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97화 (97/220)

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97)

“…고귀한 축복의 서약과 더불어, 새 축제의 여명을 위해 건배하겠다!”

길다.

지나치게.

나는 숨을 한번 깊게 쉬고 공중으로 들었던 손을 내렸다.

마리안은 중반부부터 표정을 굳히고 연기를 보고 있었다.

반면 연기 선생은 꽤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저으며 내게 다가왔다.

“그라나흐 씨. 분명 처음이라고….”

“그라나흐 씨.”

마리안이 가볍게 손을 저어 선생의 입을 막았다.

순간 연습실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그에게는 이제 처음의 부드러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발성이 걸리는군요.”

그가 나를 만년필 끝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무대에서는 그만한 성량으로 연기할 수 없습니다.”

그렇겠지.

내게 익숙한 분야는 영상매체에서의 연기다.

그렇다고 목소리가 작아도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몸을 울려 가며 대사를 뱉어야 하는 무대에서 요구하는 성량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루카 자체가 울림통이 크지 않다.

“또, 행동이 크지가 않군요. 표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맞는 말이다.

영상물에서는 자연스러움이 강조되지만 연극에서는 다르다.

어떤 촬영 기술도, 어떤 편집 기술도 허용되지 않는 이 장소에서, 관객을 몰입시키는 방법은 일반적인 자연스러움보다는 현실 세계에서 사람들이 드러내지 않는 감정의 본연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마리안이 양손을 맞잡고 눈을 번득였다.

“그라나흐 씨. 이 연기는 무대에서 할 것이 못 됩니다. 속된 말로 감상을 표현해 보자면… 일대일로 누군가를 등쳐 먹기는 좋은 연기군요.”

“…….”

정확하네.

나는 최대한 무대라는 점을 의식하고 연기했지만, 연극에만 몰입해 왔던 그에게 내 연기는 지나치게 일상적으로 보였을 테니까.

다만….

‘왜 평가가 그 모양이었는지 알겠군.’

할 말 못 할 말을 가리지 않으니 말이다.

물론, 일대일로 그를 등쳐 먹어야 하는 내게 있어 그 당사자의 인정은 최고의 찬사로 느껴지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진정으로 무대에 서길 원하는 자들이 들으면 좌절스럽겠지만.

‘뭐, 이러나 저러나….’

성공했다.

나는 미소를 죽이며 간단히 답했다.

“유념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정적이 이어졌다.

한참 뒤, 대본에 눈을 고정하고 있던 마리안이 고개를 들었다.

“자정에 시간 되나요?”

* * *

연습실의 분위기는 험악했다.

열 명 남짓한 견습생들은 시간이 끝났음에도 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한 견습생이 혼자 씩씩대다 자리에서 일어나 쓰레기통을 걷어찼다.

콰앙―!

“아오, X발….”

갑자기 소란을 일으킨 탓에 그에게 따가운 눈길이 쏟아졌다.

“뭐! 다 똑같은 생각 하는 중 아니야?”

“…….”

“마리안 바움이 남의 연기 지적하는 사람이야? 아니잖아! 백날천날 입 처닫고 딴청 피우던 새끼가 왜 연기 배워 본 적도 없는 초짜한테 지적질이야?!”

가장 나이가 많은 견습생이 입을 열었다.

“뷔르펠.”

“뭐요.”

“다 똑같은 생각이니까 조용히 해라. 어차피 그쪽도 지적받아서 기분 안 좋을 거야.”

“지적이 그냥 지적인 게 아니잖아요. 우리는 싹도 안 보이니까 말해 봤자 입 아프다, 이거고. 저 새낀 말 좀 하면 알아들을 거 같으니까 그러는 거 아니에요?!”

“누가 모르냐고. 그냥 받아들여.”

“아니, 어떻게 그래요. 형님 여기서 5년 계셨는데 지금 형님이 제일 화내야 할 때 아니에요?”

그 말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형님이라 불렸던 견습생이 뷔르펠을 노려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잘했어. 결이 달라서 그렇지 조금만 손보면 우리보다 더 나아질 거야.”

그가 씁쓸한 얼굴로 연습실을 나가며 조언했다.

