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105)
“건물 밖이요.”
리히트호펜이 잠시 고민하다, 손을 까딱였다.
레오가 그에게 완드를 겨눈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걸린 구속을 풀어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나는 마력으로 이루어진 구를 짓밟아 깨뜨렸다.
“음, 기대 안 했는데 고마워요.”
“뭘요. 다시 막아 드릴 텐데요.”
“하하….”
리히트호펜이 어깨를 풀고는 손으로 허공을 훑으며 주문을 외웠다.
[In omni re vincit imitationem.]
그 순간 팔을 내지른 범위에 군중의 모습이 비쳤다.
저 멀리, 익숙한 사람이 목덜미를 붙잡힌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확성 마법을 걸었는지 그들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가벼운 말 한마디로 끝내려는 걸 보니 생각이 얼마나 짧은지 바로 느껴지는군요.]
“누구죠?”
레오의 물음에, 리히트호펜이 보이지도 않는 눈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단장님이시네요.”
“로버트 뮐러?”
“그중 하나라고 보면 되겠죠.”
로버트 뮐러가 개인이 아니라는 점은 놀랍지 않다.
그게 아니라 저자가 우리의 처리 대상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가 엘리아스와 함께 있다는 점도.
‘잘됐어.’
엘리아스가 그와 함께 있다니, 행운이다.
[…어디선 파란 피라 하고 어디선 경우 없는 놈이라 하고…. 이러면 너무 속상해~?]
“…….”
역시 엘리아스답다.
대놓고 로버트 뮐러에게 붙잡혔으면서 긴장의 기색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나도 모르게 레오를 보며 눈치를 살폈다.
‘음.’
레오는 질색하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놀랍게도 내가 그의 눈에서는 느낀 것은 신뢰였다.
‘…생각해 보면 소설에서는 자주 있었지.’
[당신이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것 같으니 어쩔 수 없지요.]
[아니, 알아들었어. 왜 네 멋대로 판단하고 난리야. 니콜라우스 에른스트를 데려올 생각 아냐? 이렇게 대놓고 내걸면 니콜라우스가 네 앞까지 올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지.]
“좋은 판단이네요.”
리히트호펜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놈이 생각하는 자경단장은 그렇게 행동할 놈인가 보네.
당연히 가지 않는다.
뜻이 뻔히 보이는데 그걸 해 줄 리가.
‘무엇보다, 니콜라우스가 끼어들 부분이 아니지.’
카타콤의 지지를 얻는 부분은 엘리아스의 운명을 바꾼 부분이라 봐도 좋다.
이제부터 엘리아스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그의 자의적인 선택이어야만 한다.
그 순간, 엘리아스의 손에 걸려 있던 마력 구속구가 부서졌다.
[어, 어어어!]
[저 사람 지금…!]
[로버트 뮐러가 뭘 원하는지는 이제 뻔하지. 안 그래?]
나는 그 광경을 보며 헛웃음을 쳤다.
“…좀 더 끌어 줘야 할 텐데.”
“그러게.”
레오가 간단히 답했다.
나는 자리에 앉아 리히트호펜의 눈가를 덮었던 마력을 깨부쉈다.
“…음?”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나는 그의 심장을 강하게 눌렀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윽!”
“알아서 시야 안 넘어가게 조절하세요. 아니면 직접 저주술 풀든가.”
“…….”
리히트호펜이 빛 때문에 눈을 찡그리더니, 나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겠죠. 안 그러면 죽겠는데?”
“잘 아네요.”
예속 마법이다.
다른 마법을 개량해 만든 마법이라 지금 그에게 처음으로 사용해 보았는데, 반응으로 보아서는 성공적으로 코어에 자리 잡은 모양이다.
“자, 지금부터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 그 전에 우리가 뭘 해야 할지는 당신도 제대로 알아야겠군요.”
나는 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우리가 여기 왜 왔을 거라 생각하죠?”
“플레로마가 있으니까 왔을 거라고… 대부분은 그렇게 말하죠.”
그리고 너는 생각이 다르고?
나는 그 말을 삼키고 미소지으며 말했다.
“플레로마를 잡으러 온 게 맞습니다.”
“흐음….”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죽이려 한 로버트 뮐러를 잡으러 온 것도 맞고 말입니다. 그 둘을 제거하러 왔습니다.”
“그래요, 개인적으로 원한이 될 법도 하죠.”
나는 주머니에서 접은 편지를 꺼내며 말했다.
“‘카타콤의 동향을 확인해 달라’는 황제 폐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개인적인 원한으로 온 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군요.”
“…….”
리히트호펜이 나를 빤히 보며 물었다.
“그래서 이곳까지 들어왔다? 황제 폐하께 충성하기 위해?”
“그 반대죠. 황제 폐하께 카타콤을 학살해도 좋을 명분을 드리기 전에 그 빌미를 제거하러 왔습니다.”
