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177)
루도비카 슈나이더였지.
사실 잠깐 만난 인간들 얼굴과 이름 따위야 금방 지워 버리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이름이 멋지다고 생각한 건 사실이라 빠르게 기억이 났다.
루도비카가 나르케를 짓밟고 있는 경비원에게 손짓했다.
“제가 아는 분입니다. 놓아주시지요.”
“신부님께서 아는 분이라고요…? 이… 이런 사람을?”
경비들이 의아해하면서도 뒤로 물러났다.
루도비카가 나를 내려다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술집에서 만났죠. 아까도 위스키랑 와인을 병째 사다 놓고 드시던데, 역시 과음하셨네요.”
그걸로 모자라서 마지막 와인은 병나발 불면서 나왔지.
지금은 콘셉트를 위해 엘리아스에게서 또 다른 술을 받아 왔다.
나는 초점을 잡으려 눈을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기억하시네요~ 영광이에요.”
“마지막에 드신 술은 입에 맞으셨나요? 아닌가, 지금은 또 다른 걸 드시고 계시네요.”
루도비카가 바닥에 엎질러진 와인병 라벨을 확인하며 말했다.
나는 목에서 힘을 빼고 웃음을 섞었다. 힘을 빼니 멋대로 말끝이 올라갔다.
“부르고뉴 화이트와인이 계속 머리에 맴돌아서요. 슬슬 가벼운 게 당기네요.”
“어디 주변에 부탁해서 간신히 묵으신 줄 알았더니만 다시 돌아다니고 계실 줄이야. 분명히 더는 영업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요.”
“그 주제로 넘어가는 거예요? 봐주세요. 제가 자제력이 부족하다는 걸 저도 이제 깨달았거든요.”
아니.
문만 열지 않았지 다들 이 안에 있는 것 다 안다. 이미 지워진 시간에서 겪었는데 모를 수 있나.
나는 목소리를 깔며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히 믿을 수도 없어서요. 압수수색이라뇨. 그 프림로즈 패스가?”
“자기가 자기 입으로 내뱉는 수식어는 흘려듣는 게 맞는데 제레마이야 씨는 정말 맞는 말만 하시는군요. 자제력을 키우는 걸 추천할게요. 지난 호 신문도 일주일 단위로 묶어서 파니 직접 확인해 보시고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그러지 않을 수가 없겠네요.”
어둠에 적응이 되어 이제 루도비카의 표정이 보인다.
온화하지만, 그 안에서 묘하게 구제 불능을 보는 듯한 눈빛이 읽혔다.
‘그렇겠지.’
성공적이다.
중요한 건, 그러면서도 그의 눈에서 흥미가 읽힌다는 점이다.
“그러고 보니 이름으로 불러 주는 거예요? 아까 제게 제레마이야라고 하셨죠.”
“카에타니라고 하기엔 좀 미안해서요.”
“아하….”
카에타니에게 미안하다는 말이지.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나 장갑 위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나저나 신부님이신가요? 그렇게 나이 많아 보이진 않았는데요.”
우리 세계의 이 종교에서 여성은 성직 서품이 안 되는 걸로 알고 있다. 성공회면 또 모를까.
좀 복잡하지만 간단히 줄이자면, 이곳에서는 마력이 재산화되면서 규정이 달라졌다.
그러니까 내가 그의 사제직에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해서 그게 곧 ‘플레로마임을 알고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제레마이야 카에타니는 플레로마를 몰라야 한다. 여타 이슈들에 무지했던 것처럼.
내 말이 같잖은 아부로 들렸는지, 루도비카가 별 감흥 없는 얼굴로 내게 완드를 들이댔다.
“술 좀 깨시는 게 좋겠군요.”
―육신의 날개와 달리 마음의 날개는 이토록 가볍구나.
완드 끝에서 퍼진 연기가 내게 스며들었다. 손가락만 한 랜턴에서 나오는 빛만이 바닥을 비추고 있었기에 앞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검은 연기였다.
