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85)
아델베르트의 방으로 이동한 나는 한 시간째 계속되는 그의 들뜬 말에 맞장구쳐 주어야 했다.
‘…그냥 멜빈 2라고 해도 되겠다.’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인데, 축하연도 이놈이 떼써서 연 게 아닐까.
멜빈이 니콜라우스를 강사로 초청해서라도 만나겠다는 발상을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멜빈은 친구기라도 하지 아델베르트는 내게 있어 굳건한 지지 세력을 가지고 엘리아스를 사사건건 방해했던 악역으로 보일 뿐이다.
그는 능력 면에서 뛰어났고, 황태자보다 인물이 뛰어나고 사교적인 편이라 지지자가 많았다.
‘그런 놈을 이런 꼬맹이 상태로 만날 줄은….’
“저라면 경처럼 행동할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혹시 경께서는 곁에 두고 즐겨 읽는 책이 있으신가요? 저도 경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싶습니다.”
“다양하게 읽다 보면 전하만의 가치관이 생길 겁니다.”
남의 몸으로 이역만리에서 죽게 생기면 책이고 뭐고 그냥 하게 된다.
이게 사실이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설명이 부족했는지 황자는 아직도 나를 반짝이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제가 추천하는 책을 읽어야만 저처럼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저하께서 진정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가 있다면, 어떤 책을 읽더라도 그 가치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또 그 과정에서 다른 가치를 찾을 수도 있는 것이니, 아직 책 한 권에 매몰될 시기는 아닙니다.”
“그렇군요…!”
‘이런 말에 깨우치지 마라….’
나는 시선을 돌리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난 김에 상태창이나 확인할까.’
아델베르트 호엔촐레른
호감도 +10
칭호: —
체력: +5
정신력: +1
마력: +8
기술: +2
인상: +7
행운: +8
특성: 매력 (Lv.1)
호감도 장난하냐?
하지만 파이 때도 그렇고, 대체로 나이가 어린 이들이 호감을 퍼 주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황자가 내 눈치를 보더니, 진열장에서 비싸 보이는 와인을 꺼냈다.
“에른스트 경, 같이 드시겠습니까? 사실 황태자 저하께서 혼자 마시라고 주신 건데… 에른스트 경도 좋아하실 것 같아서요.”
“감사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아까 많이 마시고 왔습니다.”
사실 아까 딱 한 잔 입에 댔지만, 진로 상담을 하고 싶어 하는 15살과 술을 마시고 싶지는 않았기에 거절했다.
그러자 황자가 주뼛대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혹시, 에른스트 경.”
“말씀하세요.”
“저의 대련 선생이 되어 주실 수 있나요?”
“…….”
이 말 하려고 술 마시겠냐고 물었던 건가…. 그것도 황태자가 혼자 마시라고 준 술을?
‘어쨌든, 내가 누굴 가르치냐.’
이제 막 기술 점수가 4점대 중반에 접어들었는데.
물론, 선후배 멘토링 정도의 대련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아델베르트의 기술 점수는 2점.
2점 차이면 못 가르칠 상대는 아니다.
하지만 이 자가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닐 것이다.
“황자 전하의 소원이시라면 들어드리고 싶지만, 제게 시간이 많이 주어지지는 않아서 말입니다.”
“그렇군요.”
아델베르트가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분명히 십 년 후 감옥에 갈 때는 이렇게까지 애가 아니었는데, 내가 알던 이미지와 달라 자꾸만 부조화가 생긴다.
“시간이 된다면 엘리아스 공작과 함께 자리를 마련해 보지요. 이번에 부상도 나았으니, 곧 훈련할 수 있을 겁니다.”
그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그렇죠. 깨끗이 나았더군요. 하지만 공작은….”
“실력은 보장된 자입니다. 저는 전투마법보다는 특수마법에 능해서, 황자 전하를 가르치기에는 그분이 훨씬 적합할 겁니다.”
그러자 아델베르트가 입을 꾹 다물며 착잡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봤다.
“엘리아스 공작 저하를 싫어하시나요?”
“…….”
그래도 잘 포장해서 말하는 법을 아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러지 못하는 걸 보면 진짜 싫어하는 게 분명하다.
물론 그렇게까지 싫어하니 엘리아스가 승세를 쥘 때도 끝까지 대립했지.
자신의 패배가 예정된 것을 알고도 끝까지 황태자에게 충성했던 독종이다.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이유를 듣고 싶군요.”
“예의라는 것이 없습니다. 항상 대놓고 무례를 저지르고, 마력만 믿고 오만방자하게 굽니다.”
