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170)
우리 학교라니.
좋은 일이긴 하나, 부담이 엄청나다.
이들은 매일매일 나와 함께 지내온 사람들이 아닌가. 목소리를 변조하고 마력도 체향도 신력으로 덮어 지웠지만 행동에서 미묘하게 루카스 아스카니엔의 분위기가 묻어날까 의식이 되는 건 사실이다.
‘그래도 사람은 없네.’
일부러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후문으로 왔다.
황실의 마차가 우리 재단의 학교에 드나드는 건 그리 낯선 일이 아니지만, 오늘은 일을 끝마치기도 전에 사람이 몰려들면 곤란하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제국2교육원 총장과 레오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그들에게 인사하려다 옆에 선 다른 한 명을 보고 입을 닫았다.
아델베르트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나를 보고 서 있었다.
“…….”
존경하는 인물 인터뷰 하러 온 것 아닌데 저놈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만 드네.
마침 총장이 내게 다가와 모자를 벗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에른스트 각하. 헬레나 팔켄하인입니다.”
“반갑습니다. 각하께서 이번 일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셨다는 것 폐하께 전해 들었습니다.”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학교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그리고 폐하의 뜻이라면 뭐든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나는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사실 이자는 총장 대리다.
진짜 총장은 어디 갔는지 모르겠지만, 그쪽은 입학 때부터 얼굴 한번 들이밀지를 않았다.
학생들도 그냥 대리자를 총장이라고 부른다.
나는 그가 말을 길게 늘어놓기 전에 레오에게 말했다.
“저하, 학교에서 뵈니 새롭군요.”
레오가 한쪽 입꼬리만 비틀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습니다.”
“예. 그리고… 황자 전하, 잘 회복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아, 전부 들으셨군요.”
폭주했다는 소식을 듣지 않았다면 회복 이야기도 할 일이 없었겠지.
아무튼 내가 직접 처리했는데 모를 수가.
나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고 다른 질문을 했다.
“폐하께 오늘 있던 일을 낱낱이 보고하셔야 할 텐데, 피로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델베르트가 여기에 있는 건 놀려고 있는 게 아니다.
경찰국에서 내 옆을 따라다녔던 황실 소속의 신력 마법사 역할을 그가 추가적으로 하려는 것이다.
물론 아델베르트 말고, 지금 나를 따라 온 황실 마법사가 있기는 하다.
내 물음에 아델베르트가 흠칫 놀라더니 목청을 키웠다.
“전혀 아닙니다! 더할 나위 없이 뜻깊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폐하께서, 아니, 또 각하께서 제 요청을 받아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렇게까지?’
나와 같은 생각인지 옆에 서 있던 레오의 표정이 의문스럽게 바뀌는 것이 보였다.
거의 면접장에 와 있는 듯한 기분에 나는 그냥 웃음 지었다.
“그렇게 여겨 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보다 이 자리에서 더 있다가는 교내가 혼잡해질 것 같군요. 슬슬 들어가도록 하지요.”
웃으며 지켜보고 있던 총장이 나를 데리고 가장 가까운 건물로 들어갔다.
“에른스트 경. 오늘 오신 목적은 플레로마에 대한 자료 수집으로 해 두었으니, 혹시 문제가 생길 경우 그렇게 처리하시면 되겠습니다.”
“예, 잘 알겠습니다.”
처음부터 다짜고짜 신력을 쓸 생각은 없다.
학교는 경찰국과 경우가 다르다.
교수들이 아델베르트 폭주 미수 사건을 2주 전부터 피나게 수사하면서 용의자로 점찍어 둔 학생이―나다―있고, 나름의 근거 있는 의견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다.
결과에 의문을 가지지 않게 하려면 오늘 기억만 지우는 게 아니라 모든 기억과 자료를 싸그리 제거해야 하므로, 신력은 정말 필요할 때만 쓰고 대화를 이끌어 나가 설득시키는 게 낫다.