‘비트리올을 받았네.’
그냥 사제가 아니다.
능력이 좀 있는 놈이겠다.
나는 이마를 붙잡고 놀란 눈으로 웃었다.
“…방금 뭐죠? 마법사?”
“네.”
루도비카가 희미하게 웃었다.
“멋지네요. 구인류 중에서도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더니. 제가 제국어를 원어민처럼 할 줄 알긴 해도 제국 사정에 밝진 않거든요. 그런데 여기도 미국과 꽤 비슷한 분위기네요.”
“아~ 하하. 그런데 하나만 지적해도 돼요?”
“예? 그러세요.”
“딱히 원어민 같진 않아요.”
“아….”
내 머쓱한 탄식에 경비원에 의해 붙들려 일어난 나르케가 피식거렸다.
고맙다.
사실 영어 좀 섞었다. 한국의 12년짜리 정규교육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프’ 발음을 정직하게 ‘브’로 하는 경향이 있더군요. ‘야’를 ‘자’로 발음한다든가. 단어 선택도 영어식이고요.”
“아, 그랬나요?”
“네. 그래도 과자를 쿠키로 대신하는 정도라 알아들을 수는 있어요~”
‘…쿠키.’
며칠 전 아인시델 저택에서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문구가 생각난다.
이상하다고는 해도 그 문구와 관련된 일이 터지지 않으니, 당장 눈앞의 일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바빠 더는 그 문구에 쓸 정신이 없다. 바이에른에 이야기해 두긴 했으나 들려 오는 것도 없고, 극단에서 내게 보내오는 우편도 없었다.
‘일단은 집중하자.’
나는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며 웃었다.
“전 몰랐어요. 나름 독일인 사이에서 커서 잘하는 줄 알았는데 민망하네요.”
“아, 참고하라고만 말해 준 거예요. 저도 이탈리아에 자주 가는데, 잘못된 말을 해도 다들 지적해 주지 않아서 곤란할 때가 있더군요.”
“경험에서 나온 조언이었군요. 그런데 루도비카 씨는 이 거리의 관리자인가요?”
“비슷하죠.”
그래.
플레로마를 마주쳤으니, 슬슬 움직여 볼 때다.
자연스럽게 연락처라도 받아 내야지.
나는 술기운에 전 웃음을 흘리며 좀 더 가까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도와주실 수 있나요? 사실 제가 묵을 곳을 아직 못 찾았거든요.”
“네? 아직도요?”
“제가 아는 선에서는 연락해 봤지만 이 주변은 다들 영 마음에 안 들고… 또 자리가 없다고 해서요. 지금 워크인 되는 호텔 좀 아세요? 이왕이면 그랜드 유니언 정도 퀄리티로.”
“…!”
옆에서 경비에게 붙들린 채 우리를 구경하던 나르케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이해한다.
안 봐도 가지가지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루도비카가 나와 나르케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살짝 당황한 듯 웃으며 물었다.
“네? 그랜드 유니언? 옆에 친구분 집에 가면 되는 것 아닌가요?”
“저 친구도 집안에서 사실….”
내가 잔뜩 고민하자 루도비카가 웃으며 대답했다.
“아, 이해했어요. 그런데 이제 곧 베를린에 펜탈론이 열리잖아요? 이미 2주 전부터 이 근방은 예약이 꽉 차서 지금 들어가서 체크인 할 수 있는 호텔은 없을 거예요.”
펜탈론은 황실이 지난 5년간 전 세계에서 회원국을 끌어모아 유치한 대회로, 국제 마법사 경기다.
마법사 올림픽이라고 보면 된다.
플레로마가 제국을 온통 난장판으로 만드는 바람에 이미 한번 미뤄진 대회인데, 황제는 여기서 더 미룰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는 플레로마 탓에 대회를 무기한 연기하는 것이 곧 플레로마에 대한 패배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절대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해 왔지만, 이번에는 유용하게 활용했다.
