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108)
에버하르트가 미소지은 얼굴 그대로 고개를 기울였다.
“고맙다? 그거참 현실감 없는 말이로군요. 아직 이곳이 어딘지 파악하지 못한 모양인데, 우리 강아지가 설명을 좀 해 줄래요?”
나와 레오의 시선이 동시에 리히트호펜에게 꽂혔다.
‘…방금…?’
거의 손주 부르듯 부르고 있다.
리히트호펜이 싸늘한 미소를 유지한 채 짧게 말했다.
“중간계죠.”
“그렇게 말하면 이분들은 못 알아듣지요.”
리히트호펜이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이중공간마법과 아까 당신들이 먹었던 약물이 결합된 형태입니다. 약에 플레로마의 세계를 연결하는 마법이 같이 걸려 있었겠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당신들은 약을 먹지 않았으니까요. 표적이 의장님과 같은 영역에 진입하지 못해서 둥 뜬 상태입니다.”
리히트호펜이 잔을 들어 검은 배경에 술을 비추어 보았다.
“이런 교착 상태에서는 못 나갑니다. 물론 계속 버틴다면 의장님께서도 어떻게 하실 수는 없으니….”
그가 말을 끌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잔을 허공에 내던졌다.
쨍그랑―!
“누가 이기나 해 보지요.”
“허허, 말대답이나 하는 개는 키울 맛이 안 나는데.”
“여전히 입버릇이 썩 좋지 않으시군요.”
“습관이 괜히 습관이 아니지요. 그보다… 니콜라우스 경은 애초부터 생각이 달랐던 모양인데. ‘이렇게 도와주다’니, 무슨 말이지요?”
리히트호펜이 눈썹을 까딱이며 나를 바라봤다. 반면 레오는 몇 번 겪었다고 내성이 생긴 건지, 아니면 진작 나와 같은 결론을 내린 건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 그대로입니다. 혹시나 당신이 마음이 약해져서 니콜라우스를 살리겠답시고 플레로마에게 절 넘기지 않으려 했다면, 제가 당신의 목에 완드를 들이대고 협박이라도 했어야 할 테니까요.”
“애초부터 플레로마를 만나려 했다는 말이군요. 그렇다면 고맙다고 표현할 법도 하네요.”
“그렇죠. 예측대로만 움직이는 상황은 없으니까요.”
“두렵지 않나요?”
그가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플레로마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이 두렵지 않냐는 말일 텐데, 그 세계로 넘긴 장본인에게 들으니 웃음이 다 난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이죠.”
“…….”
“당신은 카타콤의 안전을 위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그것 말고 다른 목표는 내 인생에 없지요.”
나는 미소지었다.
“그런데 당신의 계획이 되레 황제 폐하의 입지를 강화해 준다고, 아무도 말하지 않았나요?”
“상식적으로 조금만 생각해도 답이 나오는 문제이니,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건 우리의 힘이 불완전할 때의 이야기겠지요?”
굉장한 이상주의자다.
플레로마가 지상의 인구를 이길 만한 힘을 줄 놈들인가?
그렇지 않다는 걸, 그의 말대로 상식적으로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다.
“플레로마가 힘을 빌려준다던가요?”
“나 역시 경과 같은 의문을 가지기야 했지만, 그들도 경과 같은 이들의 공격으로부터 살아남으려면 우리의 손을 잡아야 할 겁니다.”
“그렇다면 제가 죽고 난 뒤에는 당신의 손을 놓겠군요.”
“…….”
그는 말없이 와인잔을 바라봤다.
반쯤 긁으려 던진 말에 대한 반응으로는 예상 밖인 눈빛이 스쳐 지나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 자 역시 개인적으로는 내가 죽는 걸 바라지는 않는다.
‘그러겠지.’
‘원하는 방식으로 정의를 추구할 수 있다는 건 행운’이라느니 말했던 걸 생각하면, 로버트 뮐러의 사상은 내가 읽은 것 그대로다.
하지만 대표자로서의 입장은 다르겠지.
어쨌든, 지금은 알 바 아니다.
“이중공간마법은 이미 그들에게 넘어갔다고 들었습니다. 언제, 누구에게 들어갔죠?”
“경이 알 필요는 없지요.”
“하하…. 대답하지 않으면 우리가 플레로마 측으로 넘어갈 이유가 없는데?”
“…….”
오히려 에버하르트는 제 코어가 터질 걸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지.
다행히,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에버하르트는 웃는 얼굴 그대로 나를 빤히 바라보다 말했다.
