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명가 차남으로 살아남는 법 (182)
“프림로즈 패스 수사는 브란덴부르크 수사국과 연방정부 검찰국에서만 담당하는 줄 알았는데, 바이에른까지 공조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프로이센에서 잡지 못한 특종을 먼저 잡아내셨으니 참으로 기쁘겠습니다.”
“…….”
나는 침묵하며 웃음을 참았다.
아까, 프림로즈 패스에 오기 전에 바이에른에 들렀지.
회장이 든 금속 카드는 그때 만든 신분증이다.
당연히, 가짜다.
‘내가 뭔 수사국 소속이야.’
바이에른 행정부 특임장관이나 대책본부장이면 또 몰라도.
회장과 플레로마 사이의 분열을 유도하기 위해 준비한 이벤트가 성공적으로 터져 주니 감사할 따름이다.
이걸로 그와 나의 이해가 일치한다.
그는 플레로마에 나를 넘겨주지 않을 명분, 동시에 내 목숨줄을 잡고 있는 결정적인 정보를 얻었고, 그 덕에 나는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 시간과 기회를 얻었다.
물론, 교수님을 구할 단서는 이미 잡혔다.
하지만 여기에 마지막 문제가 있다.
회장의 존재와 능력에 대해 알려 교수님의 무고를 주장할 수는 있어도, 무고하다는 확증을 제시할 수가 없으며 회장을 처벌할 수도 없다.
그 이유는 일단 제쳐 두고, 지금은 회장에 대해 최대한 많은 정보를 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조합할 수 있게끔.
‘좀 피로하겠지만….’
버틸 수 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당장 이 문제도 있지.
계시의 조건은 하나가 아닐 것이다.
대화 동의만이 유일한 조건이라면 이자는 진작 세상을 지배했어야 한다. 분명히 무언가가 더 있다.
“웬만해서는 플레로마의 재교육 요청에 따라 주겠지만… 이런 미꾸라지를 내 거리에 용납할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재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았으니까요.”
‘계시’ 주는 과정을 재교육이라고 하는군. 아스만 때도 들었던 단어다.
“이렇게 합시다. 우리가 합의점을 찾는다면 당신을 각하께 돌려보내 드리지요.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당신은 내 아래에 있어야 할 겁니다.”
“누구 마음대로?”
“누구 탓이냐는 질문이 더 정확하지 않겠습니까? 준비가 좀 더 치밀했다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테니, 당신의 잘못을 내 마음대로 해결하는 것이라 해 두죠.”
그가 나와 시선을 맞춰 앉아 말투로 물었다.
“돌아가고 싶지요?”
“어디로.”
“집으로 가셔야겠죠. 사랑하는 가족이 있는 곳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면서 편안히 휴식을 취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나는 대답 대신 그를 빤히 바라봤다.
그 순간 머리에 통증이 느껴졌다.
그가 내 머리채를 잡아 들고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이 상황에 집에 가고 싶지 않다는 사람은 처음 보는군요.”
“…….”
나는 가만히 그를 보며 미소지었다.
집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 적 없다.
‘이거, 대답하지 않아도 내가 동의하는지 아닌지 알 수 있군.’
질문한 뒤 내게 능력을 썼는데, 그게 통하지 않았던 거겠지.
좋은 능력이다.
나는 그의 투명한 눈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제 보니 회장님께서는 상당히 감정적이시군요. 왜, 비장의 수가 안 통해서 분노 조절 능력을 잃으셨나 봅니다?”
“…….”
회장이 인자한 얼굴로 침묵했다.
그러다 방금 체중을 실어 명치를 공격한 인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수사국 생활은 즐거우십니까?”
“딱히요.”
“이해합니다. 조직 생활만큼 피곤한 게 또 없지요.”
“조직이 피곤한 건 아닌데요.”
말장난처럼 느껴지겠지만, 진심이다.
내가 장난치고 있지 않다는 건 지금 그가 더 잘 알 것이다. 능력이 통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군요. 나도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그보다….”
회장이 주위를 바라보며 턱을 쓸었다.
“나는 소속이 여러 곳이라 하루에 해야만 하는 일이 여럿인데, 최근에는 계획한 바가 많이 틀어져 하루 대부분을 일하는 데에 쓰고 있습니다. 가끔은 자다가 그대로 눈을 감게 될까 싶기도 하더군요.”
“…….”
“어떻습니까. 당신은 내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저 미소만 지었다.
그의 의도가 뻔히 들여다보인다.
‘의심하고 있네.’
내가 니콜라우스인지 아닌지 말이다.
