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167)
이제 ‘왜’ 나였는지 이해가 가네.
나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고, 거의 뛰지 않던 심장이 점점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형이 퍼트린 소문은 이런 형태로 파급되었다.
내 추측대로, 니콜라우스는 타깃이 아니었다.
플레로마가 루카스 아스카니엔을 그들의 손에 넣으려 하고 있다.
‘…니콜라우스에 대항하기 위한 도구를 모으는 중이겠지.’
거기에 교구 간 실적 경쟁이 얽혀 있을 테고.
전국을 적합자 실험장으로 만들어서 인력이 풍족한 상황에 나를 끌어들이려는 이유는 그것 하나뿐이다.
[브란덴부르크 대교구에서 항의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여기는 베를린이고 이 학생도 베를린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관할구역에 있는 업장 하나 제대로 지원도 못 해서 이 모양으로 맞아 준 것들을 뭘 걱정해 주는가? 그리고….]
주교가 손짓했다.
그 옆에 있는 사람은 잘 보니 보라색 가두리 장식을 달고 있었다. 주교가 아니라 몬시뇰이었다.
그래 봤자 이제 10여년 된 교단에 몬시뇰이 웬 말인가.
로마 가톨릭과 달리 근본이 없는 만큼 이들 사이에서는 주교와 몬시뇰 사이에 엄격히 상하 관계가 잡혀 있는 듯했다. 저들의 말투로 추측해 보자면 그렇다.
[그쪽은 루카스 아스카니엔 주장만 철석같이 믿고 있어. 아드리안 아스카니엔 차관이 하도 싸고돌아서 여태 접근을 못 한 거지, 안 한 게 아니야. 그런데 그렇게 순진히 나오는 건 바보짓이지.]
“…….”
[피를 먹는다는 소문은 헛소문이더라도 자질 자체는 훌륭해. 10년 전에 입단했으면 지금쯤 대주교까지 오르지 않았을까 싶군.]
[지금은…?]
정적이 이어졌다.
한참 뒤 주교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자네는 이 마법사가 그렇게 되게 내버려 둘 건가?]
[…….]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 해도 시기와 운이 받쳐 주지 않으면 끝장일세. 프라이부르크의 종으로 키워야지. 주인이 아니라.]
프라이부르크.
나는 그 이름을 잊지 않기 위해 여러 번 되뇌었다.
바덴 대공국을 포함하고 있는 가톨릭 교구다. 플레로마도 똑같은 이름을 쓰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바덴은 맨 처음 오염 약물 실험장으로 쓰였던 나라다. 체링겐의 가문이 다스리는 곳이기도 하고.
몬시뇰이 한참 말없이 있다가, 입을 열었다.
[잘 알겠습니다. 여기서 축복을 주실 겁니까? 반항할 테니 세례라도 빠르게 주셔야 할 겁니다.]
[하하, 이런 장소에서 축복을? 그렇게 말하니 내가 꼭 구유 앞에 선 동방박사라도 된 것 같아서 새롭군.]
그 말에 몬시뇰이 입을 벌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속사포처럼 말했다.
[주교님, 프림로즈 패스처럼 구제할 길 없는 영혼이 떠도는 곳에 그런 비유를 하는 것은 크나큰 모독입니다.]
[자네는 너무 진지하군. 이런 것에 트집 잡을 시간이 있다면 내려가서 이 학생이 탈출하도록 도운 놈이 있는지나 찾아보게. 처리할 시간도 아끼고 아주 좋겠네.]
[…죄송합니다. 그런데 1층에는 한스 사제를 보냈습니다.]
“…….”
나는 놈들도 그 신을 믿는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나르케가 이 대화를 들으면 목덜미를 붙잡고 쓰러질지 그냥 헛웃음만 칠지 궁금하다. 이들은 이 세계의 교황청이 공인한 이단이니 그냥 주의 깊게 듣지도 않겠지.
그리고….
‘아까 기억 지우길 잘했다.’
