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181화 (181/220)

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181)

알고 있냐고.

나는 눈을 깜빡이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새로 오신 기분이 어떠십니까?”

빛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얼굴이 말을 걸었다.

방금 세례를 받았지.

여태까지 세례 의식이 완전히 끝나기 전에 시간을 돌렸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루도비카는 피를 만지고서야 내가 세례를 받은 존재라는 걸 알았다.

‘23년 전이라고 했지.’

루카의 세례는 마력이 몸 안에 남았으니 그렇다 쳐도, 그건 남을 리가 없는데.

정신이든 어디든 흔적이 남는 거라면 플레로마의 세례도 남는 것인가.

시간을 돌려도 그것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아니, 확신하기는 이를지도….’

물론 각오했다.

이것이 불확실함에도 내가 이 전략을 밀고 나갔던 건, 설령 흔적이 남는다 해도 누군가 그걸 알아챌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맥 한번 짚고, 피 한번 뽑고서 상대가 플레로마임을 알았다면 지금 플레로마는 이렇게까지 대성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더.

영혼에 남는 것과 내 신체가 플레로마화 되는 것은 다르다.

후자는 현실의 문제지만 전자는 오로지 내가 인식하는 내 정체성, 나라는 사람에 대한 관념 문제다.

현실의 문제는 시간을 돌리면 깔끔히 해결되는 문제였다. 즉 내 정신력만 버텨 주면 된다. 이 정도는 문제 축에도 안 낀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자신 있다.

“우리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비록 반의반도 오지 못했지만, 어쨌든 새로 태어나실 것을 약속받은 분이니 이리 인사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

“그래도 몸이 새것 같지 않습니까? 한번 주먹을 휘둘러 보시지요.”

나는 천천히 주먹을 내려다보고 살짝 바닥에 내리쳤다.

아니, 그럴 생각이었는데….

투둑―

“…….”

있을 리 없는 균열이 손날에 느껴졌다.

나는 손에 잡힌 돌조각을 떨구고 느릿하게 손을 들었다.

몸이 내 것이면서도 내 것 같지 않게 움직였다.

“아직은 미약하군요.”

미약하다? 이걸 보고?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지 않았다.

“뼈가 녹아내리고 입이 바싹 마르는 경험을 하지 않으셨지요. 각하께서 속이려 해도 제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중후한 목소리가 따뜻함을 담고 있었다.

나는 가늘게 눈을 뜨고 노인의 얼굴을 살폈다.

머리가 희게 세었지만 표정과 자세에서 나오는 품위 덕에 그는 생각보다 늙게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당신의 격이 더 높은가 봅니다. 아마 몬시뇰께서도 예상하지 못하셨겠지요. 당신도 예상하지 못했을 거고요. 이런 신고식은 또 처음이더군요.”

“…….”

“아티팩트의 마력을 코어로 흡수하고 세례자를 공격할 줄은 몰랐다는 말입니다. 딱 들어도 참 이상한 사례이지 않습니까?”

그가 그렇게 말하고는 내 심장께를 완드로 눌렀다.

그러더니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닌가 보군요. 하하하!”

무슨….

“루도비카 각하 말입니다. 지금 생각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

“이제 시작이기는 해도 그분이 당신의 창조자가 되었으니 순리대로라면 당신은 앞으로 각하의 곁에서 떨어질 수 없을 겁니다.”

무슨 뜻인지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뭐가 어쨌거나 전부 사라져 버릴 시간에 불과하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입에 가져다 댔다. 마력을 흘리자 목의 힘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탁—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시작하기 전에,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 봅시다.”

그가 일어서자 목소리가 이 드넓은 공간에 울려 들려왔다.

새까만 구두가 내 머리 바로 옆에서 멈춰 섰다.

“나는 아브라함입니다. 어떤 이들은 나를 회장이라 부르더군요.”

그의 투명한 회색 눈이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아브라함.”

웃기지 마라.

나는 상태창을 열었다.

마르코 슈라이버

칭호: 회장

체력: +5.0 [+7.0]

정신력: -6.0 [+8.0]

마력: +3.5

기술: +3.0 [+8.0]

인상: +7.0

행운: -3.0 [+3.0]

특성: ―

‘-6.0, +8.0.’

잘 알았다.

나는 창을 닫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은 연기를 지속해야 한다.