니콜라우스는 얼굴을 가린 채 살아가니, 가면 안의 신원으로 다른 일을 겸하고 있을 것이라는 의심은 합리적이다. 게다가 자신을 찾아 여기까지 잠입한 자라면 충분히 니콜라우스로 의심할 수 있지.
회장은 웃으며 내 눈을 한참 들여다보다, 그 표정 그대로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
안 통할 것이다.
나는 나의 업무량에 대해서 어떠한 판단을 내린 적이 없고, 지금 굳이 따져 보자면 내 감상은 그가 말한 것의 반대다.
회장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아까, 비장의 수라고 하셨지요. 그건 비장의 수가 아닙니다.”
“그럼?”
“잘 생각해 보시지요. 당신의 그 망나니 같은 성향이 거짓인지 진실인지는 몰라도, 내 입장에서는 당신은 새로운 사업의 주인공으로 삼기에 최적입니다.”
그가 얼굴을 가까이 하며 속삭였다.
“당장 저 구인류 파리지옥 속에 던져 버리는 수가 있다는 말이지요.”
“하하하….”
“평생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니 반갑지 않겠지요. 이해합니다.”
내가 대답 대신 입꼬리만 비틀고 있자 그는 놀랍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두렵지 않으니, 이번에도 능력이 통하지 않았을 테다.
어차피 놈의 뜻대로 될 리가 없고, 설령 그렇게 된다 해도 버티는 것에는 도가 텄다.
“새로 공감대를 만들어 볼까요. 두렵지 않다면, 두렵게 만들어 드리는 수밖에 없겠군요.”
회장이 바닥을 지팡이로 가볍게 두 번 쳤다.
콰앙―!
문짝이 떨어져 나갈 듯한 굉음이 들렸다. 검은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방 안에 들어왔다.
두렵지 않다면 두렵게 만들어 주겠다.
미래가 훤히 보이는 말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손을 꽉 말아쥐었다.
* * *
툭―
“…….”
툭―
‘죄의 삯은 죽음이고….’
“…하느님의 은사는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로마서 6장이군요.”
“…….”
“플레로마의 심장과도 같은 구절이죠. 정신이 좀 드십니까?”
나는 머리카락에 맺힌 물이 얼굴에 닿아 흐르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마찬가지로 물이 눈을 덮어 세상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방금까지 익숙했던 피 냄새가 새롭게 코끝을 찔렀다.
“한번 의식이 나갔다고 하기에 직접 깨우러 왔습니다.”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졸음이 몰려왔다.
옮겨진 방의 조명이 딱 알맞게 어두워 상대가 뭐라 하든 잠자기에 딱이었다.
“많이 아프겠군요. 얼마나 힘드시겠습니까. 이제 그만 돌아가고 싶을 텐데….”
걱정 섞인 따뜻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고막이 터졌는지 이미 한쪽 귀의 소리는 누군가 멀리서 말하는 것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그가 내 머리를 들어 내 눈을 살폈다. 다행히, 이 와중에도 내 시야를 가린 머리칼은 밝은 금색이었다. 아마 똑같이 금색으로 바꿔 놓았던 눈동자 색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을 것이었다.
걱정 어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그가, 한참 뒤 믿기지 않는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놀랍네요. 설마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드는 겁니까?”
“…….”
“난공불락이군요.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없어, 구인류 속에 던지겠다고 해도 별생각 없어, 맞아도 딱히 관두고 싶단 생각이 없어…. 고문 전문 훈련이라도? 바이에른 수사국은 형사를 키우는 건지 특수요원을 키우는 건지 모르겠군요.”
틀렸다.
애초에 수사국 소속도 아니고.
나는 반쯤 잠에 빠져들며 생각했다.
“아무리 특수요원이라 해 봤자 신인류라면 따뜻한 저택에서 떠받들리면서 자란 자들이니….”
그의 말이 잔뜩 끊겨 들려왔다.
“상황이 부족했다면, 좀 더 겪으시면 됩니다.”
그 뒤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가 이미 밖으로 나갔다는 걸 깨달은 때는, 망치를 든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아 의자 팔걸이로 옮겼을 때였다.
* * *
몇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누군가 내 머리를 잡아들었다.
촤악―
차갑게 얼굴에 닿은 공기가 폐 속까지 흘러들어 왔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졌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물을 빼길 반복하며 기침했다.
위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잔뜩 울려 들려왔다. 이제는 무슨 말을 하는지 쉽게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그동안 뭘 해도 입 한 번을 안 열더니, 물속에 넣고서야 간신히 입을 여시는군요.]
“커헉…. 콜록.”
[여기서 그만두고 싶겠지요. 이해합니다.]