“그렇게 좋은 호텔은 아니지만, 저곳은 어떠세요?”
루도비카가 저 뒤편 골목을 가리켰다.
그가 재킷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고는 완드로 바람을 훅 일으켰다. 바람에 의해 날아간 무언가가 간판 앞에서 터져 빛을 만들어 냈다.
내 눈에는 모텔로 보이지만 어쨌든, 호텔이기는 했다.
“제가 주인이라서요.”
“…….”
이런 행운이.
플레로마 사제인 걸로 모자라 프림로즈 패스에서 사업을 해? 이것들 야심이 대단하네.
물론, 내가 플레로마 지도부라 해도 슬슬 돈 될 곳에 플레로마 내부 인력 꽂아 넣고 단물 빨아 오게 하겠다.
내가 계속 그곳을 바라보며 멍때리고 있자, 루도비카가 부드럽게 웃으며 놀렸다.
“아, 카에타니 가문 도련님은 설마 저런 곳에서 잠을 못 자나요?”
“아닙니다. 루도비카 씨가 운영하는 곳인데 그럴 리가요. 얼마면 되죠?”
“두 분은 무료예요.”
“대가 없는 건 싫은데요.”
“계셔 주는 게 오히려 제게 좋은 일이에요. 어차피 제 업장에는 손님도 없어서, 텅텅 비는 곳 자리 하나 드리는 거라서요.”
“압수수색 영향이군요.”
“맞아요. 그러니 자리라도 하나 채워 줘요. 유령 호텔 되는 것보다는 낫거든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래요. 고맙습니다.”
나를 가만히 보던 루도비카가 이상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25살 맞아요?”
“네.”
“더 어려 보이는데. 혹시… 그럴 거라고 생각은 하는데, 지금까지 줄곧 집안 돈으로 이런… 유흥비를 내면서 지내 왔나요?”
“네. 그렇죠?”
“아~ 그래서 그랬구나.”
“…….”
그러니까 나이에 비해 철딱서니 없는 게 딱 그 꼴이다 이거지.
집안 돈으로 지낸다고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알아서 이해해 주니 고맙다.
대화가 끝난 듯해 보이자, 경비가 나르케를 떠밀었다.
우리는 루도비카가 운영하는 호텔로 들어갔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쉴 수는 없었다.
안내받은 방에 들어가고 나서, 나르케가 신력을 써서 말했다.
―“넌 아래로 내려갈 거지? 난 여기서 대기하고 있을게~”
―“그래. 대화 끝나면 너랑 같이 나가야 하니까 만약 파이가 불러도 꼭 다시 돌아와.”
나르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방에 짐을 풀고서 곧장 루도비카의 방으로 내려갔다.
똑똑―
문을 두드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루도비카가 의아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방에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아뇨. 한잔하실래요?”
“…….”
그가 나를 어처구니없이 보다가 헛웃음을 쳤다.
어쩔 수 없다. 어떻게든 그에게서 대화를 끌어내야 한다.
왜 플레로마가 처음부터 내게 접근했는지, 그 점은 의뭉스럽지만 이 드문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정 문제라면 재시도가 체크포인트를 마련해 줄 테니 일단 직진하는 수밖에.
“저는 이제 다시 나가 봐야 하는데.”
“안 될까요?”
“…….”
고개만 기울이고 있던 루도비카가 웃으며 바깥으로 고갯짓했다.
우리는 불이 꺼진 와인바로 올라갔다.
“여기 5시부터 열거든요. 제가 직접 3시에 불을 켜게 될 줄은 몰랐네요. 술을 굉장히 좋아하시는군요.”
루도비카가 고민하다 병 하나를 골랐다.
“아까는 샤르도네를 마시고 있던데, 이번엔 리슬링으로 가죠. 우리나라에 왔으면 한 번쯤은 마셔야 하지 않겠어요?”