“…내가 왜 여기에 있습니까?”

“루도비카 슈나이더 몬시뇰께서 당신의 혼란을 덜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니까 계시를 주라 이 말이지.

“긴장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 보니 당신은 바로 움직일 수 있어 보이는군요. 세례 도중 방해받아 본성을 유지한 케이스는 처음 보는데, 생각보다 나쁘지 않군요.”

그가 손가락을 튕겼다.

“걸으면서 대화나 할까요?”

쿠우웅—

“…!”

바람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방금까지 느껴지던 약간의 몽롱함이 1월의 겨울 바람에 순식간에 씻겨 나갔다. 몸의 감각도 세례 이전과 비슷하게 익숙해졌다.

나는 이제 두 다리로 땅에 서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확인한 거리는 어두컴컴했다.

“이곳이 당신이 인식한 프림로즈 패스군요. 듣자 하니 당신이 그렇게 노는 걸 좋아하신다면서요?”

혼자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디서 나타났는지, 뒤에서 지팡이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글쎄요. 그런 기억이 없는데~?”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자에게까지 제레마이야의 연기를 하려니… 살짝 속이 뒤틀리는 것 같기도 하고, 여러모로 묘한 기분이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런데 당신이 만든 이곳은 꼭 수도의 인류가 전부 사라진 뒤 맞이한 첫 겨울 같군요.”

“감성적이시군요.”

“감성 없이 사는 것도 슬슬 지겹습니다.”

그는 장난스러운 말을 던졌다.

나는 미소지으며 그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이게 내가 만나려 했던 자다.’

키가 크고 풍채가 좋은 노신사. 값비싼 의복과 깔끔한 장신구, 품위 있는 말투.

범죄자의 전형에서 완벽히 벗어나 있다.

“이곳에서 사업을 하고 싶으시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지요?”

“그렇습니다. 당신은… 아까 회장이라고 하셨죠. 프림로즈 패스의 회장이신 겁니까?”

“하하, 이곳의 사업을 총괄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래도 그렇게 거창히 부를 일은 아니고요.”

“대단하시네요~ 유흥에 취미가 좀 있으세요?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나는 그의 귓가로 몸을 기울였다.

“이곳에서 선생님이 제일 즐겨 가시는 곳 좀 소개해 주시죠.”

“…….”

“옷 입으신 것 보니 저랑 취향이 비슷해 보이는데, 그런 쪽 취향도 맞을지도요.”

그가 침묵하며 미소지었다.

내가 생각해도 한참 어르신에게 경박한 질문을 했다.

일부러 했기 때문에 찔리지는 않았다.

다만 1초 만에 의도가 썩 좋지 않은 대사를 뽑아 감정을 실어 입 밖에 내야 하는 나의 정신만이 고통받을 뿐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인 뒤 휘파람을 불었다.

제레마이야는 그래야 한다. 적어도 지금은.

회장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루도비카 각하 보기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그 사람뿐이냐?

이러고 있는 걸 아무도 몰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만 든다.

레오는 말할 것도 없고, 엘리아스는 온갖 호들갑을 떨면서 자기 앞에서도 한번 똑같이 말해 보라고 깐족거릴 것이 눈에 선하다. 나르케도 말로 꺼내지 않을 뿐 크게 다르지 않고.

거기까지 생각하자 점점 표정이 굳었다.

‘돌아가면….’

돌아가서 친구들을 만나면, 나르케에게 플레로마의 세례 흔적이 내게 남았는지 확인해 달라고 해야 한다.

최선의 결정이었으니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그다지 직면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보기에는 당신이 불교 신자인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아 보이는군요. 당신은 프림로즈 패스의 사업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프림로즈 패스의 사업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말로 할 필요가 있나. 내가 엎어 버려야 할 대상이다. 다시는 수면 위에 올라오지 못하게 모조리 없애야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역겨움을 참고 중얼거렸다.

“모르겠는데요? 빛과 소금?”

“프림로즈 패스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인간성의 최저선을 시험하는 일입니다.”

“…….”

정적이 흘렀다.

한참 뒤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이 막힌다.

그건 내가 해야 할 말이다.

이게 프림로즈 패스 수장 입에서 나올 말이냐?