여태 엘리아스가 다리 때문에 훈련하지 못해서 그렇지, 사실 엘리아스는 실력 면에서 딱히 겸손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력만 믿는 쪽은 엘리아스가 아니라 이쪽인 것 같은데.’
+8의 마력을 가지고 기술 점수가 이제 +2라니.
노력 없이 무작정 힘으로 밀어붙이는 공격과 방어만 해 왔다는 말이다.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공작께서는… 지나치게 가볍습니다. 황가의 이름을 달고서 방종을 저지르고 다니지 않습니까.”
“방종이라…. 엘리아스 공작께서는 저와 모든 활동을 함께했습니다. 그런 행동도 모두 방종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건….”
그가 고개를 저었다.
“실언했습니다. 경을 깎아내리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끝까지 엘리아스에 대한 사과는 아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습니다, 전하. 이제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저는 슬슬 돌아가야겠습니다.”
그도 더는 대화할 기분이 아닌지, 나를 문 앞까지 배웅했다.
“그래요. 오늘 대화 즐거웠습니다, 에른스트 경. 다음에 또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 *
“인기 좋네요, 경.”
숙소로 돌아오자, 제 방인 것처럼 엘리아스가 내 침대에 드러누워 있었다.
나는 엘리아스와 나를 둘러싼 차음 마법을 걸었다.
“전에 구치소에서도 그러더니 아주 대단하다.”
“뭐야, 평소에 못 들어 본 말인데? 술기운 돌아서 그런가? 하하!”
엘리아스가 선심 쓰듯 침대 위로 굴러가더니 아래쪽을 두드렸다.
“안 취했어. 그냥 비켜, 엘리.”
“2차 열어야지.”
“…….”
“그런데 오늘 사람들 많이 취했더라. 네가 만나고 온 걔도 좀 과음하던데.”
“그래 보였다.”
아무리 존경하는 인물이어도 그렇지, 초면인 사람을 한 시간 내내 새벽에 붙들고 있으려면 어느 정도 이성이 날아가 있어야 한다.
“황태자는 왜 안 왔는지 알아?”
“분명히 쥐꼬리만 한 마력 키우느라 피똥 싸고 있겠지. 걔가 어디 놀러 다닐 상황이겠어?”
“음.”
엘리아스에 비하면 쥐꼬리만 하기는 하지.
자꾸 이런 말을 해서 아델베르트가 그를 싫어했는지도 모르겠다. 아델베르트는 황태자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었으니까. 니콜라우스에게 보이는 열정으로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아, 나는 술 좀 가져온다. 기다려!”
그렇게, 엘리아스는 정말로 제 저택으로 워프하더니 와인을 가지고 왔다.
나는 거의 목만 축이는 수준으로 마셨지만, 엘리아스는 정말 미친 듯이 목구멍에 술을 퍼붓고 있었다.
마시는 도중에 황제와의 대화가 어땠는지 묻길래 처음부터 끝까지 말해 주었더니, 카타콤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그 속도가 더 빨라졌다.
“어떻게 된 게 이렇게 마시는데 안 취하냐.”
“집안 내력이야. 아, 이 자리에 레오도 있었어야 했는데.”
레오는 먼저 바이에른으로 돌아갔다.
마법약 실험 대회가 열리기 전에, 지역에 문제가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곧 출발해야 하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새벽 네 시네. 우리도 슬슬 가자.”
“아, 너 아침 여덟 시에 출발하지?”
“어.”
이제부터 일주일간, 바이에른에 가서 대회에 참가해야 한다.
“그래, 그럼 나 잠시 아래층 좀 갔다 올게. 클록 룸에 두고 온 게 있어서.”
“그래라.”
나는 가져온 마법약 서적을 뒤적이며 침대에 편하게 앉았다.
20분쯤 지났는데도 엘리아스는 방에 돌아오지 않았다.
‘왜 안 오지.’
나는 조용히 방 밖으로 나갔다.
왜인지 모를 불안함에, 귀에 마력을 집중했다.
계단 아래서 시끄러운 말소리가 들려왔다.
연회 막바지라 그런지, 오히려 중간 시간대보다 더 많은 사람이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딱히 엘리아스의 것으로 들리는 소리를 분간할 수는 없었다.
‘그냥 가서 찾아보는 게 낫겠네.’
걸음을 옮긴 순간, 낯선 소음이 들려왔다.
콰앙― 쿵―!
“아아아아악!”
“…!”
엘리아스의 목소리다.