“아~ 좋죠.”
나는 빠르게 그를 자리에 앉히고 잔을 꺼내 세팅했다.
가볍게 잔을 맞대고 알코올을 입에 대자, 날 관찰하고 있던 루도비카가 웃으며 말했다.
“술 하나 들어간다고 되게 행복해 보이네요.”
“그래요…?”
불행하다. 누가 이 20만 원짜리 알코올 좀 대신 마셔 주라. 나는 이제 그냥 알코올램프를 먹어도 이것과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할 것 같다.
우리는 그 뒤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졸려서 하품이 날 지경이었지만, 평소에도 새벽에는 바이에른에서 밀려 있던 대책본부 일거리를 처리했기에 잠을 참는 데에는 이미 도가 터 있었다.
“낮엔 뭘 해요?”
한참 재미없는 대화가 이어지던 때에, 그가 굉장히 중요한 질문을 했다.
“흠… 공부를 좀 하고 있어요. 즐기려면 돈이 있어야 하잖아요? 언젠가 모아 둔 돈도 다 떨어질 거고. 그래서 최근엔 사업체 하나 생각하고 있거든요.”
“사업이라.”
루도비카가 계속 말해 보라는 듯 턱을 괴고 나를 바라봤다.
“상담해 주실 거예요?”
“물론이죠. 업종은 어떤 것으로 생각하고 있죠?”
“글쎄요. 프림로즈 패스에 뭐든 가게 하나 차리고 싶네요. 내 사업장이 되면 맨날 술 마시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거 아니에요?”
나는 개소리 중 개소리를 지껄이며 킬킬댔다.
역시나 상대방의 미소 속에는 여전히 구제 불능을 보는 듯한 눈빛이 깔려 있었다.
‘하하….’
의도한 반응인 만큼, 반가웠다.
“좋아요. 그러면 미리 견학 좀 하셔야겠네요. 프림로즈 패스에 가게를 차리려면 그래야 할 것 아니에요?”
“음, 그렇죠. 시장 조사.”
“오~”
나는 그 놀리는 듯한 감탄사에 고개를 기울였다.
“…너무하네요. 저 이래 봬도 고등학교 꽤 높은 성적으로 졸업했거든요.”
“아~ 물론 그렇겠죠. 카에타니 혈통인데.”
루도비카가 와인을 한 모금 입안에서 굴리며 길게 음미하고 한마디 내뱉었다.
“펜탈론 끝날 때까지 이곳에 묵을래요?”
“…….”
순조롭다.
“그래도 돼요?”
“물론이죠. 저야 자리 하나라도 채워 주면 손님 유치를 위해서도 더 좋다니까요.”
“좋아요. 그런데 아마 제가 자주 들어가 있진 않을 텐데… 새벽에 두세 시간이라도 괜찮다면 그렇게 할게요.”
“낮에는 여자 만나러 가게요?”
‘…벌써 이미지 확실히 잡혔나 보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공부하는 거죠. 인간관계 처세 공부.”
상대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손가락을 튕기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요. 인정할게요. 제가 뭘 할지 어떻게 아셨죠?”
“딱 하는 짓이 그래요. 성직자 핏줄에서 이런 후손이 나와서 어떡하나 싶을 정도인데 모르셨나요? 전 지금 보니파키우스 8세도 이런 방탕함을 감추고 살았는지 의심이 가는 상황이거든요.”
“으음, 하하하….”
나는 잔을 들어 그의 잔 윗부분을 가볍게 쳤다.
유리잔끼리 부딪혀 맑은소리가 들려왔다. 루도비카의 초록색 눈이 나와 한참 마주쳤다.
“그럼, 공범이 되면 그런 생각 안 하시겠군요.”
“…….”
“수녀원 출신이시잖아요. 아니, 지금은 신부님이죠.”
나는 그렇게 말하고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루도비카의 입꼬리가 천천히 말려 올라갔다.