“제가 제대로 들었나요?”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성을 사고판다든가, 빈민가 아이들을 꾀어 와서 이곳에 묶어 둔다거나, 사람을 때리고 장기를 떼어 갈 권리를 사고파는 이 행위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하, 그렇게 생각하실 줄은 몰랐네요? 제가 아까 한 말은 잊어 주시죠.”

“범법 행위로 돈을 버는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에 놀라신 모양이군요.”

“…….”

나는 바람이 머리칼을 흩고 있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왜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겁니까?”

놈이 심심해서 이런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의 투명한 회색 눈을 바라봤다.

높은 확률로 이것은 그의 능력과 관련이 있을 테다.

이를테면….

‘계시를 주기 위해서 대상의 사고방식을 알아야 한다든지.’

또는 설득을 통해 대상의 동의, 즉 허락을 받아야 한다든지.

그러니 입에 발린 말일 가능성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어처구니없는 말이 들려왔다.

“내 말을 믿기 어려운가 보군요. 경영자에게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와 내 사업이 어떤 상호작용을 할지 아는 통찰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요.”

“다시 말씀드리지요. 나는 매춘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걸 인류 지성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장경제의 논리 속에서 인간은 우리 자신의 어디까지를 내어줄 수 있는가…. 단순히 육신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바로 인간성의 최저선입니다.”

“…….”

“다시 말해, 성관계와 그에 따라붙는 온갖 기행을 돈으로 사고팔 수 있다면 돈을 내고 사람을 때리는 것도 큰 문제가 아니지 않겠습니까? 본능의 일종이고 서로의 이익이 보장되어 있으며 누군가의 정신건강에 유익한 일인데 금전 거래가 불가능하고 산업으로 발전해서는 안 된다면 그 이유는 왜입니까?”

나는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아야 했다.

지금 이 말을 하는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프림로즈 패스의 최고 권력자다.

“그렇다면 더 나아가 죽음을 사고팔 수는 없습니까? 마찬가지로 저것은 되고 이것은 안 되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그가 나와 보폭을 맞춰 걸으며 말을 이었다.

“수요와 공급 문제는 논할 필요도 없습니다. 가족의 병원비를 대고 싶어 하는 빈민가 구인류는 널리고 널렸으니 공급자가 존재하느냐의 여부는 고려하지 말도록 하지요. 합당한 보상만 주어진다면 죽어 줄 사람도 있고 사람을 죽이고 싶어 할 사람도 예상외로 적지 않습니다. 돈을 내면 인간은 어디까지 내려갈 수 있는가. 이런 이유에서 늘 윤리 문제의 문을 여는 내 사업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논란의 대상이 되어야 할 이유가 있다…. 이것 역시도 의도가 궁금하군요.”

“내 사업이 망할 말을 어떻게 하는지 궁금한 것이겠지요? 논란이 되는 것이 곧 매춘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부터 매춘은 죄악시되어 왔으나 지금껏 인류는 그것과 결별한 적이 없습니다.”

“…….”

“그런데 인류 역사상 가장 찬란한 시간을 맞이한 이 시대에, 인구가 1억에 달하고 많은 이들이 고등교육을 마친 이 시대에 다 같이 구약 이전으로 회귀하고 있다면 그것이 뭘 의미하겠습니까?”

나는 그 어떤 표정도 짓지 않고 간단히 대답했다.

“한 분야에서만 그런 양상을 띠지는 않을 테니 제국의 발전 가능성과 투자 가치를 재고해 볼 필요가 있겠지요. 하지만 세계 기업으로 확장되기 어려운 회장님의 사업체와는 큰 관계없을 텐데요.”

“우리는 잘 맞는 것 같군요. 당신이 사업가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내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런 결론을 내었는지 쉽게 이해할 거라고 말하려 했는데, 이리 정확한 말을 하다니.”

“회장님의 사고방식에 맞춰 대답한 것뿐입니다. 만족하십니까?”

“…좋아요. 대화할 맛이 나는 답변이었습니다.”

회장이 웃으며 대화를 끝냈다.

길은 걸어도 걸어도 끝이 나지 않았다.

한참 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구인류와 신인류 이야기를 좋아하십니까?”

“들어나 봅시다.”

“몇백 년 전, 이 대륙은 마법을 쓰는 것으로 의심되는 구인류를 잡아 불태워 죽였습니다. 당시 마법이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졌는지 잘 보여 주는 사례지요.”

