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179)
사실 그에게 말을 꺼내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다.
이 일은 나 혼자 해야 하니까.
하지만 나르케는 능력으로 내 생각을 읽을 수 있으니―상태창에 대한 것은 대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감도 안 온다―그에게 내 계획을 얼버무려 봤자 큰 의미는 없을 테다.
프림로즈 패스에 같이 가되 그에게 위험하지 않은 선에서 다른 일을 시키는 게 낫다.
“의원 심문하러 안 가고 바로 프림로즈 패스로 간다고?”
나르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해했다는 듯 손뼉을 쳤다.
그러고는 진지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루카스.”
“…왜?”
“진짜 멋진 권능을 가지고 있구나. 내가 써 보고 싶을 정도야.”
권능?
설마 이놈도 레오처럼 뭔가를…?
나는 아까와 같은 표정을 유지하려 노력하며 말했다.
“내 권능이 뭐라고 생각하는데?”
“통찰 비슷한 능력이겠지. 어떻게 보면 나보다도 더 정확하게 능력을 쓰는 것 같네~”
“…….”
나는 나르케를 빤히 보며 미소지었다.
정말 그게 전부인가?
내게도 통찰 능력이 있었으면 좋을 텐데, 이놈의 체계는 내가 바라는 건 안 주고.
굳이 생각하려 하지 않겠지만 처음부터 그를 믿기 쉬웠던 건 아니었지.
지금도 나르케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판단할 능력이 내게는 없다.
“하하하! 이해해. 그래도 루카는 믿어 주는구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로선 고맙지 않을 수가 없네.”
우선 믿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상황이지.
그런데….
“루카?”
“엘리아스가 별명 부르는 게 멋져 보여서~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는 별명 부르잖아!”
아.
나는 그가 지금 거의 처음으로 학교를 다닌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고 웃었다.
“어릴 때부터 친한 거 아니면 보통 그렇게 안 불러. 엘리아스는… 뭐 그렇다 치고. 레오도 사실 별명으로 불리는 셈인데 걔는 이름이 너무 길어서 그런 거야.”
“아, 진짜…? 아쉽다….”
“…아냐. 마음대로 해라….”
“하하, 아냐. 난 네 이름을 알고 있으니까 그걸로 됐어. 그보다 저거, 하이케 집에서 봤던 그 문장이구나?”
잠깐 의문스러운 말이 스쳐 지나갔지만, 거기에 쓸 신경은 없었다.
나는 나르케가 가리킨 노트를 건네주었다. 그동안 내가 읽었던 이상한 문장들을 모아 정리해 둔 페이지였다.
“어. 혹시나 암호일까 싶어서.”
지금까지 확인한 다섯 문장을 모두 모아서 연결해 읽고, 또 뒤에서부터도 읽어 보는 중이다.
만약 암호가 적용되었다면 어떤 암호인지 파악하는 데에만 시간이 한참 들 테니, 천천히 시작해 봐야지.
“아~ 암호! 그럴 수도 있겠네!”
“먼저 카이사르 암호로 가정하고 해독하는 중인데, 어때. 감이 와?”
“음, 지금… 이 상태로는 안 와. 도움이 못 되어서 미안해.”
나르케가 고민하다가 턱을 쓸며 말했다.
“노력하는 건 좋지만 너무 힘 빼지 마, 루카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도 말고.”
“그래. 안 그래도 쉬는 시간에만 잠깐씩 생각하고 있었어.”
저걸 메인으로 할 정신은 없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르케가 가방을 뒤적거렸다.
“아, 지금 바로 갈 거 아니면 이거 받아.”
하지만 꺼내진 것은 파이였다.
“으엉?”
자고 있던 파이가 고개를 번쩍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앗, 얘 여기 있었네.”
“너도 몰랐구나.”
“하하… 방에 두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요새 혼자 두고 나가는 바람에 외로웠나? 몰래 따라왔네.”
나르케가 파이를 다시 넣고 가방 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바덴 대공가의 문장이 새겨진 상자였다.
“…체링겐?”
“응, 율리아가 전해 주래. 어제 교무실 드나들면서 네 소식을 들었나 봐.”
