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106)
“…….”
단장의 눈가가 좁혀졌다.
엘리아스가 그런 그를 흘끗 보았다.
‘그렇게 반응할 만하지.’
말투가 바뀌었으니까.
그가 나를 공격할 지점으로 내 출신을 꼽은 이상, 그걸 계속 둘 수는 없다.
‘나는 내가 다르다는 걸 알고, 그걸 숨길 생각이 없다.’
끝까지 ‘나는 당신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우기는 것보다는 나은 방법이다.
그럴 경우 공격은 계속해서 유효한 타격을 주지만, 정작 공격을 받는 당사자가 자신의 속성을 인정한다면 그 공격은 가치가 급락하게 되니까.
어차피 인정 안 한다고 내가 귀족인 거 모르는 놈도 없다.
그 순간, 단장은 엘리아스를 노려봤다.
‘…여태까지 귀족의 것이라면 전부 의도적으로 배제하더니,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나와?’
설마 부르주아를 공략하려는 생각인가.
바깥이었으면 나쁘지 않겠지만 카타콤에는 부르주아가 많지 않다.
재력이 있는 자들은 지역 소귀족에게 도움을 주고 먼 친척으로 이름을 올리는 등, 단속을 대놓고 피하기 때문이다.
그때 엘리아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 이것 하나는 분명히 하고 가야겠어. 황제에게 배척받는 삶을 살아온 것만으로 그대들의 인생을 이해하고 있다 말할 생각은 없다.”
“…….”
“하지만 나의 지향은 그대들의 지향과 같아.”
그 순간 광장에서 악에 받친 외침이 들려왔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당장 죽이지 뭘 계속 듣고 있어!”
엘리아스가 예상했다는 듯이 미소지었다.
단장이 손에 마력을 실어 그를 다시 바닥에 앉히며 목소리를 키웠다.
“이거 놀랍군요. 플레로마 잡는 영웅으로 유명해지니, 이제는 플레로마에 반감을 가지는 것만으로 ‘지향이 같다’고 표현하는 겁니까?”
“…….”
“플레로마는 당신들에게 있어 악이지요. 하지만 그 근거는 뭡니까?”
“아무 잘못 없는 이들을 멋대로 죽여 이득을 취하는데 악이 아닌가?”
“그겁니다. 아무 잘못 없는 우리를 죽이고 멋대로 마력을 뽑아 국고에 저장하는 당신들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근본적인 악이지요. 당신에게는 플레로마가 유일한 적이자 악의 현신으로 보일 수 있어도, 우리에게는 아닙니다.”
‘음.’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반격할 생각이었군.
플레로마보다 지상의 정치인들이 더 악질이다, 우리는 그들이 주입한 선악의 논리에 휘둘릴 필요 없다.
‘좋은데?’
모든 것을 둘로 나누지 않고서는 미쳐 버릴 것처럼 구는 게 대중의 본성이니….
이 논리라면 플레로마는 악의 기준에서 천천히 벗어나고, 그 자리를 지상의 귀족이 대체할 것이다.
‘듣기로는 뮐러 역시 반플레로마 성향을 띤 인간이었는데.’
나를 꺾기 위해 자신의 생각은 한 수 접어 둔 게 보인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지.
엘리아스는 이제 나름의 상쾌함까지 느끼며 단장의 말을 들었다.
“당신들은 어디 처박혀 있는지도 모를 10만 명의 플레로마에게 기습당할까 두려워하지만, 그 플레로마를 잡아 줄 시스템이 있고, 대신 애도하고 분노해 주는 1억 명의 신민들이 있습니다. 반면 우리에게는 제국의 1억 인구 모두가 비밀경찰이나 다름없지요.”
“…….”
“그러니, 우리에게 플레로마보다 당신들이 더한 악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한 말이지요. 이제 지향이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니.”
망설임 없는 짤막한 답변이 확성 마법을 타고 광장 전체로 퍼져 나갔다.
종잡을 수 없는 대화에 광장의 반응이 뚝뚝 끊겼다.
누군가 버럭 소리쳤다.
“장난하는 거야! 말장난하지 말고 빨리 죽이기나 해!”
엘리아스가 그 외침을 무시하고 표정 없는 얼굴로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내가 언제 플레로마 때문에 그대들과 지향이 같다는 말을 했지? 나는 플레로마를 처단하는 것이 내 궁극적인 목표라 말한 적이 없어.”
“그것 말고 우리가 당신과 공유하는 정서가 있을 것 같습니까? 이 판국에 억지를 부릴….”
