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122)
“정말 축하해, 루카.”
시간을 돌리자, 아까 겪었던 그 순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내 마력을 관찰하던 눈이 이제 다시 기쁨을 담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떤 순간에서도 살의는 한눈에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무리 봐도 연기는 형이 했어야 했다.
“형님께서 이리 생각해 주셨다니 감동입니다.”
살의를 아픈 동생에 대한 가족애로 포장하겠다면, 나 역시도 그렇게 받아쳐 주는 게 맞겠지.
나는 마음에도 있지 않은 말을 꺼냈다.
“형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은 아직 제가 상상하기에는 와닿지 않는 행운이군요. 저는 그저 형님의 이름에 먹칠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나는 그동안 네가 내 이름에 먹칠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아드리안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가, 한참 뒤 걱정스러운 듯 눈썹을 기울였다.
“그간 네가 느낀 무게가 가볍지 않았던 모양이구나. 이제는 그러지 않아도 돼. 기질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해도, 네 태도가 달라진다면 사람들은 너를 쉽게 무시하지 못할 테니까.”
‘기질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어도’라….
마력까지는 그러려니 해도 플레로마 누명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이군.
그 부분에 계획이 있다는 뜻으로 알겠다.
내가 그저 바라보기만 하자 아드리안이 나긋하게 말하며 미소지었다.
“그게 어렵다 해도 내가 늘 도와줄 테니 걱정할 필요 없어, 루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더없이 든든하군요.”
지금보다 훨씬 치밀하게 매장시킬 계획을 세우려는 사람의 입에서 듣기는 우습다.
나는 그가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웃으며 대답했다.
* * *
나는 한참을 그와 대화하고, 밤이 되어서야 방에 돌아올 수 있었다.
“루카스!”
이불 안에 있던 파이가 불쑥 튀어나와 어깨로 뛰었다.
나는 또다시 힘이 풀리기 전에 침대에 드러누웠다.
내가 옷도 갈아입지 않고 곧바로 눈을 감는 게 이상했는지 파이가 내 눈꺼풀을 앞발로 짚었다.
“왜~? 왜 그래?”
“그냥.”
이제야 좀 쉴 수 있게 됐다.
형의 전략을 생각하다 보니 체력이 금세 닳았다.
나는 눈을 감으려다, 파이가 가져왔을 편지를 떠올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근에는 파이가 학교와 이곳 사이를 워프해 소식을 전달했는데, 그 덕에 조금은 숨통이 트였다.
책상을 손으로 한번 쓸자 투명화 마법이 걸려 있던 편지가 나타났다.
‘…오늘도 이빨 자국….’
봉투 윗부분에 무언가 눌린 흔적이 보였다. 파이가 물고 왔으니 당연하겠지.
나는 편하게 침대에 기대 앉아 봉투를 열었다.
[루카스에게]
[너라면 잘할 거야.]
‘시작부터 다짜고짜?’
오늘 형과 대면할 걸 예상했나 보네.
나르케가 나를 상대로 시도 때도 없이 능력을 써서 그런지, 이제는 내 얼굴을 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 감이 오는 듯했다.
‘이거 원격으로 내 생각까지 읽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나는 의심을 지우고 종이를 넘겨 보았다.
뒷장에는 레오와 엘리아스가 적은 편지가 있었다.
‘첫날보다 훨씬 내용이 차분해졌네.’
안할트에 막 왔을 때는 온통 무거운 이야기뿐이었는데, 이제 엘리아스가 쓴 편지에는 돌아오면 같이 술이나 퍼마시자는 말이 대부분이었다.
나르케가 내 소식을 전해서 긴장이 조금 풀어진 듯했다.
나는 친구들의 편지를 읽고, 이제 나르케가 조사 현황을 적어 보낸 종이를 펼쳤다.
‘니콜라우스를 키우려면 돌아가자마자 움직여야지.’
그래서 일부러 보내 달라고 했다.
