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111)
확실히 기습이 좋기는 좋다.
이 수많은 성직자들을 한 번에 날릴 수 있다니.
그들이 제정신을 챙기고 있었다면 이런 성과를 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후….”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이 전부 쓰러지고 말소리 하나 없이 조용해지자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광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햇살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타고 내리쬐어, 부연 공기가 은은하게 빛났다.
이곳이 플레로마 교구의 한복판이라는 걸 잊을 만큼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전에 말했던가? 나는 곧 네 발끝에도 못 미칠 거라고.”
레오의 차분한 목소리가 성당에 울렸다.
“곧이라는 게 한 30년쯤을 의미하는 건가?”
특수 마법은 신력 때문에 그렇다 쳐도, 일반 전투 마법을 따지면 레오 발끝에도 못 미치는 건 난데.
발끝이 뭔가. 그냥 차원이 다르다.
내가 물량으로 때려 박고 있어 그럭저럭 쓸 만해 보이는 것뿐.
레오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래서, 어디까지 지웠어?”
“이중공간마법, 카타콤 지도부, 그리고 오늘 니콜라우스에 대한 기억까지.”
평신도는 몰라도 성직자인 이들은 지금까지 수많은 생명을 잡아다 죽인 자들이다.
그러니 이들을 만난 김에 조용히 보내거나, 살려는 두되 기억을 전부 지우는 건 어떨까 생각해 봤는데….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지.’
플레로마가 대놓고 선공을 날렸을 때 뒤엎는 게 낫지, 플레로마에게 ‘니콜라우스가 이제는 교구의 중심부까지 쳐들어왔으니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는 빌미를 주는 것은 최선의 선택이 아니다.
‘…바이에른까지도 생각해야 해.’
나의 이른 행동으로 무고한 이들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줄여야 한다.
그래서 니콜라우스가 들어왔다는 기억까지 지운 것이기도 하다.
어차피 플레로마의 계획을 뜯어낼 수 있는 지금, 그냥 자신들이 다 털린 줄도 모르고 잠이나 자게 두는 편이 낫다.
“이 사람들은 자는 거지? 언제까지 자?”
“누가 마력을 퍼붓기 전까지.”
단순히 흔들어서 깨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력을 흘려 깨우지 않는다면 일 년이고 십 년이고 잘 수 있다.
물론 그 전에 굶어 죽겠지만.
‘그보다 슬슬 아인시델을 맞을 준비를 해야겠는데.’
그러려면 이 성당을 좀 보내 버려야겠다.
기껏 교구의 성직자를 못 쓰게 만드는 데에 성공했는데, 아인시델이 이들을 깨우게 둘 수는 없지.
“레오. 선배님하고 나르케는?”
레오가 귓가를 툭 두드렸다.
보이지는 않지만 감각 전이 아티팩트를 꽂고 온 듯했다.
“자료는 전부 없앴고, 보좌주교 집무실에서 쓸 만한 것 찾고 있대.”
“그래, 좋네. 그러면, 이따 이곳 성당 전체를 중간계로 띄울 수 있냐고 물어봐 줘.”
레오가 내 말을 그대로 전하고는,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리히트호펜과 나르케가 계획을 알아내고 있다니 다행히 체력을 좀 아낄 수 있겠다.
사실 이들에게 정신 계열 마법을 써 계획을 알아낼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최대한 사려야 한다.
‘이제 눈에서도 피가 날 지경이다.’
숨에서 피 냄새가 나는 것쯤이야 그렇다 쳐도, 어떻게 된 게 눈까지 시큰거릴 수가 있나.
내가 눈을 주먹으로 때리고 있자 레오가 경악하더니 등을 툭 두드렸다. 순간 레오의 눈 색과 같은 마력이 몸 주위를 훅 감쌌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
대표적인 치유 마법이다.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약식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전신에 망치를 미친 듯이 내리치는 것만 같은 통증이 이제 한결 나아졌다.
“효과 좋네. 고맙다.”
“뭘. 너 지금 서 있는 게 용한 상황인데.”
레오가 그렇게 말하더니 급하게 코를 틀어막았다. 그러더니 주머니를 뒤져 손수건을 꺼내 피를 닦았다.
플러스마이너스 해서 결국 0이 아닌가?
“…괜찮냐?”
“괜찮아. 너도 참는데 이 정도야.”
레오가 중얼거렸다.
“어릴 때는 괜히 반항심이 들어서 마법의학 수업 시간에 몰래 도망치고 그랬는데, 그렇게 억지로 익힌 마법 덕을 보게 될 줄이야.”
“네가 도망도 치는구나.”