“자퇴한지 얼마 안 돼서 모르나본데, 여기 학교 아니다. 이렇게 구는 게 먹히는 곳이 있고 아닌 곳이 있어. 화낼 시간에 연습이나 해.”

“…….”

뷔르펠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제 또래의 견습생들에게 말했다.

“야.”

“…….”

“이대로 있을 건 아니지?”

몇몇이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 그냥 받아들여. 내가 보기에도 괜찮게 했어.”

“나 같아도 그런 애 쓰겠다. 그냥 형님 말씀대로 연습이나 하자.”

“아니, X발… 쟤 올라가면 앞으로 몇 년 더 늦춰질 줄 알고?”

그 말에 친구들이 비웃음을 흘리며 연습실을 나섰다.

“그럼 어쩌게? 뭐, 패서 쫓아내기라도 할 거야?”

“어휴…. 열심히 해라. 난 그냥 연습이나 할란다.”

이제 연습실에는 다섯도 남지 않았다.

멍하니 그들의 뒷모습을 보던 뷔르펠이 남은 학생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야, 얘들아.”

* * *

“연기 배운 적 있죠.”

자정에 그의 연습실로 찾아가자마자, 어둠 속에서 질문이 들려왔다.

나는 헛웃음을 칠 수밖에 없었다.

‘여태까지 부족한 점만 나열하고서는 뭔?’

물론, 그런 지적마저 그의 관심 표현이라는 건 충분히 느꼈다.

앞서 연기했던 견습생들의 연기에 아무 말도 없이 눈만 감고 있을 때부터, 쓸 생각도 없는 패에는 아무런 에너지도 쓰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아니, ‘배운 적 있다’고 물을 수는 없지. 몇 년 됐죠?”

“처음입니다.”

“처음일 리가 없는데?”

“왜 그렇게 생각하셨습니까?”

그가 그저 어깨만 으쓱였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해 냈는지 입을 열었다.

“대본 없이 연기했죠. 설마 아주 공교롭게도 그 페이지를 혼자서 수십 번 연습했다고 말할 생각은 아니겠지요? 파우스트 전체를 오랫동안 연기해 봤다면 모를까.”

“오늘 처음 읽은 대사였습니다.”

“…….”

마리안 바움이 인위적인 미소를 지으며 손을 맞잡았다.

“그라나흐 씨, 나는 농담을 싫어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시간 아까운 일이죠.”

“농담한 적 없습니다. 외워서 읊었을 뿐입니다.”

“외….”

마리안 바움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까지 농담을 할 거냐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검증해 드리겠습니다. 대본 하나 주세요.”

“뭐, 그럴까요.”

그가 자신의 파일에서 종이 하나를 뽑아 건넸다.

“대본은 아닙니다. 열 문장이니, 1분 안에 외워 보시죠.”

무리 없이 할 수 있었다.

내가 정말 1분 안에 문장을 외운 걸 확인하자, 그의 얼굴이 점점 굳어 갔다.

“연기를 배운 적 없다고.”

“예.”

“정말?”

“…예.”

“…….”

그의 입꼬리가 슬슬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침에도 올 수 있습니까?”

그렇게, 그 뒤 이틀은 아예 가문에 휴가를 냈다고 말하고 종일 극단에만 있어야 했다.

마리안 바움은 기준에만 들면 가까워지기 쉬운 상대였다.

매번 새벽이 되어서야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자기 스타일대로 연기를 하나하나 뜯어고치려는 욕심 때문이었다.

‘뭐, 같이 오래 있으면 나야 좋지.’

그와 친밀해져야 카타콤에 진입한 후에도 일이 수월할 테니 말이다.

그때 마리안 바움이 창밖을 보고 손뼉을 쳤다.

“자, 오늘은 여기서 끝냅시다. 이러다 해도 뜨겠군요.”

“내일 뵙겠습니다.”

“예. 그리고… 그라나흐 씨.”

내가 뒤돌자, 마리안 바움은 한참 나를 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손 좀 줘 보시죠.”

“왜요?”

“줄 게 있어서요.”

‘…빠르네.’