1층에서 만났던 구인류들 말이다. 어차피 돌리면 사라질 시간인 데다 그 뒤로 길게 잡아 봐야 고작 두세 시간쯤 지났겠지만 정의가 불의로 통하는 이곳에서 잠깐이라도 책망받길 원치 않았다.
모두 이런 곳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겠지만, 단순한 소망과 탈출을 적극적으로 돕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혁을 실천에 옮기는 한둘을 지금의 익숙함마저 깨부술 수 있는 위험인자로 여긴다.
주교가 계속 말대꾸할 거냐는 얼굴로 쳐다보자 몬시뇰이 헛기침했다.
[크흠…. 그렇다면 빠르게 프라이부르크로 옮기겠습니다.]
[아니. 이곳에서 세례를 주도록 하지.]
[예? 방금은 이런 곳에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셨습니까?]
[우리 교단 특성상 어디서, 누구에게 세례와 축복을 받았는지는 굉장히 중요하지. 안 그런가?]
몬시뇰이 망설이다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앞으로 수백 번은 어디서 세례를 받았냐는 질문을 들을 텐데, 결점 하나는 남겨야 하지 않겠나?]
[그건 어디까지나 어느 교구의 이름 아래서 세례를 받았냐는 뜻이지, 어느 건물에서 받았냐는 질문은… 아니지 않습니까.]
[자네는 뭘 모르는군. 남들은 아무것도 몰라도 본인 스스로 떳떳지 못한 부분을 만들어야 한다 이 말이네.]
그가 손을 까딱였다.
[왕이 되지 않게 하려면 싹을 밟아야지. 가져와.]
[…….]
주교가 칼을 꺼내 들었다.
그걸 본 순간, 그의 얼굴이 코앞에 불쑥 나타났다.
[마침 일어났군.]
콰앙―!
주교가 내 목덜미를 잡고 바닥에 처박았다.
어떻게 눈치챘는지 생각할 새도 없이 팔에 바늘이 꽂히는 게 느껴졌다.
이미 내게 약효가 들고 있다는 걸 확인했는데도 또 약을 넣는 이유는 뻔하다.
‘이 약 하나면 마력도 안 막아도 되고 좋네.’
이 새끼들은 모르겠지만 어디까지나 내게 좋다는 뜻이다. 내게 말이다.
나는 아까 씹은 탓에 너덜너덜한 혀를 깨물었다. 머리가 온통 새하얗게 변하려는 것을 막아야 한다. 생각을 놓친다면 끝이다.
지익―
무언가가 왼손 손바닥부터 손목까지를 길게 그었다. 이어 손바닥에 가로로 줄을 긋기 시작했다.
피부가 이제 마비된 것처럼 시원해졌다.
―이 마지막 술잔, 내 영혼을 바쳐 여명을 위해 축복의 경배를 올리노라!
엎어져 있어서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 성수일 것 같은 액체가 방금 그은 피부 위에 쏟아졌다.
‘…이제 슬슬 끝낼 때가 됐다.’
나는 머리에서 통증을 지웠다. 엄살부릴 때는 아니다.
마지막으로 확인 하나만 해 볼까.
나는 한참 전부터 끊임없이 귓가에 울려대던 아티팩트 알림음을 이제 의식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통신했던 사람이 누구였는지 떠올리며 아티팩트를 눌렀다.
[…받았어? 루카스!]
“레오.”
[확실히 좀 세게 만들긴 했나 보군?]
주교가 비웃었다.
내가 환청을 듣는다고 여긴 모양이지. 갑자기 남의 이름을 부르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어디야?! 너 지금 방에도 없고…!]
레오가 계속해서 목청을 높이며 소리쳤지만 감각에 과부하가 오는지 그 뒤로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러니까, 방에 들어가 봤다는 말이지.’
반장이 내 방에 대놓고 드나들면 의심을 살 테니 분명 워프했을 테다.
잘 알겠다.
그 워프 마법은 일회용이다. 그것도 잔여 마력 없이 깨끗이 처리한 모양이다.
상당한 실력자가 설치했을 것이다.
“이따 보자.”
나는 레오에게 인사하고 귀로 옮겼던 마력을 회수했다.
마음에 든다.