하루빨리 돌아가서 제대로 기반을 다지고 싶은 마음뿐이다.
솔직히 조금은 승리욕도 붙었다.
형은 내 신력에도 겉으로는 평정을 유지했지.
‘그야 세상에 드러나기 전에 죽이면 되니까.’
자신이 이길 수 있는 상황에서는 평정심을 유지한다.
그 능력을 이미 세상에 드러내고 있었다는 걸 알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진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나르케의 편지를 쭉 읽어 나갔다.
[…
이틀째까지 수집한 물에는 약물 반응이 나왔는데, 네가 집에 간 날부터 차례로 수집한 물에는 반응이 전혀 나오지 않았어.]
신력 쓰는 사제 둘이 지역에 들이닥쳤으니 몸을 사려야 했겠지.
계속해서 수원지에 약이나 뿌리고 있으면 들킬 테니까.
그런데….
‘약물 반응? 지금까지 놈들이 물에 탄 약을 체크할 검사 도구는 딱히 없었는데?’
[그리고 아마 너라면 약물 반응은 어떻게 알았냐고 물을 것 같은데.]
“…….”
[리히트호펜 선배님한테 카타콤에서 너희가 먹었다는 그 약을 받았거든.
정확히는 비트리올이 아니라 체내에서 비트리올을 합성하는 약이더라.
그걸 분석해서 비교했어.]
그랬군.
나 없는 사이 이렇게 진행이 척척 되어 있으니 좋다.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종이를 넘겼다.
[…
마지막으로 제안할 게 있어.
플레로마 측에서는 우리를 피해 움직이고 있겠지.
물론 그 이유만으로 철수한 건 아닌 듯하지만, 우선 사제 신분이 눈에 띈다는 건 확실해. 변장 또 할래~?
P.S. 오염에 관해서 알아야 할 게 있으면 뭐든 남겨 줘. 의견이 필요해.]
나르케도 나와 똑같이 생각했다.
그나저나….
‘얘 민간인 행세하는 거 엄청 좋아하네….’
하이리겐지에 안 데려갔으면 억울해서 어쩔 뻔했냐.
언제나 나쁘지는 않은 선택이다. 상대에게 들어가는 정보를 차단해야 우위에 설 수 있으니까.
‘어쨌든 여기서까지 변장할 생각은 없고.’
의견을 달라고 했지.
다 좋은데, 여기서 하나 더 생각할 지점이 있다.
나는 노트 한 장을 찢고 만년필을 들었다.
[비교해 봤다고 했지. 다른 약물이 잡히지는 않았고?]
―“파이.”
“으응?”
―“이것 좀 전달해 줄 수 있어?”
“당연하지!”
파이가 길게 찢은 종이를 입에 물더니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1분도 지나지 않아 답변이 왔다.
나는 나르케가 보낸 미색 종이를 펼쳤다.
[응, 없었어.
그나저나 신경을 많이 썼나? 피곤해 보이네.]
나는 그냥 글만 썼는데, 확실히 잘 아는 사람일수록 능력을 쓰기 쉽다는 게 사실인가 보다.
‘그보다, 없었다….’
이 부분이 문제네.
리히트호펜은 비트리올을 기억 약과 함께 복용해야 한다고 했다.
마력을 동요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이거, 적을 게 너무 많은데.’
나르케는 지금 나에 대해 통찰을 계속 쓰고 있는 듯한데, 그가 알 만한 문장 하나로 정리하는 게 낫겠다.
나는 다시 펜을 들어 글을 갈겨 적었다.
[그럼 왜 같은 상황에서 일부에게만 문제가 일어났는지 알아봐야겠는데.]
내가 마침표를 찍은 순간, 옆에서 내가 쓰는 걸 반짝이는 눈으로 지켜보고 있던 파이가 불쑥 말했다.
“갖다줘?!”
―“어. 고맙다.”
오가는 게 재미있나 보다.
