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96)
풍채 좋은 한 사람이 심드렁한 얼굴로 걸어오다 눈썹을 들어 올렸다.
“오.”
“어때요, 제 말이 맞죠?”
요나스가 열의 넘치는 말투로 그에게 외쳤다.
그가 심각한 얼굴로 내 얼굴을 뜯어보더니, 요나스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번엔 정말이군요.”
“그렇다니까요. 처음에는 다른 극단에서 오신 분인 줄 알았지 뭡니까.”
“그렇게 착각할 만하네요. 약간….”
그가 몸을 돌려 가며 나를 관찰했다.
“머리만 붉지, 아드리안 아스카니엔 느낌도 나고.”
“…….”
혹시 몰라 인지 교란 마법을 내게도 살짝 씌웠는데….
정확하네.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표정을 감췄다.
반면 요나스는 그와 의견이 다른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예? 그런가요?”
“안 나요? 묘하게 느낌 나는데.”
“저는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 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조금 인상이 흐리긴 하네요. 어쨌든 그 이름을 들먹이면서 홍보하면 리스크가 클 테니 됐습니다.”
“인기 하나는 제대로 끌지 않겠습니까? 우리 극단에서 스타 배우 하나 나는 거죠!”
“허허, 벌써 그걸 논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그가 요나스에게 귓속말했다.
그러고는 웃는 얼굴로 내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디트리히 그라나흐 씨. 배우로 서고 싶다고 했죠?”
“…….”
전부 이렇게 해서 잡일꾼으로 먼저 시작하는데 왜 난?
앞으로 일어날 상황이 벌써부터 어처구니가 없어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는 알아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해 봅시다.”
* * *
“와~”
“극단까지는 어찌어찌 갔네.”
내가 복잡미묘한 얼굴로 방에 워프하자, 먼저 숙소에 와 아티팩트로 대화를 듣고 있던 친구들이 나를 돌아봤다.
“배우 왔어?”
“…….”
“야, 그렇게 말할 생각이었으면 나한테 먼저 검사받지 그랬냐~ 우리 루카는 이게 먹힐 줄 몰랐던 거지?”
“이래도 되냐고 할 때는 언제고?”
내가 소파에 털썩 앉자, 나르케가 웃으며 말했다.
“플레로마로 먼저 알아서 우리는 체감을 못 했는데, 첫인상이 이렇게 중요하구나.”
“그러게 말이다. 이렇게 바로 길이 생길 줄은 몰랐네.”
레오가 장난기 없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나도 놀랍긴 하다.
견습도 많다면서 뭘 또 배우로 세우겠다고?
연기력도 검증하지 않고서 대체 뭘 한다는 말인가.
오직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나를 데리고 가겠다 판단한 셈이라 내 안에서 극단에 대한 신뢰도가 급격히 하락했다.
“전에 보니까 40분 연습한 것치고 잘하던데? 네 파우스트 볼 때 뭔가 딱! 오는 게 있었는데. 뭔 말인지 알지?”
“아니. 연기가 문제는 아니야. 그냥 예상한 결과가 아니라서.”
전에도 생각했듯 이 분야는 내게 낯설지 않다.
아쉽게도 나는 무대가 아니라 영상에 익숙하기는 하지만, 내 목적이 진짜로 배우에 도전하려는 것은 아니니 문제는 아니다.
그저 허드렛일을 계획하고 있다가 이런 결과를 마주하니 조금 당황스러웠을 뿐이다.
그때 레오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알아보니까 그 사람 자기 극에 애정이 엄청나다더라. 가볍게 만난 사람들은 좋게 평가하던데, 오래 알아 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한숨부터 쉬어. 괜찮겠어?”
마리안 바움은 극단의 관리자인 동시에, 연출가 중 하나라고 했다.
그 말은 즉 내가 연기를 후지게 하면 마리안 바움의 눈에 들지도 못한다는 말이지.
아니, 저런 평가를 받는 걸 보니 들지 않는 걸로 끝나면 다행일 테다.
나는 간단하게 답했다.
“잘해 봐야지. 정보 고맙다.”
“며칠만 있다가 나올 거니까, 마리안 바움하고 관계만 잘 쌓아 보자~”
나르케는 그저 재미있다는 얼굴로 웃으며 나를 위로했다.
나는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어쨌든, 잘된 일이다.
어찌 보면 허드렛일하면서 그에게 접근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기회다.
그의 눈에 들기만 하면 더 오랜 시간, 더 제대로 그와 대화할 수 있을 테니까.
* * *
부담스럽다.
다음 날 저녁, 나는 내게 꽂히는 수많은 시선을 외면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다지 고운 시선은 아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뻔했다.
극단에서 잡일을 맡아 하며 얼굴을 익힐 시간이라도 있었다면 모를까, 연출가 마음에 들었다고 연기 수업에 바로 투입되었으니 더더욱 좋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계획이 어쨌든 이미 맡은 자리, 대충 할 생각은 없다.