그래, 놈들도 신중하게 움직여야겠지.
그래야 찾아서 터트리는 맛이 있지.
어쨌거나….
이제는 시각마저 날아가기 시작했다. 앞이 검게 변했다가 이내 새하얗게 변하기를 반복했다.
―나는 이제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주교의 희미한 목소리에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입을 뻐끔거렸지만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러니 사람의 아들아.’
나는 입안에서 그 말을 한참 굴렸다.
주문을 그들의 귀에 전할 수는 없었으나 손끝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서서히 몸에 퍼진 약물이 가시는 듯한 느낌이 들어, 나는 이제 눈을 감지 않고 중얼거렸다.
―네가 비록 가시와 찔레 속에 함께 처하며 전갈 가운데 거할지라도.
“뭐….”
통한다. 공식을 완성할 때마다 힘이 돌아오고 있다. 나는 곧장 몸을 돌려 바닥을 발로 내리쳤다.
콰아앙―!
“…?!”
“주교님!”
물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귀가 먹먹해졌다. 비트리올이 마력의 빛을 뚫고 닥쳐왔다.
미처 막지 못한 비트리올이 등 뒤에서 목을 졸랐다. 잘라 내려 해도 점성이 있어 검이 없다면 어렵다는 걸 이미 이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럼 다르게 하면 되지.’
손가락을 튕기자 몬시뇰이 선 자리가 붉게 변했다.
“…?!”
그가 자리를 벗어나려 했지만 때는 늦었다. 바닥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콰아아앙―!
“커헉…!”
—그들을 두려워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일지니 그 말을 두려워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지어다!
나는 손을 내지르며 말을 이었다.
이제 시야가 완전히 돌아왔다.
상대방이 아니라 시전자 본인에게 사용하는 정화 공식이다.
형이 처음으로 시종장을 보냈을 때, 그때는 자기 자신에게 쓰는 정화식을 아직 배우지 않아서 스스로 정화할 수 없었지.
그 경험을 흘려보내지 않았다.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면, 재시도할 때 들어가는 체력 이상을 여기서 소모한다. 그러니 지금 써야만 했다.
‘좋아.’
약이 온전히 씻겨 나가자 연장자에 대한 예의범절과 인간을 패서는 안 된다는―시체라 해도―윤리가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사람의 아들만큼 인내심이 많지 않기 때문에 안 때릴 수는 없었다.
나는 주교의 멱살을 잡고 넘어뜨렸다.
콰앙! 빠악―!
내가 주먹을 내지르는 대로 주교의 얼굴이 돌아갔다. 나는 옆에 닥쳐오는 비트리올을 간단히 장막으로 막고서 그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얼굴에 공포와 의혹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마침내 신은 황혼과 함께 가라앉을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미소 지으며 나지막이 읊은 주문이 그의 발악을 덮었다.
주교의 동공이 탁 풀렸다가, 금세 원래의 크기로 돌아갔다. 그의 얼굴에 경악스러운 빛이 스몄다.
잠깐이나마 먹힌 것에 경악했을 테다.
‘아인시델도 끝까지 읊고서야 넘어갔지. 그래도 이놈은 아인시델보다는 훨씬 약하긴 하다만… 역시 주교는 주문 하나로는 안 넘어가는군.’
콰앙! 쨍그랑―!
다른 주교가 쓴 비트리올 탓에 장막이 박살 났다.
볼에 흐르는 피를 손으로 쓸며 장막을 수복한 순간, 내 아래 있던 주교가 버럭 소리쳤다.
“안드레아스! 교구로 돌아간다!”
“예?! 학생 하나 처리 못 해서 돌아가기는…!”
“멍청하긴! ―태초에 행위가 있었느니라!”
음. 현명한 선택이다.
나는 빠르게 그들의 눈을 차례로 응시해 상태창을 열었다. 멱살을 다시 틀어쥐었을 때, 눈앞에서 그들이 사라졌다.
‘몬시뇰은 그 직함 폐기해야겠는데.’
주교의 판단은 정확했다.
그들의 실력이 모자라서 튄 게 아니다.