“…….”
[당신 뜻대로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이걸 원하셨지요?]
나는 계속해서 숨을 고르면서 웃음을 흘렸다.
이미 입가가 터져 과연 그렇게 전달되었을지는 모르겠다.
하나 확실한 건, 이번에도 그는 실패했다는 점이다. 아마 앞으로 24시간 더 이곳에 둔다 해도 내 생각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역시나 그도 자신의 전략이 단단히 틀려먹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이 정도면 병이군요.]
이 말을 누구에게 들었더라.
떠올리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스트라우치에게서 들었던 말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며칠 전 했던 말로 보아서는 아마 레오도 그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신체를 지키기 위해 있어야 할 본능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걸 알고 있습니까? 수사국에서 이미 이 수준의 훈련을 받은 건지, 그게 아니면 기억력이 나빠서 죄다 잊을 예정인 건지, 어차피 못 돌아갈 거라 생각해서 전부 놓아 버린 건지….]
그가 옷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 한번 알려 주시지요. 당신은 이 무감각의 이유를 알고 있을 것 아닙니까.]
그가 내 팔을 한참 매만지다, 핏줄을 찾고 바늘을 푹 꽂았다.
희미하게 피 냄새가 풍겨 왔다.
“…뭘….”
[뭘 위해 뽑냐고요? 당연히 마시려 뽑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그는 피를 마시는 대신 그것을 다른 병에 주입했다.
감각이 피로한 이 상황에서 피 냄새가 자극적으로 다가와 속이 울렁거렸다.
[사실 이미 한 병을 마셨는데, 그걸로 모자라서 더 마셔야 하다니 정말 기이한 일이군요. 내 이런 경험은 살면서 딱 두 번 해 보았습니다. 다른 한 분은 굉장히 괴짜 같은 분이셨지요.]
‘…좋아.’
계시의 조건을 하나 더 알았다.
아까 회장은 공간 마법으로 만든 거리를 ‘내가 인식한 프림로즈 패스’라고 했다.
카타콤에서도 내 생각과 기억 속 영상을 공간 마법으로 전환했었지. 그런데 그건 약을 먹고서야 가능했던 일이다.
내게 약을 먹인 것도 아닌데 공간 마법으로 내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를 끄집어낸다?
피를 마시고서 대상에 개입할 권한을 얻는다.
이것이 가장 정답에 가까운 추론일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플레로마 같은 능력이군.’
플레로마 중 플레로마다.
플레로마는 피를 마셔서 마력을 보충하고 세례를 주지만, 거기까지다. 이자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피를 마신 대상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
이러니 자신이 교단에 묶이기 아까운 존재라고 생각할 수밖에.
비트리올까지 받아 놓고 새 교단을 만들 생각을 하다니, 다 퍼 주고 배신당하게 생긴 플레로마에게는 안 된 일이다.
[계속해서 나쁜 일만 일어나면 그게 나쁜 일인지도 모르는 법이니, 이제 다시 차분히 대화나 해 봅시다. 마침 피에 관심이 있나 보군요.]
“…….”
[나는 플레로마의 정교한 부활 사상과 비트리올 능력을 높이 사지 않을 수가 없지만, 이것 하나는 미덥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부활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압니까?]
뭘 어떻게 이루어져.
세례나 축복 방법조차도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마당에 말 그대로 진짜 시체를 살려 내는 가장 핵심적인 기술을 외부에 알리겠냐.
[모르겠지요. 플레로마의 99%도 마찬가지로 그 과정과 원리를 모릅니다. 그러면서 언약의 피가 자녀들을 죽음으로부터 구하러 오셨다는 말만 반복합니다. 진짜 그들이 인자의 피라도 가지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아니, 피가 아니라 다른 삿된 매개를 이용해 부활시키고, 정당성을 위해 성서에서 피라는 주제를 가져와 그럴듯하게 포장한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는 뜬금없는 주제로 넘어갔다.
[마법은 사람의 인지 능력에 의존합니다. 주문이 담고 있는 의미와 신성함, 그것이 신의 권능을 온전히 빌려 올 수 있게끔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피가 등장하는 마법 주문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없다.
마법부는 성서에서 아주 핵심적인 구절이라 해도 피가 나오는 구절은 절대 공식적인 마법 주문에 등록하지 않는다.
[없지요. 왜냐? 피의 주문으로 마법을 쓸 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과 달리 나는 피를 취해 타인의 생명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플레로마가 진정으로 가지지 못한 그 능력이지요.]
그는 진정으로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그래.
플레로마의 능력을 뛰어넘어 피를 활용할 정도면 교주가 될 만하다. 물론 그걸 내가 없애야겠지.