“예.”

“그런데 지금은 마법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까? 그때는 죄 되는 것이 지금은 왜 성스러운 것입니까?”

“글쎄요~ 마법사 수가 많아져서?”

나는 가볍게 대답했다.

제레마이야는 놈의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내놓아서는 안 된다. 대답해야 한다면 대강 한두 마디로 끝내야 한다.

“아뇨. 귀족이 마법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바람직하지 않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아니, 그런 수준이 아니라 정답이다.

“또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왜 성공했습니까? 반대로 루터에 앞서 비슷한 주장을 했던 후스와 위클리프는 왜 이토록 역사적인 성취를 해내지 못했습니까?”

“선례가 쌓여서 루터 때 터진 거겠죠.”

마법 이전의 시대, 내가 살던 세계와 이 세계가 공유하는 시간의 이야기다.

21세기에서도 배운 내용인 만큼 가장 그럴듯한 답변 두세 가지를 알고 있지만, 나는 이번에도 할 수 있는 한 대충 대답했다.

중요한 건 내가 아니라 그가 어떤 소리를 하느냐다.

회장의 사상에 대한 내 예측이 빗나갔으므로―살다 살다 포주가 매춘을 비판하는 광경을 다 본다―, 다시 파악해야 한다.

“루터는 귀족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반면 후스와 위클리프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루터는 개혁가이니 약자의 편이었을 것 같지요? 그는 농민을 외면하고 유대인을 맹렬히 비난했습니다.”

“…….”

“이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줍니까? 강자에게는 그들의 신념과 가치관을 사회 정의로 등극시킬 능력이 있습니다. 약자인 대중은 강자가 이끄는 정의를 받아먹는 역할을 하지, 정의를 창조하지는 못합니다.”

“하하….”

내 이럴 줄 알았다.

본성은 감출 수가 없군.

아니면 감출 생각이 없는 것일지도.

“이것은 신인류와 구인류의 성질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최근 들어 부르주아의 정치 참여가 늘어난 것을 아십니까?”

“최근? 한 세기도 넘은 것 같은데요.”

“그래요. 평민들이 귀족을 끌어내리고 정치에 참여하고자 부단히 노력해 온 것을 아시겠지요. 하지만 부르주아가 세상을 지배하고 구인류에게 완전한 참정권이 주어져서는 안 됩니다. 당신도 신인류이니 동의하겠지요?”

“으음, 아뇨. 근거는?”

“바보에 의한 정치를 두고 볼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대중은 지도자가 아니라 광대를 왕으로 선출할 겁니다. 수천 년간 인류를 다스려 온 우리 지배계층은 지도자와 광대를 분간할 수 있지만, 수천 년 전부터 평민에 불과했던 구인류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

나는 턱을 쓸며 생각에 잠겼다.

구인류로 20년 넘게 살아 온 사람으로서 속이 울렁거리는 발언이라는 것은 둘째치고.

‘이건 예상 밖인데.’

종교가 교단을 갖추려면 정치성이 일부 필요하기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정치 사상을 가졌다면 말이 달라진다. 기억해 둘 만하겠다.

“장담하지요. 왕과 귀족이 그들을 휘어잡지 않는다면, 평민들은 쿠데타를 일으키고 전례 없는 학살을 저지를 겁니다. 그들은 지도자가 될 능력이 없습니다.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펜을 들고 연설을 하는 대신, 구인류 최대의 업적인 총을 들 겁니다.”

“…….”

“총을 들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인간의 특권인 지성을 이용해 대중을 설득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신 말초를 자극해 광기로부터 촉발된 지지를 얻을 수는 있지요.”

나는 대답 대신 그저 미소만 지었다.

내가 그의 주장에 찬성하지 않는 것을 알았는지, 그가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예언 하나 해 보지요. 왕정이 무너지고 구인류가 정권을 잡는 순간, 이 대륙의 유대 계통은 전멸할 겁니다. 이민족에 이교도, 얼마나 좋은 대상입니까? 마침 생김새도 다릅니다. 단일 종교 문화권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민족주의를 자극해 국민을 단결시킬 수 있습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통찰력과 그릇된 사상이 겹쳐 만들어진 이 오묘한 광경이 경이로울 뿐이다.

이 자도 설마 다른 세계에서….

‘아니.’