하지만 내가 신력을 쓰는 걸 본 이상, 그들은 여기 남아서는 안 됐다.
교구의 소중한 정보를 제 입으로 낱낱이 말해 주게 생겼으니.
‘어쩌냐.’
아무리 그래도 다음 시간선에서는 내가 더 유리할 텐데.
나는 다음에 만날 때 그들이 구면이지만, 그들은 내가 초면이지.
플레로마가 학교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 확실해진 이 상황에서, 나는 그들을 다시 찾지 않을 수가 없다.
“으음.”
나는 천천히 다리에 힘을 주었다.
이제 돌아갈 때가 되었다. 나 역시도 이제 이곳에 더 남아 있을 힘은 없다.
내가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전부 긁어 냈다.
나는 비척비척 일어나 만족스럽게 입을 열었다.
“재시도.”
* * *
덜컹―
“…!”
나는 마차의 흔들림에 퍼뜩 잠에서 깼다.
내 얼굴에 마력으로 된 새까만 가면이 얹혀 있었다.
돌아왔다.
나는 이제 막 경찰국에서 나와, 다시 기숙사로 돌아가고 있었다.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방금 베였던 손도 팔도 언제 그랬냐는 듯 살로 막혀 있다.
여기서 겪은 모든 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프림로즈 패스와 플레로마 놈들의 기억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대로 끝이 아니다.
이제 시작이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나는 재시도 여파로 난 피를 닦아 내고, 여관에 들어가자마자 레오의 방으로 워프했다.
훈련을 마쳤는지 레오가 잠옷 차림으로 앉아서 공부하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자정이었다.
“…?”
레오가 갑자기 나타난 나를 보고 웃음을 지으려다 헛기침했다.
아마도 내일 오후에 있을 그 일은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당연한 말이었지만 방금까지 그 시간에 있던 내게는 현실이었기에 그것마저 낯설었다.
“…크흠…. 무슨 일이야? 최근에는 온 적 없잖아.”
“…….”
아까의 다급한 목소리는 이제 없었다.
익숙한 얼굴을 보니 완전히 돌아온 것이 실감 났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가방을 던지고 놈의 책상 한쪽에 걸터앉았다. 엘리아스처럼 침대에 누울까 했지만 양심적으로 외출복을 입고 남의 침대에 드러누울 수는 없었다.
역시나 레오는 내가 책상에 앉은 것만으로도 이 새끼가 뭐하는 건가 싶은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의자가 없잖아. 그리고 일이 있어서 와야 하냐?”
“아니.”
나는 대답을 듣자마자 고개를 저었다.
“일 있어서 온 거 맞아. 레오, 지금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서 내 방 확인하고 교수님 호출해 줘.”
레오가 고개만 기울였기에, 나는 말을 이었다.
“얘기하자면 길어. 이번에는 엘리아스나 나르케는 안 돼. 네가 나서줘야 해.”
레오가 답 없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내 가면을 떼어냈다.
“아, 말 안 듣고 뭐 하는데.”
“코피 뭐야?”
“…….”
가면을 안 벗고 있어서 눈치 챘나.
하여간 눈치만 빠르네.
“너도 뭐 하다 왔는지 알잖아. 경찰국에서 내내 신력만 썼다.”
그런데 이놈은 코피 따위에 허락도 없이 남의 가면을 벗길 놈이 아니라는 점이 살짝 미심쩍다.
물론 내가 레오 부모도 아니고 반응 패턴까지 파악하고 있진 않지만, 추측하기로 그런 것에 유별나게 굴 놈이면 훈련이랍시고 사람을 뒤지게 굴리지는 않을 것이다.
마침 레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어. 경찰국 다녀왔으니까 체력 보충이나 먼저 하자.”
레오가 그렇게 말하며 내 손목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언제 받아도 효과는 좋네.
지금 굳이 치유까지 하고 있을 심적 여유가 없긴 하지만.
나는 간단히 인사하고 뒤돌았다.
“고맙다. 이제 올라가자.”
“그런데, 루카스.”
등 뒤에서 레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디 갔다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