진짜로 뭘 주려는 의도는 아니다.

그는 지금 나를 시험하려 하고 있다.

내 맥박에서 마력을 감지할 수 있는지 아닌지 알아보려 했겠지.

일부러 최대한 코어를 억제한 채로 다녔는데, 그새 내 마력을 느끼다니 놀라울 뿐이다.

어쨌든 내 예상이 맞다면 지금 내가 보여야 할 반응은….

“아뇨, 괜찮습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뭐, 그래요.”

마리안 바움은 별 뜻 없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가는 길 조심하시고요.”

* * *

가는 길 조심하라고 했지.

‘조심히 들어가세요’ 정도의 일상적인 인사라고 생각했는데….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고 위조된 신분증이 든 지갑을 꺼내 앞을 가로막고 선 자들에게 건넸다.

1만 펠밖에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열악하네.’

치안이 왜 이 모양이냐.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저 멀리를 살폈다.

내가 도주할 걸 우려했는지, 한패로 보이는 사람 둘이 골목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물론, 내가 붙잡힌 건 치안이 후져서만은 아닐 것이다.

“돈 많네? 귀족은 괜히 귀족이 아닌가 보네. 나도 귀족 가문에 취직했어야 했나….”

선택지가 지폐 아니면 수표뿐인 곳에서 지갑에 10만 원 들었다고 많다고 하다니 그저 놀랍다.

말없이 발걸음을 옮기자, 그 옆에 선 다른 사람이 내 멱살을 붙들고 벽에 밀쳤다.

쾅―!

“…….”

“어딜 가? 안 끝났어.”

“달라는 대로 줬으면 됐지, 뭘 또 하려는 건지 모르겠네.”

그 말에 나를 둘러싼 사람들이 서로를 바라봤다.

“허….”

“이 새끼 말 되게 편하게 한다.”

먼저 말을 놓길래 나도 놓은 것뿐인데 이렇게 반응하니 할 말이 없다.

꼴에 누군지 감춰 보겠다고 복면을 썼기에 표정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위기가 싸늘해졌다는 건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야, 그냥 빨리 끝내자.”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야에 무언가 날아들어, 나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뒤로 틀었다.

내게 주먹을 날렸던 사람이 재빨리 중심을 잡으며 당황스럽게 소리쳤다.

“어!”

“뭐가 어야, X발, 가오 다 떨어지네.”

내 지갑을 챙겼던 사람이 소리를 버럭 지르더니 다짜고짜 주먹을 내질렀다.

콰앙―!

“아악!”

“어, 이 새끼…!”

“…….”

나도 당황스러웠다.

또 주먹을 내지르려기에 걷어찼는데, 찬다고 이게 되는 것부터 어이가 없었다.

‘…확인 좀, 빨리해 보자.’

프랭크 뷔르펠

호감도 -7*

칭호: —

체력: +2

정신력: -5

마력: —

기술: +1

인상: -2

행운: 0

특성: —

모든 값이 지극히 평범한 수준에 있다.

나머지 둘도 빠르게 훑어보았는데 모두 비슷했다.

만약 체력 값이 3-5점이었다면 제국2교육원 학생들과 비슷한 수준이겠지만, 2점 정도면 일반인 중에서 조금 높은 축에 속할 뿐이다.

그리고 나는 모든 항목에서 놈보다 값이 높다.

‘…그런데, 하나씩 오면 몰라도 사람 넷은 좀 아니지.’

나는 몸의 무게를 실어 달려드는 놈을 피하며 미간을 좁혔다.

아주 작정을 했네.

익숙한 이름과 목소리에, 내가 어디서 일하는지 아는 걸 보면 이들은 극단 놈들이다.

아마 내가 다시 극단에 갈 수 없을 상태로 만들려는 것 같은데….

콰앙―!

이미 놈들은 한둘씩 붙어서는 애매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착실히 분업을 하고 있었다.

아예 한 놈이 뒤로 빠져 내 어깨를 붙잡았다는 말이다.

퍼억―

“…….”

나는 골이 울리는 걸 느끼며 초점을 잡으려 노력했다.