뚜껑을 열자 검은 천 위에 진주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당연히 일반적인 진주는 아니었다.
“아티팩트네.”
“응. 너 목걸이 아티팩트 쓰는 것도 알고 있더라. 지금 쓰는 줄에 하나 더 끼워!”
“…미감이…. 그런데 이거 그쪽 가문 사람들만 쓰는 거 아니야?”
“그렇겠지?”
함부로 이런 걸 받으면… 전후 사정을 모르는 인간에게는 자칫하면 굉장히 정치적인 이슈로 번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스카니엔과 체링겐이 친교를 맺었다거나, 바덴 대공국을 통치하겠다는 야심이 있는 것으로 비친다거나.
물론 케이스 없이 아티팩트만 보고서 체링겐 가문에서 제작한 것임을 바로 알아채지는 못하겠지만 사람 일은 또 모르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 나르케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안 받으면 직접 준다고 했는데~ 율리아가 너 부담스러울까 봐 먼저 나한테 전해 달라고 한 건데, 안 받을 거야?”
“어.”
“율리아는 네가 잘 써 주길 바랄 텐데~?”
“…….”
계속되는 회유에, 나는 짧게 헛웃음치고 다시 상자를 열었다.
“이게 뭔데?”
“저항 마법이 걸려 있는 거래. 방어 전문은 아니지만 잘 써 줄 수 있겠냐고 하더라고~”
얼굴도 안 보고 돌려보내는 것도 또 예의는 아니다.
그리고 정치적인 관계를 따지자면 극구 거절하는 것보다는 받고서 나도 이에 상응하는 선물을 주는 편이 훨씬 좋긴 하지.
직접 보고 인사는 따로 해야겠네.
일단, 다녀와서.
“그래. 슬슬 가자.”
“잠깐, 네 계획이 뭔지는 듣고 갈래. 회장에 대해서 네가 뭘 더 알아냈는지는 알겠어. 그런데 그걸 회장과 만날 도구로 활용하기에는 좀 빈약하지 않을까 싶은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나르케가 의자에 앉으며 침대를 툭툭 쳤다.
“…….”
맞는 말이다.
플레로마와 회장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이 상황에서, 나는 플레로마 쪽 인사인 루도비카 슈나이더를 통해서만 그에게 접근할 수 있다.
그를 통하지 않으려 해도 그 거리가 플레로마에게 장악당한 지금 다른 선택지는 없다.
즉 내가 회장에게 ‘플레로마 버리고 새 종교 만드는 거 도와주겠다’고 말하면서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말이다.
그 말을 루도비카에게 해야 하는데 퍽이나 전해 주겠다.
물론, 내게는 계획이 있다.
지금 따져야 할 것은 이것이다.
진정으로 나르케까지 여기에 끌어들여도 되는 것인가?
‘아니.’
아무리 사라질 시간이라지만 잠깐이라도 안 해도 될 경험을 시키고 싶지는 않다.
나와 같은 시간에 다른 정보를 얻도록 하는 것이 낫겠다.
“나르케.”
“으응?”
“그때 네 옆에 앉았던 오이게니 실러라는 사람, 호텔에서 또 만난 적 없지?”
“응.”
“그럼 오늘은 그 사람만 마크해 줘.”
“…….”
나르케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일부러 뇌를 비우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자, 나르케가 웃으며 물었다.
“루카스, 이상한 생각 하는 거 아니지~?”
“이상한 생각이라니.”
“알겠어. 두 번째 만남이니까 좀 더 정보를 얻기 쉽겠네.”
“고맙다. 이제….”
나는 그렇게 말하며 나르케에게 워프를 부탁하려다, 생각을 바꿨다.
“아니, 잠깐 바이에른 좀 들렀다가 가야겠다.”
* * *
“일찍 왔네요.”
새벽에 길에서 들었던 목소리다.
루도비카 슈나이더였지?
어제저녁에 왔던 술집에 또다시 발을 들인 나르케가 두 구인류를 보고 미소지었다.
또다시 술 한 병을 먼저 비우고 온 루카스는 잔뜩 취한 얼굴로 웃음을 흘리며 그들이 앉은 테이블 앞에 섰다.
