 놈들은 아니긴 했다.

그보다….

지금 누가 협박을 해?

다른 무엇보다 그 사실에 웃음이 나 레오를 쳐다보니 레오가 또 뭐냐는 시선으로 응수했다.

사실 바이에른 마법사 습격 사건으로 비상이 걸렸기에 외부로 돌렸던 인력을 국내로 들여올 가능성이 있었는데, 교황령에서도 플레로마의 흔적이 발견되었으니 그럴 가능성은 크게 낮아졌다.

두 국가 간 체결한 조약에 따라 이동한 것이었기에, 더더욱.

그러니… 이제 어디서든 플레로마가 활개를 치기만 한다면, 교황령의 안전을 지켜야 하는 형은 제국으로 돌아올 수 없다.

이렇게 된 거, 내 행동 범위를 좀 더 늘려도 문제없겠는데.

‘형 발목 제대로 잡았네.’

나는 기사를 한 글자씩 눈에 담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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