‘아무튼, 온천수에서 비트리올 캡슐 성분 외에는 나온 게 없다고 했지.’
비트리올을 기억 약과 함께 복용해야 오염이 이뤄진다고 했는데, 어떻게 비트리올 약 하나만 먹고 피해를 입은 사람이 생겼는가?
‘물론 나쁜 기억을 되살리는 약은 마력을 동요시키기 위해 쓰는 거지. 굳이 그 약을 먹지 않더라도 마력만 동요하면 비트리올이 코어에 침입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해.’
이때, 그 지역의 희생자들이 대부분 비마법사였다는 걸 생각해 봐야 한다.
코어가 없으니 비트리올 약품 하나만으로도 영향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여기서 결정적인 문제점이 하나 발견된다.
공공식수대는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이 이용하는데, 왜 고작 다섯만 부마되었을까.
‘그렇다면 비마법사도 비트리올 약 하나만 먹는 건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겠지.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조건이 하나 더 있다는 말이야.’
아마 높은 확률로 감정에 대한 것일 텐데.
검증해 봐야겠지만, 오염된 온천수를 마시고 감정이 심하게 자극되는 일이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때, 파이가 답장을 물고 내 위로 워프했다.
나는 종이를 받아 들어 펼쳤다.
[이런, 거기까지는 생각도 못 했네. 고마워.]
‘벌써 잘 파악했네.’
그때, 뒤에 기다란 종이 한 장이 더 만져졌다.
[참, 이 문제는 시간 좀 걸릴 테니, 내일 직접 만나서 얘기하자. 기다릴게.]
내일?
내일 안할트까지 온다는 말은 아니겠지.
다같이 죽자는 이야기를 이렇게 쉽게 내뱉지는 않았을 테다.
그렇게 써서 보냈지만, 답장은 그저 웃는 얼굴 그림만 받을 수 있었다.
[^_^]
“…….”
* * *
‘이거였냐.’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 나는 나르케의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성의 1층에서, 하인들이 아드리안에게 코트를 입히고 가방을 정리해 그의 곁에 섰다.
시종장이 미련 남는 얼굴로 말했다.
“아직 다 낫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가시면….”
“아닙니다. 폐하께서 부르시는데 제가 외면할 수는 없지요.”
“그건 그렇지만, 도련님. 보통 부상이 아니지 않습니까. 최소한 요양 마지막 날에 뵙는 것이 어떠십니까.”
“이미 확정된 약속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낫는 대로 폐하를 알현할 생각이었고요. 이틀 앞당긴 것뿐이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아드리안이 시종장에게 부드럽게 웃어 보이고는 그의 옆에 선 나를 바라봤다.
“루카.”
“예.”
“항상 응원할게.”
나는 대답 대신 가볍게 미소만 짓고 대화를 끝냈다.
그 뒤 시종장과 함께 입구까지 가서 형을 배웅하고, 성으로 돌아갔다.
“그럼, 저도 이제 갈 준비를 해야겠군요.”
“아, 도련님께서도 돌아가실 겁니까?”
“형님께서 저를 부른 것 아니었습니까. 형님이 계시지 않으니 돌아가도 문제없지요.”
“오늘은 공작 전하를 뵙고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절 만나 주신답니까?”
“…….”
시종장은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입가에 미소를 올렸다.
“귀찮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학교로 갈 준비부터 하죠.”
* * *
만나서 무슨 대화를 한다고 만나나.
애초에 저쪽에서 문도 안 열어 줄 것이다.
그래서 루카는 매번 인사 없이 집에 오갔다.
오히려 그때는 인사하러 갔다가 괜히 화를 입을 걸 걱정한 시종장이 인사 없이 갈 것을 권했는데, 이제는 내가 달라졌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굳이 인사를 시키려 한다.
하지만 결국 학교에 도착하는 시간만 늦춰질 뿐이다.
‘궁정 연회에서 들었던 인사말은 기적이었네.’