“아니면 그래도 하실까요? 한번 실험해 볼래요?”
“제 양심의 가책은 누가 책임지고요?”
“제가 하죠.”
“하하하! 이런 사람을 믿으면 이제 끝나는 거죠.”
루도비카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고서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재능 있군요.”
“재능?”
“아까는 다시 만날 일 없을 거라면서 웃는 얼굴로 대차게 거절해 놓고 이제 와서 공범이 되자느니, 이게 재능이 아니고 뭘까요?”
“그건 잊….”
“매주 5만 펠.”
“…….”
50만 원?
뭐가?
나는 내가 뭘 들었는지 고민하느라 한참 멍때렸다.
물론 뭘 의미하는지는 약 10초쯤 지났을 때 깨달았다.
“사업 자본금이라 봤자 집안 돈이죠. 어때요? 원하는 대로 놀면서 월에 20만 받아 가는 것 나쁘지 않죠.”
“이건 좀 아닌데.”
“적다? 10만은?”
“그런 취미 없어서요.”
“이번 기회에 만들면 되죠.”
‘뭔 소리야.’
나는 그저 웃음을 터트리며 술을 들이켰다.
“50만.”
“…!”
나는 가까스로 술을 삼키고 입가를 닦았다.
지금 월 2,000만 원을? 경제관념이라는 것이 없나?
내 반응이 격했는지 그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 주에 50만이면 생각해 볼 만해요?”
“신고할 생각이 들긴 합니다, 슈나이더 씨. 다 떠나서 주에 50만, 저도 제국은행에 이미 수천만 펠이 쌓여 있는데 그게 필요하지는 않거든요.”
내가 이름 대신 성을 부르자 그가 흥미롭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술을 마셨다.
별 미친 소리를 다 듣고 있으니 머리가 아파진다.
하지만, 여기서 잠깐 생각 좀 해 보자.
앞뒤가 맞지 않는다.
돈을 주고 나를 매수하려 했다면 애초에 내가 아까 꼬드겼을 때 화답했으면 될 일이다.
뭘 위해 매달 2,000만 원을 내게 바치겠다는 건가?
나는 생각을 정리하고 미소 지었다.
“절 시험하고 계시는군요.”
루도비카가 한쪽 눈썹을 올렸다.
여태까지는 콘셉트에 맞춰 줬지만, 조금은 본래 성격대로 나갈 필요가 있다.
“솔직하게 말합시다. 그런 목적 아니잖아요.”
“하하하…. 글쎄요?”
“딱 봐도 아닌데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술을 마셨다.
“그런 목적이면 아까 제 말에 응하셨어야죠. 아니면 연애는 싫고 구인류적 번식 활동에만 관심이 있으세요? 경험상 99.9% 확률로 그럴 리가 없는데.”
“정확하네요.”
“지금 내가 0.1%와 대화하고 있는 건가요?”
“사업하고 싶다고 했죠.”
“…….”
나는 슬쩍 올라가는 입꼬리를 꾹 눌렀다.
루도비카가 양손을 잡고 만족스럽게 웃었다.
“투자 원금 6개월 안에 회수하고 매달 200만 펠 가져갈 수 있게 해 드리죠.”
“…….”
그래. 진짜 의도를 밝힐 때가 됐지.
동업하자는 말을 저렇게 꺼내다니 세상에 별의별 인간 다 있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감사한 말이다.
물론, 따져야 할 것은 많다.
‘제국은행에 수천만 펠이 쌓여 있다’는 말만 듣고 투자할 돈을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는 점, 그리고 왜 처음부터 굳이 내게 접근한 것인지.
일단 후자는 그와 대화하면서 살짝 안개가 걷히기는 했다. 그는 이곳에 새로 오는 사람들에게 한 번씩 인사를 건넨다고 했다.
그래도 이 운 좋은 상황이 내게만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에게도 운이었는지 면밀히 따져 봐야 한다.