나는 그 뒤로 총장과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누다, 건물의 지하로 들어갔다.
학생 신분으로도 단 한 번도 들어가 본 적 없던 소강당이 나타났다.
총장이 문 앞에 서서 뒤돌았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제게도 마법을 쓰셔야 할 테니 저도 함께 들어가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자 어제 보았던 교수들이 예복을 입고 앉아 있었다.
내 눈은 자연히 붉은색 예복을 입은 교수들에게 향했다.
기사 학부다. 잠깐 트라우트 교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단상 앞에 서,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여러분.”
거리가 먼 탓에 내가 내는 소리마저 울려 들려왔다.
나는 확성 마법을 걸고 말을 이었다.
“제가 오늘 여기에 온 이유를 모두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얼마 전 있었던 폭주 미수 사건에 대해, 학교 차원에서 조사하신 바와 제가 따로 조사한 정보를 비교 분석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습니다. 제국2교육원 교수진 여러분 모두 흔쾌히 협조해 주신 점 감사합니다.”
사실 흔쾌히 협조하진 않았겠지만 내 알 바 아니다.
역시나, 누군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자백하도록 마법을 쓰려는 겁니까? 우리 중 범인이 있을 것을 확정짓고 범인을 색출하려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유감입니다. 제가 제국2교육원의 조사에 참여하는 것은 폐하의 명령입니다.”
[…….]
역시나 교수만 조사하는 것에 불만을 가진다. 이들은 ‘학생은 조사하지 않을 거냐’고 묻고 있다.
조사하지 않는다.
‘그러면 니콜라우스가 루카스를 조사하는 상황이 되는데 하겠냐?’
안 되지.
애초에 플레로마의 표현대로 ‘정치계’를 구분짓자면 제국2교육원은 그 안에 들어간다 보기 어렵다.
실제로 교수 중 약 50%만 정치인인 상황인 데다, 초기 계약서대로 하자면 학교는 내 소관이 아니며, 실제로 ‘정치계’를 내버려 두고 여기까지 조사하는 것은 낭비다.
하지만 황제가 그깟 것에 물러날 인간은 아니다.
레오가 바이에른에서 가져 온 두 개의 편지 중 하나는 황제가 바이에른 왕실에 보낸 추가합의서였다.
그가 계약서를 왕실에 먼저 넘겼다는 건, 지금 이 상황에 비추어 보자면 법률 검토를 해도 니콜라우스와 바이에른에 손해가 되는 사항이 없도록 만들었다는 뜻이다.
‘잘 생각했다.’
이 정치판에서 법무팀에 분석을 맡기지도 않고 만난 자리에서 계약서에 사인하는 인간은 없다. 즉 황제는 내가 바로 움직일 수 있도록 판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그걸 증명하듯, 그는 ‘학생에 대한 심문’을 추가 합의서에 넣지 않았다.
왜냐? 교수진은 절반이 정치인인 데다 재단이 경영구조상 황실 산하에 있는 만큼 나의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여지가 많지만, 학생 중 정치인은 손에 꼽을 정도이며 이들은 학교에 고용된 자들이 아니라 학교에 비용을 지불한 자들이다.
법리적 해석이 길어질 것을 우려한 게 분명했다.
‘물론 교수 중에서 안 나오면 은근슬쩍 학생 쪽으로도 손을 뻗겠지만.’
새 사건이 터진 직후 바로 움직여 주었으면 하는 황제의 조급함 덕분에 위험 하나 피해 갔다.
니콜라우스가 루카스를 심문해야 하는 그 상황 말이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 상황이다.
나는 이제 생각을 지우고 그들에게 집중했다.
“그리고, 강압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 드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여러분께서 납득하실 때까지 차근히 대화하고, 그 뒤에 행동해도 늦지 않습니다. 천천히 서로 가진 정보를 비교해 보도록 합시다. 그게 제가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도움이고, 폐하께서 바라시는 바입니다.”