“또 만나네요. 옆에 앉을 영예를 제게 줄 수 있을까요?”
“음…. 분명히 다시 같이 앉을 일 없다고 하지 않았나요?”
오이게니 실러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루도비카에게 이미 새벽에 있었던 이야기를 들었는지, 진심으로 의문스러워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장난을 치는 중이었다.
“면목이 없네요.”
루카스가 그렇게 말하며 다짜고짜 자리에 앉았다.
루도비카가 나르케에게도 손짓해, 나르케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그들 앞에 앉았다.
루카스가 새 술을 주문하고 루도비카에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그 테스트라는 거요.”
바로 들어가는구나.
이 내용에 대해서는 루카스가 말로 전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노트에 기록해 두고 간 내용을 통해 이미 파악했다. 훈련 중 통찰을 써 보기도 했고.
“뭔지 궁금해서 잠이 안 오더라고요?”
“그런 것치고는 새벽부터 나가시던데.”
“아….”
루카스가 머쓱한 듯 웃으며 목덜미를 쓸었다.
“아시는군요? 그건 다른 문제죠~ 제국에 또 이런 거리가 있는지 찾아보려고 나갔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아쉬워서요.”
“한결같으시네요. 벌써 프림로즈 패스를 벗어날 줄은 몰랐는데. 새로 마음에 드는 곳 찾으면 거기서 사업하실 건가요?”
“아뇨. 루도비카 씨랑 약속했잖아요.”
루카스가 반만 묶어 어깨로 흘러내린 루도비카의 머리칼을 가볍게 들어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루도비카의 눈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이곳 아니면 안 할 거예요.”
‘하하하… 하하…. 으음~’
친구의 연기를 보고 있으니 소름이 돋는다. 어쩔 수 없었다.
나르케가 터지려는 웃음을 누르며 진지한 표정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의 분위기가 어제저녁과 완전히 다르다. 어쩐지 나오기 전에 겉모습에 좀 더 공을 들이더라니, 아예 이런 방향으로 밀고 나가기로 했나 보다.
비록 루카스는 환멸이 났는지 다 버리고 혼자 술집 밖으로 뛰쳐나가는 심상을 그리고 있었지만, 여전히 보는 사람은 전혀 그걸 느낄 수가 없었다.
‘한량 역할 하나는 제대로 신경 쓰네~ 그럼… 슬슬 이쪽 생각이나 읽어 볼까.’
오이게니 실러, 그러니까 루도비카에 비해 파악이 덜된 사람 말이다.
[재밌네.]
다짜고짜 이런 생각부터 읽히다니~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르케는 오이게니의 생각에 공감했다.
루카스의 말이 아무리 소름 돋아도, 내가 내뱉는 것이 아니라서 구경은 즐거웠다.
[그런데 보통 꾼이 아닌데…. 각하께서 잘 처신하시겠지만 잘못하면 넘어갈지도 모르겠어.]
루카스의 연기는 그에게 제대로 통했다.
그런데, 잠깐만.
‘각하?’
각하라.
‘잘못하면 넘어갈지도 모르겠다’, 정황상 ‘각하’는 루도비카 슈나이더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보통 아무한테나 각하라 하지는 않을 텐데~’
순식간에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나르케가 루도비카를 바라보며 능력을 썼다.
[…….]
쉽게 읽히지 않는다.
무언가 잡히기는 하지만 이렇게 막히는 건 나와 상성이 맞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다 해도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지.
‘좀 더.’
나르케가 심장께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능력을 썼다.
루도비카가 미소지으며 술을 마셨다.
[조급하네.]
읽힌다.
나르케가 루도비카의 내리깐 눈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능력을 썼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어쩌면 의외로 어렵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말하지 않고 바로 세례를 주는 것도 좋아 보이는데. 어차피 저자는 제국에서 찾는 사람이 몇 없을 테니….]
세례?
나르케는 이제야 루카스가 제게 오이게니 옆에 붙으라 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
나르케가 제 앞에 내어진 술잔을 천천히 흔들며 그것을 내려다봤다.