특히 마리안 바움의 눈에 들려면 더더욱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한참 따가운 시선을 외면하고 있을 때, 문이 열렸다.
부드러운 인상을 가진 한 중년이 우리를 둘러보며 연습실에 들어왔다.
“좋은 저녁입니다, 여러분.”
곳곳에서 당황스러운 반응이 흘러나왔다. 누군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 선생님이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새로 수업을 받는 분이 계신다 해서 와 봤습니다.”
그가 곧바로 내게 다가왔다.
“이번에 새로 들어왔다는 그분인가요? 성함이?”
“디트리히 그라나흐입니다.”
“반갑습니다, 그라나흐 씨. 저는 마리안 바움이라고 합니다.”
만났다.
나는 그와 간단히 악수했다.
그가 악수하는 내내 나를 구경하며 말했다.
“크리스 씨가 오늘 내내 당신 이야기를 하던데…. 확실히 그럴 만하군요. 기대하겠습니다.”
내가 어제 만났던 연출가를 말하는 듯했다.
아직 수업도 안 받은 마당에 기대하겠다는 말을 들으니 살짝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과연 제대로 된 절차를 무시하고 이곳에 올라온 값을 하는지 보겠다는 말이겠지.
‘애초에 수업이 수업이 아니기는 하지.’
가르치는 것은 거의 없고, 대부분은 본인이 알아서 공부해야 한다.
언제나 재능 있는 인력이 밀려드는 시장이니 그리 놀랍지 않았다. 이 극단에 그 정도의 투자를 기대하지도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기 선생이 들어왔다. 그가 마리안 바움을 보고는 반갑게 인사했다.
“선생님, 먼저 와 계셨군요. 이쪽은… 오늘 처음 들어오시는 분이죠. 그라나흐 씨?”
“예.”
“저는 브리짓 휴버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저야말로요.”
“자, 그럼 수업 시작합시다. 오늘은 새로 오신 분도 있으니, 가볍게 대사만 쳐 보도록 하죠.”
선생이 부드럽게 웃으며 우리 줄에 앉은 사람들에게 종이를 나누어 주었다.
타자기로 찍은 한 쪽짜리 대본이었다.
‘…이것도 파우스트네.’
국민 희곡이니, 처음 들어온 사람에게 한번 읽혀 볼 만하지.
익숙한 대본을 받아 긴장이 풀렸는지, 뒤에서도 희미하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분석에 10분 드리지요. 10분 뒤에 한 명씩 시작합시다.”
학교에서 받았던 대본과 달리, 이 대본은 생략 없이 긴 대사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래도 어느 부분인지는 알겠네.’
나는 연습실에 긴장이 감도는 것을 느끼며 대본에서 시선을 뗐다.
나와 함께 대본을 받은 둘은 여전히 입을 달싹이며 연습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나와 다른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시선이 강하게 느껴지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마리안 바움과 눈이 마주쳤다.
살다 살다, 이곳의 연기 수업에 참여할 줄은 몰랐지만….
“10분 끝. 시작합시다.”
그래도 카타콤에 진입하는 값으로는 싼 편이지.
나는 마리안 바움에게서 시선을 떼고 대본을 덮었다.
* * *
‘흠.’
마리안 바움은 무대 옆에 앉아 턱을 쓸며 견습 배우들을 둘러봤다.
‘확실히 쓸 만하긴 하네.’
유독 눈에 띈다.
남작 가문에서 일한다고 들었는데 이상하게 하인은커녕 본인이 남작 자신이라 해도 믿을 수 있는 분위기가 난다.
‘뭐, 상관없지. 좋은 특성이니까.’
평민도 상당한 경제력을 갖출 수 있는 지금, 사람들은 경제력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고귀함을 선망한다.
그러니 모로 보나 팔릴 만한 인물이다.
‘문제는 연기력이지.’
아무리 시대가 변해 이전보다 외모가 더 중요해졌다고 해도 연기력이 받쳐 주지 않으면 누구도 극을 보러 오지 않는다.
어제 처음 만난 자를 바로 이 자리에 꽂아 넣은 걸 보니, 다들 어떻게 해서든 이 자를 무대에 올릴 생각인 듯한데….
실력이 안 된다면 그들이 어떤 수를 쓴다고 해도 나는 허용할 수 없다.
“10분 끝.”
선생이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뷔르펠 씨부터 시작하죠.”
그 말에 뷔르펠이 대본을 들고 무대로 나갔다.
선생이 시작 사인을 주자, 순식간에 그의 눈빛이 바뀌었다.
“어째서 저 친구에게는 희망이 사라지지 않는가. 줄곧 하찮은 욕심으로 금은보화를 캐려다 지렁이를 찾아내고도 기뻐하는 꼴이라니!”
단단한 목소리가 연습실을 울렸다.
마리안 바움이 기억을 되짚었다.
발성 자체는 언제나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다.
감정도 나쁘지 않다.
젊어진 파우스트로는 고려해 볼 만한 사람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마리안 바움이 그의 대사를 들으며 관자놀이를 짚었다.
