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101)
시끄러운 경보음에 길에 다니던 사람들이 멈춰 섰다.
몇몇은 주위에 있던 사람들에게 안내창을 가리키며 무어라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마법을 걸어 분리한 건지, 그들의 시선은 우리에게 닿지 않았다.
엘리아스가 주위를 휙휙 둘러보자 리히트호펜이 손을 내저었다.
“걱정 마세요. 안 보이니까. 신인류 셋에게 서른 명이 졌다는 사실을 광고할 필요는 없잖아요.”
‘흠….’
아무리 봐도 태도가 이상한데.
성격일 수도 있겠지만, 일방적으로 밀렸는데도 지나치게 평온하다.
‘믿는 구석이 있겠지.’
하지만… 플랜 2가 있다고 해도 썩 납득되는 반응은 아니다.
뭘 숨기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어떻게 하실 거죠? 지상에서의 워프 마법은 통하지 않는 걸… 플레로마와 자주 접촉한 니콜라우스 경께서는 분명 아실 텐데요.”
그가 나와 레오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맞는 말이다.
이곳 좌표를 모르니 쓸 수 없지.
쓸 수 있었으면 술집에서 자경단이 들어왔을 때부터 썼을 것이다.
이 마당에 지상으로 내려가는 길을 막지 않았을 리도 없고….
무엇보다, 도주할 이유는 없다.
‘그럴 생각이었으면 숙소에 막스 리히트호펜을 불러서 편히 대화했겠지.’
물론 그랬다면 얻는 정보도 한정적이었을 거고, 뭘 해 보기도 전에 이곳에 출입하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내쫓기는 것보다는 못 나가게 되는 편이 훨씬 낫다.
‘물론 이긴다는 전제하에서지만.’
당연히 질 생각은 없다.
마리안 바움 때문인지 홀로 심각하게 당황했던 엘리아스가 이제는 평정을 찾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자, 생각해 보자. 네가 이미 경보 때렸는데 이 중에서 누가 니콜라우스인지 말하는 게 뭔 소용이냐?”
“말투가….”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쳤다.
평범한 10대라면 모를까, 몇 살이건 황족이 쓸 말투는 아니긴 하지.
물론 굳이 이 상황에서 말투를 지적하는 건 그가 뼛속까지 귀족 사회에 적응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말해.”
“공간 마법이 해제되면 당신들은 카타콤 방위군에 잡혀갈 겁니다. 자경단에서 손을 쓰지 못할 경우 당신들을 밖으로 풀기로 했거든요.”
“뭐, 좋아. 그런데 과연 잡힐까?”
“물론이죠.”
허풍은 아니다.
온갖 마법을 동원하겠지. 카타콤의 기술력이라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를 잡아낼 수 있다.
리히트호펜이 비꼬듯 말을 이었다.
“그러니 불필요한 꼴을 보기 전에 말씀해 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안 그래도 여러분 모두 지체 낮은 분들이 아니니, 평민 방위군이 여러분을 진압하게 두기는 마음이 좋지 않군요.”
“미안한데 진압이라도 받아야 말을 할까 말까 한 상황인데. 얘 여기 들어오려고 다구리 맞은 거 안 보이냐?”
“…….”
설마 지금 그래서 맞은 거냐는 표정이 리히트호펜과 레오 모두에게서 보였다.
리히트호펜은 금세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됐습니다. 그러면, 제안 하나 하죠.”
그가 우리를 천천히 둘러보며 말했다.
“나르케 파르네세, 그리고 루카스 아스카니엔이죠.”
“…….”
“특히 이쪽은… 전에 포커 재밌게 쳤습니다. 진 게 아직도 기억에 남는데, 다 같이 게임이나 할까요?”
‘그러고 보니….’
이름을 알면서 경고창에는 우리 이름을 적지 않았군.
뭘 위해서? 우리 이름을 숨겨 봤자 그에게 득 될 것은 없을 텐데.
이것도 생각해 봐야겠다.
그때 엘리아스가 눈을 구겼다.
“게임~? 장난할 기분인가?”
“여러분 모두 몸싸움이나 할 위치에 있지 않으니, 배려해 드리는 겁니다.”
“널 이겨서 얻는 이득은?”
“니콜라우스 에른스트가 누군지 밝힐 때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되겠죠.”
“이기든 지든 밝히게 된다, 이건가? 하하…. 니콜라우스를 잡아가서 뭘 할 건데?”
“그걸 알면 당신들이 니콜라우스를 밝히기 힘들어질 텐데, 굳이.”
“…….”