“일주일 전, 프로이센에서 다섯 명이 죽은 날 넘겼습니다. 그 대가로 5000명이 1년간 쓸 수 있는 비트리올을 받았지요.”
수지타산이 안 맞는 계약을 잘도 하네.
“누구에게?”
“스트라우치 의원이 몸담았던 곳이 오스나브뤼크였지요. 그곳의 교구장 플레로마와 맺은 계약입니다.”
오스나브뤼크라.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다.
나는 레오를 둘러싸고 차음 마법을 걸었다.
의장과 리히트호펜이 어떻게 생각하든 지금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레오.”
“말해.”
“나는 아마 거기까지 맨정신으로 가지는 않을 거야.”
“…….”
레오는 여전히 침착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플레로마가 니콜라우스를 멀쩡히 살려 데리고 가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한 듯했다.
매번 시작 전에는 나를 뜯어말려도 어쨌든 실전이 되면 이런 놈이지.
깔끔하니 좋다.
나는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지금은 혼자 갈 거니까, 뭐가 어떻게 되든 그냥 가만히 있어.”
“…지금은. 그래.”
놈들이 니콜라우스를 잡을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
그러니 놈들이 야심차게 준비한 일을 먼저 한번 겪어 줄 필요가 있다.
그 뒤 시간을 돌릴 것이다.
나는 차음 마법을 지우고 마력에 변화식을 외워 가면을 만들어 냈다.
스트라우치를 만난 이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만든 방법이었다.
“당신이 계획한 방식은 아니더라도, 당신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세상이 이루어진다면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아까도 말했듯이 남은 방법이 하나뿐인 사람도 있는 법입니다.”
“언제까지 하나뿐일지는 두고 봐야 알겠죠.”
그 말에 에버하르트가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더니 테이블을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요. 내가 무언가 말해 봤자 경의 결정에 방해만 되겠군요.”
잘 아네.
나는 답하지 않고 잔을 들어 와인을 마셨다.
그 순간, 내가 있던 공간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성당의 내부가 펼쳐졌다.
주위에 새하얀 천을 뒤집어쓴 인간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열, 아니, 열둘. 많기도 많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눈이 감겨, 세상이 다시 어둡게 변했다.
* * *
“…!”
나는 번쩍 눈을 떴다.
새하얀 햇살이 눈을 따갑게 찔러 왔다.
반사적으로 땅을 짚자, 부드러운 천이 잡혔다.
‘…방금 뭐?’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처음 보는 침대였고, 처음 보는 방이었다.
귀족이나 부르주아의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손님용 방이지만 묘하게 스트라우치의 저택에서 보았던 느낌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나와 레오가 리히트호펜의 머리를 책상다리로 날려 버린 것처럼 나도 그런 경험을 할 줄 알고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는데, 왜 이렇게 평화로운 풍경이 나타났는지 모르겠다.
나는 얇은 이불을 걷어치우고 주위를 둘러봤다.
‘노을이 지고 있었는데 빛은 거의 아침이네.’
한나절 넘게 의식이 없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 시간대가 어긋나 있는 걸 보면 플레로마 측으로 넘어온 게 분명하다.
플레로마가 날 평범하게 대우할 이유가 없음에도 내 상태는 이전과 같았다. 어딘가에 구속구가 붙어 있지도 않았다.
나는 손가락을 튕겨 보았다.
“…!”
순간 코어에 전기가 통하는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역시나.’
구속구가 아니라, 스트라우치가 썼던 방식으로 공간에 저주술이 걸려 있다.
이미 한 번 겪어 봐서 잘 알지.
이렇게 생각하기는 좀 그렇지만, 이런 방식이라면 죽기 직전까지 마법을 쓸 기회가 있다는 장점이 있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방의 물건을 하나씩 살폈다.
특이하게도, 마력이 느껴지는 물건도 없었다. 방에는 나를 감시할 만한 무언가를 붙이지 않았다는 얘기다.
‘나야 환영이지만… 이쪽은 무슨 생각이 있길래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네.’
그걸 지금부터 알아봐야지.
그러려고 온 것이니까.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가겠습니다.”
누가 봐도 시종으로 보이는 누군가가 방에 들어왔다.
하나 놀라운 점은, 하인을 시키지 않고 직접 식사를 가지고 들어왔다는 점이다.
‘뻔하네.’
니콜라우스와 접촉하는 이를 최소한으로 줄이겠다는 뜻이다.