1부의 ‘밤’.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를 만나기 전, 많은 학문에 통달했지만 세상의 본질만큼은 깨닫지 못해 괴로워하는 부분이다.
이때 파우스트는 인간의 몸으로는 진리를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해, 독이 든 술을 마시고 생을 끝내려 한다.
그의 연기에서 괴로움은 느껴지지만, 죽음을 결심하기까지의 결의는 느껴지지 않는다.
“감히 그대를 닮으려 해서는 안 되었단 말인가? 나는 그대를 끌어당길 힘은 있었으나… 그대를 붙잡아 둘 힘이 모자랐구나.”
‘쓸데없는 곳에서 힘을 빼는군.’
견습생의 연기를 보고 있자니 불만만 생겨난다.
눈을 감고 있자, 어느 순간부터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좋습니다.”
연기 선생은 썩 나쁘지 않게 평가한 모양이다.
제 기준이 높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직접 마주하니 생각이 복잡해지고 있다.
마리안 바움이 미소를 유지하며 다음 배우의 연기를 보았다.
견습은 견습인 이유가 있다.
어차피 궁금했던 것은 제대로 된 절차도 없이 바로 여기로 보내진 신입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머리를 비우고 시간을 보내자, 어느새 연기 선생이 손뼉을 쳤다.
“이제 새로 오신 분만 남았군요.”
그라나흐가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로 나왔다.
선생이 의아한 듯 물었다.
“대본은요?”
“보고 해야 하는 게 아니라면 대본 없이 하겠습니다.”
“음?”
마리안 바움이 턱을 괴었던 손을 떼고 입을 열었다.
“마흔 줄이 넘습니다, 그라나흐 씨.”
“압니다.”
“중간까지만 하고 들어가는 건 안 되는데요.”
“예, 알고 있습니다. 반드시 봐야만 하는 게 아니라면 대본 없이 하고 싶습니다. 방해가 되어서요.”
그라나흐가 차분히 미소지으며 말했다.
‘…지금 외웠다는 말인가?’
그건 아닐 테고.
이미 이 대본을 수도 없이 연습해 봤다는 뜻일 텐데….
“뭐, 좋습니다. 해 보세요.”
그렇다면 더 환영이지.
진짜 실력을 알 수 있을 테니.
마리안 바움이 웃으며 손짓했다.
그러자 그라나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무대 한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손을 가슴께로 들었다.
“어째서 저 친구에게는 희망이 사라지지 않는가.”
단단하다기보다는 맑은 목소리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마리안이 시선을 따라 무대 옆을 보았다.
제자가 간 곳을 보는 연기를 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그가 다시 무대 앞을 바라보았다.
“줄곧 하찮은 욕심으로 금은보화를 캐려다, 이제는 지렁이를 찾아내고도 기뻐하는 꼴이라니… 정령이 나를 휘감고 있는 이곳에 저런 순수한 목소리가 들려도 되는 것인가!”
‘흠.’
문단이 나뉘어 있는 부분인데.
굳이 쓰여 있는 대로 쉬지 않고 연결했다.
한 번에 읊는 문장이 너무 길어지면 관객들의 집중도가 떨어진다.
‘확실히 무대에 익숙한 사람은 아닌가.’
하지만 그 덕에 감정 자체는 나쁘지 않게 흘러나오고 있다.
절망과 같은 감정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연기할 때 생기기 쉬운 부조화가 그에게서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 한 번은 감사할 수밖에 없겠구나. 내 감사는 지상에서 가장 비참한 너를 향한 것이다. 모든 감각이 저 아래로 가라앉는 절망에서 나를 낚아채 주었으니!”
그라나흐가 목소리를 키웠다.
웃음기 없는 차가운 목소리와 달리, 그의 얼굴에는 희미하게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마리안이 그라나흐를 빤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파우스트가 슬슬 미쳐 가는 걸로 해석했나.’
크게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진리를 위해 죽음을 결심하는 시작에 해당하는 부분이라 봐도 좋으니까.
‘이상하게 이해도가 높지만….’
무대에 섰던 것 같지는 않단 말이지.
마리안이 턱을 쓸며 주위를 바라봤다.
별 기대를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던 연기 선생은 이미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아마, 처음치고는 꽤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감히 그대를 닮으려 해서는 안 되었단 말인가? 나는 그대를 끌어당길 힘은 있었으나 그대를 붙잡아 둘 힘이 모자랐구나.”
아까와 달리 그라나흐의 목소리에서 자조적인 웃음기가 옅게 배어났다.
다만 연기가 부담스러워질 것을 우려한 건지, 표정은 여전히 과장되지 않은 선에 있다.
‘그래… 뭐. 해석 자체는 괜찮네.’
그 덕에 파워도 급격히 변하지 않고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파우스트와 결이 같아 마음에 든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곳에서 마력이 느껴지는 것 같은데.’
귀족이라고는 한 명도 없는 이곳에서 말이다.
마리안은 이제 아무 표정 없이 그라나흐에게만 시선을 고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