그 말에, 리히트호펜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가 귓가를 세 번 두드리고 말했다.
“좋은 정보 고마워요. 언제 황제 이야기를 꺼내나 했네요.”
“…!”
그가 뭘 사용했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감각 전이 아티팩트다.
“걱정 마시죠. 단원들에게 전한 것뿐이니까요.”
나는 그를 가만히 보다 웃음을 터트렸다.
마법이 걸린 부위가 있는지 확인한다고 했는데, 이걸 또 숨겨 뒀을 줄이야.
분명 이번에도 공간 마법과 엮어 두었을 것이다.
다른 시기였다면 당장 시간을 돌렸겠지만, 지금은 더없이 잘된 일이다.
“이거, 내가 더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닌가 모르겠네.”
“애 좀 먹었습니다. 이곳에 10년은 있었지만 귀족이라는 점 때문에 제 편이 그리 많이 늘지는 않아서요.”
리히트호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다행히 자경단에는 친플레로마 단원만 있는 게 아닙니다. 단장님의 비트리올 주입 요구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도 처음에는 꽤 있었습니다. 그런 마당에 황제까지 얽힌다면 당연히 말이 달라지죠.”
“인원은?”
“이걸로 오백 명은 확보했을 겁니다.”
괜찮네.
기대 안 했는데 이런 것까지 준비했다니, 꽤 써먹을 만하다.
인력 부분은 됐으니….
나는 다시 광장의 영상을 바라보았다.
엘리아스가 저곳에서 카타콤의 민심을 얻는 동안, 나는 이곳에 연결된 플레로마부터 해결해야 한다.
“로버트 뮐러가 접촉하고 있는 플레로마는 지금 이 상황을 압니까?”
“우리 측에서 그쪽 지도부로 연락을 주지는 않았지만, 알 겁니다. 다른 로버트 뮐러가 이야기했을 테니까요.”
그 말은 지도부로 연락할 방법이 있다는 말이군.
나는 리히트호펜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안내하세요.”
* * *
“…로버트 뮐러?”
“발뺌할 생각은 없지? 더 말하기도 입 아픈데.”
엘리아스가 제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 발코니 양쪽에 일렬로 늘어서 있던 자경단 마법사들이 완드를 겨누었다.
[Immodica ira creat insaniam.]
“…!”
엘리아스가 손을 급하게 심장께로 옮겼다.
주문이 통했는지, 피와 함께 흐르던 마력이 점차 느려졌다. 무언가에 눌리는 듯한 감각이었다.
‘하나로 안 될 것 같았나. 여러 명이 동시에 마법을 걸었네.’
내 실력이 엄청 고평가되어 있나 본데.
엘리아스가 히죽 웃으며 코어에 제 마력을 천천히 흘려보냈다. 죽지 않으려면 저들의 마력이 몸을 전부 짓누르기 전에 느리게라도 손을 써야만 했다.
“…마법을 못 쓰게 만들려는 건 알겠는데, 나 아직 화도 안 냈고 미치지도 않았다고. 주문 좀 구리지 않나?”
“역시 아무리 한량 소리나 듣는 황족이라도 이 정도 해석은 되는군요.”
“학교에서 지겹게 배우잖냐.”
“김나지움도 못 들어간 내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말이네요.”
엘리아스가 웃는 얼굴 그대로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아아아아, 진짜…. 이런 점에서 또 건드리게 될 줄이야….”
“이런 점에서, 또? 존재 자체가 우리를 건드리고 있는데 모르는군요?”
“그래, 나 같아도 빡치긴 하겠어. 어디 빡치기만 해? 너희가 날 이렇게 곱게 살려 두고 있는 건 솔직히 놀라운 일이야.”
그 말에 단장이 나긋하게 말을 꺼냈다.
“당신은 무언가 착각하고 있습니다.”
“뭔데.”
“당신이 지겹게 여기는 라틴어 공부는 저 아래 빈민가 아이들이 간절히 바라는 일이지요. 당신이 이곳에 들어오기 위해 특별히 갖춰 입은 남루한 옷은 누군가의 일상복이고, 당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성서 주문은 누군가는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 특권의 증명입니다.”
광장의 말소리가 하나둘씩 줄어 갔다.
황족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 게 분명하다.
분명 이곳에는 부르주아 평민도 있을 텐데, ‘마력 탓에 박해를 받는다’는 점 외에는 공감대를 만들기는 어려울 테니 카타콤이라는 집단의 특성상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자를 위하도록 전략을 세운 게 분명하다.
물론, 분석은 거기까지면 됐다.
몰랐던 적이 없다. 모두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도, 엘리아스 그 자신은 늘 그가 말한 모든 것에 의심을 가지고 살아왔다.