합리적인 의심이었지만 그건 아닐 것이다. 이 세계의 상황으로도 충분히 세울 수 있는 가설이었다.

회장이 나를 가만히 보다 애매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제레마이야 씨는 약자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

“돈도 명예도 없는 집안에서 태어난 9,800만 평민 인구가 우리의 눈에는 약자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수가 많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대중이라고 부르지요.”

“이런 말을 내게 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는 내 말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개인은 똑똑할지 몰라도 집단은 그렇지 않습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인간은 멍청해지는데, 내가 아니어도 사고할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먹이를 대신 씹고 뱉어서 내 입에 넣어 주는 친절한 타인이 있는데 내 힘으로 소화하고 반추할 이유가 있습니까? 겉보기에만 그럴싸한 깡통 논리가 들불처럼 퍼져 나가 집단의 의견이 되고, 집단의 의견은 곧 사고할 힘 없는 개인의 의견이 됩니다. 그러니 구인류는 인구가 너무 많다는 것이 그들의 패착이 될 겁니다.”

“…….”

“현명하고 이성적인 변화는 오직 우리 신인류의 손에 달려 있지만, 우리는 그들의 수가 압도적이라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집단은 자신이 약자라는 것을 알면 특유의 선동적인 기질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지 압니까?”

나는 공기의 흐름을 느끼고 말없이 코어에 마력을 집중했다.

“바로 자신에게 힘이 없다는 것을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연극적인 장치가 필요하지요. 가장 많이 쓰이는 장치는 식민 통치에서 주로 활용되는 내분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내가 서 있던 세상이 하얗게 흐려졌다.

[또 있습니다. 설령 물 위를 걷는 재주가 있다 해도 그들은 절대로 우리 같은 위치에 오를 수 없고, 자손 대대로 약자의 위치에 머물러 살아가야 한다는 걸….]

콰아앙—!

“…!”

명치에 닥친 격통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회장이 만들어 냈던 공간 마법이 깨지고, 나는 다시 처음 깨어났던 공간에 누워 있었다.

회장의 구둣발이 내 명치를 짓눌렀다. 뒷굽으로 내리친 탓에 갈비뼈가 깨질 것 같았다.

“이런 활동으로 가려 주는 겁니다. 내 건물에서는 마법을 못 쓸 테니 쓸데없는 시도는 말지요.”

비트리올이 코어 위에 맴돌았다.

입술을 깨물어 비명을 참자 그가 내 배를 더 세게 짓눌렀다.

“세상 돌아가는 것은 몰라도 미시 세계에서 내가 강자를 압도하며 쾌락을 얻을 수 있다면 거시적인 흐름 따위야 중요하겠습니까? 구인류에게 소수의 신인류를 마음대로 다룰 권리를 판다…. 나라는 개인은 윤리적으로 동의하지 않지만 구인류 매춘 사업과 마찬가지로 괜찮은 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의하십니까?”

“그럴 리가.”

나는 숨을 빠르게 내쉬며 놈을 내게서 떨쳐 냈다.

그가 내 주먹을 피해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아무리 대화해도 당신과는 합의점을 찾기 어려워서 안 되겠습니다. 들어갈 틈을 내주질 않는군요.”

‘합의점을 찾기가 어렵다’.

정보 고맙다.

아까, 나는 그가 아무 의미 없이 나와 대화하는 게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논리를 정당화하는 게 목적이라면 이 긴 대화는 시간 낭비다.

하지만 목적이 다르다면?

동의를 이끌어 ‘들어갈 틈’을 만드는 것, 그게 사람의 뇌에 계시를 줄 수 있는 조건일 것이다.

그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각하의 곁에서 떨어질 일 없을 거라고 했지요. 확답해서 미안했습니다. 아마 당신의 각하와는 만나지 못하겠군요. 뭐, 그래도 상관은 없지요?”

나는 말없이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가 티켓 하나를 제 주머니에서 꺼내 보여 주었다.

제레마이야의 연기를 위해 내 옷에 넣어 두었던 뉴욕의 공연장 입장권이었다.

그가 종이를 세 번 흔들자 티켓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금속으로 된 신분증이 나타났다.

나는 천천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도 나와 비슷한 표정을 하고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이에른 정부 수사국 형사1과, J.H.….”

“…….”

“당신은 저를 찾아 여기까지 오셨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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