뒤에 선 자의 명치를 팔꿈치로 찍어 떨쳐 내는 사이, 앞에서 길을 지키던 놈까지 합세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지자, 또다시 누군가 얼굴을 가격했다.

빠악―

“아, 진짜 이제야 좀….”

“존X 당황했네.”

살이 이에 부딪혀 입 안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아직 양호한 상태다.

네 명을 순수한 물리력으로 떨치기는 불가능에 가까우니, 회생 불가하게 맞기 전에 마법을 써야겠지.

사실 손가락 한 번만 튕겨도 전부 못 움직이게 만들 수 있다.

그게 상식적인 대처법이지만….

‘아니.’

맞아 줘야 한다.

무조건.

나는 고개를 돌려 내가 왔던 길 위쪽을 바라봤다.

극단에서 쓰는 사무실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누군가 내 멱살을 잡아 들어 올렸다.

뒤로 팽팽하게 당겨진 팔이 또다시 내게 닥쳤다.

* * *

“…….”

“더 패야 하는 거 아냐? 눈깔 아직도 살아 있는데.”

“됐어. 일어나지도 못하잖아. 야.”

누군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왜 처맞았는지 알지?”

“…….”

“네가 처음부터 하나씩 밟고 올라왔으면 안 이러지. 좋게 대했을걸?”

“그니까, 처신만 잘했어도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어. 이제 알아서 좀 빠져라.”

“얼굴 X나게 패 놔서 나오고 싶어도 못 나오지.”

“아, 그렇지.”

놈들이 낄낄대며 무어라 중얼거리고는 사라졌다.

못 나가는 쪽은 저들일 것이다. 당장 날이 밝는 대로 구속당할 테니까.

극단으로 경찰이 나오더라도 무작정 발뺌할 생각으로 얼굴을 가렸나 본데, 내가 이미 이름을 상태창으로 다 읽어 둔 상태이기에 의미가 없다.

나는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피냄새가 진동한다. 여태까지 필사적으로 숨겼던 마력도 이렇게 되면 의미가 없어진다. 피에 마력이 섞여 있으니까.

‘어쨌든, 이제 그건 됐고….’

나는 숨을 푹 내쉬고 하늘을 바라봤다.

차가운 바람에 피가 점점 피부에 말라붙었다.

이쯤에서 좀 나와 줬으면 좋겠는데, 뭘 간만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눈을 감고 편하게 눕자,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려왔다.

촤악―

“윽!”

차가운 물이 얼굴에 쏟아졌다.

나는 몸을 벌떡 일으키며 내게 물을 뿌린 자를 쳐다봤다.

마리안 바움이 아무 표정 없이 양동이를 들고 있었다.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지.”

“…….”

나는 표정을 굳히고 그를 노려봤다.

딱히 화가 나거나 두려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 상황에 맞는 연기를 하자면 그래야만 했다.

“아뇨. 필요 없습니다.”

“아닐 텐데?”

물론 그렇겠지.

마력이 느껴지는 구인류는 발각되자마자 사살될 테니까.

물론 그건 바이에른 바깥의 일이지만, 제국 정부의 입장이 무관용 사형인 만큼 이들이 안심할 수 있는 부분은 없다.

“조심히 가라고 한 게 이런 뜻인지 몰랐습니다.”

“아, 걱정 마시죠. 내가 지시한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그저 극단에 있다 보면 별말을 다 듣게 되죠.”

“알았으면서 왜….”

“왜 안 도와줬냐고 묻고 싶겠죠?”

“예.”

“아주 철저하더군요. 보통 그렇게 맞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빠져나가려 할 텐데….”

그가 주위를 둘러보더니 다시 나를 내려다봤다.

“단 한 번도 마법을 쓰지 않더군요. 나라면 한 번쯤은 썼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뭐, 우리 모두 죽을 위기에 있으니 경계심이 강한 건 알고 있지만… 그럴 필요 없습니다.”

“…….”

맞은 보람이 있네.

나는 웃음이 나려는 것을 죽여야 했다.

마리안이 조용히 말했다.

“당신은 마법사지요.”

대답하지 않자, 마리안 바움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나와 눈높이를 맞춰 앉았다.

“나 역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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