단장이 몸을 낮춰 엘리아스의 귓가에 대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스스로를 귀족 사회의 검은 양으로 여겨도, 또 그게 사실이라 해도 말이지요. 당신은 5펠짜리 진 한 잔보다는 프리미에 크뤼 클라쎄 와인에 더 익숙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
엘리아스가 말없이 광장의 사람들을 내려다봤다.
맞는 말이다.
그보다 더 적절히 자신을 표현할 수 있을까.
하지만 여기서 자신 역시 너희와 생각이 다르지 않다고 말해 봤자 바뀌는 것은 없다. 화를 돋우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특권의 한가운데에 서서 그런 말을 해 봐야 의미도 없어.’
또, 이런 생각이 큰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에서 비롯된 고집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었다.
반발심에 불과하다 해도 신분제를 옹호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지만, 자신의 마음 상태도 알지 못한 채로, 그것도 평민에게 목숨줄이 붙잡힌 상황에서 평민들 듣기 좋은 말을 해 봤자 큰아버지와 똑같은 기회주의자가 될 뿐이다.
‘그걸 말해도 좋은 때는 큰아버지 목을 치기 직전이어야겠지.’
그때라면 뜻이 전해질지도 모른다.
물론 쿠데타를 개혁으로 포장하는 참주로 여겨질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적절할 것이다.
“대체, ‘나 같아도’라는 말을 하다니 그저 우습다는 말밖에 할 수 없군요. 그 말에 얼마만큼의 깊이가 있을지…. 당신은 태생부터 우리를 이해할 수 없는 위치에 있습니다. 뭐에 꽂혔는지 몰라도, 당신은 과도한 정의감으로 불타서 우리를 돕겠다고 발 벗고 나섰겠지요?”
“정확하네.”
엘리아스가 희미하게 미소지으며 중얼거렸다.
큰아버지의 손길이 이제 닿을 곳이다.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이곳은 황제가 심어 놓았을 게 분명한 스파이에게 발각될 것이고, 아무리 뛰어난 공간 마법 기술이 있다 해도 엄청난 피해를 보게 될 것이다.
맨날 바보 같다고 생각은 해도, 그들은 진짜 바보가 아니니까.
루카스가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도 이들이 죽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단장의 싸늘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하지만 우리에게 당신처럼 고귀한 분의 도움은 필요 없다는 걸 똑똑히 알아 줬으면 하는군요.”
비록 지금 이런 대우를 받고 있어도 말이다.
권력 전복의 두려움 탓에 그들이 지키기로 약속한 사람들을 지하로 몰아낸 결과가 이것이다. 여러 세대에 걸쳐 돌이킬 수 없게 쌓인 탄압의 결과가 여기에 있다.
‘…물론, 그건 그거고.’
이제 본론을 꺼낼 때가 되었다.
엘리아스가 웃음기 없이 또박또박 말했다.
“필요 없겠지. 플레로마와 손을 잡았으니까.”
순간 광장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엘리아스는 그 광경에 잠시 헛웃음을 쳤다.
“…플레로마?”
“플레로마라니?”
인파의 중간쯤에서 목청 큰 누군가가 소리쳤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설명해 주세요!”
점점 그와 같은 반응이 광장 전체로 퍼져 나갔다.
엘리아스가 고개를 저었다.
“야, 이거 합의 안 된 이야기야? 대단한데~”
“그만!”
단장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손을 들었다.
슬슬 다시 시끄러워지던 광장의 목소리가 서서히 줄어 갔다.
엘리아스가 그 광경을 보고 휘파람을 휙 불었다.
“지지도가 대단하네. 그래, 이 정도는 해야 마음대로 나라 팔아먹고 그러는 거지.”
“언제까지 꿈같은 이야기를 할 건지 들어나 보지요.”
엘리아스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당장 안에 가둬 놓기보다는 대화를 하는 것이 훨씬 나은 방법이라 여긴 모양이다.
의혹이 제기되었는데 즉시 최초 발화자를 숨기고 저 혼자 나선다면 해결은커녕 의심만 증폭될 테니까.
물론 동시에 ‘플레로마와 손을 잡았다’는 말에 방어할 거리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너는 이도 저도 아닌 내 정체성과 입지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평민층의 삶을 더 불행한 것으로 치는 모양인데. 오늘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삶에 비하면 나는 따뜻한 방에 누워서 배부른 소리나 한다고 생각하겠지. 내가 잘 이해했지?”
“방금 잠에서 깬 사람치고는 판단이 빠르네요. 하지만 이건 아까의 주장과 무슨 관련이 있지요?”
“하하하….”
엘리아스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관련이 없기는.
지지를 얻으려면 우선 내가 가진 약점에 대해서는 인정부터 하고 가야 하는 법이다.
엘리아스가 천천히 단장의 손을 떼어 내고 무릎을 일으켰다.
“그대의 말이 맞아. 모두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오만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