“착각을 하고 있군. 내 적은 플레로마가 아니라 황제 폐하와 연방위원회다.”
엘리아스가 단장의 말을 끊었다. 이제 그의 목소리에는 선득한 웃음이 희미하게 녹아 있었다.
“…….”
찬물을 끼얹은 듯 광장이 조용해졌다.
크게 뜨인 수많은 눈이 모두 엘리아스의 얼굴로 향했다.
엘리아스가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 광장을 내려다보고는, 당황한 채 자신을 바라보는 단장에게 말했다.
“뭘 그리 놀라지? 이렇게 내 죽음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은데 자네가 나와 대화하며 시간을 죽이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 아니었던가?”
엘리아스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네는 나를 황실에 넘길 생각이지. 나를 깎아내릴 기회만 노리는 큰아버지는 카타콤에 대한 강경책을 폐지하고 입장을 바꿀 테니, 그대들은 나를 팔아 합법적으로 안전해질 수 있어. 안 그래?”
“…….”
“빠져나갈 생각은 말지. 네 부하가 내게 했던 말을 그대로 옮겼으니.”
광장이 술렁였다.
윤리적이지 못하다거나, 엘리아스를 황실에 넘겨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그런 반응이 나온 것은 아니었다.
아직 그들은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했다.
단장이 소요를 잠재우기 위해 빠르게 손을 들며 목소리를 키웠다.
“잘 알고 있군요. 계획이 바뀌었습니다. 엘리아스 호엔촐레른은 프리드리히 황제의 가장 큰 정적이니, 이 자를 죽이는 것보다 황제에게 넘기는 것이 훨씬 처벌의 목적에 부합하며 카타콤의 안전을 위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단장이 그렇게 말하며 엘리아스를 바라봤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다른 주제를 꺼내니 피로해지기만 하는군요. 시간을 오래 버릴 수는 없겠지요. 이제 마리안 바움 선생이 당신에 대해 증언할 차례입니다.”
“…!”
엘리아스가 순간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바움을 데려오겠다는 것도 문제는 문였지만, 지금 아까와 다른 마력의 기류가 느껴진다.
장막을 펼치려 마력을 흘려보낸 순간, 주위에 서 있던 마법사들이 동시에 엘리아스에게 완드를 겨누었다.
[Nunc est bibendum.]
“컥…!”
순간 시야가 새까맣게 변했다가 돌아왔다.
엘리아스가 심장을 다급하게 눌렀다. 그의 손등 피부에 붉은 글씨들이 빠르게 적히며 번쩍였다.
숨을 고르던 엘리아스가 그 광경을 보며 피식거렸다.
‘주문 구린 건… 일단 됐고, 다른 주제를 꺼내 피로하다고?’
아니, 그딴 이유로 피로할 리가.
내가 대중을 원하는 결말로 유도하려는 걸 눈치챘기에 하는 말이지.
물론, 지금 이건 적신호가 아니니 너그럽게 참아 줄 수 있다.
“5분 드릴 테니, 카타콤의 신민들에게 사죄하시지요.”
오히려 그는 상황이 내게 유리하게 흘러갈 것이라 예상했다.
‘내 목표는 플레로마가 아니라 황제 폐하와 연방위원회다’, 이 말에 반발이 잠시 그쳤지. 내 말에 집중할 기반이 깔리기 시작했다.
누구나 엘리아스 호엔촐레른이 다른 귀족 마법사들처럼 대중의 지지를 얻고 편안하게 살 것을 추구할 줄 알았지,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건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좋긴 좋은데 아쉬운 거 하나 있네.’
큰아버지의 목을 치겠다는 내 일생일대의 목표가 이렇게까지 광고가 안 됐단 말야?
어쨌거나, 저자는 내 발언을 막기 위해 핑계를 대 가며 저주술을 걸었다.
‘꼴에 다짜고짜 치우는 건 좀 아니라고 봤나 보지.’
5분 고맙다.
엘리아스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대들의 목표는 무엇이지? 다른 신민들과 동일하게, 지상에서 목숨의 위협을 받지 않고 살아가는 것?”
“그걸로 끝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반드시 잃어버린 시간을 보상받을 겁니다.”
“그래, 좋은 태도야. 나 역시 그래.”
단장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일이 끝나면 자네의 뜻대로 해. 분명 많은 이득이 될 거야. 제국신문은 하루아침에 집단 학살을 옹호하는 칼럼을 내리고 카타콤을 동정할 테고, 나와 니콜라우스는 왜인지 몰라도 세상에서 가장 후안무치한 인간이 되겠지.”