레오와 루카스가 마지막에 무슨 대화를 했는지 정확히는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건, 나는 둘의 입장을 모두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렵네.’
레오의 우려도 이해할 수 있고, 루카스의 판단도 이해할 수 있다.
그 누구도 틀리지 않았다.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에 있어 레오는 과민하지 않고, 대의를 생각하는 마음에 있어 루카스의 결단은 무모하지 않다.
실제로 회장을 만나는 것이 간단히 이뤄질 일이 아니라는 것은 나 역시도 알고 있다. 어쩌면 루카스보다도 더 확실히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어떤 방식을 써서라도 제국을 지배하려 하고 있으니, 이곳에 평화가 낄 자리는 없다.
‘그러니 루카스의 판단을 말리지는 않겠지만… 각오 단단히 해야겠네.’
내가 걸림돌이 되지나 않으면 다행인 상황이다.
나르케가 그렇게 생각하며 가져온 가방에 손을 넣었다.
그러는 동안, 루카스가 루도비카를 향해 고개를 돌려 턱을 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설마 이제 와서 생각이 바뀐 거예요?”
“그럴 리가요~ 저는 재능 있는 사람이 좋은데요. 같이할 거라면 당신 같은 사람이랑 함께해야죠.”
루도비카 슈나이더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밖을 가리켰다.
“테스트가 궁금하다고 했죠. 바로 갈래요?”
* * *
나르케가 잠깐 화장실에 가야겠다고 날 끌고 나왔기에, 그가 통찰을 써서 알아낸 게 무엇인지는 나도 알았다.
‘보통 놈이 아니군.’
그래.
회장 같은 위험인자 곁에 아무나 두지는 않겠지.
하지만 이미 사라진 시간에서 알아낸 정보, 그러니까 플레로마와 회장 사이의 관계는 아직 써먹을 시기가 아니다.
일단 루도비카 슈나이더를 통하는 수밖에 없으니, 지금은 새벽에 하던 대로 장단에 좀 더 맞춰 줘야 한다.
호텔로 돌아온 우리는 내가 어제 묵었던 방으로 올라갔다.
“방은 마음에 들었어요? 거의 잠도 제대로 안 자고 나간 것 같던데요.”
“물론이죠~ 그런데 손에 든 건 뭐예요?”
나는 루도비카가 들고 있는 손가방을 가리켰다.
루도비카는 대답하지 않고 웃으며 말을 돌렸다.
“자, 먼저 자리에 앉을까요?”
“네에. 그런데 뭐길래 대답을 피하시는지 궁금하네요~?”
“하하, 이따가. 이곳에 가게를 차리려면 조건이 하나 더 필요한데, 먼저… 종교가 있으신가요?”
시작이다.
‘종교 말이지.’
루도비카 슈나이더는 나를 플레로마로 만들 수 있다. 그렇게 할 때에 그의 이득이 커지지.
그리고, 그는 지금 그 주제에 대해서 간을 보고 있다.
여기서부터 나는 상황을 조성해야 한다.
루도비카가 자질 판단을 정확히 내렸다면 프라이부르크의 주교들처럼 나를 놓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부분에서는 배짱을 부려도 된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아무리 회장의 정신 계열 마법이 필요하다 해도, 그를 경쟁자로 여기는 이상 플레로마는 그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려 노력할 것이다.
새로운 정보를 회장에게 넘기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기존에 회장에게 맡겨 두었던 일도 천천히 플레로마 내부로 가져올 것이란 말이다.
무슨 수를 쓰든 루도비카가 나를 회장에게 데려가지 않을 가능성이 극히 높아진 상황이다.
‘의원들 심문 안 했으면 어쩔 뻔했냐.’
주구장창 루도비카 환심만 사려고 했겠지. 회장과 플레로마가 절대적인 우호 관계일 것을 가정했으니까.
자연스럽게 회장과 만날 수 없는 지금 상황에서는, 루도비카가 나를 회장 앞으로 ‘끌고 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 방법은 이것뿐이다.
“불교를 믿고 있습니다.”
“으음~”
루도비카가 관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다, 천천히 입을 벌렸다.
“…뭐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