“하하…. 이럴 줄 알았으면 치유 마법을 좀 더 익혀 둘걸.”
지금도 실력은 뛰어난데.
그걸 떠나서, 이렇게 저주술이 걸려 있는 상황에서는 어떤 마법이든 더 쓰기 어렵다.
‘알 만한 놈을 깨워 저주술을 풀라고 명령하는 수밖에.’
발걸음을 옮기려던 차에, 레오가 나를 불러세웠다.
“루카스.”
“응.”
“지금 그 얼굴이면 말을 들을 거야. 여기 걸린 저주술을 풀라고 명령하자.”
“으음.”
“왜?”
“나랑 똑같이 생각해서.”
“그래? 그러면 빨리해. 끝나고 바로 치유 써 줄 테니까.”
좋다.
여기에 분명 보좌주교도 와 있을 텐데.
나는 눈으로 바닥을 훑었다.
‘저 뒤에 있네.’
나는 보라색 파시아를 허리에 매단 성직자에게 다가가, 목을 가다듬고 코어에 마력을 쏘았다.
그가 눈을 번쩍 떴다.
“…허업…!”
“되게 요란하게 일어나네.”
“주, 주교님? 방금 누가 제 코어에 공격을…!”
“그래, 알아. 당장 일어나게. 지금 바로 니콜라우스를 쫓아야 해.”
주교가 바닥에 널브러진 사람들을 바라보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니콜라우스 말입니까?! 그런데 지금…! 이게 어떻게 된….”
“니콜라우스의 짓이야. 지금 공간에 걸어 둔 마력 저주술로는 안 돼. 교체해야 하니 빨리 해제부터 하고 와.”
“예, 예!”
주교가 허둥지둥 일어났다.
아인시델이 다른 성직자들을 어떻게 칭했는지 몰라 일단 호칭 없이 내 할 말만 내뱉었는데 다행히 의심하지 않았다.
막 잠에서 깨어나기도 했고, 주위 상황이 말이 아니라 그런 듯했다.
주교가 금세 어딘가로 워프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해제했습니다! 이제 뭘 하면 됩니까, 주교님!”
“해제했다고?”
“예!”
그 우렁찬 대답에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새하얀 신력이 아무런 막힘 없이 쑥 손으로 빠져나갔다. 코어의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
“주, 주교님?”
나는 나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 보좌주교를 보며 씩 웃었다.
그러고는 레오가 던지는 완드를 잡아채 놈에게 겨눴다.
―야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허사로다.
순간 충격에 빠졌던 놈의 눈에서 힘이 풀렸다.
나는 바닥에 떨어지는 그의 몸을 피해 옆으로 물러났다.
쿵―!
전에도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은데, 수업 안 듣고 신력 공부한 보람이 있다.
나는 그의 기억까지 깨끗이 손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게 되네….”
레오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더니 내게 치유 마법을 사용했다.
그 순간, 레오가 귓가를 붙잡았다.
“나가자. 도착했대.”
나는 사람들의 팔다리를 피해 걸어 성당 밖으로 나갔다.
레오가 연 문 너머로 나르케와 리히트호펜이 보였다.
리히트호펜이 잔뜩 쓰러진 플레로마들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했네요.”
“그럼요. 저주술도 해제했으니 쓸 일 있으면 편히 쓰시죠.”
“하하, 어쩐지 방금 코어가 좀 더 가벼워졌더라~”
“…….”
리히트호펜이 한참 미소만 짓더니, 스태프를 바닥에 내리찍었다.
발치에서 그의 금빛 마력이 확 일어 성당 안까지 빠르게 밀려갔다.
[Si vis vitam, para mortem!]
순식간에 성당 내부의 사람들이 사라졌다.
리히트호펜이 그 안을 보며 내게 물었다.
“일부러 죽이지 않은 게 맞겠죠?”
“예.”
“그래요. 중간계로 넘겼으니, 돌려놓아야 할 때 말하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질문했다.
“쓸 만한 정보는 좀 찾았습니까?”
“부주교 집무실에서 몇 개 가져오기는 했죠. 카타콤과의 계약서도 파기했습니다.”
“…잠깐, 가져왔다고?”
“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걱정 마시죠. 파르네세 씨가 재밌는 제안을 하더군요.”
“그 집무실에 있던 잡다한 서류 몇 개는 다른 성직자 집무실로 옮겨 놨어. 이제 둘이 알아서 잘 싸우겠지~”
“…….”
괜찮은 방법이기는 하다.
통찰 능력도 있으니 서로 싸울 만한 사람의 방에 가져다 놨겠지.