곱게 보내지는 않겠다 이거겠지.
정말 로버트 뮐러가 어디에 있는 놈인지 잘 알겠다. 어디 가서 니콜라우스 죽이는 쇼라도 펼칠 건지 모르겠군.
리히트호펜이 엘리아스에게 고갯짓하며 말했다.
“그리고 말은 바로 하죠. 당신도 같이 넘겨질 테니까요.”
“대단하네. 파장이 장난 아닐 텐데?”
“카타콤에는 이득이죠. 당신이 카타콤에 진입했다는 걸 황제 폐하께서 알면 노선을 바꿔 카타콤을 옹호하고 귀족인 당신의 침입을 비난할 테니까요. 한 일 년쯤은 평민 마법사들도 평화롭게 지낼 수 있겠군요.”
“…….”
엘리아스가 싸늘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엘리아스는 황제가 자신을 내리찍으려 든다는 사실보다, 남들이 그걸 안다는 점을 더 못 견뎌 한다.
그것 때문에 여태 귀족 사회에서 배척당하면서 살아왔으니까.
언젠가 엘리아스가 지나가는 말로 ‘반 일진한테 처맞고 있는데 전부 구경만 하고 있다’고 표현한 적이 있었다. 레오는 질색했고, 나 역시 누가 봐도 일진 같은 놈이 그런 말을 해서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무슨 감정일지 이해는 할 수 있었다.
“잘 아네. 그럼 황제에게 넘겨.”
“싸우자는 뜻은 아니었는데, 안타깝네요.”
“그만.”
나는 조용히 말을 끊었다.
이대로면 끝도 없다.
이제 놈들의 목적은 잘 알았다.
로버트 뮐러로 추정되는 누군가가 위쪽에 있다는 것도, 리히트호펜이 그리 쉬운 놈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고, 또….
놈이 무언가 제대로 숨기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굳이 지금 게임을 제안할 이유가 없다. 여기서 뭔가 얻고자 하는 게 있을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끌려가는 건 똑같다면, 놈과 시간을 보내야지.
승산 역시 이쪽에 있다.
“무슨 게임? 설명은 제대로 해 주셔야죠.”
“오, 생각이 있는 모양이네요. 다들 같은 의견인가요?”
자연스럽게 주제 돌리는 거 봐라.
“설명부터.”
“흠…. 많이들 좋아하시는 걸로 해 드리죠. 우선 같이 술부터 마십시다.”
엘리아스가 내 쪽을 돌아봤다.
술 이야기에 혹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레오 역시도 나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레오는 엘리아스의 얼굴빛을 살피고는, 리히트호펜에게 말했다.
“가죠.”
“좋네요.”
리히트호펜이 깔끔하게 대답하고는 가지고 있던 완드를 휙 돌려 늘이고 바닥을 찍었다.
그 순간, 조명 없는 어두운 방이 펼쳐졌다. 빛이라고는 창에서 들어오는 것과 벽난로에서 나는 게 전부였다.
리히트호펜이 뒤돌아 테이블로 향한 순간, 엘리아스가 손을 작게 튕겼다.
쾅―!
등 뒤로 닥친 마력을 막은 리히트호펜이 웃으며 엘리아스에게 말했다.
“뭐, 만질 수는 있겠지만 당연히 실물로 온 것은 아닙니다. 제가 신인류를 어떻게 믿겠어요?”
“아~ 아쉽네.”
엘리아스가 성큼 다가가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런데 아까부터 신인류 타령하는데 넌 아니냐? 어릴 때 리히트호펜에 입양된 구인류인가?”
“…….”
내내 이 질문에는 묵묵부답이다.
뭐가 됐든 저자가 3교육원을 다녔다면, 구인류는 아닐 것이다.
구인류와 달리 신인류는 이차 성징 없이 그냥 나온 그대로 자라기에 성장 과정에서는 차이가 확실히 보인다.
“내가 누군지는 딱히 알 필요 없고….”
리히트호펜이 완드로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사람 수에 맞는 샴페인 잔이 모습을 드러냈다.
“궁금하면 게임에서 이기시면 되겠네요.”
“샴페인? 별론데.”
“맛이 좀 세서.”
그가 알 수 없는 답을 하고 우리에게 어서 마시라는 듯 손짓했다.
엘리아스가 먼저 벌컥 마시고는 눈썹을 까딱였다.
아무런 변화도 못 느낀 듯했다.
‘물론 뭐가 들어 있기는 하겠지.’
그냥 마시라고 했을 리가.
그가 우리를 빤히 보고 있었기에, 나와 레오는 가볍게 한 모금씩 입에 댔다.