놈이 완드를 휘적여 구석에 놓여 있던 의자를 내 앞으로 끌어와 앉았다.
[당신은 불교 신자가 아니지요. 로마서 6장 23절… 의식이 다 돌아오지 않은 와중에도 반사적으로 구절을 외다니, 그 충성심에 감동했습니다.]
“…….”
[잘됐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죄를 속해 주신 것을 알면서도 개종한 게 사실이라면, 지옥과도 같은 영원한 형벌만이….]
“그러라고 해.”
제대로 입을 연 지 오래되어 낯설게 들리는 목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목을 긁었다.
한참 말없이 있던 상대가 대답했다.
[미안합니다. 종교 이야기가 당신의 신경을 거스른 모양이군요. 다 왔다고 생각했는데 아까부터 결정적인 순간에 합의점이 사라지는군요.]
동의에도 종류가 있나 보군.
더 내밀하고 깊은 이야기에서 동의를 얻어야 능력을 쓸 수 있는 건가.
대부분의 마법이 그렇듯이, 능력 발동 조건은 상대의 격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내게는 잘 통하지 않으니 더 많은 동의를 얻어 내야 하는 걸 테고.
그가 나와 시선을 맞추려 몸을 숙였다.
[당신에게 나는 단죄할 대상이지요. 왜 그렇지요? 당신이 만약 세상을 심판하려는 각오를 가지고 있는 자라면, 마땅히 정의를 행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구인류가 가진 악의 본성과 무지함은 신인류의 참됨과 함께할 수 없고, 정의는 오직 현명한 자인 우리 신인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신인류라고 해서 크게 다를 것 같나? 지금 자네가 하는 말이 전부 자네가 그토록 증오하는 구인류적 악의 본성과 다를 것 없음을 모르는가?”
[악한 자들은 대대로 심판받아 왔으며 구인류는 여전히 소돔에 살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이 멸망하기 전에 그들을 구원할 겁니다. 그러니 내 사업은 만민에게 이로운 사업입니다. 구인류에게는 말초적 쾌락을 제공하고, 신인류에게는 영원한 통치권을 부여하는 것, 그것이 내 종교이고 내 사업이지요.]
대답하지 않자, 그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동의하지 않는군요. 더 이상의 대화는 의미가 없을 듯합니다. 이따 보지요.]
“아니.”
내 말에 그가 우뚝 멈춰 뒤돌았다.
“네 이름은 아브라함이 맞나?”
[물론이지요.]
“아니.”
나는 없는 힘까지 쥐어짜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그 역시도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자네는 그레고리오야.”
회장이 살짝 입을 벌린 채 가만히 서 있었다.
[…하하하하! 누구에게 들었습니까? 당신은 계속 내 예상을 뛰어넘는군요. 그건 플레로마만 아는 이름인데, 이렇게 되면 플레로마에서 나를 죽이러 온 첩자인지….]
그가 웃음을 터트리고 내게 다가왔다.
[아니면… 정말 니콜라우스인지.]
그 말에 비웃으려던 순간,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아주 조금이지만 코어가 가벼워졌다.
여태까지 짓눌리는 느낌을 받고 있는 줄도 몰랐는데, 이제 분명히 알겠다.
[…….]
회장이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봤다.
그도 무언가를 느낀 게 분명했다.
하지만 여전히 표정은 평온했다. 그가 나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이 준비한 겁니까? 어디 한번 공격해 보시지요.]
내가 준비한 것이 아니다. 나 역시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른다.
‘어쨌거나….’
기회다.
물론 기회치고 그는 굉장히 평온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자신 있어 하는 이유를 모르지 않는다.
‘정신력 수치가 -6.0, 그리고 +8.0이었지.’
마르코 슈라이버는 -6.0의 정신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는 현재 어떤 이유로 +8.0짜리 정신력을 가진다.
다른 스탯도 타인이라고 봐도 좋을 만큼 극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무슨 뜻이겠는가?
지금 그의 뇌를 장악하고 있는 자는 +8.0의 정신력을 가지고 있다.
그건 마르코 슈라이버가 아니라….
‘그레고리오의 정신력이지.’
아까 생각했던 문제, ‘무고하다는 확증을 제시할 수가 없으며 회장을 처벌할 수도 없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는 남의 몸을 이용해 내 앞에 서 있다.
[공격해서 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이렇게 된 것, 비밀 하나 알려 드리지요.]
그가 내게 다시 다가와, 몸을 숙여 내 귓가에 대고 말했다.