내가 이곳에서 만나는 이는 이자뿐일 수도 있다.
“처음 뵙겠습니다. 각하의 시중을 도울 마티아스 헤르츠라고 합니다.”
“플레로마 쪽으로 넘어와서까지 시중을 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놀랍군.”
“주인님께서 각하를 극진히 모시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내 비웃음 섞인 말투에도 상대방은 표정 변화 없이 깍듯이 대답했다. 나는 그의 눈을 보며 상태창을 열었다.
마티아스 헤르츠
호감도 0
칭호: ―
체력: +5 [+8]
정신력: +2
마력: +4 [+4.5]
기술: +6
인상: +2
행운: 0
특성: ―
‘…흠.’
견적 나온다.
이렇게 허접한 실력으로 내 곁에 있는 걸 보면, 놈에게 확실한 방어책이 있다는 말이다.
문제가 생겼을 때 바로 달려와 줄 사람들이 있거나, 이중공간마법을 이용하고 있겠지.
“주인이 누구지?”
“죄송합니다만 답해 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순순히 답해 주는 게 더 어이없지.
나는 묽은 죽으로 된 식사를 내려다보았다.
“카타콤에서 독한 약을 드셔서 속이 상하셨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다음 식사부터 정찬으로 준비하겠습니다.”
“아침인가?”
“그렇습니다.”
“가져가. 먹을 생각 없다.”
상대는 순순히 쟁반을 다시 트레이에 올렸다.
먼저 하나의 연결고리는 확인된 셈이다.
놈은 내가 일어났다고 기별을 주지 않았는데도 내가 일어난 걸 알고, 식사까지 들고 방에 들어왔다.
‘아마 나와 연결되어 있겠지.’
마력이 느껴지지 않지만, 놈들이라면 어떤 방법을 썼을지 모른다.
그러면, 놈이 다른 놈과 연결되어 있는지 아닌지 알아볼 차례다.
“앉지. 자네와 할 말이 있으니까.”
상대는 가만히 나를 보더니, 트레이를 밖으로 내다 놓고 문을 잠그고 내 앞에 앉았다.
“어쩔 셈이지?”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목적을 말해. 피차 오래 끌 일은 아니니 빠르게 끝내자고.”
“저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각하.”
“모른다?”
나는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다면 내가 말해보지. 나를 죽여 버리는 게 목적이었다면 진작 그랬을 테니, 자네들은 더 고차원적인 성공을 원해. 단순히 숨통을 끊는 게 아니라 더는 플레로마를 얕보지 못하게 국민들을 완벽한 좌절에 빠뜨릴 방법을 찾고 있겠지. 니콜라우스를 영원히 저주받게 만들 방법이 뭐가 있을까.”
“…….”
“자네들은 나를 플레로마로 만들 거야. 비트리올을 쓰지 않는다면 티가 나지 않으니 내게 비트리올을 주입하겠지. 니콜라우스 개인에게 보복하는 동시에 국민을 완벽히 우롱하는 일이 되니, 이보다 더 좋은 결말은 없을 것 같은데.”
“…….”
“그래, 내 추측이 틀렸나?”
“저는 모릅니다.”
“그럼 자세히 아는 사람을 데려와야겠군. 내가 가든지.”
뜻이 명확한 말에도, 상대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태연한 걸 보니 이중공간마법을 사용하고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신력을 쓰든 마력을 쓰든 의미가 없지.’
나는 손을 들어 코어에서부터 마력을 이끌어 냈다. 손끝에 새하얀 신력이 맴돌았다.
나를 지켜보는 상대방의 얼굴에 미묘하게 한심함이 스몄다.
분명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하냐는 뜻이겠지.
‘그렇게 생각해라.’
그동안 나는 내게 아이디어를 준 레오에게 감사 인사나 하고 있을 테니.
나는 손에 뭉쳤던 신력을 날카롭게 다듬어, 내 심장께를 강하게 찔렀다.
“커헉…!”
순식간에 놈의 덤덤한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더니, 곧바로 고통과 경악이 차올랐다.
콰앙―
놈이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 심장을 붙잡고 테이블에 엎어졌다.
내게 이 정도 코어 손상은 일도 아닌데, 내성이 없나 보네.
“끄, 으윽….”
“뭘 안심하고 있어.”
감각을 연결해서 내 상태를 알려 했다면 이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어야지.
나는 미소지으며 다시 손을 심장께에 가까이했다.
“아직도 모른다고 발뺌할 생각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