내게 계산이 깔린 것처럼 그도 깊은 계산이 깔려 있을 수 있다.
‘일단.’
알아내되, 천천히 돌아서 간다.
제레마이야 카에타니의 콘셉트를 유지하면서.
“…이런 사람 믿으면 이제 끝나는 거죠. 신부님이 이래도 돼요?”
“하하! 그거 아까 제가 했던 말이잖아요. 애초에 전 가톨릭이 아니라서요.”
“이단이군요. 신부님이 프림로즈 패스에서 사업을 하는 것부터 특이했는데 이런 이상한 칼뱅주의 교파가 실존하는지 몰랐네요. 프로테스탄트가 사제라고 불리다니 대체 어느 교파죠?”
“프로테스탄트? 영국말이네요. 제국에서는 개신교도를 에반겔리시라고 합니다.”
“제국어 교실이에요? 논점 아니잖아요.”
“포인트 벗어나기는 당신도 마찬가지죠.”
“…….”
이 정도면 내가 플레로마를 모른다, 적어도 ‘이름쯤은 들어 봤어도 그걸 여기서 떠올릴 만큼 친숙하지는 않다’는 점은 그에게 각인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술로 입술을 축이길 반복하다, 그가 계속 내 행동을 빤히 지켜보는 걸 눈치채고 다시 연기를 시작했다.
“압수수색 들어왔다면서.”
“그렇죠.”
“어떻게 원금을 6개월 만에 회수해요. 루도비카 씨가 보증해 줄 수 있는 거예요?”
“물론이죠. 이번 이슈는 금방 끝날 거예요. 원래는 좀 시간이 걸릴 예정이었는데…. 금방 해결될 테니 걱정할 필요 없어요.”
“어떻게?”
‘원래는 좀 시간이 걸릴 예정이었는데 금방 해결될 것이다.’
좋은 정보다.
이들은 내가 의회를 정지시켜 놓기 전까지는 천천히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이 틀어지기 시작한 지금, 더 문제가 커지기 전에 빠르게 처리해 버리려 하고 있다. 아마도 회장의 뜻이겠지.
그런데 왜 진작 그러지 않았는가?
그 빠른 방법에는 치명적인 리스크가 있다는 뜻이다.
리스크가 없었다면 진작 빠르게 처리했겠지.
루도비카는 내게 일이 순조롭게 풀릴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사실 놈들은 지금 마음이 급하다.
“다 방법이 있죠.”
“그 방법이 뭔데요?”
“…….”
“그리고 무슨 사업인데요.”
“무슨 사업이든 놀고먹을 수만 있다면 상관없는 것 아니었어요?”
루도비카가 부드럽게 대답을 피했다.
‘알려 주지 않겠다?’
얼마나 봉으로 보고 있으면 내가 알아야 할 것까지 숨겨? 재능 운운하는 걸 보니 대강 짐작이 가지만….
아무리 제레마이야 카에타니의 이미지를 생각하더라도 이대로 넘어가 줄 수는 없다.
지금 내 예상보다 빠르게 목표에 가까워지는 중인데, 이 기회를 날릴 수는 없지.
나는 몸을 낮춰 그와 눈높이를 맞췄다.
“루도비카 씨.”
“네?”
“제게 재능이 있다고 하셨죠. 동업자로 마음에 드세요?”
얼굴을 가까이하자 그의 시선이 잠깐 주위로 방황했다.
하지만 잠시였다. 루도비카는 빠르게 여유를 되찾았다.
“물론이죠~ 이만큼 천부적인 사람은 또 못 봤거든요.”
“그럼 제게 확신을 주셔야겠는데요.”
“…….”
“정보도 없이 투자할 수는 없잖아요? 말뿐으로는 부족해요.”
말해라.
그리고, 내 눈앞에 직접 데려와라.
“어떻게, 누가 프림로즈 패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