[…….]
“먼저, 교내 수사록을 오늘 아침 받아 보았습니다. 마법학과에서 담당했더군요. 신력을 제외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충실히 조사하신 점이 눈에 띕니다.”
그 말에 기사학부 교수들이 살짝 눈썹을 구기고 마법학과 교수들을 바라봤다.
[아니, 그래서 분 단위로 진술을 요구했던 거군? 폭주 미수 사건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오늘에서야 듣고 설마설마 했는데….]
“조사 때문이었겠지요. 그렇게 조사한 결과… 범행을 준비하기 위한 공백 기간이 있는 분을 찾지 못했다는 점이 눈에 띄는군요.”
그 말이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마법학과 교수 중 누군가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에른스트 각하. 황명이니 이곳에 온 것은 이해하겠습니다만, 지금 각하께서 읽으신 대로 우리 교수진 중에서는 혐의점이 있는 사람을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빈터 교수였다.
어제 본 인간을 다른 모습으로 마주하다니. 어쨌거나 그는 내가 그 학생이라는 걸 전혀 알지 못하는 듯했다.
반응을 보니 우리 담임 교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계속 말하라는 의미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각하께서 ‘교수진 중 플레로마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신다면, 그건 이미 검토했으니 전혀 아니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범행은 플레로마나 그 관계자의 사주를 받아 일어났을 것이며 우리 학교 내부 사람이 범행의 통로가 되었겠지요. 그렇지요?]
“저와 의견이 같으시군요.”
나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방 안에 들어가 범죄를 저지르려면 세부 좌표를 알아야 하니, 적어도 좌표를 알려 준 사람이 교내의 범인이 됩니다. 그리고 세부 좌표는 어디까지나 교수진에게만 접근 권한이 있지요?”
[학생들이 방의 세부 워프 좌표를 알아내 바로 방으로 워프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걸 친구들에게 공유하는 경우도 적지 않고요. 그러니 학생 중에 그 범행 통로가 있을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겁니다.]
이때 세부 워프 좌표란 방 앞 복도가 아니라 바로 방 내부로 들어갈 좌표를 말한다. 그걸 몰라서 내가 아델베르트 방 문을 부수고 들어갔었지.
어쨌거나 나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그는 여전히 학생 중에 범인이 있을 것이라 여기는 중이다.
뭐, 굳이 학생 중에서 범인 후보를 찾자면 나보다는 하이케 아인시델이 가장 유력하지 않을까 싶은데… 여전히 날 의심하는 중인 듯하다.
[아무튼 이건 논점이 아닙니다. 교수 중 누군가가 플레로마의 사주를 받아 움직였다면, 공백이 존재해야 합니다. 나가서 그 관계자와 대화하고 범죄를 모의할 그 시간 말입니다!]
“음.”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속사포처럼 말을 이었다.
[아니면 아티팩트라도 써서 소통했겠습니까? 나가서 직접 편지라도 받아 왔을까요? 그럴 줄 알고 이미 불시에 교원 숙소와 본가를 수색했습니다. 심지어는 벌써 세 달째 학교에만 처박혀 있던 교수의 본가에까지 찾아가 집을 털어 보았다 이 말입니다.]
“…….”
[당연히 단 하나의 흔적도 찾지 못했습니다.]
나는 간만에 흥미를 느끼며 그의 말을 들었다.
내가 대꾸 않고 그냥 바라보기만 하니, 그는 더 열정적으로 교수진을 변호하기 시작했다.
[범죄를 준비하려면 약품을 구해야 하니, 직접 밖으로 워프해 물건을 가져오거나 플레로마를 만나러 가야 합니다. 아니면 외부에서 학교에 약품을 워프시켜 주거나 학교 우편국을 거쳐 약을 보냈어야 했을 겁니다. 그렇지요?]
“계속 말하세요.”