“맛은 어때요?”
“이딴 게 술?”
엘리아스의 짧은 평가에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나도 같은 생각이네요. 포커나 할까요? 판마다 진 사람들이 마시는 걸로.”
아무도 게임 할 얼굴이 아닌데 게임 이야기가 나오니 적응이 안 되네.
아무튼, 그건 사양이다.
레오 혼자 다 마실 게 분명하다.
아무도 말이 없자 그가 입을 열었다.
“4인 체스는?”
“귀찮다.”
“하하하,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럼… 간단하게 가죠. 진실게임이나 합시다.”
“…….”
“당연히 니콜라우스 에른스트가 누구인가, 이 질문은 빼죠. 의도가 보이는 간접 질문도 제외하는 걸로.”
내가 그를 빤히 보자, 그가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재미없으니까요.”
여러모로 갈피를 잡을 수가 없는 인물이지만, 이제 하나는 알겠다.
진짜로 이 마당에 재미를 추구하는 건 아니다.
놈은 지금 시간을 끌고 있다.
나는 변경 가능성 창을 불러냈다.
여명777
― 최종 결말 ‘Chapter X. 사망’까지 654일 8시간 1분 25초
― 변경 가능성: 25.3%
‘8시간 1분.’
내가 생각에 잠긴 동안, 엘리아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혀를 찼다.
“혹시 술 지금 처음 마시냐? 친구들이랑 여행 가 본 적은?”
“그걸 왜 묻는지 모르겠군요.”
“기원전부터 해서 이제 재미도 없고 참신함도 없다는 얘기다.”
“그렇긴 하죠.”
그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며 말했다.
“이번에도 그렇게 느끼실지는 모르겠지만요.”
쿠웅―
그때, 시야가 한순간에 밝아졌다.
“…!”
나는 내 눈에 들어온 것이 무엇인지 납득할 시간을 가져야 했다.
이제 우리는 실내에 있지 않았다. 12월 말도 아니었다.
피부 위에 햇빛이 따갑게 닿았다.
알아듣기 힘든 외국어가 익숙한 억양으로 귓가에 흘러갔다.
이상한 위화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리히트호펜의 뒤에 있는 건물을 바라봤다.
내가 나온 학교였다.
“…….”
제국2교육원이 아니다.
피가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 났다.
뒤를 돌았다. 저 멀리 버스 정류장이 구간마다 늘어선 대로가, 각종 예체능 학원과 카페 간판이 보였다.
“뭐야?!”
엘리아스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레오 역시 상황 파악이 안 된다는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기만 했다.
“흠….”
리히트호펜이 턱을 쓸며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러더니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아스카니엔 씨는 견문이 넓으시군요.”
“…루카?”
엘리아스가 나를 휙 돌아봤다.
“…….”
“어떻게 그 유명한 플레로마가 마법을 쓸 수 있는지 궁금해서 안 그래도 첫 타자로 열어 보고 싶었는데 마침 당신이 걸렸네요. 그런데 나오는 게 이런 알 수 없는 장소일 줄이야….”
엘리아스가 리히트호펜의 멱살을 잡으며 말했다.
“설명 똑바로 해.”
“이제 좀 참신한가요?”
리히트호펜이 엘리아스의 손을 떨쳐 내며 물었다.
“시작할까요? 여긴 어디길래 기억에 이렇게 깊게 남아 있죠?”
“…….”
확실히 정보 하나는 제대로 뽑아낼 수 있는 방법이다.
그가 자신 있게 제안했던 이유를 알았다.
당연히 이 중 누군가는 니콜라우스의 기억을 드러낼 테니까.
그러니 오히려 니콜라우스의 기억이 나오지 않은 지금 이 상황은 놈에게 계획 밖의 일이다.
‘그래도 이걸 설명해 줄 생각은 없으니….’
이렇게 된 이상, 긁을 것만 긁는다.
나는 다시 변경 가능성 창을 불러냈다.
여명777
― 최종 결말 ‘Chapter X. 사망’까지 654일 7시간 50분 01초
― 변경 가능성: 25.3%
아까 8시간 1분이었지.
체감상 5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현실에서는 10분이 줄었다.
카타콤 내에서는 크게 시간이 달랐던 경험이 없는데, 지금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말은….
‘일부러 시간을 늦췄군.’
아까부터 뭘 위해?
그가 기다리는 것이 있다는 말이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그쪽도 하는 겁니까?”
“당연히 그렇죠.”
나는 잔을 비우고 고갯짓했다.
“다음으로 넘어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