두 개의 층을 뛰어 내려가자, 사람이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제 막 방에서 나와 보는 사람도 있었고, 연회장에서 뛰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괜찮으세요?!”
“빨리 부축해 드려!”
아델베르트도 넘어졌는지, 누군가 그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그 옆에서 엘리아스가 다리를 붙잡고 몸을 웅크린 채 비명을 참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 붕대로 감아 두었던 자리였다.
“…….”
목덜미가 싸해지는 느낌이 났다.
분명히 다시 다리를 다치면 영영 쓰지 못하게 될 거라 했다.
“의사 불러와!”
“저하,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엘리아스가 이를 악물고 손을 떠는 게 보였다.
‘…돌려야 해.’
띠링―!
재시도 Lv.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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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대로 시간을 돌리라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
생각해 보자.
시간을 돌려 일을 바꾸면, 이 현장 자체가 사라진다.
상황부터 파악해야 한다.
“어떻게 된 거야!”
“저 사람이 밀었습니다. 저 사람이요!”
“저, 전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 황가 분들을…!”
“뭐가 아니야, 나도 봤는데!”
사람들의 소음이 귀에서 뭉개졌다.
‘시기가 지나치게 공교롭지 않나.’
하필, 엘리아스가 붕대를 푼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지금 사고가 일어났다.
또,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는데 무릎 아래부터 발목을 다치는 것이 흔한가?
‘…머리나 허리를 다치는 게 일반적이지. 거기에 손목이랑 엉덩이뼈까지는 일반적인 축에 속해.’
고의다.
그냥 밀치면 티가 많이 나는 데다 무릎 아래부터 발목까지를 다치는 경우는 적으니, 확실히 다리를 계단의 모서리에 사람의 체중으로 짓뭉개야 했을 것이다.
그래야 다시는 쓰지 못할 테니까.
안 그래도, 짓누를 용도로 쓰이기 위해 같이 굴러떨어진 사람이 있지.
나는 창백한 얼굴로 숨을 몰아쉬는 황자를 보며 생각을 이어 나갔다.
‘그럼 누가 이렇게 했는가, 이게 중요한데.’
돌려서 사고가 일어나지 않게 막는다면, 엘리아스는 구할 수 있지만 그 민 사람을 처벌할 수가 없다.
당연한 말이다.
아무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설명은 못 해도 이 사람이 황족 둘을 계단에서 밀쳤다’고 주장해봤자 나만 미친 사람이 될 뿐이다.
대신, 이번 일에서 실패한다면 그자는 다음 기회를 노릴 것이다.
그 기회를 막기 위해서는 범인을 찾을 각오로 시간을 돌려야 한다.
나는 지금 범인으로 몰리고 있는 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재시도 창을 열었다.
―“이 시간 전으로 돌려.”
* * *
노란 조명과 고풍스러운 벽지가 눈에 들어왔다.
방금까지 계단에 서 있던 나는 어느새 다시 방에서 마법약 서적을 읽고 있었다.
“…!”
나는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계단으로 뛰어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취한 귀족과 정치인들이 느릿느릿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언제 또 열릴지 모르지 않습니까.”
“허허, 연회 주인공은 따로 있는데.”
“그래도요. 이번에 각하를 만나서 내년 안보 예산을 논의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법사 배치를 늘려야 할 것 같았는데….”
나는 급하게 인파 속에서 엘리아스를 찾았다.
계단에서 올라오는 엘리아스가 그들 사이에 섞여 있는 아델베르트를 발견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야, 너 표정이 왜 그래. 너무 마신 거 아냐?”
“…….”
“참견 안 하려고 해도 그렇지, 아직 생일 지나지도 않았는데 좀 적당히 마셔라.”
“황자 전하.”
아델베르트를 발견한 귀족이 예를 갖춰 인사했다.
그 뒤에 서 있던 귀족도 같은 방식으로 인사했다. 아델베르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은 둔탁한 움직임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아델베르트의 위쪽에 있던 귀족이 무언가에 이끌리듯 뒤로 휘청거렸다.
엘리아스가 그 순간 당황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어?”
“어어?! 잡아!”
“안돼!”
콱―
나는 취한 귀족을 밀치고 같이 쓰러지던 아델베르트의 셔츠깃을 붙잡았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완드를 저어 떨어지는 엘리아스를 마력으로 받쳤다.
“…!”
아델베르트의 얼굴에 다시 없을 경악이 스며들었다.
나는 그의 멱살을 잡고 조용히 말했다.
“그러면 안 되겠지요, 황자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