[둘째 경우는 말도 안 되지요. 워프 마법으로 무생물만 운반하는 건 올해 들어 금지되었고, 교내의 모든 우편물은 전부 검열되어 정화 과정을 거칩니다. 그럼 첫째 경우를 살펴 봅시다. 직접 외부로 워프한다…. 약을 가져오는 시간은 1분도 되지 않을 테니, 약품 부분은 어쩌면 인정할 수 있을 듯합니다.]
이제 다른 교수들이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국2교육원의 교수는 학생과 다릅니다. 참 마음에 드는 단어 선택은 아닙니다만, 이곳 교원은 전적으로 재단의 재산입니다. 수천만 펠의 연구비를 받는 대가로 어디에나 부려먹힐 수 있죠. 학생들에게는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워프 마법을 허용하지만, 교수는 학교의 보호자로서 24시간 내내 교내에 있어야 합니다. 걸어 나가든 워프해 나가든 외부로 나가기 위해서는 매번 상세히 사유를 보고해야 하고, 길게 자리를 비울 수도 없습니다.]
그렇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작년 바이에른 마법사 습격 사건을 겪고, 그 뒤로 또 플레로마가 강에 약을 타면서 규정이 이렇게 바뀌었다.
학교가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니 교수들의 보호가 필요하다는 이유였다.
나는 수사 기록지에 수록된 사유 보고서를 펼쳤다.
‘정말 다들 밖으로 나가질 않네.’
근 한달 모든 학과 교수를 합해도 외출 목록이 종이 한 바닥 분량밖에 안 나온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군요. 특히 폭주 미수 사건과 이번 아스카니엔 사건의 범인이 동일하다면…. 더더욱 충돌이 생기겠습니다.”
빈터 교수의 부족한 논리를 조금 보충해 주자면….
누군가 물품보관소나 가게에 편지를 맡기고 거기에 명령을 적어 우리 학교 사람에게 전달할 수도 있는 일이다.
밖에 나가서 일을 보다가 편지 하나 슬쩍 받아오는 것에 시간이 얼마나 걸린다고? 이 경우 공백따위 없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고려해야 할 게 또 있지.
준비 기간이 길었던 폭주 미수사건까지는 몰라도, 이번 워프 마법 사건에서는 이것이 통하지 않는다.
내가 자신의 편을 들어줄 줄 몰랐는지 빈터 교수가 동료들과 시선을 교환하다 내게 물었다.
[충돌이라면 뭘 말씀하시는 거죠?]
“먼저, 이것부터 알리고 갑시다. 프림로즈 패스는 플레로마의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듣자하니 이번 워프 마법이 프림로즈 패스로 연결되어 있었다 하더군요?”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쪽이 플레로마와…?]
그의 물음에 하나하나 답해 줄 이유는 없다.
나는 바로 입을 열었다.
“그쪽에서 아스카니엔 학생을 타깃으로 고른 이유는 제가 황제 폐하를 만난 뒤부터 검찰 수사가 재개되었기 때문입니다. 저와 엘리아스 공작이 파트너로 여겨지는 지금, 프림로즈 패스는 엘리아스 공작의 친구를 공격하면 충분히 압박이 될 거라 믿었을 겁니다.”
옆에서 레오가 눈살을 찌푸리는 게 느껴졌다.
물론 내가 끌려간 이유는 그게 다가 아니지만 굳이 밝힐 필요는 없다.
그리고 레오가 알아야 하는 정보는 여기까지다. 아니, 앞으로의 활동을 위해서는 그도 이 정도까지는 알아야 한다. 하지만 이상으로 아는 것은 위험하다.
[…….]
교수가 말하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프림로즈 패스에서 보복 대상으로 나를 고른 것은 니콜라우스가 황실에 다녀갔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였다.
내가 황제에게 편지를 보낸 것은 6시 반. 저녁 식사 시간에 편지를 보냈는데 30분도 지나지 않아 나와 즉시 만나겠다는 답신이 왔다고 했지. 답신이 온 7시부터 준비해서 황실에 진입한 시각은 약 7시 반이다.