그때도 형식만 간신히 갖췄다고 생각했는데, 집안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그건 나름대로 예의를 차린 셈이라는 걸 알겠다.
그렇게, 나와 시종장은 다시 기차를 타고 학교에 도착했다.
“그럼, 들어가 보십시오.”
시종장이 내 손에 가방을 들렸다.
“예, 고맙습니다.”
“약 드실 날이 모레이니, 그날 다시 뵙겠습니다, 도련님.”
나는 가볍게 예를 표하고 뒤돌아 학교로 들어갔다.
아직 한창 수업 중이라, 학교에는 밖에 나와 있는 사람이 없었다.
‘수업 끝나려면 다섯 시간은 남았군.’
그런데… 묘하게 춥다.
여기는 1월이어도 한국 겨울보다 덜 추운데, 그럼에도 유독 춥게 느껴진다.
나는 빠르게 걸어 기숙사에 도착했다.
그리고, 어제 그랬듯 가방을 내려놓고 침대에 앉았다.
‘이거지.’
드디어 돌아왔다.
‘…돌아오지 못할 줄 알았던 게 불과 엊그제인데.’
강제 제적을 염두에 두고 있다가 학교에 오니 느낌이 남다르다.
그간 경직되었던 온몸의 근육이 기숙사에 온 것만으로도 훅 풀리는 느낌이 났다.
“우와~”
파이도 가방에서 뛰어나와, 이곳에 오기 전 자신이 쌓았던 돌무더기 앞에서 감탄했다.
매번 만들면 얼마 뒤 우리가 치우기에, 며칠째 유지되어 있는 것을 보니 신기한 모양이었다.
‘그동안 치운 게 미안해지네.’
하지만 책상 한가운데에 쌓으면… 그걸 어떻게 안 치울 수 있나.
앞으로도 치울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밤이 된 후였다.
이마에 무언가가 얹혀 있었다. 그 무게감에도 묘하게 신력처럼 상쾌한 느낌이 났다.
‘이거 뭐야.’
이마에 붙은 덩어리를 툭 치자, 파이가 새된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우왁!”
“…왜 이렇게 놀라. 미안하다. 그런데 왜 여기서 자?”
“뜨거워서 식히는 중이야!”
“음?”
무슨 말인가 싶어 만져 보니 살짝 열감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곳에서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계획에도 없이 형을 만난 게 부담이었던 듯했다.
솔직히 긴장의 연속이기는 했다.
죽어 줄 생각이 없다고 해도, 나를 죽일 이를 눈앞에 두고 그의 수십 가지 행동 방향을 생각해 보는 건 좀 피로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원래 내 몸이었으면 감기까지 걸리지는 않을 텐데.’
루카의 몸으로는 벌써 겨울에만 두 번이나 감기에 걸렸다.
이제 체력 점수가 순수 3점이기에 제국 신민 전체로 따졌을 때는 객관적으로 좋은 체력이다.
하지만 면역력은 또 입장이 다른 모양이다.
나는 내 신력을 파이에게 불어넣었다.
“고맙다. 덕분에 많이 떨어진 것 같아.”
감기 좀 걸렸다고 가만히 있을 생각은 아니다.
나는 서랍을 열어 찾은 약을 입에 한 번에 털었다.
마법약인 만큼 얼마 지나지 않아 효과가 몸에 퍼졌다.
“음.”
상쾌하다.
어제 그 두 가지 의문에 대해서 나르케와 이야기하기로 했으니, 이제 슬슬 가서 바로 시작해야겠다.
“나르케 지금 학교에 있지?”
“지금 바덴바덴에 있는데!”
“왜? 언제는 기다리겠다며.”
“으음~ 낮에 누가 불렀어. 지금 갈래?”
급하게 갔나 보네.
‘또 악마 들린 사람이 나왔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 이제야 책상 한쪽에 놓인 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의문의 부마 행렬… 제국 전역 ‘검은 연기’ 주의보]
‘…흠.’
이것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