[이건 내 몸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까도 놈은 내 피를 마시지 않고 다른 병에 넣어 두었던 것이다. 아마 이제 돌아가 그걸 자신의 몸에게 줄 작정이겠지.
만약 시간을 돌려 마르코 슈라이버를 범인으로 지목한다면, 그레고리오는 영영 그의 몸을 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다른 이의 몸을 이용해 프림로즈 패스에서 활동하고 교단을 만들겠지.
이번에도 진범은 도망가고 남의 육신만 처벌받는 꼴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총체적으로 답이 없지.’
마르코에게 어떤 위협을 가하든 회장은 그저 그 안에서 빠져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 나는 다음 시간선에서 교수의 무죄를 주장하는 동시에, ‘진짜’ 회장을 만나야만 한다.
이때 보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이다.
마르코 슈라이버의 칭호다.
‘회장.’
상태창의 칭호마저 마르코 슈라이버를 회장이라 칭하고 있다.
내 칭호가 ‘???의 사냥꾼’을 거쳐 ‘니콜라우스 경’이라는 재미없는 이름에 정착한 것은,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인식했기 때문이다.
즉 많은 이들에게 마르코 슈라이버는 이미 회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회장이 항상 그 몸을 이용해서 대외 활동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스트라우치 때부터 겪어 알고 있듯이, 나는 이들의 공기에서 조금이나마 마법을 쓸 수 있다.
어디까지나 내 생명력을 이용하는 것이기에 늘 그랬던 것처럼 명백한 한계선이 정해져 있다.
‘기회는….’
작게 자주 쓴다고 가정하면 안전하게 다섯 번.
크게 쓴다고 가정하면 한두 번쯤 될까. 그 이상으로 넘어가면 의식을 잃을 것이다.
특히 지금처럼 몸이 성치 못한 상황에서는 더더욱 소모가 클 것이다.
[설령 당신이 니콜라우스라서 내게 세뇌를 건다 해도, 몸 주인은 아무것도 답할 수 없을 겁니다.]
그가 인자한 얼굴로 미소지었다.
[공격을 한다 해도 내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요. 기껏 해 놓은 장치를 못 쓰게 되어서 미안하게 됐군요.]
―그러므로….
내가 조용히 입을 열자 회장이 고개를 기울이며 나를 바라봤다.
콰아앙—!
나는 의자를 부수고 손을 내질렀다.
이미 부러진 손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마력을 뽑아낸 덕에 무리가 없었다.
쿠웅—!
나는 흐린 시야를 살펴 그를 확인했다. 다행히 마력 조준은 잘 되었다. 그를 쓰러뜨리기 위해 마력을 한 방에 터트린 탓에 코어에 격통이 느껴졌다.
어쨌거나, 미안하게 됐다고 했지.
전혀 그럴 필요 없다.
콰과광— 쾅—!
나는 내게 닥쳐오는 비트리올에 장막을 치고 그를 마력으로 짓눌렀다. 바닥을 더듬자 아까 내게 쓰였던 물이 손에 묻었다.
―너희는 가서….
“무슨….”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내가 세상의 끝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내내 평정을 유지했던 회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체 뭔 짓을 하는 거냐는 듯, 내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럴 수밖에.’
나는 지금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
다음 시간선에서 교수의 무죄를 주장하는 동시에 진짜 회장을 만나야만 한다고 했지.
일단 진짜 회장의 육신을 만나려면 다음 시간선에서도 이자를 만나야 하는데, 그러려면 루도비카에게 세례를 받고 여기에 끌려오는 짓을 또 해야 한다.
‘이 미친 짓을 어떻게 또 하냐.’
그럴 수는 없지.
정통의 세례 흔적은 시간을 돌려도 남아 있었지.
마르코 슈라이버의 몸을 이용하는 회장은 다음 시간선에서 자신이 즐겨 사용하는 몸의 정신에 이변이 일어났음을 눈치챌 것이다.
이걸로, 다음 시간선에서 나는 이런 지난한 과정 없이 마르코 슈라이버를 만날 수 있다.
마법을 쓰지 못하게 막아 둔 공기에서 마법을 쓰니 코어에 격통이 느껴졌다. 장막이 깨지고 새까만 비트리올이 내 눈앞에 닥쳤다.
‘재시도를….’
써야 한다.
이대로 가면 안 된다. 나는 의식이 꺼져가는 것을 느끼고 혀를 콱 깨물었다.
콰아앙—!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그 순간, 귀가 먹먹해졌다. 시야에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상아색 머리칼이 흐린 시야에 들어왔다. 여기 있을 리가 없는 인간의 얼굴을 인식한 순간,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루카스!”
레오가 내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돌려!”