다이렉트로, 조금의 지체도 없이 프림로즈 패스에 소식이 들어갔다 쳐도 7시 반이다.
하지만 여기 문제가 있다. 황제가 프림로즈 패스 수사 재개를 명한 건 7시 반이 아니라는 점이다.
“검찰에 압력이 들어간 시각은 저와 폐하의 대화가 끝난 오후 8시 30분입니다. 만약 프림로즈 패스든 플레로마든 학교에 있는 학생을 공격하고자 했다면 이 시기부터 외출해서 명령을 듣고 범죄를 꾸민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나는 수사록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며 말을 이었다.
“없군요.”
[…허허, 그래요. 각하께서도 인정하셨습니다. 워프하든 걸어 나가든 플레로마와 직접 만날 시간도, 편지를 주고받거나 아티팩트로 소통할 방법도 없습니다. 대체 어디 작당 모의를 할 시간이 있단 말입니까? 각하께서 표현하신 대로 교수 중 누구에게도 ‘공백’이 없는데 말이지요.]
나는 그 말에 미소지었다.
이미 사라진 시간에서 들었던 말과 비슷한 말이다.
프림로즈 패스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구인류에게, ‘어떤 방식으로 통보를 받아서 일을 진행했냐’고 물었지.
놈은 직접 만나지도, 서면으로 연락하지도, 아티팩트로 전달하지도, 사람이든 동물이든 뭐든 매개 하나 두고 명령을 전달받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 뒤로 내게 짚이는 건 딱 하나였다.
“공백이 없어도 충분히 범행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 말에, 레오와 아델베르트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만약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미 알고 있다면 나가서 범죄를 모의할 시간같은 것은 필요 없겠지요.”
[에른스트 각하.]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는 듯한 표정이 교수에게 스쳐 지나갔다.
그럴 수밖에.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진작 알고 있었으면 교내에 플레로마가 있다는 말이지 뭔가.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말씀드리지요. 플레로마는 새로 태어난 자에게 사명이라는 명목으로 계시를 줍니다.”
아스만 때에 알게 된 것이었다.
누구도 알려 주지 않았지만 다시 태어날 때부터 본능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플레로마의 길로 이끌어야 한다’는 사명을 느꼈다고 했다.
그리고 이것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 내가 프림로즈 패스의 구인류에게 했던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었다.
머릿속으로 직접 지시를 받았나? 그게 가능하다면, 그 지시를 주는 자가 생각이나 행동도 조종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구인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계시라고 하면 다들 감을 잡으셨겠지만 플레로마는 머릿속으로 직접 정보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범죄 모의를 위해 들어가는 시간이 거의 없다시피하겠지요. 그리고, 제가 알아낸 바에 따르면 플레로마가 아니라고 해도 계시를 받는 데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
빈터 교수는 말문이 막혔는지 당황한 눈으로 서 있기만 했다.
어쨌거나, 교수들은 마음만 먹으면 모든 기숙사 내부의 세부 워프 좌표에 접근할 수 있으므로 그 누구보다도 훌륭한 도구가 된다.
계시만 줄 수 있다면 말이다.
“이제 공백에 대해서 답변이 되었습니까? 시작해도 되겠지요.”
나는 바이에른 왕실에서 새로 받은 완드를 손가락 사이에서 굴렸다.
그리고 스태프 끝을 바닥에 내리찍었다.
콰앙―!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새하얀 빛이 밀려나갔다. 내 뒤에서 황실 마법사가 레오와 아델베르트의 앞에 보호 마법을 거는 것이 느껴졌다.
‘문제는 본인이 범행을 아느냐 모르느냐인데.’
아까 새벽에 있었던 회의를 생각하면,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에 한 표 던지겠다.
“어제 8시 30분 이후부터 자정 사이, 잠깐이라도 기억이 비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해당되는 분께서는 대답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