내가 나르케의 윤리관에 잠시 의문을 느끼는 사이, 그가 내게 종이 뭉치를 내밀었다.
[각국 정치계 플레로마 연합 요청]
그 아래 플레로마가 만년필로 강조 표시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항시 반플레로마 성향을 표현하고 관련 운동에 적극 참여할 것: 의심받지 않도록 적정선 유지]
[*1월까지 새 혈액 반입 및 전교 활동 금지]
“아쉽게도 그 정치인들의 이름은 적지 않았더군요. 스트라우치 때에 배운 게 많나 봅니다.”
그 정도 학습 능력은 있어 줘야지.
‘각국’이라니, 참 많이도 퍼져 있는 모양이다.
‘돌아가면 바이에른 행정부부터 턴다.’
하나씩 심문해 보자고.
그럼, 다음 장.
[제국정보부 N.E.전담팀 격상]
— 논의안건 “제국정보부 바이에른왕국정보실 산하 N.E.전담팀을 제국정보부 산하 N.E.전담실로 격상한다.”
[의장단 12명 중 찬성 12명 / 기권 0명 / 반대 0명 : 가결]
“…….”
N.E.라면… 니콜라우스 에른스트를 말하는 건가.
단체로 마크해야 할 만큼 경계 받고 있다니 새롭다.
“이건 칭찬 아닌가.”
“태평하시네요~”
“이미 생긴 것 제가 뭘 어쩔 수는 없겠죠.”
나는 대강 답하고 뒷장으로 종이를 넘기며 빠르게 훑었다.
‘음.’
솔직히 앞에서 읽은 것들은 전부 어느 정도 예상하던 내용이라 감흥이 크지 않았는데, 괜찮다.
아니, 괜찮은 수준을 넘어섰다.
단순히 이중공간마법만 제거할 게 아니라 황제의 관심사를 돌릴 정보도 필요했지.
여기에 있는 정보라면 황제와의 일도 마무리 지을 수 있다.
어디까지 황제에게 넘기고, 어디까지 우리가 독점할지 판단 끝났다.
나는 서류 뭉치를 리히트호펜에게 넘겨주며 친구들을 바라봤다.
“자, 이제 전략회의나 합시다.”
“전략회의?”
“주교가 남았으니까요.”
* * *
콰앙―!
누군가 문을 벌컥 열고 성당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이곳에서도 이제 노을이 지고 있다. 역광이 비쳐 얼굴이 보이지 않지만, 저 실루엣은 익숙했다.
들어온 사람이 미친 듯이 숨을 헐떡이며 웃었다.
“하하… 하….”
이번 시간대에서는 그와 처음 만난다.
나는 충격에 빠진 아인시델의 눈을 바라보며 완드를 들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내 마법에도, 아인시델은 여전히 텅 빈 바닥을 휙휙 둘러보며 실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안 통할 줄 알았다.
저렇게 뛰어 들어오는 걸 보면 문제가 생긴 걸 알았다는 건데, 그러면서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고 올 리가 없지.
신체 장막을 최대한 강하게 씌웠거나, 아니면 이중공간마법을 걸었거나.
아인시델은 마치 내가 없는 것처럼 미친 듯이 두리번거리더니, 이제 고개를 번쩍 들어 나를 바라봤다.
“나잖아.”
아인시델이 문을 붙잡고 비식비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이런 식으로 다시 나를 화나게 할 줄이야. 좋게 대해 주려 했는데….”
‘다시 화나게 했다’라….
그 첫 번째는 베르너 스트라우치겠지.
나는 미소지으며 말했다.
“통성명부터 할까?”
“알아, 경은 니콜라우스지. 경도 나를 아는 모양인데?”
“잘 아네. 앉아.”
“앉으라고. 지금?”
아인시델이 미친 듯이 웃었다.
콰앙―!
나는 목으로 날아드는 그의 공격을 붙들었다.
똑같은 수법에 또 당할 생각은 없다.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나를 바라봤다.
“그래, 베른을 죽인 자가 이 정도 비범함도 없다면 안 되겠지.”
“…….”
전에 들었던 것과 똑같은 말이다.
어쨌든, 그는 여전히 미친 듯이 피식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무슨 말을 하나 들어 볼까?”
“들어 볼 상황이 아닐 텐데.”
나는 레오의 완드를 그에게 겨누며 말했다.
“마법 해제해.”
“싫다면?”
나는 아인시델의 물음에 미소를 띠며 답했다.
“네 부하를 전부 죽여야지. 오스나브뤼크의 성직자들이 한 번에 죽으면 어떻게 될지 한번 봐야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