엘리아스가 비식비식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손에 땀이 배어났다.
“내가 가진 선택지에는 5펠짜리 진뿐 아니라 50만 펠짜리 와인까지 있는 게 사실이야. 그 점을 부정할 생각은 없어. 그렇게 누리는 모든 특권이 만민의 고혈로 이루어진 혜택이라는 걸 안다면, 그래서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고 말하면 마음이 편안해지나?”
“그럴 리가요. 그렇게 말하면서 모든 부를 향유하고 있을 텐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러면, 내가 당장 황실에서 쫓겨나 빈민가에 살게 되면, 그대의 과거와 처지가 같을 테니 조금 마음이 편해질까?”
“…….”
편해질 것이 있나.
처단해야 할 귀족은 널리고 널렸다. 그중 하나만이 고꾸라진다고 해서 특별한 감상이 드는 것은 아니다.
“그걸로 한시름 놓을 이유까지는 없겠지. 근본을 바꾸는 일이 너무나도 멀어서, 눈을 가린 채 당장 손에 잡히는 것을 구겨 버리고는 정의를 이루었다고 착각하는 꼴이니 말이야.”
“…….”
“똑같아. 자네는 그대들을 지하로 내몬 황제에게 엎드리면서 단 몇 달간의 평화를 얻고 싶은가? 스스로를 플레로마로 만들면서까지, 파멸이 예정된 방식에 몸을 맡기면서까지 찰나의 안식을 얻길 원하는가?”
군중의 술렁거림은 이제 엘리아스의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그걸 들을 상황은 아니었다.
“그걸 원한다면 그렇게 해. 하지만 나는 아니야.”
“당신은 카타콤의 일에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방식을 택하든 그건 당신이 이해할 만한 범위에….”
“내가 그대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지. 그 반대도 마찬가지야. 당신이 더 높은 물질을 향유하는 삶을 모조리 삿된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 말할 생각은 없지만….”
엘리아스가 식은땀이 흐르는 얼굴과 달리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적어도 타인을 이해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할 거라면, 자네 역시 타인에 대해 그렇게 확정적인 말은 단 한마디도 꺼낼 수 없다는 건 알아야 하지 않나 싶군.”
“…….”
단장이 말없이 엘리아스를 내려다봤다.
엘리아스의 입에서 말이 멋대로 속사포처럼 튀어나왔다.
“…타고난 것으로 죽을 위기에 처하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 일인지 알아. 나는 마력 탓에 기억도 나지 않는 순간부터 큰아버지의 경쟁자로 여겨졌으니까. 나를 지켜야 할 사람이 나를 짓밟아 죽이려 하는 세상에서, 나는 이 세상이 합리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 내가 상황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그렇게 단언할 수가 있나? 당신들도 나와 같은 상황이 아니던가?”
지금 이 광장의 분위기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솔직히 이 재수 없는 말투를 유지하는 것도 제대로 되고 있는지 아닌지 모르겠다.
분명 누군가 바깥에서 계속해서 소리치고 있는데, 이제 귀에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는다. 저주술이 코어를 잠식한 모양이다.
“내가 신분을 숨기고 온 건 안전뿐 아니라 당신들의 존재를 위협하는 일이지. 모르지 않았어. 그걸 알면서도 여기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딱 하나야.”
뮐러가 곧 플레로마겠지.
루카도 같은 추측을 내렸는지 몰라도, 사실 자경단 놈들의 피를 보고서 그 정도 추론이 안 되는 게 더 이상하다.
어쨌든 시간이 없으니, 내가 맞을 거라 생각하고 말하는 수밖에.
“황제가 이곳을 플레로마와 엮어 처리하려 하는데, 당신은 여전히 플레로마와 손을 잡을 생각인가? 니콜라우스와 내가 대체 뭘 하러 여기에 왔다고 생각했나? 내가 당신들의 편일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겠지. 이해하지만….”
이제 정말 끝이다.
엘리아스가 있는 힘껏 목소리를 끌어냈다.
“약속하지. 당신들을 해치러 온 게 아니야. 나는 황제를 막으러 왔다.”
그 순간, 좌우에 서 있던 자경단원들이 단장에게 완드를 겨누었다.
반쯤 풀렸던 엘리아스의 눈이 커졌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시야의 빛이 사라졌다.
* * *
“성공했네요.”
우리 앞에 공간 마법을 펼쳐 두었던 리히트호펜이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